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10화 (10/90)

< 괴물 배터리 -010- >

010.

“드라마틱한 승부……. 이거구나.”

나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사이버 지식방으로 달려가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베이스볼 트레이너’는 제법 인기 있는 시리즈다. 덕분에 검색어 몇 개 넣어보는 것만으로도 금세 공략 블로그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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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미션]

[보상 포인트 1,000]

드라마틱한 승부.

2번 이상 고의사구한 타자를 9회 만루에서 아웃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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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창에서 본 문장과 완전히 똑같다.

애당초 이 미션은 내 기억에도 남아 있었다. 투수 육성할 때마다 쉽게 대량의 포인트를 얻을 수 있는 꼼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스페셜 미션이라서 캐릭터 하나당 한 번씩밖에 쓸 수 없었지만.

“이러면 다른 특성도 쓸 수 있을지 모른단 건데…….”

왜 이런 ‘초능력’이 생겼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건 포기한 지 오래였다.

현실적으로 피해가 없다는 것은 둘째다. 스트라이크존의 단맛을 본 뒤부터는 익숙해져서 이상하다는 생각 자체도 안 들었다.

말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다. 당장 눈앞에 실제로 보이는 것을 부정하지 않기로 한 것뿐이다.

“두 번째 특성 여는데 필요한 포인트가 2,000. 세 번째 특성 열려면 4,000. 맞아, 맞아. 그랬었지.”

블로그를 조금 둘러보는 사이에 어릴 적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모든 특성을 다 가진 슈퍼 선수 하나 만들겠다고 끙끙거렸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지. 여기 보니까 원래 안 되는 거였구나.

“그런데 좀 이해가 안 되는데……. 왜 이제 와서?”

완봉, 완투, 몇 타자 연속 삼진, 몇 타자 연속 홈런, 사이클링 히트, 3구 3아웃 등등.

야구에서 웬만큼 의미가 있는 기록은 대부분 미션으로 주어진다. 당연히 난 지금까지 이런 미션들을 수없이 달성했다. 하지만 미션 달성에 성공했다면서 포인트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스페셜 미션과 일반 미션의 차이?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도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퍼펙트게임만 해도 명백한 스페셜 미션이었다. 그러면 오른손으로 처음 바꾸고 퍼펙트 한 날에 포인트를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때랑 지금이랑 다른 게 뭐지? 내가 원래 왼손잡이니까, 오른손으로 던져서 퍼펙트 딴 건 인정을 안 해준다거나…… 아니아니, 이것도 아니지.”

처음에는 평범하게 왼손으로 던졌는데 뭘. 왼손 오른손이 문제라면 네댓 경기 뛰는 사이에 됐겠지.

나도 모르게 괜히 한숨이 푹푹 나왔다.

견물생심이라고 하나?

스페셜 미션이니 뭐니 하는 변화가 없었다면, 나는 이대로 ‘타자의 약점이 보이는 초능력’을 만끽하다가 평범하게 제대했을 거다.

초능력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화기중대 타자를 생각하면, 프로 지망 같은 건 꼴같잖은 소리고.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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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잡이 : 반대쪽 손으로도 원래 손과 동일한 위력과 정밀도의 공을 던질 수 있다. 같은 손 타자를 상대로는 피안타 확률이 특히 더 하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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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뭔가를 봐버린 다음에는 좀처럼 붕 뜬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

“……뭐냐? 쟤, 부상이라서 오른손으로 바꿨다메?”

“그, 그러게 말입니다.”

“벌써 다 나았나? 애초에 밖에서 다친 거 아니었어? 재활해도 안 되는 거라서 야구 관둔 거라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씨발! 왜 하필 딱 우리랑 붙을 때부터 왼손인데?”

내가 왼손잡이용 글러브를 끼고서 나타나자, 상대 팀 타자들은 발칵 뒤집혔다.

그 기분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측정해본 건 아니지만, 왼손이냐 오른손이냐에 따라서 구속이 30km/h 이상이나 차이가 나니까.

삼가 휴가증의 명복을 빕니다.

좋은 일에 쓰겠습니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아웃!”

“스트라이크 쓰리!”

이를 악물고 타석에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똥씹은 표정으로 나가 떨어졌다.

저들은 모르겠지만, 빠른 공을 아무렇게나 던지기만 하던 데뷔 초와는 달랐다. 지금은 똑같은 쿨존이라도 색깔에 따라 피안타율이 다르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한복판으로 와도 건드리기 어려운 강속구를 ‘컨닝’까지 해가면서 던진 셈이다. 이날 경기는 탈삼진을 25개나 뜯어내는 참혹한 양민학살이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안 뜨네.’

공략에 따르면 한 경기 20탈삼진은 1,000포인트짜리 스페셜 미션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왼손으로 던졌는데도 이러는 거 보면 확실히 뭔가 단단히 잘못 짚은 듯했다.

그 뒤로도 두 경기쯤 왼손을 썼지만, 마땅히 달라지는 것도 없어서 오른손으로 복귀했다. 미션 포인트를 주는 게 아니라면 굳이 왼팔로 무리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위 병사는 부대 단합을 위한 전투체육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과 협동심, 전우애를 보여 타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이 상장을 수여한다.”

“충성! 이병 최태웅!”

그러는 사이에 리그랑 토너먼트가 끝나고, 우승한 우리 중대에는 5장의 포상휴가증이 내려왔다.

내 경우는 다승왕에 MVP로 뽑혀서, 아예 백지로 된 휴가증 2장과 상장까지 따로 받았다.

이것만 해도 꿀이긴 한데…… 탈삼진왕이랑 평균자책점이랑 승률은 왜 안 뽑는담. 그것도 내가 1등일 건데.

“와, 시발 쩐다…….”

“신병 휴가도 안 나간 짬찌 새끼가 백지 휴가증이 4장인 게 말이 돼?”

“얘만 그런 거 아니야. 저기 화기중대 이등병도 장난 아니야. 홈런왕에 타점왕 먹었잖아.”

“타격왕은 어따 팔아먹었습니까?”

“몰랐어? 우리 타율 안 세잖아. 계산하고 기록하기 귀찮다고 타점이랑 홈런이랑 도루만 세는데.”

“이건 뭐, 가라도 아니고 FM도 아니고…….”

이날 시상식은 주중에 치른 전술훈련의 뒤풀이와 전투휴식도 겸하는 자리였다. 산더미 같은 삼겹살에, 막걸리까지 여러 통 나와서 거의 전 부대원이 회식을 벌였다.

솔직히 고기 자체는 싸구려 티가 팍팍 났지만, 군대에서 이게 어디냐.

모처럼 뱃속에 기름칠한다는 생각에 신나서 쌈 싸먹던 나는 불현듯 위화감을 느꼈다. 백지 휴가증 때문에 다들 샤바샤바하러 올 줄 알았는데, 문득 정신 차려보니 오히려 하나둘씩 내 곁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지? 내가 무심코 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눈치를 살피는데, 문제가 뭐였는지는 바로 드러났다.

“충성! 이병 최태웅!”

“어, 그래그래. 일어날 거 없어. 앉아서 먹어. 나한테도 한잔 받아야지? 우리 부대 MVP인데.”

“감사합니다!”

벌써 얼근해진 연대장이 어깨를 두드리자 내 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이거였구나! 나를 제물로 바치고 튄 거였어?!

내 옆에 털썩 앉은 연대장은 그 뒤로 꿈쩍할 생각도 않았다. 보아하니 여태까지 테이블마다 얼굴 한 번씩 비추고 마지막으로 찾아온 자리 같았다.

“최 이병이. 그런데 자네는 원래 양손잡이인가? 오른손으로도 휙휙 잘 던지더구만. 설마 여기서 벼락치기로다가 연습한 건 아닐 거 아니야.”

“투수가 하는 훈련 중에 반대손으로 공 던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 감각이 다행히 조금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르치? 양손잡이라기엔 너무 느리더라고. 그런데 또 왼손잡이가 갑자기 오른손으로 던지는 거라기에는 정확하게 휙휙 꽂히고.”

“감사합니다.”

“왼팔도 한 번씩 쓰는가 보던데, 듣기로는 부상 때문에 야구 접었다며. 그런데도 괜찮나?”

“한두 경기는 괜찮습니다. 부담 안 되는 선에서 한 번씩 던지는 거지, 무리하면 더 많이도 던질 수 있습니다.”

“에헤이, 그러면 안 되지. 아들내미가 군대에서 쌩뚱맞게 야구하다가 팔 아작났다고 해봐. 부모님 억장이 얼마나 무너지시겠냐? 보나 마나 연대장 때문에 그랬다고 뒤에서 씹을 거잖아! 아니야?”

“…….”

생각지도 못한 연대장과의 독대가 머리카락이 쭈뼛 섰으나, 대화하다 보니 서서히 긴장감이 가라앉았다.

부대의 체질을 바꾼 장본인답게, 연대장의 관심사는 야구뿐이었다. 나를 붙잡고 늘어놓는 것도 내 선수 시절이나 프로야구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야구를 그만둔 지 오래됐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깜냥이 있지. 술김에 긴장 풀려서 말실수하지 않을 정도로만 조심하면 내게도 유쾌한 자리였다. 야구장에서 만난 붙임성 좋은 아저씨와 수다 떨게 된 기분이랄까?

“충성! 이병 박진효입니다. 연대장님께서 부르셨다는 말씀 듣고 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훈훈한 분위기도 잠시뿐.

바짝 군기 든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나는 정말로 의자째로 우당탕 나자빠질 뻔했다.

“어, 그래. 박 이병이. 너도 앉아서 한잔해라. 근무 서고 있었다면서? 짜식들이 융통성이 없어요. 명색이 우리 부대 홈런왕인데, 이런 자리에 빠지게 하면 쓰나.”

“이병 박진효! 감사합니다!”

경기 중에는 체육복만 입고 있는지라, 나도 아까 시상식 때에야 이름을 알았다.

박진효 이등병.

입대 날짜는 나보다 좀 빠른데 동기라던가.

홈런왕 겸 타점왕. 화기중대의 괴물 타자.

“그러고 보니까 둘이 부대가 달라가지고, 따로 얘기하고 그럴 시간도 없었겠네? 서로 이름 정도만 아나?”

연대장이 우리 두 사람 어깨를 동시에 툭툭 건드렸다.

지은 죄…… 는 아니지. 고의사구도 엄연한 전략인데. 그래도 켕기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닌지라, 똑바로 바라보지를 못하겠다. 뒤통수에 막 일방적으로 찌릿찌릿한 시선이 느껴질 뿐이다.

연대장에게 막걸리를 받은 박진효 이병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대화해본 적은 없지만 자~알 알고 있습니다. 최태웅 이병도 저를 자~알 알고 있을 겁니다.”

“으하하하! 역시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낭중지추라는 말 아나? 송곳을 주머니에 넣으면 무조건 삐죽 튀어나오게 돼 있어! 고수끼리는 알아보게 된단 말이야!”

“…….”

좋댄다, 아주 그냥.

이제야 뭔가 좀 분위기 파악이 된다. 연대장은 부대 최강 투수와 최강 타자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한잔하고 싶었던 것이다. 연대장이 아니라 야구를 좋아하는 한 명의 아저씨로서.

아오, 지고지순하신 마음은 좋은데요. 미리 말이나 좀 해주지.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게!

연대장의 목소리가 더욱 유쾌해졌으나, 나는 가시방석이 따로 없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나 대신에 박진효 이병이 연대장의 말상대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크으, 나도 재능이 없어서 관뒀지만, 야구 해본 사람이라서 알지. 어떤 분야가 안 그렇겠느냐마는, 자네처럼 운동하는 친구한테 20대 젊음이 얼마나 소중해? 그 청춘을 이런 식으로 까먹는 게 진짜 치명적인 거거든!”

“아닙니다. 다 국방의 의무 아닙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고 있네. 그럼 말뚝 박겠나?”

“그, 그건 조금 곤란…….”

“거봐. 사람 생각하는 게 다 똑같은데, 어디서 혼자만 고상한 척 야부리를…… 아, 어디 가서 연대장이 이런 말 했다고 하면 안 되네. 직업군인이 이런 말 하면 안 되거든.”

막걸리를 홀짝거리면서 듣기만 하던 나는 박진효 이병의 이야기에 조금 놀랐다. 선수 출신이라는 건 들었는데, 설마 현역 프로 2군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기야, 그쯤 되니까 내 공을 난타할 수 있을 정도로 스트라이크존이 시뻘겋지.

보통 프로선수는 경찰청 야구단이나 상무 야구단 같은 데서 병역을 해결한다. 중간과정은 모르겠지만, 거기 들어가는 데 실패해서 일반 병역을 소화하게 된 모양이다.

“이런 말 하면 약오르겠지만, 자네는 그래도 불행 중에 다행이야. 여기 이런 에이스가 있어가지고.”

연대장은 사시 붙은 아들내미 자랑하는 것처럼 흐뭇한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친구 공이 사회인 야구로 쳐도 톱 클래스 아닌가. 어차피 상무나 경찰청 못 간 다음에야 싫어도 이 안에서 지지고 볶아야 하는데……. 이 친구 공 상대하는 것보다 감 유지하기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나? 안 그래?”

“예. 확실히 그건 그렇습니다만…….”

박진효 이병의 의미심장한 눈초리가 내 옆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나는 도망치고 싶어서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억지로 눌러 붙여야만 했다. 아, 엄마 보고 싶어.

“현실적으로는 큰 도움이 안 됩니다. 최태웅 이병이 첫 타석에 저한테 홈런 맞았다고, 다음 타석부터는 무조건 고의사구만 해서 말입니다.”

“뭐야? 아직도 그러고 있었어?”

분위기상 저 말을 기어이 할 것 같더라니만!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피했다.

기분 탓인지, 시선 반대편에서 묘하게 히죽거리는 듯한 코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실은 그래서 말 나온 김에 연대장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만…….”

“부탁? 그게 뭔가?”

“최태웅 이병이 저한테 고의사구 못하도록, 연대장님께서 지시라도 내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잠깐만 시발.

이건 반칙 아니냐, 새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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