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09- >
009.
왼팔을 아낀 지도 벌써 몇 주가 되었다.
통증은 사라졌고,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없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왼팔 투구였지만, 7년여 만에 갑자기 공을 던졌을 때도 어떻게든 됐는데 뭘. 더욱이 이번에는 타자 한 명을 상대할 뿐이기도 했다.
“야, 투수가 중간에 맘대로 손 바꾸는 게 어딨어?”
“한 타자 상대로만 안 바꾸면 됩니다. 규정에 분명히 있는 겁니다.”
“1번 타자한테는 왼손으로 던지고, 2번 타자한테는 오른손으로 던지고, 이런 걸 해도 된다고?”
“예. 한 타자 상대하면서 초구는 왼손으로 던지고, 2구는 오른손으로 던지고, 이런 것만 안 하면 됩니다.”
사실 이 룰은 선수 중에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양손잡이 투수를 겪어볼 일이 있어야 알지.
심판이 스마트폰으로 검색까지 해보고 나서야 항의가 사라졌다. 그 사이에 가벼운 캐치볼로 어깨를 푼 내가 마운드에 올랐고, 양 진영에서 응원이 쏟아졌다.
‘저번에도 반대손으로 공 하나 던진 다음에야 반응이 왔지?’
나는 승부보다 왼손 감각을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천천히 와인드업했다.
퍼억!
타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초구가 스트라이크존에서 공 네댓 개 정도나 멀찌감치 빠졌기 때문이다.
‘설마 만루인데도 또 거르려는 건가?’라는 듯이 표정이 일그러졌으나, 나는 그의 눈치나 살필 정신이 없었다.
[플레이어 설정이 ‘좌투(左投)’로 변경되었습니다.]
됐다!
홀로그램 알림판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스트라이크존이 변화했다.
‘좌투’에서 ‘우투’로 바뀌었을 때만큼 극단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내가 왼손으로 던질 때도 저 타자의 스트라이크존은 붉은색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핫존 투성이지만…… 분명히 작아졌어.’
오른손 모드였던 방금 전에는 ‘핫존’이 ‘스트라이크존’보다도 컸다. 약간 빠지는 정도라면 볼을 던져도 위험하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왼손 모드인 지금은 핫존이 스트라이크존보다 작아지고, 색깔도 연해졌다. 왼손과 오른손의 구속 차이가 저 타자에게도 영향을 미치기는 했다는 거다.
내 어림짐작으로는 피안타율 3할 초반.
10번 붙으면 6~7번은 내가 이긴다는 말이지만, 우리 팀 수비능력을 생각하면 안심할 수 없는 숫자였다.
지금까지 가상 스트라이크존을 이용한 경험에 따르면, 이 ‘컨닝 페이퍼’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심리나 컨디션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한다.
맨 처음 고의사구를 할 때도 그랬다. 존 전체가 ‘위험 코스’였는데, 타자가 스윙 의지를 버리자마자 ‘안전 코스’로 변하지 않았나.
한 타석 안에서도 핫존과 쿨존은 변화한다.
그렇다면 운에만 맡길 수 있나.
기껏 타자의 약점을 실시간으로 알아보는 능력이 생겼는데?
퍼억!
“……!”
2구가 미트에 꽂히는 순간, 어디선가 ‘악!’하는 짤막한 비명이 터졌다. 명실상부한 부대 최강속구가 타자의 얼굴 옆을 휙 지나갔기 때문이다.
“새꺄! 위험하잖아!”
“똑바로 안 던질래!”
사방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쳤던 타자도 싸늘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오케이. 먹혔어.’
하지만 나는 야유 따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몸 쪽 코스와 바깥쪽 코스를 번갈아 던지는 것은 굉장히 기초적인 볼 배합 중 하나다. 몸 쪽 공에 대한 잔상이 남아 있으면, 바깥쪽 공은 같은 코스라도 훨씬 더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렁물렁한 연식(軟式) 야구공이라서 과연 압박감을 심어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틀림없이 통했다. 타자가 선 위치는 그대로였지만, 몸 쪽의 핫존이 다소 줄어들었던 것이다.
몸 쪽 공을 의식한다는 건, 바깥쪽 코스에 대한 경계가 조금이라도 허술해진다는 말.
약점이 없다면 만들어 줘야지.
생기기만 하면 눈에 보이는데!
퍼억!
“스트라이크!”
예상대로 바깥쪽 낮은 코스를 찌른 3구에는 방망이가 나오지 않았다. 조건반사 같은 느낌으로 어깨가 움찔거렸을 뿐이다.
까앙!
“파울!”
이번에는 반대로 최대한 아슬아슬한 몸 쪽 코스를 노렸더니, 엇박자로 스윙이 나왔다.
어우, 소름 돋아. 반응을 저렇게 늦어놓고도 갖다는 맞추네. 만루만 아니면 진짜 거르고 싶다.
퍼억!
5구는 아까처럼 몸에 바짝 붙인 위협구.
몸에 맞아도 어쩔 수 없다 싶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던졌는데, 타자는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느낌이지만 이건 ‘어차피 안 맞는다.’ 라고 코스를 간파한 게 아니었다. 몸에 맞으면 걸어서 나가겠다는 생각으로 버텨선 거지. 시발, 완전히 상남자네.
‘볼 배합이 뽀록 난 것 같은데…….’
워낙에 초보적인 배합이었으니까, 상대가 눈치를 채도 이상하진 않았다. 볼 배합은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는데 어쩌겠어.
“이제 어쩐다…….”
상대는 완전히 평상심을 되찾았다.
스트라이크존이 아니라 표정만 봐도 안다. 좌우로 흔들어 놨던 감각은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그래도 뭐 3볼 2스트라이크의 풀 카운트.
공 하나로 끝나는 상황까지 데려왔으면 잘한 거지.
기왕 이렇게 된 거, 한복판 공으로 맹점을 찔러볼까? 아니면 틀림없이 스트라이크가 올 거로 생각할 테니까 한참 빠지는 볼을 던지거나?
이런저런 궁리로 눈동자를 굴리던 끝에, 나는 천천히 투수판을 밟았다.
야구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입 모아 말한다.
서로 데이터가 적다면, 도망치지 않는 한은 무조건 투수가 유리하다고.
과연 그 말대로 공이 내 손을 떠난 순간, 타자의 몸이 벼락에 맞은 것처럼 경직되었다.
홈 플레이트까지 닿기는 할까 걱정될 정도로 무지막지한 슬로우 볼이 큼지막한 포물선을 그린다.
한순간 흠칫했던 방망이가 뒤늦게 반응해 비실비실한 공을 때리기 위해 휘둘러져 나온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퓨스(Eephus)’.
나더러 이름 붙이라면…… 으음. 그냥 똥볼이지 이름은 무슨.
까아앙!
시속 30km나 될까 싶은 극단적인 슬로우 볼에 리듬이 덜컥 무너졌으면서도, 상대는 기어이 방망이를 갖다 맞추고 말았다.
맹렬하게 지면을 때렸다가 날아오는 공에 반사적으로 내 오른손이 튀어 나갔다. 하마터면 글러브가 벗겨질 뻔했을 정도로 강렬한 타구였다.
“오케이! 잡았어!”
난 느긋하게 공을 꺼내서 1루로 던졌다. 어지간히도 기가 막혔는지, 타자는 뛸 생각도 않고 타석에 얼어붙어 있었다.
“이야아아!”
“시발, 저 양아치 새끼! 저걸 저렇게 잡아내냐!”
“최태웅 멋있다! 잘생겼다!”
“이 얍삽한 새끼!”
손에 땀을 쥐고 구경하던 우리 중대원들이 벌떡 일어나서 마운드로 달려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패싸움하는 줄 알 만큼 열렬한…… 에이 씨, 아프다고! 이게 무슨 역전 끝내기 홈런도 아니고, 투수를 왜 때리냐고!
[스페셜 미션 ‘드라마틱한 승부’를 달성했습니다.]
등짝 스매시 세례에 허우적거리던 내 몸이 굳어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홀로그램 알림판이 나타나 시야를 가렸던 것이다.
[드라마틱한 승부 : 2번 이상 고의사구한 타자를 9회 만루에서 아웃시킨다.]
[1,000포인트의 보상이 주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