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8화 (8/90)

< 괴물 배터리 -008- >

008.

결과적으로 도발에 넘어가지 않은 것은 현명하고 냉철한 판단이었다. 5회가 끝나도록 우리 타선도 점수를 추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온 이래로 가장 적은 득점이었으나, 상대 투수의 피칭에 유별난 점은 없었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싶은 느낌으로 운 나쁜 타구가 쏟아졌을 뿐이다.

“5회까지 1대 0이라……. 투수전은 또 오랜만인데.”

나는 오랜만에 마운드에서 신경을 조였다.

가상 스트라이크존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핫존에 던진 공이 무조건 안타는 아닌 것처럼, 쿨존에 던진 공도 무조건 헛스윙이나 범타가 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점의 살얼음판 리드는 아무리 나라도 확실하게 지킨다는 보장이 없었다. 6회 초에도 ‘그 아저씨’가 선두타자로 나왔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부우웅!

“스트라이크!”

제대로 붙어본 것은 한 타석뿐이지만, 타구의 질을 보면 대강 안다. 노아웃에 1점 차라도, 저 타자는 볼넷으로 내보내는 편이 분명히 싸게 먹힌다.

이번에도 상대가 고의 헛스윙으로 도발했지만, 나는 무시하고 꿋꿋하게 볼만 4개를 던졌다. 화기중대원들의 야유하는 목소리가 아까보다도 훨씬 커졌다.

까앙! 까앙! 퍼억!

“아웃!”

계속된 고의사구에 성질이 난 걸까.

다음 타자들이 독기를 품고 달라붙어서 파울을 남발했으나, 결국에는 어찌어찌 무실점을 지켰다.

하지만 문제는 이번에도 침묵한 우리 타선이었다.

실력과 상관없이 죽어도 안 풀리는 날이 있다는 것은 아는데, 왜 그게 하필 화기중대 상대할 때인지 원.

까앙!

“야야야! 빠졌잖아!”

“던지지 마! 던지지 마! 어차피 늦었어!”

“세이프!”

이런 후반까지 1대 0의 살얼음판 리드를 하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이더라. 오른손 투구가 익숙하지 않은 점까지 더해, 나는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어버렸다.

7회에는 안타를 두 개나 얻어맞으면서 간신히 버텼다. 스트라이크존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데, 체력 고갈로 제구가 흔들린 탓이었다.

아무리 타자의 약점이 보이면 뭐하냐고. 제구가 흔들려서 약점 코스에 못 집어넣으면 말짱 꽝인데.

“우우우우! 더럽다!”

“전국체전에서도 그딴 식으로 우승했냐!”

7회에 주자를 둘이나 내보낸 탓에, 8회에는 ‘그 아저씨’가 또 선두타자로 나왔다. 나는 똑같은 패턴으로 고의사구를 했고, 화기중대가 내게 야유를 퍼부었다.

어디서 개가 짖나. 아오, 시끄러워.

신경이 다소 날카로운 상태였지만, 저런 야유 따위를 귀담아듣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상황이 짜증나는 건 저쪽이 더할 테니까.

하지만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내려왔을 때 선임이 불쑥 던진 말에는 나도 울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확실히 가오가 좀 안 살기는 한다. 한 번쯤 붙어봐도 되지 않냐? 무조건 맞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

아니, 시발. 이게 말이야, 당나귀야?

지가 던지는 거 아니라고 개 같은 소리를 하네.

“점수가 서너 점쯤 되면 괜찮은데, 지금은 안 됩니다. 한 방만 맞아도 동점 아닙니까.”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더니, 헛소리를 던졌던 선임이 과장스럽게 움찔했다. 담담했다는 건 내 생각일 뿐이고, 나도 모르게 짜증스러운 기색이 섞인 모양이었다.

“와, 시발. 지금 봤어? 쟤가 나 째려보는 거?”

“우리가 태웅이 너무 키워줬나 보다. 점수 못 낸다고 이제 우리 막 구박해.”

“우리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만!”

“병신들아. 잘 던지는 애한테 왜 지랄이야? 틀린 소리 한 것도 아닌데.”

“그래, 이 새끼들아. 한두 점만 더 뽑아봐. 왜 태웅일 소년가장 만들고 있어?”

사람이 몸이 힘들면 정신이 예민해지는 법이다. 여느 때 같은 농담 따먹기일 뿐인데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속이 괜히 부글부글 끓어댔다.

기합을 넣은 보람도 없이, 우리 타선은 8회 말에도 무득점으로 물러났다. 정규 이닝 안에 끝내려면 내가 다음 이닝을 무조건 무실점으로 막아야만 하게 생긴 것이다. 에라이, 썅.

‘그래도 뭐 5, 6, 7번이니까…….’

제구에 집중하면 어떤 투수든 구속이 느려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더 느린 공을 던진다고 해서 체력 소모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악필인 사람이 억지로 예쁜 글씨를 따라서 쓰면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 경우는 익숙지 않은 오른손이기까지 하다 보니까 정도가 더했다.

손아귀에 힘이 빠져서 불안했지만, 이번 이닝만 막으면 되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억지로 기합을 넣고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사달이 났다.

까아앙!

“야이, 병신아! 그걸 못 잡냐!”

“던지지 마! 늦었어! 던지지 마!”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내 경우는 악력과 제구력이 많이 비례하는 편이다. 노린 코스보다 살짝 높게 들어갔을 뿐인데 안타가 나왔다.

저것도 뭐, 사실 수비수가 보통 수준으로만 했으면 잡는 거긴 한데…….

완투가 처음은 아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체력 소모가 너무 컸다. 약점 코스를 노리기는커녕, 스트라이크존에 구겨 넣는 것조차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볼!”

“세이프!”

“볼!”

“볼!”

“이야아아!”

내 공이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나거나 방망이에 스칠 때마다 화기중대에서 열렬한 환호가 쏟아졌다.

평소에는 과자나 까먹으면서 느긋하게 구경하던 우리 중대원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볼! 베이스 온 볼스! 1루로!”

“이야아아!”

“만루다!”

약점 코스를 찌르지 못하면, 내 공은 흔해빠진 똥볼에 지나지 않는다. 1회보다 구속이 떨어졌을 걸 생각하면 명백하게 평균 이하였다.

군대 리그에 데뷔한 이래, 처음으로 고의사구를 제외한 볼넷이 나왔다. 내 제구력이 뛰어나다기보다, 타자들 선구안이 개똥 같아서 별 희한한 공에도 스윙해주는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 그러고 보니까 만루 상황도 처음인가.

“화기중대! 파이팅!”

“그랜드 슬램 가자! 만루 홈런 고고!”

“최! 강! 화! 기!”

1점 차, 9회, 2아웃, 만루.

야구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장 벌렁거릴 만한 상황이 종합선물세트로 찾아왔다.

가슴이 서늘했지만 그래도 이 상황 자체만이라면 전혀 감당 못할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힘이 빠졌다고 해도 집중하면 어떻게든 안 되겠나. 그래 봤자 타자 하나만 더 잡으면 끝나는데.

……라고, 평소의 나라면 생각했을 거다.

마지막 타자가 하필 또 저 인간만 아니었다면.

“왜, 이번에도 걸러보시지!”

“걸러봐! 걸러봐!”

무슨 소방차 사이렌처럼 새빨간 색으로 변한 스트라이크존을 보니 한숨이 저절로 쏟아졌다.

화기중대 ‘괴물 타자’가 시위하듯 허공에 대고 방망이를 붕붕 휘둘렀다. 매끄러운 궤적이나 스피드나, 아마추어와는 차원이 다르게 위력적인 스윙이었다.

“태웅아. 어떡할래? 만루라서 거르지도 못하잖아.”

“큰일 났네. 점수가 이렇게 안 날 줄은 몰랐어.”

“어떡하냐, 이거 진짜?”

승패의 갈림길인지라 외야에 있던 사람들까지 마운드로 몰려와서 쑥덕거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결책이 생겨날 리 없었다. 이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그랬다. 기본적인 운동신경으로 경기를 뛸 뿐인, 연습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무슨 뾰족한 수를 낼 수 있겠는가.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무슨 작전이라도 있어?”

“작전씩이나 되는 건 아니고……. 여기까지 왔는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봐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리둥절한 선임들을 뒤로 한 채, 나는 잠깐 느릿느릿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마운드로 돌아온 내 손에는 왼손잡이용 글러브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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