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07- >
007.
“와아아! 퍼펙트! 퍼펙트!”
“5승 무패!”
환호하는 고참들에게 둘러싸인 나는 가슴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동네야구 수준밖에 안 되는 데서 퍼펙트게임을 해서? 아니. 환각이라고만 생각한 것이 정말로 타자의 약점이라는 걸 믿을 수밖에 없어졌기 때문이다.
‘초능력이라도 생긴 거야? 도대체 왜? 어떻게?’
선임들은 대기록 세운 기념이랍시고 월급 탈탈 털어서 과자파티를 벌였다. 나도 일단은 웃는 낯으로 어울렸지만, 머릿속은 복잡해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결과적으로 환각 때문에 내가 무슨 피해를 본 일은 없었다. 아니, 반대로 도움이 되는 일만 있었다.
하지만 10억이 든 돈 가방을 주웠다고 신나서 집 사고, 차 사는 머저리가 세상에 어디 있나. 범죄와 연관된 돈은 아닐까 걱정도 하고, 주인 찾아줄까 내가 먹을까 양심적인 고뇌도 하는 게 정상인의 사고방식이지.
이 경우에는 뇌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이만저만 초조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막내, 너 왜 오른손으로 던졌냐? 알아서 잘하겠지 싶어서 내버려두긴 했는데, 괜히 여유 부리다가 실점하면…….”
“그런 거 아닙니다. 왼팔이 좀 안 좋아서 그럽니다.”
“왼팔이 왜? 다쳤어?”
“원래 팔꿈치에 부상이 좀 있었습니다. 저 야구 관둔 게 사실 이거 때문입니다.”
“뭐? 야, 그럼 팔 계속 아팠던 거야? 부상인데 계속 던져도 돼? 괜히 탈나고 그러는 거 아니야?”
내 고백에 선임들 표정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하지.
순수하게 내 몸을 걱정해주거나, 에이스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걱정하거나, 아픈데도 계속 던지게 했다고 가혹행위로 긁힐 걸 걱정하거나.
나는 한순간 투수를 그만두겠다고 말할까 말까, 심각하게 갈등했다.
사실 내가 안 하겠다면 이들이 강제할 방법은 없었다. 지들이 어쩌겠어? 기껏해야 욕하고, 패고, 눈치 주고, 따돌리고, 귀찮은 일 몰아주고, 훈련할 때 트집 잡고, 보급품 모자라면 내 거에서 빼고, 새벽 한복판에만 근무 넣고, 포상휴가 추천 안 해주고………… 시발. 아니네. 방법 무지 많구나.
“아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서 오른손으로 던지지 않았습니까. 오른팔은 멀쩡합니다. 저 계속 투수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래도…….”
“에헤이. 괜찮다니까 그러십니다. 실제로 오늘 오른손으로 퍼펙트게임도 땄잖습니까. 그리고 저 아니면 투수 할 사람도 없는데, 정말로 그만해도 상관없습니까?”
“그, 그건 아닌데…….”
“진짜로 문제 될 것 같으면 미리 말씀드릴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 못 믿으십니까?”
방긋방긋.
그날, 잠까지 설쳐가면서 고민한 나는 결국 현실에 순응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도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만 없으면 비상식적인 일에도 쉽게 적응하는 보통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등병이 갑자기 “환각이 보입니다.” 같은 소리를 떠벌린다고 해보자. 인간적으로 이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군 생활 날로 먹어보려고 어떻게 수 쓰고 있다는 의심을 먼저 받겠지.
내가 환각을 보는 것은 마운드에서 타자를 상대할 때뿐이다. 당연히 일상생활에는 어떠한 피해도 없었다.
아니, 피해가 뭐래. 왜 저런 환각이 보이는지 모르겠다는 불안감만 제외하면, 천금 같은 행운이지.
타자의 약점을 볼 수 있다니!
투수에게 이보다 커다란 선물이 어디에 있겠나.
어느 날 갑자기 스트라이크존이 안 보인다고 해도 잃는 것은 없다. 원래대로 돌아갈 뿐. 누리던 것을 못 누리게 되는 박탈감은 있겠지만, 어쩌겠어. 원래 내 능력도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순수하게 이 기적이 주어진 시간을 즐기고 이용하자.
이것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절대로 군 생활을 꿀 빨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응, 진짜로.
***
내가 부상 때문에 공 던지는 손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연대 전체에 쫙 퍼졌다.
야구 좀 한다는 중대에서는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다.
그럴 만도 하겠지. 방망이에 맞출 엄두도 안 나던 강속구가 자기들 수준으로 느려졌으니까.
하지만.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퍼억!
“스트라이크!”
까앙!
“아웃!”
내가 10승을 달성할 때까지도 신들린 듯한 볼 배합을 뚫어내는 타선은 없었다.
공이 느린 탓에, 종종 방망이에 맞추기야 한다. 실책이 나오면 1~2실점 할 때도 있지만, 그쯤은 타선이 충분히 해결해 주었다. 아마추어 야구다 보니, 아무리 적어도 5점씩은 꼬박꼬박 내곤 했으니까.
“그런데 진짜, 선수 짬밥이 세긴 세구나.”
“그러게. 오른손으로 던지는 거는 솔직히 만만해 보이는데도 죽어라 안타가 안 쳐지네.”
“노하우가 있는 거지, 노하우가. 명색이 선순데.”
“선수 공은 느리다고 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쩐다.”
“구위니 볼 끝이니 하는 말이 괜히 있냐? 오정환 봐라. 150km 될락 말락 하는 직구만 던지는데도 프로 타자들이 못 치잖아. 150km 던지는 다른 투수 공은 멀쩡하게 잘만 치는데도.”
“저 친구는 구위라기보다 볼 배합 아니냐? 무슨 독심술 하는 것 같다니까. 안쪽 노리면 바깥에 오고, 바깥쪽 노리면 안쪽에 와.”
타 중대원들은 틈날 때마다 내 투구를 놓고 기가 막힌다면서 쑥덕거렸다.
나로서야 사실 좀 고마운 일이다. 타자들 약점이 눈에 보여요, 라고 할 수도 없는데 저런 식으로 알아서 해석을 해주고 있었으니까.
이쯤 돼서는 나도 군 생활에 웬만큼 적응했다.
부대 업무도 그럭저럭 이해했고, 막내도 뗐으며, 실수도 거의 없어졌다. 어쩌다 한 번씩 저지르는 실수쯤은 에이스 버프로 적당히 야단맞는 정도에서 끝났다. 가끔 다른 소대원이 실수해서 욕먹는 걸 보면, 생트집 잡히지 않는 것만 해도 군 생활 절반은 날로 먹는다고 봐야 했다.
“3중대 파이팅!”
“최! 강! 화! 기!”
그렇게 군 생활이 일상처럼 느껴질 무렵, 전입해 오자마자 붙었던 화기중대를 상대로 다시 던지게 되었다.
“여전하구만. 저 아저씨는.”
소방차 사이렌처럼 새빨간 스트라이크존을 보면서 난 쓴웃음을 지었다.
선수 출신이라던 화기중대 4번 타자.
쌩쌩한 왼팔로 던질 때도 스트라이크존 전체가 핫존으로 표시되었던 그 사람이 이번에는 1번 타자로 나왔다. 단순히 한 번이라도 더 많은 타석에 들어오겠다는 작전 같았다.
뭐, 그러시든지 말든지.
“우우우우!”
“승부해라! 비겁하다!”
“불알 달고 쪽팔리지도 않냐!”
“승부의 세계에서 비겁한 게 어딨냐!”
“공짜로 내보내 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꼬우면 다음 타자가 치면 되지!”
내가 고의사구를 던지자, 예상대로 양방향에서 야유와 응원이 일제히 쏟아졌다.
핫존에 던진다고 해서 무조건 안타가 되는 건 아니다. 이건 내 어림짐작인데, 피안타 확률이 3할을 넘어가면 그때부터 ‘위험 코스’로 분류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핫존이나 쿨존끼리도 색깔의 농도가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무조건 맞는 게 아니라고 해서 내가 일부러 상대해줄 필요가 있나. 저 타자만 넘기면 물빠따인데.
“볼넷!”
“…….”
타자는 한순간 나를 찌릿 노려보았지만, 별말 않고 순순히 1루로 걸어 나갔다. 저 아저씨도 이등병밖에 안 되는지라, 이런 일로 나한테 시비 걸기는 뭐할 터였다.
까아앙!
“뛰어, 뛰어!”
“세이프!”
경기는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흘러갔다.
중간에 안타 하나를 맞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야수 실책. 나는 2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았고, 우리 타선은 꾸역꾸역 1점을 뽑아냈다.
3회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자, 또 그 선수 출신 아저씨가 타석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내가 눈짓을 하기도 전에 포수가 알아서 먼저 일어났다.
“우우우! 승부해라! 승부해라!”
“괜찮아! 괜찮아! 최 이병, 잘한…… 어?”
야유와 격려 속에서 초구를 던지는 순간, 내 눈썹이 꿈틀했다. 개구리 점프를 해도 못 맞출 정도로 멀찌감치 뺀 공에 타자가 힘찬 헛스윙을 했던 것이다. 뭐지?
부우웅!
“스트라이크!”
두 번째 공도 마찬가지였다. 대놓고 멀찌감치 공을 뺐는데, 홈런이라도 칠 기세로 허공에 맹렬한 스윙을 했다.
이걸로 투 스트라이크.
“얼씨구?”
자세를 고쳐 잡은 타자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저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수는 없었다.
-투 스트라이크 공짜로 줬으니까, 도망치지 말고 한판 붙자.
부대 최강 투수에 대한 부대 최강 타자의 도발.
잠깐 머쓱해하던 포수가 어떻게 할 거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공을 만지작거리던 내 오른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한 번 해보자, 이거지?’
내가 눈짓하자, 포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홈 플레이트 뒤에 앉았다. 방망이를 고쳐 쥐는 타자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씩 올라갔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투수판을 단단하게 밟았고, 볼넷으로 내보낸 뒤에 다음 두 타자를 깔끔하게 아웃으로 잡아냈다.
짝짝짝.
저 아저씨가 만화를 너무 많이 봤네.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아저씨랑 붙어?
귀찮게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