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3화 (3/90)

< 괴물 배터리 -003- >

003.

찬희는 그 뒤로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았다. 듣기로는 깁스도 풀고 훈련에 열심이라고 했다. 반이 다른 탓에, 따로 얼굴을 마주친 기회는 많지 않았다.

야구부는 경기력이 뚝 떨어져서 지역대회 2~3차전 진출을 노리는 수준이 되었다. 나 하나 믿고 가는 원맨 팀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미안한 마음이야 있는데, 내 잘못은 아니다. 난 이미 6학년인데, 뒤이을 투수가 없는 게 어떻게 내 탓일 수가 있겠어. 감독님이 세대교체에 실패한 거지. 그래도 전국체전 우승은 했으니까, 눈에 띈 놈들은 괜찮은 중학교에 불려 갈 테니 다행이다.

나는 야구를 만나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중학생이 된 뒤로는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면서 괜찮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 2학년에는 적당히 놀고 적당히 공부하다가 고3이 되어서야 인 서울을 꿈꾸며 머리 싸매는, 정말로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굳이 눈에 띄는 굴곡이 있다면, 수능 당일에 식중독에 걸려서 시험을 망쳤다는 정도일까?

기왕 재수하게 된 김에 군대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팔꿈치 때문에 면제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2급 현역 판정이 나왔다.

하기야 뭐. 재활도 열심히 했고, 일상생활에서는 가끔 팔꿈치 다쳤다는 걸 까먹기도 할 정도니까.

내가 배정받은 곳은 후방의 향토예비군사단이었다.

나름대로 긴장하면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선임 한 명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혹시 경훈 초등학교?”

“……예, 그렇습니다.”

“너, 야구 했지? 투수.”

뭐야? 누군데 날 알지?

그러고 보니 낯선 얼굴이 아닌 듯도 해서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선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쟤가 투수라고? 선수 출신입니까?”

“어. 저 새끼 완전히 거물이야. 나 6학년 에이스 먹고 있을 때 들어왔는데, 나 3학년짜리한테 선발 뺏기는 줄 알고 개쫄았다니까.”

“오오오! 그 정돕니까?”

“장난 아니야. 이제 막 야구공 잡아본 3학년짜리인데, 감독님이 너 연습 나오고 싶을 때만 나와도 되니까 제발 야구부 들어오라고 사정까지 했어.”

“이야아. 왕건이네. 어떻게 요래 에이스 갈 때 되니까 딱 세대교체가 되나?”

“막내! 넌 이제 군 생활 폈다! 예쁜 누나 없어도 내가 특별히 용서한다!”

“강 병장 이제 필요 없으니까 버려! 에이스 대우고 뭐고 때려치워! 모포 말아서 밟아!”

“야! 시발, 니들이 어떻게 나한테 이래!”

그렇구나. 이제야 생각이 나네. 내가 야구부 처음 들어갈 때 에이스 하던 6학년 승재 형이었구나.

뜻밖의 환대에 얼떨떨해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강승재 병장이 나를 불러냈다.

“오랜만이다. 나 기억은 하지?”

“물론입니다, 강승재 병장님.”

“병장님은 무슨. 나 내일 집에 간다. 그냥 형이라고 불러도 돼.”

“아, 그래요? 축하해요, 형.”

“……시발. 그런다고 바로 형 소리 튀어나오는 거 보니까 너도 군 생활 걱정된다.”

“에이. 이것도 다 사람 봐가면서 비비는 거죠.”

우리는 킬킬거렸다.

“우리 학교 전국체전 우승했다며? 그냥 결과만 들었는데 그게 너네 세대 맞지?”

“네. 제가 선발이었어요. 2대 1로 이겼던가?”

“이야아. 네가 난 놈은 난놈이네. 그 물빠따 새끼들 끌고 거기까지 올라가려면……. 아니다. 너네 세대 때는 또 물빠따 아니었을 수도 있겠구나.”

“빠따 애들은 제 공 보면서 커가지고 괜찮은 편이었는데, 투수가 문제였죠. 저 빼고 다 겸업이었어요.”

“아이고, 미친. 나 때도 그랬는데 너 6학년 때까지 그랬으면, 거의 4년 동안을 투수 두 명으로 때운 거야?”

“어쩌겠어요. 투수로 포텐 터지는 애가 없는데.”

“그래도 그걸 어떻게든 하는 게 감독 일이지.”

군대에서 아는 사람 만나면 외국에서 한국인을 만난 기분이라더니. 야구부 시절에는 거의 말 나눈 적도 없는 사이인데, 강 병장이나 나나 서로를 보는 눈빛에 친근함이 뚝뚝 묻어났다.

기왕 만난 거 좀 더 오래 봤으면 좋겠지만, 내일 전역하는 사람한테 그런 말 했다간 귀싸대기 맞겠지.

“아까 봐서 대충 분위기 파악은 됐겠지만, 우리 부대는 야구 잘하는 놈이 왕이야. 연대장이 야빠라서, 사비까지 보태서 장비 들였거든.”

“야구 잘하면 휴가라도 보내줘요?”

“응. 휴가증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휴가 겹치면 야구 잘하는 놈 먼저 보내주기까지 해. 난 휴가 다 못 써서 애들한테 뿌리기도 했잖아.”

입대하기 전에 들은 풍월이 있는지라, 아까 선임들의 반응만 보고도 대강 분위기 파악은 한 상태였다.

왜, 축구 잘하는 신병은 서로 데려가려고 발악한다지 않나. 축구 좋아하는 부대가 있으면, 여기처럼 야구 좋아하는 부대도 있는 거지 뭐. 야구로 휴가증을 딸 수 있다는데, 야구 잘하는 신병보다 더한 보물이 어딨겠나.

“연대쯤 되면 사람도 많을 텐데, 다른 부대에는 잘하는 사람 없어요?”

“제까짓 것들이 잘해봤자지. 내가 아무리 야구 그만뒀어도 10년 가까이해온 짬밥이 있는데.”

“어? 형 야구 관뒀어요?”

“응? 아 뭐. 어쩌다 보니…….”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었는지 강승재 병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놀라서 반사적으로 물어봤을 뿐이지, 민감한 화제를 자꾸 건드릴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아무튼, 너도 야구 했던 깜냥이 있으니까, 너무 나대지만 않으면 군 생활 편할 거다. 우리 중대 새끼들이 복 받은 거지. 나 전역하면 앞으로 휴가증 어떻게 타느냐고 초상집 분위기였는데.”

“아, 저 그거 말인데요.”

나는 약간 쭈뼛대면서 말했다.

“아까 말하려다가 타이밍을 놓쳤는데……. 저도 사실 야구 관뒀어요. 팔꿈치 다쳐가지고…….”

“뭐?”

“전국체전 결승전 있죠? 그때 다쳤어요. 일상생활에는 크게 지장 없는데, 야구 같은 건 좀…….”

나를 보는 강승재 병장의 눈이 둥그레졌다.

“아, 그렇구나……. 내가 실수했네. 차라리 닥치고나 있을걸. 야구 잘하는 놈이라고 잔뜩 띄워놨더니 갑자기 못한다고 하면 띠껍게 보는 새끼들 있을 텐데…….”

“어, 듣고 보니 그러네요…….”

젠장. 생각해보니 나한테 빅똥을 선사한 거잖아! 딴에는 후배가 군 생활 적응 잘하도록 지원사격 해준 거였겠지만…….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쩌겠나. 더럽고 치사해도 한 번 밟고 자빠져야지.

다음 날 아침에 승재 형이 위병소로 나가는 걸 부대원 몇 명과 함께 배웅했다.

아는 사람이 하루 만에 없어지니까, 비로소 본격적인 군 생활이 시작된다는 생각에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맞이한 전입 첫날은 막연하게 각오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야! 막내는 오늘 뭐 시키지 마라. 쓸데없이 심부름시켜서 힘 빼놓으면 나한테 뒤진다.”

“훈련소에서 뭘 했기에 벌써부터 활동복이 이렇게 너덜너덜하냐? 야, A급 하나 쌔벼 와봐! 막내 주게!”

“집에 전화는 했어? 야야,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누가 막내 데리고 가서 전화부터 시켜라! 컬렉트콜 같은 거 말고, 일반전화로 시켜줘!”

“네스퀵 없냐? 네스퀵! 왜 막내한테 흰 우유를 먹이고 자빠졌어? 네스퀵 가져와!”

“부모님 면회 안 오신대? 언제든지 마음 편하게 오시라고 해! 인사병이 내 불알친구거든. 책임지고 면회외박 내보내 준다!”

“야야! 점심시간에 막내 전투복에 줄 좀 다려줘라! 전투화도 물광 좀 내고! 부모님 면회 닥쳐서 허겁지겁 하지 말고!”

시발, 뭐지? 이건 내가 듣던 군대가 아닌데? 요즘 군대가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이게 말이 되나?

나로 하여금 불길함마저 느끼게 했던 살가움의 정체는 일과가 끝난 뒤에야 판명되었다.

“바로 내가! 3중대! 멋진 3중대! 싸움에는 천하무적! 사랑은 뜨겁게! 사랑은 뜨겁게!”

“화기중대 파이팅!”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고 버텨라! 화기중대 밀려나면 모두가 쓰러져! 최후의 5분에! 승리는 달렸다!”

일과시간 내내 신줏단지처럼 모셔졌던 나는 전투체육 시간이 되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연병장 주위로 100명도 넘는 병사들이 모여서 응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수 A급 글러브까지 가지고 온 분대장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저번에 훈련 일정 때문에 휴가증이 한 번 이월됐어. 그래서 이번에 우승하면 10장쯤 나올지도 몰라. 그게 다 네 손에 달린 거야.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알겠지?”

“하, 한영호 병장님? 미처 말씀 못 드렸는데, 사실은 제가…….”

“원래 강 병장이 모포말이 안 당하는 조건으로 오늘 경기까지 뛰고 전역하기로 했거든? 그런데 너 믿고 그냥 아침에 보내준 거야. 그러니까 만약에 오늘 지면 남은 군 생활이 아주 스펙터클해질 거야. 납득 오케이?”

뭐? 아니, 그런 게 어딨어! 이 새끼가 어쩐지, 위병소 나가기 전에 표정이 떨떠름하더라니! 와, 시발. 모포말이 안당하고 집에도 일찍 가려고 나 팔아먹은 거야?

이제라도 부상 때문에 투수 못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 하나 믿고서 확실한 에이스 카드를 일찍 집에 보냈다는데, 짬밥 찌끄레기 이등병이 무슨 깡으로 못 던진다는 말을 하냐.

이 인간들도 생각해보면 병신이지. 던질 수 있느냐고 나한테 직접 한 번쯤 물어봤어야 하는 거 아니야?

“부대 차렷! 연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떡해야 하나 어버버하고 있는데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은 연대장까지 기어 나왔다.

아니, 기어 나온 정도가 아니라…….

“이병 최태웅!”

“어, 그래. 자네가 전국체전 우승까지 한 투수 출신이라면서? 허허. 3중대가 야구 인복이 많아. 강 병장이도 선수 출신이라더니, 가자마자 막내 에이스가 오고.”

“아, 아, 아닙니다.”

“잘 해보게. 기대할 테니까.”

“최선을! 다하겠…… 습니다?”

씨발. 도대체 이게 뭔 봉변이냐.

솔직히 내가 병신 쪼다도 아니고. 정말로 못 던질 것 같으면 아무리 군 생활이 꼬이게 생겼어도 말했을 거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선수생활이 어렵다는 것뿐이지, 평소에는 부상 사실을 까먹을 정도로 말끔하게 회복된 팔꿈치였다. 설마 한두 경기도 못 던질까? 2년 넘게 야구한 가닥이 있는데.

“막내 파이팅!”

“차기 에이스 파이팅!”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마운드에 올랐다. 한가운데 투수판까지 박혀 있는 게, 병사들이 직접 만든 것치고는 훌륭한 마운드였다.

어릴 때와 달리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연식구를 만지작거리며, 내가 홈 플레이트 쪽을 바라봤을 때였다.

[베이스볼 트레이너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최초의 특성을 선택해주세요.]

내 인생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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