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01- >
001.
어릴 적에 신동 소리 안 들어본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봐도 나는 진짜배기였다. 결코 어린 시절에 대한 미화 따위가 아니었다.
“태웅이 아버님. 태웅이는 꼭 야구를 해야 합니다.”
“웬만큼 야구로 먹고살 만한 재능이라면 제가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태웅이 저놈 재능은 최고가 되느냐 마느냐를 다툴 수준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안타가 뭔지도 모르는 3학년짜리 꼬맹이 공이 우리 6학년 에이스보다도 빨랐다고요!”
“특별히 하는 운동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하다못해 아침 조깅 같은 것도 안 한다면서요. 그런 애가 저런 공을 던지는데, 이게 어디 보통 재능입니까?”
체육 계열에서 으레 던져주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꼬박꼬박 연습해야 하는 게 싫어서 야구부에 안 들어간다고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정 그러면 연습은 네가 땡길 때만 와도 된다.”
“네? 정말요?”
“대신에 연습 나온 날은 무조건 고기를 사주마. 그럼 야구부에 들어올 거지?”
“네! 그럼 저 야구부 들어갈래요!”
머리 좀 큰 다음에는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지도 못할 얘기였다. 나 같아도 누구한테서 이런 말 들으면 병신이 센 척한다고 비웃고 말 거거든.
하지만 현실이 이러했고, 어렸던 나는 이게 얼마나 파격적인 조건인지도 모른 채 덥석 물었다.
“뭐, 뭐야. 쟤? 3학년이라면서?”
“3학년짜리 공이 어떻게 저래?”
우리 학교 야구부는 투수지망생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6학년 에이스인 승재 형이 졸업하면 대책이 없는 상황이었던지라, 내 공을 본 선수들은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기뻐했다.
“너 진짜 대단하다. 다른 운동은 하나도 안 해본 거 맞아?”
그중에서도 특히 나를 잘 따르는 것은 포수인 유찬희였다. 동급생 상대로 ‘잘 따른다.’라는 표현이 이상한 건 아는데, 정말로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건 진짜 천재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넌 무조건 메이저리그에 가야 돼. 야구 말고 딴 일 하는 건 야구에 대한 모욕이야.”
“박준호도, 선동혁도, 최공원도, 10살 때는 이런 공 못 던졌어! 그런데 네가 성장기 끝나봐! 진짜 던질 때마다 100마일 나오는 괴물딱지가 될 수도 있다니까!”
“왼손 강속구 투수는 지옥에서도 데려온다는 말 몰라? 넌 투수를 해야 돼. 왜냐고? 투수하려고 태어났으니까! 네가 딴 거 하는 건 진짜 죄악이야.”
찬희는 팀 동료나 친구이기에 앞서, 투수 최태웅의 열성적인 팬이었다. 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에 한발 담그고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나 뭐라나. 내가 공을 던질 때면 찬희의 입에서는 침이 마를 순간이 없었다.
“오버 좀 그만 해라. 구속이 무슨 게임 레벨업하는 것처럼 꼬박꼬박 오르는 줄 아냐? 중학교 때 구속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대로인 사람도 있다는 말, 못 들어봤어?”
“네 재능은 그런 차원이 아니라니까! 제구나 변화구는 노력해서 익힐 수 있지만, 강한 어깨는 타고나는 거야! 그런 천재가 노력까지 한다고 생각해봐!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괴물이 되겠어?”
어른들이 칭찬하는 거랑 친구가 칭찬하는 건 마음에 와 닿는 게 달랐다. 찬희가 호들갑 떠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민망해서 얼굴이 다 빨개졌다.
물론 한편으로는 우쭐한 마음도 들었다. 천재라는 말 듣고 기분이 안 좋아지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찬희가 이렇게 호의를 쏟아내는데, 나라고 찬희에게 나쁜 감정이 들 리 없었다.
나는 찬희와 단짝이 되었고, 연습에 참가하는 날도 조금씩 늘었다. 덕분에 부원 중에는 내가 ‘연습참가 자유’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입부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을 정도였다.
6학년 에이스인 승재 형이 졸업하자, 감독님은 나를 선발투수로 기용했다.
자체 홍백전에만 등판하다가 비로소 다른 팀과 연습경기를 하게 된 나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선발이 4학년? 지금 장난하나?”
“우리가 무슨 와리가리 하러 나온 줄 아나.”
내가 4학년이라는 걸 안 상대 팀 선수들은 항상 띠껍다는 얼굴을 했다. 다 들리게 이죽거리는 사람도 두세 경기에 한 명씩은 꼬박꼬박 나왔다.
나도 얼라인지라 당연히 기분이 나빴고, 그런 팀 상대로는 평소보다 악에 받쳐서 공을 던졌다.
“뭐, 뭐야, 이거?”
“4학년이라면서!”
나와 처음 만나는 팀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초구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죽거리던 사람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는 일은 정말 질리지 않는 즐거움이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공식경기에 데뷔하자, 중하위권이던 우리 학교는 지역 대회의 패자로 우뚝 섰다.
내 투구에는 수 싸움도 뭣도 없었다. 왼손으로 직구만 던져도 상대 타자들은 붕붕 헛스윙하기 바빴다.
듣자하니, 전례가 없는 일은 또 아니라고 했다.
초등학생 레벨에서는 아무래도 공만 빠르면 장땡인 면이 있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몇 년에 한 번씩은 꼭 또래 수준을 초월한 괴물이 튀어나온다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우리 학교가 단숨에 전국 레벨까지 올라선 것은 아니었다.
나야 뭐 감독님이 던지라면 던질 뿐이라서 나중에야 알았는데, 초등야구에는 연투 금지와 투구수 제한 규정이 있었다. 잘하는 투수 한 명만 계속 던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다른 포지션과 겸업하는 선수들이 마운드에 올랐고, 그런 경기는 반쯤 졌다.
그래도 든든한 에이스의 존재는 향상심을 자극했고, 부원들의 실력은 쑥쑥 자랐다. 내가 6학년이 된 해의 여름에는 기어이 전국소년체전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최태웅이가 1점 넘게 두들겨 맞는 거 본 사람 있냐?”
“없습니다!”
“오늘 태웅이가 선발이다. 그럼 너희가 할 일은 뭐냐?”
“2점을 내는 겁니다!”
“그래. 겨우 그거다. 2점만 내면 너희가 전국 최고다. 할 수 있겠냐?”
“할 수 있습니다!”
“경훈 초등학교! 파이팅!”
부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준결승에서 12대 10의 난타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에이스를 아끼는 도박수가 제대로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연습경기를 통틀어도, 내가 패전투수가 된 적은 세 번뿐이었다. 그나마도 전부 1대 0의 패배였으니, 부원들이 우승을 맡아놓은 것처럼 들뜨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퍼억!
“……뭐야, 저놈은?”
상대 선발투수의 1회 말 투구에 우리 타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표정은 내 1회 초 투구를 본 상대 팀 타자들과 많이 닮아 있었다.
“저거…… 거의 최태웅이 수준 아니야?”
“덩치 졸라 크네. 진짜로 초딩 맞아? 고딩이 나이 속이고 온 거 아니야?”
“정식 투수는 아닌가 보네. 던질 때마다 폼도 들쭉날쭉하고, 제구도 엉망이고…….”
“쟤 이름이…… 박현성이? 맞네. 기록 보니까 원래는 중견수고, 투수 등판은 처음이야.”
“저쪽 에이스는 부상인가?”
“별나네. 공이 저렇게 빠른데 왜 투수 경력이 없지? 저렇게 어깨가 쎄면, 엉성한 데가 있어도 보통은 투수로 키워보려고 할 텐데…….”
나와 비슷한 구속에 흠칫했지만, 놀란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상대는 3회까지 노히트하면서도 볼넷만 5개를 줄 정도로 제구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구속에 쪼그라들었던 타자들은 점점 투지를 되찾았다.
“저 새끼 제구 안 된다!”
“그래 봤자 땜빵 투수야! 버티기만 하면 돼!”
“태웅이 공도 많이 쳐봤잖아! 제구도 안 되는 공인데 쫄 필요 없어! 바짝 붙어!”
웃기는 자식들. 5학년 이후로 홍백전에서 실점한 기억 자체가 없는데, 많이 쳐보긴 뭘 많이 쳐봐?
“스트라이크 아웃!”
상대 투수와 비교한다면 나는 압도적이면서도 안정적인 퍼펙트 피칭으로 마운드를 지켰다.
거의 이기기만 해온 탓에, 이런 흥분을 느끼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1실점만 해도 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올라가는 마운드는 엄청나게 짜릿했다.
“1점만 내자! 우리도 밥값은 해야지!”
찬희가 기합을 지르면서 타석에 섰다.
상대 투수가 나만큼이나 빠른 공을 던지는데도 우리 타자들 눈빛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한 이닝에 한 명씩은 꼬박꼬박 볼넷으로 출루하고 있으니, 다들 기죽기보다는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다.
퍼억!
그때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찬희가 나자빠졌다.
전 이닝부터 위태위태하다 싶더라니, 상대 투수의 폭투가 찬희의 무릎에 정통으로 꽂힌 것이다.
“찬희야! 유찬희!”
“야야야! 빨리 얼음 가져와!”
“움직일 수 있겠어? 많이 아프냐?”
사실 맞은 부위 자체는 보호구 위였는데, 넘어지면서 발목을 접질린 것이 문제였다.
우리 벤치는 난리가 났다. 백업이 없는 건 아니지만, 찬희 또한 대체하기 어려운 주전 포수였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끙끙거리던 찬희가 코치님의 부축을 받아서 내려갔다. 동료 선수의 부상 퇴장을 보는 것은 그날이 처음이라 다들 안절부절못했다.
“그런데 저 새끼는 뭔데 사과도 안 하냐?”
“씨발. 애새끼가 안 하면 어른이 와서 시켜야지.”
어른들이 찬희를 신경 쓰는 사이에 선수들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찬희를 맞힌 투수가 시큰둥한 얼굴로 껌이나 짝짝 씹고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알이 뒤틀린다고 해서 어른들이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 앞에서 싸움질을 벌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분위기가 어수선한 사이에 우리 타자들은 기어이 2점을 따냈고, 나는 6회 초 마지막 마운드에 올랐다.
“최태웅! 쓸데없는 짓 말아라. 방금 건 그냥 사고였어. 결승전이야. 너 퇴장당하면 2점 어떻게 될지 몰라.”
마운드에 오르기 전, 감독님이 엄한 눈빛으로 경고하듯이 말했다.
실수인 척하고 보복할까 생각했던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나라고 감독님의 저런 경고를 무시할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쳇, 듣지 말고 올라가 버릴걸.
감독님의 경고에 따라 성실하게 투아웃을 잡아냈으나, 마지막 아웃 카운트 앞에서 나는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우연이라고 해야 하나, 운명적이라고 해야 하나.
찬희를 맞춘 그놈이 건들거리면서 경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타석에 들어왔던 것이다.
퍼억!
“……!”
이를 악물고 던진 초구에 경기장이 웅성거렸다.
바짝 붙은 위협구에 박현성이 깜짝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기 때문이다.
‘뭘 꼬나 봐?’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잔뜩 일그러진 박현성의 얼굴을 봤더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던 것이다.
대신에 슬쩍 돌아본 감독님의 표정은 무시무시하게 굳어져 있었다. 믿을 만한 투수가 달리 있었다면 당장에 갈아치웠을 법한 분위기였다.
‘아이고. 끝나면 한소리 듣겠구나. 설마 이제 졸업할 때 다 됐다고 때리는 건 아니겠지? 지금까지는 한 번도 안 맞아봤는데…….’
몸에 맞출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이대로 곱게 넘어가기는 아니꼬워서 겁을 준 것뿐이었다.
초등야구나 리틀야구는 빈볼에 더욱 엄격하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갔다. 가만히 서 있었어도 맞지 않는 코스였다는 걸 심판이 인정해준 것 같았다.
아무튼, 나도 두 번이나 화풀이할 생각은 없었다.
힘껏 던진 2구는 아무런 문제도 없이 스트라이크존을 꿰뚫었다.
“……!”
그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헛스윙한 박현성의 방망이가 나를 향해 매섭게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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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괴물 배터리라는 제목에서 포수가 언제 나오느냐는 질문을 하시는 분이 많네요...
상징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해주세요ㅠㅠ
딱히 주인공에 대비되는 괴물급 포수가 나와서 함께 성장하는 스토리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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