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이야기의 시작 (마지막)
“가람 씨! 어서 오세요. ……아.”
카페에 들어서자 날 보고 반갑게 인사하던 동훈이 뒤따르는 한들을 보고 한 차례 더 반응했다. 눈짓으로 날 아는 척하던 연주가 동훈의 반응에 눈치챈 듯 몸을 움찔 굳혔다.
“걔랑 같이 왔어?”
연주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묘한 표정을 지은 연주가 예의상 묻는다는 투로 물었다.
“매번 주문하던 대로 내주면 되지? 음료 두 개랑 샌드위치.”
“응. 부탁해.”
그렇게 말하고 한들을 이끌고 사람들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자리로 향했다. 처음 한주와 만났을 때 앉았던 바로 그 자리로.
맞은편에 앉은 한들을 보자 묘한 감회에 젖었다.
내가 쟤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던지. 처음 이 자리에 앉았던 그날은 정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한주가 날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그날 이후 한들은 집 밖으로 나설 수 있게 됐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한들을 속박하던 결계가 모두 사라졌으니까.
그래도 집 밖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한들의 모습에 적응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그날 이후 한들은 결계에서도 악귀화에서도 자유로워졌다. 이제는 일상으로 자리잡아 이렇게 자주 같이 외출을 하곤 한다. 그중에서도 이 카페는 자주 찾아왔다.
한들은 굳이 먹지 않아도 되는 주제에 먹는 걸 좋아해서 자꾸만 먹을 것을 조르곤 했지만, 밖에서 한들용 메뉴를 주문하기도 어렵다.
아무도 없는 맞은편에 음식을 늘어놓고 대화하면 누가 봐도 미친 사람으로 보일 테니까.
그래서 외출을 할 때는 동훈의 카페를 찾았다. 동훈과 연주는 아직 적응이 안 되는 듯하지만, 아마 곧 익숙해질 거다.
나는 평생 한들을 달고 다녀야 하니까. 게다가 한들은 겉보기나 행동이나 모두 어린애 같은 녀석이고.
연주는 볼 수 없으니 모르겠지만, 동훈의 반응이 차분해지면 연주도 덩달아 그렇게 되겠지.
그날 한주가 나를 놀리는 용도로 주문했던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는 한들을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 * *
한들과 계약을 했던 날. 노크 소리가 들려오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심장이 쿵쿵쿵쿵 상당히 빠르게 뛰고 있어서 그 소리에 문 여는 소리가 묻힐 지경이었다.
문틈으로 방 내부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방 안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거울 속 귀신을 쳐다보았으나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노크한 범인은……? 한들이 아직 남아있는 건가? 긴장한 채 방 안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왁!”
문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물체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으악!”
꼴사납게 엉덩방아까지 찧고 멍한 얼굴로 내 앞에 선 존재를 올려다봤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 눈이 크게 벌어졌다.
한들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들?”
내 뒤에서 한주가 살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 반응하듯 킥킥 웃은 한들이 못된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얄밉다고?”
나는 어안이 벙벙해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너…… 환생하러 간 게……?”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그래도 의도만은 확실히 전달된 듯, 내 질문에 한들이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신의 힘을 그냥 버리라며? 근데 그냥 버릴 수는 없다고 했잖아!”
그 말에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대신 그 비슷한 게 된다고 했지. 근데 그게 왜……?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내게 한들이 씩 웃고는 말했다.
“그것 때문에 당분간 환생은 보류야! 다시 잘 부탁해!”
아무래도 자초지종을 제대로 들어야 할 것 같다.
거기에서 자리를 옮겨 앉고서야 놀란 가슴이 다소 진정됐다. 한들은 장난에 성공한 게 굉장히 좋은지 시종일관 싱글벙글 웃는 표정이었다. 그에 비해 완전히 낚인 나는 지친 표정이었고.
나와 한들의 표정 대비를 구경하던 한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건데?”
한주의 질문에 한들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툭 쳤다.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가 이래봬도 신이라 힘이 강하잖아.”
즐거운 표정으로 단언하는 게 어쩐지 얄미웠다. 한주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한주의 수긍에 한들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웃음기 담긴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마치 잘 들으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이 힘을 그냥 버릴 수는 없거든. 그 대신, 인간으로 환생하게 되었으니까 이제 써서 없앨 수는 있어. 그럼 결국 아무도 못 가지고 없어지는 거니까, 버리는 거랑 비슷하지?”
한들의 말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은…… 다 써서 없앨 때까지 환생은 미뤄야 한다는 소리야?”
내 말에 한들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니…… 그럼…… 무슨 말인지는 이해가 되는데. 그래도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았지 않나?
“너 그럼 악귀가 되는 건……?”
조심스럽게 묻자 한들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괜찮아졌는데? 밖에 나무 봤잖아.”
“아, 저거 역시 너구나.”
한주가 나무가 자라 있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그러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 대신 한 가지 가설을 내세웠다.
“이가윤하고의 계약 때문에 천벌을 받았던 거니까, 제대로 계약을 끝마쳐서 악귀화도 끝난 건가?”
한주의 말에 한들이 고개를 기울이고 대답했다.
“아마도?”
어쩐지 얼렁뚱땅 넘어가는 분위기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물었다.
“그…… 힘을 다 써야 한다는 건…… 얼마나 걸리는 거야?”
이 질문에도 한들은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난들 아느냐는 분위기가 풀풀 풍겨 나왔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평생 걸리지 않을까?”
“아…… 평생? 평생이라고?”
평생이라니…… 누구의 평생인데? 네 평생이면 정말 끝도 없을 거 아니야. 입으로 소리를 내서 말하지 않았는데도 내 표정으로 눈치챘는지, 한들이 씩 웃고는 말했다.
“네 평생. 내가 여기 남아있는 이상 계약은 아직 유효하니까 너도 열심히 써, 내 능력.”
“그 말은…….”
내가 끝맺지 못하고 흐린 말을 한주가 이었다.
“능력도 체질도 그대로란 소리인 거네.”
“그렇지.”
한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말에 묘한 안도를 느끼면서도, 안도를 느끼는 나 자신을 깨닫고 이상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처음 한주를 만났을 때, 평생 이렇게 귀신을 보며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나 절망했었는데…… 어느새 이런 일상을 말 그대로 일상으로 받아들인 나 자신이 신기했다.
지금 와서는 이 생활과 헤어져야 할 상황에 닥치자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고.
내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빠져든 사이 한주도 한들도 각자 궁금한 게 있던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나무는 어떻게 된 거야? 뭔데?”
한주가 이렇게 묻는 동시에 한들 역시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네 악령석을 어떻게 공물로 쓴 거야?”
질문하는 목소리가 겹쳐 한주와 한들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나는 둘 다 궁금해 잠자코 두 사람의 말을 기다렸다. 곧 한들이 먼저 입을 열어 대답했다.
“여기서 계약을 했으니까…… 새로 태어났다고나 할까. 원래 자리에 있던 내 본체는 죽었고.”
한들의 말에 한주가 살짝 인상을 쓰고 말했다.
“저런 나무가 갑자기 자라나면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쓸데없이 눈에 띄는 건 싫은데. 저것 때문에 사람 찾아오면 네가 다 쫓아내.”
아니, 의뢰 사무소니까 사람 찾아오면 좋은 거잖아.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한들이 한주의 투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넘겼다.
“아마 괜찮을 거야. 나는 원래 사람들 눈에 안 띄었고. 다들 관심도 없을걸?”
그 말에 예전에 한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 저런 나무가 불탔는데 사람들이 관심도 없을 수 있냐는 내 질문에, 한주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원래 신령한 것 중에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잘 벗어나도록 만들어진 것들이 있다고.
한들의 대답으로 볼 때 그건 이 경우에도 작용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저런 나무가 생겨났는데 그럴 수 있나 싶지만, 그게 말이 돼? 싶은 게 정말 되는 걸 몸소 겪어왔으니…….
한주도 한들의 대답에 납득했는지 그 부분은 더 따져 묻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투덜거렸다.
“저거 때문에 햇볕이 안 들어오게 됐잖아.”
한들은 그런 한주의 반응에 보고 보충하듯 말했다.
“괜찮아. 힘을 쓰면 쓸수록 조금씩 줄어들 거거든. 저 나무가 사라지고 나면 나도 환생할 수 있어.”
“아까 평생 써야 할 거라며?”
한주는 그렇게 쏘아붙이면서도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늘지게 된 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잘라낼 수도 없고 그런대로 이해할 생각인 듯했다.
한주의 의문이 대충 마무리되자 한들이 다시 질문했다.
“근데 악령석은 어떻게 된 거야? 네 걸 어떻게 공물로 썼어?”
한들의 그 질문에 나는 문득 의아함을 느끼고 물었다.
“너 한주 씨가 모은 악령석을 공물로 쓸 수 있는 걸 알고 나한테 그렇게 물어본 거 아니었어?”
나한테 여러 번 거래할 거냐고 물어와서,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 질문에 한들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몰랐어. 그런데…… 왠지 될 것 같았거든. 그래서 물어본 거였어.”
그런 거였어? 한들의 말에 왠지 속은 기분을 느꼈다. 다 꿰뚫어 보고 있는 거라고 굳게 믿었는데…… 아니었단 말이야?
우리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한주가 입을 열었다.
“전에, 내가 모임이 있어서 집을 며칠 비웠었잖아.”
그 말에 그런 적이 있었나? 생각하고 곧 그 일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지하실에 들어갔을 즈음의 일이다. 한주가 집을 비우고 불청객 귀신이 종이상자를 들고 찾아 왔던 때.
그때가 왜?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한주를 응시하자, 한주가 말을 이었다.
“너 그때 그 귀신 악령석을 한들한테 바쳤다며.”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힘들어 죽을 것 같고, 시간도 없어서…… 이제 끝이구나 싶은 순간에 한주에게 도움을 받았었다.
“그거, 네가 잡은 게 아니라 내가 잡은 거였잖아.”
“그랬죠. 근데 그때 일은 왜…… 아!”
의아해하며 묻다가 깨달았다. 한주의 말대로 내가 잡은 게 아니었다. 한주가 잡은 거였지. 그런데도 그 악령석을 내가 바칠 수 있었다.
내가 깨달았다는 걸 알았는지 한주가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그때, 혹시 내가 잡은 악령석도 공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거든. 나도 한가람 네 계약자니까. 계약자의 계약자도 나름대로 공물을 바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닐까 의심했었지.”
“그런데……!”
그걸 왜 말 안 해줬냐고 따지려는 순간, 한들이 절묘하게 끼어들었다.
“근데 네가 모은 악령석들은 계약하기 훨씬 전부터 있던 거잖아.”
한들의 말에 한주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이가윤이 모았던 악령석들도 그랬지. 다른 건 정확히 모은 시기가 어떻게 되는지 몰라도…… 희수로 만든, 그러니까 이가윤이 처음으로 얻은 악령석은 정말 옛날 거였어.”
그런데 이가윤은 그걸 바칠 수 있었잖아. 한주가 그렇게 덧붙이자 한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네. 너무 자연스러워서 몰랐는데.”
아니, 잠깐. 한주가 그걸 초반에 눈치챘다는 건…….
“그거…… 그러면 여기까지 질질 끌지 않아도 진작 해결할 수 있지 않았어요? 이 거래.”
내 질문에 한주가 씩 웃었다.
“어쨌든 좋게 해결됐잖아.”
저 표정, 분명 한주는 처음부터 뭔가 알고 있었던 거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 예지능력이 있었다.
“한주 씨!”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아 외치자 한주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왠지 감이 그랬거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끌어야 좋은 결말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잠자코 있었어. 그리고 그렇지 않을까 생각만 한 거지, 확신도 없었고.”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굉장히 굉장히 얄미웠다.
* * *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엄청나게 억울해진다. 알고 보니 한주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 이런 결말이 될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주도 어슴푸레한 감을 믿고 있었을 뿐이지만, 그래도 좋은 결말이 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단다.
어쩐지 그렇게 아끼던 악령석이 죄다 없어져도 반응이 미적지근하더니, 불청객 귀신이나 이가윤의 공물에서 얻은 단서로 오랜 시간 각오해온 결과였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 나한테도 말해주면 어디 덧나나! 내가 얼마나 속 끓였는지 알았으면서!
한숨을 푹 내쉬고 커피를 홀짝였다. 한주가 굉장히 얄밉지만 이젠 다 지난 일이다. 어쨌든 한주의 도움을 얻어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었으니까.
좋게 생각해야지, 하며 스스로를 세뇌할 수밖에 없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한들의 의아한 목소리와 함께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느새 음료와 접시를 싹 비운 한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옛날 일을 떠올리니까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해서.”
그렇게 대답하자 한들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는지 킥킥 웃었다.
“원망해도 어쩔 수 없어. 그런 예감은 최대한 숨겨야 적중률이 높아지거든.”
“그 얘긴 들었지만…… 그래도 얄미운 건 얄미운 거야.”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었다. 그리고 컵을 내려놓고 한들에게 물었다.
“그만하고 집에 갈까?”
내 질문에 한들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서 저녁 먹어야지!”
오늘 저녁밥 뭐야? 물어오는 얼굴에 생기가 가득 넘쳤다. 나는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또 먹게?”
내 말이 마음에 안 드는 듯 한들이 삐진 표정을 지었다.
“그럼 굶어?”
그렇게 말하는 한들을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 빨리 집에 가서 밥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