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이야기의 시작 (1)
“끝났네.”
그렇게 고하는 한주의 목소리와 함께 주변 풍경의 윤곽이 살아났다. 이윽고 색채가 나타나고, 그다음으로 소리가 살아났다.
완전히 현실로 돌아왔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한들이 있었던 자리에 실제로 거목이 자라난 걸 보고 숨을 삼켰다.
악귀가 되어 가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말라 비틀어져 가던 그 모습이 아니라, 처음 솟아났을 때처럼 웅장하고 생기 있는 모습이었다.
이렇게나 거대한 나무가 모든 현실감이 살아난 뒤에도 주변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한주! 한가람!”
그 모습에 감탄할 새도 없이 씨근덕거리는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이가윤이 처절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윤의 손엔 줄기를 내린 꽃이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저건 절대로 뿌리칠 수 없을 거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뭐야, 쟤 왜 저래?”
한주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이가윤을 응시했다. 나와 한들의 거래에 끼어들면서 이가윤을 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한주는 포박당한 두 손 가운데 활짝 피어있는 꽃을 묘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다 이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저거 네가 그랬어?”
내가 그런 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받아온 물건이고 내가 이가윤 쪽에 떨어뜨렸으니 내 탓이긴 했다.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나는 잠시 멈칫하고 곧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그런 셈이죠.”
내 모호한 대답에 정확한 내막은 몰라도 대충 상황이 보인 듯 한주가 흠, 소리를 내며 흰 국화를 응시했다.
“저렇게 재수 없는 꽃을 어디서 구했대.”
한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귀신들의 장에 참여했다가 저승사자한테 받아온 물건이라고 실토하기가 좀 그랬다.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다행히 한주는 모호한 내 반응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주는 나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걸 그만두고 이가윤의 앞으로 다가갔다.
“너 그러다 진짜 죽겠네. 정말로 위험해 보이는데.”
한주가 쪼그리고 앉아 이가윤과 눈을 맞추며…… 라고 해도,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눈이 맞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 한주도 나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있겠지. 저 뻥 뚫린 얼굴이 섬뜩해 차마 다가가지 못하는 나와 달리, 한주는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당장 이거 풀어.”
가윤은 자신의 앞에 앉은 한주를 향해 위협하듯 낮은 목소리를 냈다. 바로 반응하지 않고 천천히 눈을 깜빡인 한주가 픽 웃고는 대답했다.
“난 처음 보는 거라서, 푸는 법 모르겠는데?”
한주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말을 이었다.
“마침 잘됐네. 다들 영능력 범죄의 처벌에 대해 재고하는 분위기거든. 물론 네 이름도 많이 나오고 있어. 그것도 풀고 널 어떻게 할지도 정할 겸, 같이 협회로 가볼까?”
이가윤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가윤이 독기 어린 눈빛으로 한주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빨리 이거 풀라고! 너희 둘 다 죽여버릴 거야!”
이가윤이 악에 받쳐 외쳤다. 한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이가윤의 뻥 뚫린 얼굴을 응시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한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가윤. 다 끝났어.”
이가윤은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이가윤이 참지 못한 듯 손을 바닥에 내리치며 소리쳤다.
“죽어버려! 죽어버리라고! 당장 이거 풀란 말이야!”
“나는 푸는 법 모른다니까.”
한주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가윤은 그런 한주를 무시하고 씩씩거리며 말했다.
“이한주, 한가람……. 죽여버릴 거야.”
한주는 말없이 이가윤을 쳐다봤다. 그리고 곧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가윤은 한주의 움직임에도 아직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따라 움직이기는커녕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조용한 눈빛으로 제 언니를 내려다보던 한주가 이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이 안 통하네.”
한주의 차분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살짝 한주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상태가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요.”
분노에 떨고 있긴 했지만, 격렬한 감정 때문에 눈이 멀어진 건 아닌 것 같다. 상태가 확실히 이상하다. 한주와 가윤의 대화는 마치 벽에 대고 일방적으로 말하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화가 나고 흥분했다지만, 이렇게까지 대화가 안 될 수가 있나? 이렇게 생각하는 지금도 이가윤은 분노에 차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나와 한주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마치 눈과 귀가 먼 사람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
“이 꽃 때문인가?”
한주가 흰 국화를 보며 말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그 공간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거나, 환생궤도를 빼앗긴 충격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 말에 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가능성이 있지만, 정확히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어쩌면 전부일 수도 있고.
나와 한주가 이렇게 대화하는 동안에도 이가윤은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쳐대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잠시 말없이 이가윤을 내려다보던 한주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말을 돌리려는 것 같다. 이제 이가윤을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 듯했다.
한주의 그런 반응에…… 이가윤과의 악연이 정말 끝나버렸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거의 일 년에 걸쳐왔던 싸움이 끝난 거란 걸.
내가 묘한 감회에 젖어있는 사이 한주가 침착하게 말했다.
“박세훈은 어떻게 된 걸까?”
그 말에 퍼뜩 놀라 집 쪽을 쳐다봤다. 한주의 말대로 세훈의 상황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가윤과 한참 대치하고 있을 때 결계가 깨져버렸는데…… 그게 일부러였는지 힘에 부쳤기 때문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일부러 그런 거였다면 배신을 염두에 두고 대비해야 한다. 배신이 아니었다고 한대도 이가윤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마찰을 각오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쯤이면 나와볼 만도 한데 지금까지 나오지 않는 건, 의도적으로 숨어있거나 쓰러졌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가서 확인해야 할까? 여기서 주구장창 기다릴 수도 없다는 생각에 집으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어?”
나도 모르게 의문이 담긴 소리를 내뱉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소리소리를 지르던 이가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정말 말 그대로 한순간에.
“없어졌네.”
한주가 태평한 투로 말했다. 그 말대로, 방금까지 거기 있었을 이가윤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몸을 움찔 굳히고 곧 깨달았다. 이게 누구의 짓일지.
“박세훈 짓이에요! 순간이동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아직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다급히 한주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세훈의 능력은 결계다. 자신들의 모습을 숨길 수도 있다. 찾아보면 분명 근처에 별 그림이 있을 거다. 빨리 찾으면 놓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초조한 나와 달리 한주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쉽지 않을걸.”
한주가 그렇게 말하고는 주변을 설렁설렁 둘러봤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잖아요!”
느긋한 한주의 반응에 반박하듯 말했다. 한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가윤을 가로챘잖아. 단단히 각오했을 거야. 우리가 이러는 동안 준비도 철저하게 했겠지.”
한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일단 별 그림을 찾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한주 말대로 결계의 단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이제는 결계를 찾더라도 저 멀리 도망친 뒤라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한주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협회로 끌고 가서 뭐라도 좋으니까 결론을 내고 싶었는데…… 이래서야 힘들겠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별로 아쉽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렇게 될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제 이가윤을 어떻게 찾아야 하죠…….”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대답을 바라고 하는 질문이 아니라 일종의 푸념 같은 것이었다. 잠시 조용한 눈길로 먼 곳을 쳐다보던 한주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사실, 협회로 데려간다 해도 의미는 없었을 거야.”
한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일에 이제껏 소극적으로 대처해오던 사람들이다. 이제 와서 영능력 범죄 대처 방안을 찾으려고 해도 하루아침에 찾아질 리 없다.
세훈이라면 어영부영 시간만 흐르는 동안 충분히 이가윤을 데리고 도망칠 수 있을 거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그런 장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그래도 이대로면 찜찜해 중얼거리듯 내뱉자 한주가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엔…… 네 눈에도 보이는 것 같던데. 아니,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겠지. 이가윤의 얼굴 말이야.”
한주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가만히 지켜본 한주가 계속 말했다.
“오래 못 살 거야. 협회에 데려간다고 해도, 다들 한마디씩 하는 사이에 죽어버렸겠지. 거기에서 죽었으면 더 난감해졌을걸.”
“…….”
“여론이라는 건 쉽게 변하는 거니까.”
그 말에 한주가 이가윤이 사라지고 난 뒤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이유를 깨달았다. 만약 협회에서 처벌을 기다리다 죽어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이가윤이 말도 안 되는 동정론을 샀을 수도 있다. 과잉진압을 했다고 사람들이 나와 한주를 손가락질했을 수도 있다.
“그 꽃을 풀 수 있다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협회에 그거 풀 수 있는 사람 없을걸. 나도 처음 보는 거였는데.”
그렇게 말하고 이 상황을 털어내듯 기지개를 켠 한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화도 제대로 통하지 않게 되고, 신과의 거래가 무효화됐을 뿐만 아니라 환생궤도도 빼앗겼어. 협회에서는 절대 못 내릴 처벌을 이가윤은 이미 치렀어. 악령석이 남은 게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곧 죽을 테고. 한주가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한주의 표정을 살폈다. 오랜 시간 감정이 틀어졌다지만, 그래도 가족이었다. 한주는 어쩐지 지금 이 상황이 시원하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도 어쩐지 기분이 미묘해져 중얼거렸다.
“그 악령석도 안 남았어요. 다 깨져서 재가 되어버렸거든요.”
내 말에 한주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렇군.”
그렇게 말하고 한주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생각에 잠겼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지만, 그 꽃은 결국 내가 한 거다. 그날, 저승에서 잡아당기지 못했던 인연의 끈을 뒤늦게 잡아당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둘 중 하나는 죽을 운명. 운명의 기둥을 사이에 끼고 돈 그 짓궂은 끈이 누굴 살리고 누굴 죽일 건지 결정한 것만 같았다.
“이가윤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집 상태가 궁금한데.”
한주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한들의 마른 가지 위로 쏟아져내리던 악령석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숨이 멎을 정도의 절경이었다. 그 악령석들은 모두 사라졌을까.
먼저 집으로 발길을 돌린 한주의 뒤를 따라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집은 텅텅 비어 있었다. 컬렉션 룸뿐만 아니라 지하실 역시 악령석 하나 남지 않고 비어 있었다.
“각오는 했지만, 기분은 좋지 않네.”
구석구석 확인한 한주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지금까지 모아온 소중한 컬렉션이 모두 없어진 것 치고는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좀 더 짜증을 내거나 속상해해도 이해했을 텐데.
“다시 모으면 되죠. 한주 씨라면 할 수 있잖아요.”
위로가 아니라 화를 부추기는 말이란 자각이 있었지만, 그래도 굳이 그렇게 말했다. 한주가 나를 살짝 노려보더니 말했다.
“너도 같이해야 해.”
“네, 네. 평생 고용이니까요.”
그렇게 말하곤, 애매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들도 없어졌는데, 내 능력이나 체질이 아직 그대로일까요?”
사실은 내내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을 말로 내뱉었다. 이가윤이 없어진 다음엔 정신이 없어 진지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텅 빈 집을 목격하니 슬금슬금 걱정이 올라왔다.
능력도 체질도 모두 잃으면 한주에게 내가 필요할까? 여기서 쫓겨나더라도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지만…… 그런 상황이 닥치면 굉장히 쓸쓸할 것 같았다.
한주는 대답하지 않고 눈만 깜빡였다. 그 모습에 묘한 초조감이 일었다.
겨우 한주가 입을 열었다. 살짝 인상을 쓴 채였다.
“몰라. 그건 차차 알게 되겠지. 근데 잃으면 뭐 어쩌려고? 그 핑계로 도망칠 생각하지 마.”
톡 쏘아붙이는 말에 안심했다. 한주는 이대로 연을 끊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일반인이 되었으니까, 이제 위험한 일에 끼어들지 말고 평범하게 살아.’ 같이 어쭙잖은 배려를 받았다면 기분이 더욱 침체되어버렸을 텐데. 한주가 그런 배려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괜히 투덜거리며 말했다.
“도망칠 생각이었던 거 아니거든요. 누가 한주 씨 아니랄까봐, 생각하는 것 하곤. 왜 그렇게 배배 꼬였어요?”
그렇게 대꾸하고 곧 머릿속에 스친 의문을 다시 내뱉었다.
“그런데 한들의 힘은 어떻게 된 걸까요? 그냥 버릴 수는 없다고 했잖아요.”
“비슷한 건 된다고 했지.”
그렇게 말하는 한주도 나와 마찬가지로 한들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비슷한 게 도대체 뭘 말하는 걸까요?”
한주 역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난들 아나.”
허리에 손을 얹고 작게 한숨을 내쉰 한주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이렇게 많이 빼앗아갔으니까 뭐가 됐든 잘 해결된 거겠지. 이제 신경 끄고 우린 우리 일을 하면 돼.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날도 오겠지.”
한주가 그렇게 말해 여전히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 볼일 없는 듯 지하실을 나가는 한주의 뒤를 따랐다. 복도를 걷는데 이 넓은 집이 오늘따라 굉장히 쓸쓸하고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정말 한들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악령석들도 알게 모르게 각자 존재감을 뽐내며 이 집을 채우고 있었을까. 그게 없어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이제는 생각해도 의미 없는 일이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굉장히 심란해서 당분간 이 기분을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갈 거면 인사라도 제대로 해주고 가지.”
괜히 투덜거리자 앞서 걷던 한주가 반응했다.
“한들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네. 솔직히 지금껏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한 건데……. 이렇게 흐지부지 헤어져버리니까 왠지…….”
입을 꾹 다물었다. 곧 한숨과 함께 다시 말을 내뱉었다.
“얄미워 죽겠어요.”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옆을 지나치던 문 안쪽에서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온 건.
움찔 몸을 굳히고 돌아봤다. 노크 소리가 들려온 건, 이제는 텅 빈 한주의 컬렉션 룸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는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한들……?”
그러자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