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악귀 (5)
이가윤은 흰 국화를 떨어뜨리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유리 공예품은 딱 붙은 듯 이가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이가윤이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흉흉한 기운에서 저 꽃이 나의 짓이란 걸 확신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까맣게 뻥 뚫린 얼굴이 섬뜩해 조금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이가윤이 내뿜는 기운이 한층 더 흉포해졌다.
이가윤이 내게 다가오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이가윤이 자지러질 듯 외치며 몸을 떨었다. 반투명한 흰 국화 아래로 생겨난 줄기가 점점 자라나며 이가윤의 팔을 얽매었다. 마치 수갑처럼. 그 팔을 억세게 죄고 있었다.
그 표정이 겁에 질렸는지 아니면 분노에 물들었는지 나로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가윤이 아까보다 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줄기가 이가윤의 팔을 더 세게 조이는 게 눈에 보였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한가람!”
이가윤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소멸해버린 악령석들도, 갑자기 손에 달라붙은 억센 줄기도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이거 풀어!”
찢어질 듯 날카로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멈추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이거 풀라고!”
그 악에 받친 외침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푸는 법 몰라.”
그렇게 대답했지만, 안다고 해도 풀어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이가윤이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
이가윤이 씹어뱉듯 외치며 또다시 나와 힘겨루기를 할 생각인 듯 힘을 방출했다. 나도 이를 악물고 그에 대항하려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가윤이 힘을 방출하자마자 그 폭발적인 기운이 바로 사그라들었다. 마치 무언가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기운을 빼앗긴 충격에 이가윤이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넘어져버렸다.
순간 무리하게 힘을 써댄 것에 대한 반동인가 싶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순간 이가윤의 손 위에서 만개한 유리공예 국화가 그 몸집을 한층 더 불렸다.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저 하얀 국화는 악령석으로도 모자라서 이가윤의 몸에 기생하며 그 힘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저 반짝이는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끝도 없는 탐욕스러움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악!”
이가윤도 꽃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갈 거라는 걸 깨달은 듯, 필사적으로 묶인 손을 바닥에 내리쳤다.
바닥의 거친 표면과 드문드문 떨어진 자갈에 줄기도 이가윤의 피부도 상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비참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 손이 피범벅이 되었지만, 표면이 까진 줄기는 엄청난 재생력을 자랑하며 금방 원상 복구되었다. 그 회복력조차도 이가윤의 기운을 빨아들인 결과인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는, 왜 꽃이 피어난 순간 이가윤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것인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저 꽃은 그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이제 이가윤을 크게 경계할 필요가 없다. 저 유리공예 꽃이 이가윤의 모든 것을 잡아먹을 테니까.
그 저승사자…….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를 거라더니. 이게 좋은 일이냐고 따지고 싶었다.
도움이 되긴 했지만, 굉장히 굉장히 기분 나빴다. 이런 식으로 끔찍하고 잔인하게 이기고 싶었던 게 아닌데.
그래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한숨을 내쉬고 한들을 쳐다봤다. 이가윤의 악령석이 모두 망가졌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이제 한들에게 남은 시간은 없고, 공물도 없다.
즉, 거래는 물 건너갔다.
이가윤의 악령석을 받기 싫다고 했던 게, 정말 한들이 내게 건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 악령석이 한들의 소원을 이뤄줄 수 없을 것이란 것만은 확신했다.
그럼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어떡하는 게 좋을까.
“한들아.”
망연한 감정을 그대로 담아 그 이름을 불렀다. 회색으로 바래 멈춰버린 공간에서는 가윤의 악에 받친 외침만이 처절하게 울리고 있었다.
한들은 내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한들에게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이제 어떡하면 좋겠냐고……. 설령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해도 대화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있잖아, 한들아. 아까 그건 네가 말을 건 거였어? 아니면 그냥 내 망상이었어?”
무엇이라도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한들의 의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참회하듯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해. 정말로 진심으로 네 소원 이뤄주고 싶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에 한주가 말한 대로 한들을 성불시켜줄 걸 그랬다.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보다 좋은 결말이 났을 텐데. 당장은 가슴 아파도 지금쯤 털어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어떡하지, 한들아.”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멈췄다. 한숨을 내쉬고 어렵게 입을 뗐다.
“널 성불 시키는 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까?”
내 손으로 직접 너를 보내줘야만 하는 걸까? 내게 그럴 힘이 있을까? 내가 그럴 수 있을까?
“한들아.”
조용한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부른 순간이었다. 한들이 대답하듯 나무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응답한 건. 그 순간 다른 모든 소리들이 사라졌다.
귓가를 어지럽히던 이가윤의 비명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그 귀가 멍해질 만큼 조용한 공간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울렸다.
“한가람.”
꿈속 같은 데서가 아니라 오랜만에 현실에서 듣는 한들의 목소리였다.
이제 회색으로 바래버린 풍경조차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둘만 남겨졌지만, 그래도 이곳은 영락없는 현실이었다.
한들의 목소리는 딱히 화를 내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저 평소처럼 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어제도 봤고 오늘도 봤고 내일도 볼 친한 친구를 부르듯 평탄한 목소리였다.
“한들?”
얼떨떨한 기분에 그 이름을 부르자, 한들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응.”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평소와 같은 분위기에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지금 이건 한들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한들은 지금 마지막 이성을 끌어모아 나와 대화하고 있는 거라고.
그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든 한들에게 나의 뜻을 전하고 싶어 입을 열었다.
“거래를 방해해서 미안해. 그래도 역시 네게 저런 공물을 바치게 할 수는 없었어.”
내 말에 한들이 작게 웃은 것 같았다. 말라비틀어진 나무의 모습이라 그 얼굴을 확인할 수도 없고,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웃은 것 같았다.
“나와 거래하겠어?”
한들이 그렇게 물었다. 나는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하는 채로 망연히 한들을 올려다봤다. 한들이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뻔히 알 텐데.
“한들아.”
난감함을 가득 담아 그 이름을 불러도 한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게 한 번 더 물었다.
“나랑 거래할 거야?”
대답하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약속을 지키고 싶었는데. 한들도 나도 원하는 대답을 돌려주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속상하고 답답했다.
“나랑 거래하고 싶지 않아?”
한들이 그렇게 물어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거래하고 싶어. 네가 네 소원을 이루도록 돕고 싶어.”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나는 거래의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는걸.
“그럼 나랑 거래하지 않을래?”
한들의 반복되는 질문에 자포자기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거래가 성사될 리가 없다. 말뿐인 거래로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밖에.
어쩌면 한들은 거래라는 명목 아래 나를 놓아주는 대신 자신을 성불시켜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 나는 다른 퇴로가 없으니 그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잠자코 고개를 숙인 채 이어질 한들의 말을 기다렸다. 한동안 조용하던 한들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사람으로 환생하고 싶어. 그래서 네 소원의 대가로 이가윤의 환생궤도를 가지고 갈 거야.”
그 말에 고개를 들어 한들을 올려다봤다. 애당초 그럴 계획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면서 이제는 물 건너가 버린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제 와서는 꿈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린 계약의 내용을 한들은 계속 내뱉었다.
“그래서 넌 뭘 원하는데?”
한들의 장단에 맞춰 나도 줄곧 생각하고 있던 것을 이야기했다.
“아무도 신이 될 수 없게 해줘. 네 힘을 그냥 여기에 버려두고 갔으면 좋겠어.”
함부로 큰 힘을 원했다가는 어떤 화가 닥칠지 모른다. 게다가 나는 가족들과 친구들과 사람답게 어울려 사는 이 삶이 좋다.
그러니 감당할 이 없는 그런 큰 힘, 이곳에 버려두고 한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내 말에 한들의 비쩍 마른 가지가 살랑거렸다. 이번엔 정말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한들이 그렇게 말하며 재미있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하긴 내가 이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한들은 이미 보이지 않게 된 상태였으니까.
악귀가 되어가는 자신을 억누르는 데에만 급급했겠지.
한들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한들을 보채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힘을 그냥 버릴 수는 없어.”
한들이 그렇게 말했지만, 부정적인 내용이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저런 말투는 다른 방법이 있을 때 쓰는 것이니까.
하긴, 무엇이 되었든 이제 와서는 다 부질없는데.
한들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비슷하게는 할 수 있어.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야.”
시간이 좀 걸린다, 라……. 과연 꿈같은 이야기였다. 지금 우리에겐 그럴 여유가 없는데.
“그렇구나.”
그렇게 대답하고는 눈을 감았다.
점점 작별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어떻게 끝이 나더라도 지금 내 의지로 내 손으로 끝을 맺고 싶었다. 가슴 아프더라도.
한들이 말을 이었다.
“대신 악령석이 필요해. 그것도 아주 많은 악령석이.”
“…….”
대답하고 싶은데 대답할 수 없었다. 자꾸만 미래의 얘기를 꺼내는 한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우리는 이제 이 자리에서 멈춰서야 할지도 모르는데.
“나에게 악령석을 바치겠어?”
한들의 질문에 입술을 달싹인 순간이었다.
“그래. 바칠게.”
이곳에 있을 리 없던 엉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한주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찢고 당당하게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주겠다고. 악령석.”
한주가 그렇게 말하며 한들을 올려다봤다.
나는 갑작스럽게 한주가 들어온 것도 한주의 발언도 따라갈 수 없어 멍하니 되물었다.
“바치겠다뇨. 어떻게요? 나는 악령석을 다 못 모았어요.”
내 말에 한주가 무슨 소리 하냐는 표정으로 날 응시했다. 그 표정이 하도 당당해서 순간적으로 내가 공물을 다 모았는데 착각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주는 빠른 걸음으로 내 근처까지 다가와 말했다.
“넌 몰라도 난 많아. 그걸로 거래하면 되잖아.”
그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한주는 악령석 수집가니까 당연히 많이 가지고 있겠지만, 이건 나와 한들의 문제였다.
한주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공물로 바칠 수는 없다.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한주가 씩 웃고는 말했다.
“내 거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그 말에 이끌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망설이는 듯 목소리를 흐리자 한주가 날 보며 말했다.
“왜? 될지도 모르잖아. 뭐든 시도해봐야 하는 상황 아니야?”
날 빤히 쳐다보는 그 눈동자에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자, 한주가 내게서 눈을 돌려 다시 한들을 올려다봤다.
“바칠게. 악령석. 그러니까 네 힘은 여기 두고 가.”
한주의 말에 잠자코 나와 한주의 대화를 지켜보던 한들이 대답했다.
“힘을 그냥 두고 가는 건 안 된다니까. 비슷한 건 돼도.”
한들의 말에 한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그거지 뭐.”
태평한 한주의 말에 한들 역시 태평하게 대답했다.
“완전 다르거든.”
“완전 다른 건 비슷하다고 안 하거든.”
지지 않고 한들의 반박에 또 반박한 한주가 씩 웃었다.
“아무튼 이쪽 소원은 그거니까, 가지고 가. 내 악령석.”
그 말에 한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인 한들이 어렵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전부 가져가버릴지도 모르는데? 너한텐 소중한 거잖아.”
그 말에 한주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는 대답했다.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여기서 네가 악귀가 되어버리면, 이길 자신이 없거든. 집에 있는 악령석을 써서 이긴다고 해도 후환이 걱정되고.”
한주의 솔직한 대답에 한들의 가지들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럼 받아갈게.”
그 말에 나는 한들의 모든 질문들이, 그리고 한주와 한들이 나눈 대화가, 마음의 위로를 위한 거짓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거래가 성사되었다.
한 번 눈을 깜빡이자, 익숙한 공간에 도달해 있었다. 눈앞에는 커다란 철문이 그 웅장함을 뽐내며 떡 버티고 있었다.
십 분의 일쯤 잠금이 풀린 문. 그 문 앞에 서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까지 곁에 있던 한들도 한주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새까만 어둠뿐이다. 평소대로 이 공간에 오롯이 혼자 서서 문을 마주하고 있었다.
철컥.
쇠가 부딪치는 소리에 다시 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달라진 모습에 눈을 부릅떴다.
“와…….”
놀란 와중에도 탄성이 터졌다. 온통 새까만 공간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색채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햇빛을 가득 머금은 스테인드글라스 같기도 했고,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 같기도 했다. 뭐가 됐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철문의 잠금은 어느새 모두 해제되어 있었다. 각자 찬란한 빛을 뽐내는 악령석들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여기가 비현실 속이란 걸 알면서도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다.
팅, 티이잉, 팅, 팅, 팅그르르.
요란한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다시 한들과 한주와 함께 있었던 그 공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주의 집에 고이 모셔져 있었을 악령석들이 비처럼 하늘에서 내리고 있었다. 잎이 다 떨어져 볼품없어진 한들의 가지를 찬란한 색채를 띤 악령석들이 새로 수놓고 있었다.
숨막히게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공물은 이걸로 다 받았어.”
한들의 소년답게 천진한 목소리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나와 한주에게 그렇게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