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악귀 (2)
“악령석이 많은 곳이래요.”
한주가 늦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오자마자 오늘 꿈에서 한들을 보았고, 힌트를 받았다고 자초지종을 모두 전했다. 나른하게 하품을 한 한주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럼 함수화네잖아. 거기 말고는 또 없을 텐데.”
설마 여기는 아닐 테고. 악령석이 많은 곳이라면 손에 꼽을 정도다. 그 정도로 좁은 업계니까. 혹시 수집가의 집에 숨어있나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곧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저주 걸린 물건을 영능력자 사이에 푼 범인이라는 정도면 몰라도…… 사람을 악령석으로 만드는 취미를 가진 여자라는 소문이 나버렸다. 목숨 걸고 이가윤을 받아줄 수집가가 있을 리가 없다.
세훈도 가윤을 숨겨줄 만한 수집가는 모르는지 이렇게 말했다.
“그 힌트라면 이한주 씨나 함수화 씨 댁밖에 없을 것 같네요.”
역시. 어쩐지 그런 티를 풀풀 풍기더니 수화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머리 한구석에서 전화를 받지 않던 수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티가 너무 많이 나지 않았어요?”
이 타이밍에 절묘하게 연락을 피하다니. 굉장히 수상한 짓이다. 설마 수화가 그렇게 허술하진 않을 것 같았다. 진심으로 숨길 생각이 있었다면 연락은 그대로 하면서 시치미를 떼지 않았을까.
한주도 그 점이 이상했는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뒤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생각보다 너무 당황해서 티를 냈거나…… 일부러 그랬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렇겠죠.”
고개를 끄덕이고 한주의 말에 동의했다. 당연히 그 둘 중 하나겠지. 다시 입을 다문 한주가 곧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말을 이었다.
“일부러 그랬다면, 이유가 뭘까? 함정이 있어서? 아니면 함정이 있는 척 우리가 다가가지 못하게 하려고?”
글쎄…… 나야 모르지. 그래도 만약 함정이 있어서 그런 거라면…….
“수화 씨가 이가윤 쪽으로 완전히 돌아선 걸까요?”
내 질문에 한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함정을 파고 우리를 기다리는 거라면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단순히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는 거면 몰라도, 함정을 파놓은 거라면 우리가 본격적으로 위험에 처하게 된다. 수화가 정말로 그런 상황을 유도했다면, 배신당했다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한주가 세훈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근데 내가 보기엔 어느 한쪽 편만 들지는 않을 것 같은데…….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세훈은 이가윤의 일행이었으니 이가윤과 있을 때의 수화를 더 잘 파악하고 있을 거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주의 질문을 받은 세훈이 수화에 대해 생각하는 듯 고개를 들어 천장만 바라보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함수화 씨가 이한주 씨를 완전히 배신하면서 가윤 님께 붙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도 그럴 사람은 아니에요.”
세훈도 어김없이 한주와 같은 견해를 보였다. 나는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역시 함정이 있는 척 우리가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걸까요?”
내 말에 한주가 어깨를 으쓱이고 대답했다.
“아마도?”
그런 거라면 좋을 텐데. 수화랑 적대시하는 상황이 오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냥 한주의 말을 듣고 애초부터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아무튼, 가윤 님을 찾으려면 함수화 씨를 찾아가야 한다는 건 거의 확정된 사항이 맞는 거죠?”
세훈이 그렇게 말해 한주가 그 말을 받아 덧붙였다.
“만약 수화가 아니라고 해도 일단 확인해 볼 가치는 있어.”
세훈이 흠, 소리를 내며 한주를 응시했다.
“그런데 함수화 씨 댁이 어디인지는 아세요? 저는 잘 몰라서. 찾아가 본 적은 없거든요.”
세훈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한주가 대답했다.
“예전에 한 번 찾아가 본 적이 있긴 한데, 기억 안 나. 그리고 최근에 이사했다는 것 같던데. 주소는 못 들었어. 지금 물어봐도 말해줄 것 같지는 않네.”
한주와 세훈의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문득 든 생각에 아!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왜? 너 뭐 알아?”
한주가 그렇게 물어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네. 생각해보니 얼마 전에 수화 씨 부탁받고 이삿짐 정리해주러 찾아간 적 있어요.”
내 말에 한주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화가 너한테 도와달라고 했다고? 별일이네.”
한주의 그런 반응에 조금 고민하다 대답했다.
“한주 씨랑 이가윤이 정말 맞붙기로 한 건지…… 궁금해하시더라고요.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굳이 날 불러서 확인할 정도로.”
내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주는 조금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제삼자의 참견이 달갑지 않은 듯했다.
내가 보기엔…… 한주도 이가윤하고 갈등을 빚는 이 상황이 별로 반갑지 않아 그런 오지랖에 더 거부감을 느끼는 듯했다.
“어쨌든 함수화 씨 댁이 어디인지 아신다는 거네요. 다행이잖아요. 어쩔 거예요? 당장 찾아갈 거예요?”
세훈이 분위기를 자르고 화제를 돌렸다.
이가윤이 상처를 입은 상태니 숨어있다면 지금도 집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만약 확인하겠답시고 어중간하게 연락하면 우리가 지금부터 찾아갈 거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럼 의미가 없다.
괜히 시간 끌지 말고 지금 당장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해 입을 열었다.
“저는 당장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함정이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요.”
내 말에 한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의심하면 끝도 없을걸. 네 말은 무작정 찾아가서 집을 비우는 것도, 가만히 기다리는 것도 위험하다는 소리잖아. 그래, 나랑 너랑 갈라져서 누구는 남고 누구는 가기로 한다고 치자.”
그렇게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문 한주가 여전히 앉아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건 안 위험할 것 같니? 누군가는 혼자서 이가윤이랑 맞서야 한다는 건데. 내가 집에 남으면 만일의 사태에 거래를 막고 끼어들 수 없고, 너 혼자 집에 남으면 이가윤하고 박세훈 두 명을 혼자 상대해야 할 가능성도 있어.”
한주의 말에 세훈이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너무해. 대놓고 배신자 취급하시네.”
“배신자잖아.”
한주의 단호한 대답에 세훈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죠. 그래도 정말로 배신할 생각 없는데.”
한주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난 지금부터 수화네 집으로 갈 거야. 넌 어떡할지 지금 여기서 정해.”
나는 가만히 한주를 올려다 봤다. 한주는 더 말하지 않고 얌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말했던 대로 어떤 선택을 하든 위험하긴 마찬가지니, 가면 가는 대로 남으면 남는 대로 내 결정에 토를 달지 않고 들어주겠다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내려 땅을 노려봤다. 잠시 고민에 젖어들었다. 한주의 말대로 어떤 선택을 하든 나름의 페널티를 감수해야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한주를 따라 수화의 집으로 가고 싶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편이 안심되니까. 하지만…… 지금은 한들을 우선해야만 했다.
나와 한주 둘 다 집을 비워 한들을 방치하는 것보다는, 위험에 처하더라도 내가 집에 남는 것이 안전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우리가 가더라도 세훈이 집에 남을 테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한주의 말대로 이가윤이 이곳에 왔을 때 이쪽을 배신하고 바로 이가윤의 쪽에 붙을 수도 있는 거고.
하지만 한주만 보냈을 때, 만약 이가윤이 수화의 집에 있어 둘이 마주치게 된다면?
그 상황에서 협상은 어렵다. 두 사람은 지금 서로 감정이 크게 상해 있는 상황이고, 이가윤과의 협상은 같은 계약자인 내가 해야만 한다.
“어쩔 거야?”
내가 입을 열지 않자 한주가 대답을 재촉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한주를 쳐다봤다.
전화로…… 하는 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이가윤이 말하기를 거부할 우려가 크다. 전화만으로 움직여주지도 않을 것 같고. 표정이나 제스처 없이 억양만으로 판단해야 하니 속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 그때 내가 수화네 집으로 이동한다면? 그 순간 이가윤이 한주를 뿌리치고 집으로 향할 수도 있다. 결국 지금 이 딜레마가 되풀이될 뿐이다.
그럼 차라리 페널티를 감수하더라도…….
나는 긴 고민 끝에 마음을 다잡고 한주에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저는 집에 남을게요. 한주 씨 혼자 수화 씨 댁으로 가세요.”
그렇게 말하고 내가 생각한 걸 전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한주가 별로 내켜 하지 않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든 한주가 끈질기게 수화에게 전화를 걸어댔다. 수화는 이전의 발언처럼 한주의 연락을 쉽사리 받아주지 않았으나, 한주가 포기하지 않자 결국 전화를 받았다.
─ 무슨 일이야? 전화를 이렇게 해대고. 뭐 급한 일이라도 있니?
수화기 너머에서 수화의 황당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한주답지 않은 행동에 살짝 당황한 기색도 엿보였다.
한주는 그런 수화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지금부터 너희 집에 갈 거야. 얼마 안 걸릴 거니까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한주의 말에 수화가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놀란 게 역력히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 뭐? 지금부터 올 거라니……?
“말 그대로야. 지금 당장 출발할 거야. 그러니까 준비하고 기다려.”
한주의 뻔뻔한 대답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수화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 너 무슨 일 있니……? 우리 집이 어디인지는 알아?
“무슨 일이 있는지는 얼굴 보면서 듣고. 집 주소는 알아. 가람이한테 들었거든. 너 이삿짐 푸는 거 도와달라고 했다며.”
─ 아…….
수화가 낮게 탄성을 내뱉고 이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 한주야, 있잖아…… 지금은 진짜 안 돼. 나 일하는 중이거든. 집에 클라이언트가 와계셔서…….
수화의 난감한 듯한 목소리에 한주가 픽 웃고는 말했다.
“클라이언트 누구? 이가윤?”
─ 이한주.
한주의 말에 수화가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를 냈지만, 한주는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가윤이 있는 거면 걱정하지 마. 너도 알다시피 나 걔 동생이잖아. 가족이랑 친구 사이인데 뭐가 문제야. 거기다 나도 동업자잖아.”
문제라면 당연히 많았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을 만큼. 하지만 한주는 뻔뻔했다. 그런 한주의 태도에 황당한 기색을 내비친 수화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세상천지에 너희같이 사이 나쁜 자매가 어디 있다고. 그리고 가윤 언니 아니야. 왜 우리 집에서 가윤 언니를 찾아?
만만치 않게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내뱉는 수화에 한주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그럼 그 클라이언트가 누구인데? 말해봐.”
─ 그건 개인정보니까…….
한주의 말에 수화가 바로 반박했으나 한주는 더 듣지 않고 말을 끊었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인데. 너한테 악령석 사는 김에 나랑도 거래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전해. 특별히 희귀한 걸 내놓아주겠다고.”
수화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한주가 말을 이었다.
“내가 알기론 수집가 중에 나랑 거래할 기회를 마다할 사람은 없는데 말이지. 왜 망설여? 서로 윈윈이잖아.”
한주의 말에 수화가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주가 수화의 집으로 떠나고 나와 세훈 둘만 남았다. 명상이라도 하는 건지 얌전히 눈을 감고 있던 세훈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괜찮겠어요?”
그 질문에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뭐가요?”
내 대답에 세훈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내가 배신하면 어쩌려고요? 위험해질 텐데.”
그렇게 말하는 세훈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세훈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안에 숨은 초조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한들을 버려두고 가는 것보단 나아요.”
그렇게 대답하고 시선을 돌렸다.
한주가 대놓고 지금부터 집으로 쳐들어갈 거라고 선포했다. 그 통화에서 수화 집에 가윤이 있다는 것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가윤이 없었다면 원점으로 돌아왔겠지만, 있다는 게 확실해진 이상 앞으로 돌아갈 상황이 뚜렷하게 읽혔다.
숨은 장소를 읽힌 이상 그곳에 남아있긴 어려울 거다.
그렇다고 수화와 가윤이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할 수도 없다. 차현과 마를 포함한 영능력자들이 지금 이가윤을 추적하고 있으니까.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해 영능력자들의 레이더에 걸리면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그렇게 되면 이가윤의 행방을 확인하면서 움직일 수 있게 될 테니까.
그야말로 궁지에 몰린 쥐 상태다.
그렇다면…… 차라리 일을 빨리 끝내버리려고 하겠지. 내가 이가윤이었다면 이런 상황 속에서 바로 이곳으로 오는 것을 택했을 거다. 그리고 그건 이가윤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가윤을 선전포고로 몰아낸 한주는 수화의 집에서 이가윤이 떠났다는 걸 확인하면 바로 이곳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나는 이곳에서 이가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다가 협상부터 시도하고.
세훈의 배신이 걸리긴 하지만…… 먼저 나서서 이가윤이 신이 될 수 없게 해달라고 부탁해 온 건 세훈이었다. 배신하지 않을 가능성에 조금 더 무게를 두기로 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한주가 집을 나서고부터 시간이 조금 흘러 있었다. 지금이라면 슬슬 이가윤이 이곳에 도착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세훈을 보며 말했다.
“저는 저 앞에 나가 있을 테니까요, 잘 좀 부탁드려요. 일단은 믿어볼 테니까.”
세훈의 대답은 굳이 듣지 않고 집을 나섰다. 어지간해서는 이가윤이 보일 만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근처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누군가 다가오면 보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기운을 넓게 펼쳐 다가오는 사람을 경계했다.
몇 분쯤 흘렀을까, 휴대폰이 울렸다. 꺼내들어 확인하자 한주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 샅샅이 확인했는데 여긴 없어. 혹시 모르니까 이 근처까지만 확인하고 돌아갈게.
답장을 보내려는데 그 순간 다른 사람에게서도 메시지가 도착했다. 마였다.
─ 이가윤 씨로 추정되는 사람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한가람 씨 댁으로 향하는 것 같은데 주의하세요.
예상대로 이가윤은 곧장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한주에게 마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던 순간이었다. 그 익숙한 기척이 느껴진 건.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이가윤이 나를 응시하며 곧장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누가 한주 언니 아니랄까 봐, 쳐들어오는 주제에 당당한 걸음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