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대면 (2)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지태 혼자만 신난 듯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한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둘을 잠시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회관엔 저녁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은근히 많았다. 소문을 듣고 구경하러 들른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 혼잡한 기운들 속에서 나는 희미하게 깜빡이는 기운에 집중했다.
이 근처 어딘가, 그리 가깝지만은 않은 곳에서 익숙한 기척이 옅어졌다가 짙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라고 유도하는 것만 같았다.
“여,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퇴마사이십니까?”
지태가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며 물었지만, 나도 한주도 무시했다. 여기까지 끌고 와놓고 이 취급은 조금 미안했지만, 지금은 집중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지태는 이 정도에 기죽을 성격이 아니라, 무시에도 굴하지 않고 혼자 감탄의 말을 내뱉고 있었다.
“한가람 씨?”
지태에게 이름을 불린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줄곧 읽힐 듯 말 듯 하던 기운이 확실하게 기척을 드러내서였다. 지태가 당황스러워하며 다시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무시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다녀올게요! 기다리고 계세요!”
적당히 내뱉고 자리를 떠났다. 지태가 한 번 더 내 이름을 불렀지만 무시했다. 한주는 잠깐 시선을 보냈을 뿐 가만히 있는 게, 딱히 붙잡을 생각이 없는 듯해 보였다.
사람 사이를 요령 좋게 피하며 빠른 걸음으로 기운을 따라갔다. 어느 순간 웅성거림이 저 멀리 사라지고, 순식간에 회관 밖 인기척이 드문 곳에 다다랐다.
줄곧 추적하던 기운의 정체를 눈앞에 두고서야 발걸음을 늦췄다.
강한 바람이 휙 하고 지나자 나무들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솨아아, 어딘가 마음을 어지럽히는 소리를 들으며 저 앞에 나를 등지고 선 사람을 노려봤다.
흩날리는 머리를 정리한 여자, 이가윤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한주랑 같이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가윤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비웃음이 담긴 그 질문을 무시하고 말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그러자 이가윤이 미소를 지우고 날 빤히 쳐다봤다. 그 얼굴에 서서히 지루함이 깃들었다. 이 상황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나도 아마 만만치 않은 표정으로 이가윤을 마주하고 있을 터였다. 서로에게 좋을 것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이가윤이 신이 되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욕심을 내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이 순간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을 텐데.
이가윤도 한들을 타락시키지 않고 순순히 자신의 환생궤도를 내주기로 했다면 지금의 이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을.
이런 생각을 해봤자 의미는 없다. 그걸 알면서도 막상 이가윤을 눈앞에 두자 마음이 심란해졌다.
“한들에 대한 거요?”
이가윤이 그렇게 묻고 뻔한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달리 뭐가 있겠어요.”
여기까지 행차한 것도 한들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면서.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있어도 일단은 같이 한들을 찾아야만 했다.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한들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근데 오늘은 어떻게 억울함을 토로할 생각이세요?”
이가윤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말을 돌렸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말 돌리지 마세요.”
그렇게 쏘아붙이자 이가윤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난 이 얘기 먼저 하고 싶은데요. 오늘은 이것 때문에 온 건데. 궁금하잖아요.”
그 말에 살짝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몰라요. 저는 이 사건 범인 밝히는 게 중요해서 이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니거든요.”
이가윤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리고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대로 범인으로 몰려도 상관없어요?”
“기분 나쁘고 억울하지만, 상관없어요. 지금 한들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요. 당신은요? 범인이라고 밝혀질까 봐 무섭진 않은가 봐요?”
내 말에 가윤이 미소를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무서울 게 뭐 있겠어요. 어중이떠중이 모임에 미움 받아봤자죠. 의뢰 사무소라도 하지 않는 이상에야 손해 볼 거 없거든요. 오히려 이름 알려져서 좋은데요?”
너희는 손해를 볼지 몰라도, 자기한텐 득 될 것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하긴, 그냥 사무적인 일을 수행할 뿐인 협회에게 이가윤이 겁먹을 이유가 없긴 했다.
주소가 노출된 우리와 달리 이가윤은 모든 게 아리송한 상태고.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가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론 가람 씨는 공물을 거의 못 모았을 텐데요.”
화제를 다시 한들에 대한 쪽으로 바꾸려는 듯했다. 나는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구 할을 모은 이가윤에 비해서 나는 이제 일 할을 모은 참이었다. 즉, 내가 이가윤보다 한참 모자란 상황이다. 그래도 중요한 건, 나와 이가윤을 합치면 거래를 위한 공물을 채울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당신의 것과 합쳐서 거래를 시도하고 싶어요.”
내 말에 이가윤이 피식 웃었다. 한쪽이 구십 퍼센트를 담당하는 건 누가 봐도 부당한 거래였다.
“내가 거기에 응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가윤의 질문 아닌 질문에 나는 모르는 척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단호한 대답에 이가윤이 재미없다는 듯 정색했다. 나는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이가윤의 눈을 마주했다. 이가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누가 봐도 내가 더 유리한 상황이잖아요. 난 한 명만 더 있으면 되는데.”
그 말에 나도 지지 않고 맞섰다.
“아뇨. 한 명이든 열 명이든 그딴 건 아무 상관없어요. 내가 다 막을 거니까. 공물을 다 준비하지 못하면 많이 모아봤자 소용없을 텐데요.”
같이 망하기 싫으면 협조하라는 협박이었다. 한 번 더 바람이 불었다. 침묵 속에 나무들이 요란하게 울었다.
“어쩔 생각인데요? 나는 물러설 생각 없어요. 신의 힘은 내가 가질 거예요.”
이가윤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한발 물려줄 테니 네 생각은 뭔지 들어나 보자는 표정이었다.
“내가 당신한테 모든 권리를 넘긴다고 해도 안 믿을 거 알아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가윤은 잠자코 내 말을 기다렸다. 감정을 가지고 노는 능력자 앞에서 허술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잠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누가 환생궤도를 바치고 누가 신의 힘을 가질지는 정하지 않도록 하죠. 그 자리에서 결정하게.”
진심이었다. 내가 이가윤의 환생궤도를 바쳐 누구도 신의 힘을 가질 수 없게 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이상, 협상의 여지는 없다. 이가윤 역시 물러설 마음이 없는 듯하고.
이가윤이 내 생각을 가늠하는 듯 살피는 표정으로 날 응시했다. 곧 그 얼굴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죠.”
그게 이가윤이 내놓은 답이었다.
자리로 돌아가도 한주는 별말이 없었다. 하지만 슬쩍 고개를 들어 날 봤을 때 인상을 잠시 찌푸린 거로 봐서, 내가 누구를 만나고 왔는지는 눈치챈 것 같았다.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지태가 궁금한 듯 물어오기에,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잠깐 앞에 나갔다 왔어요. 바람 쐬러.”
그러자 지태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같이 가지 그러셨습니까. 아까 정신없이 들어오느라 밖을 잘 못 살펴봤습니다.”
“끝나고 구경하세요.”
지태의 말에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한주를 쳐다봤다. 내 시선을 받은 한주가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갈까?”
한주가 그렇게 말하며 앞장섰다. 나도 군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지태가 뒤에서 허둥지둥 짐을 챙겨 뒤따라왔다.
회의실 문을 열자 이미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사람이 모인 곳이다 보니 문밖에서 담소 소리가 들려왔었는데, 그것이 순식간에 뚝 멎었다.
가운데가 뚫린 타원형 테이블에 앉은 사람 중에 아는 얼굴이 몇 있었다. 지태도 발견했는지 반가워하며 인사했다.
“장마 씨 아닙니까! 잘 지내셨습니까!”
“아, 안녕하세요…….”
마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쳐다봤다. 이 사람이 왜 왔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받고 어깨를 으쓱하며 한주에게 시선을 보냈다. 한주가 데려온 거라는 메시지가 전해졌는지, 마가 묘한 표정으로 한주를 봤다.
“당신은 저기 가서 앉아요.”
한주가 지태를 보며 말했다. 마침 차현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지태를 떼어놓은 한주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상석을 향했다.
나는 앉기 전에 한 번 더 회의실을 살펴봤다. 차현과 마를 포함해 몇몇 눈에 익은 얼굴이 보이긴 했지만, 수화는 없었다. 내심 안도하며 한주의 뒤를 따랐다.
테이블 양쪽 가장자리에 의자가 두 개씩 놓인 게, 우리 일행과 이가윤의 자리를 마련해 놓은 것 같았다. 나도 얌전히 한주의 옆에 앉은 순간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안 그래도 조용하던 회의실에 잡음조차 사라진 것 같았다. 이가윤이 새침한 얼굴로 회의실 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헉…….”
지태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가윤을 포함해 일부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지태에게 쏠렸다.
순간 이가윤과 지태의 눈이 마주친 듯했으나, 이가윤이 바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지태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가윤의 얼굴엔 자신을 보고 과하게 반응하는 지태에 대한 의아함만이 담겨 있었다.
지태는 세훈과 한동안 룸메이트로 지낸 사람이니 알아볼 수도 있었을 텐데.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일반인은 기억할 가치도 없다는 것일까. 확실히 그때 지태는 경계 대상이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지태는 이가윤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몸담았던 종교의 간부였으니 당연했다.
이가윤이 우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분위기가 단숨에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은근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 회의실 내부에서, 왼편 가운데에 앉은 여자가 헛기침하며 일어났다.
회의실 내부 사람들의 시선이 여자에게로 쏠렸다. 정장을 입은 여자는 협회 측 사람인 듯 에이포 용지 한 뭉텅이를 손에 든 채 입을 열었다.
“시간도 됐고, 사람도 다 모였으니 이번 사건에 대한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네!”
대답이 필요 없는 말에 한 사람만 우렁차게 대답했다. 뭐 하는 거야, 그런 표정을 지으며 지태를 쳐다봤다. 경직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게 자리도 어색하지만, 이가윤이 굉장히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잠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던 여자가 곧 표정을 갈무리하고 명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사건은 저주가 걸린 물건을 사용하여 영능력자에게 무차별 테러를 가한 사건입니다.”
그 말에 지태가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그 뜨거운 시선에 나는, 그러고 보니 모찌파이인지 뭔지 때 지태가 시끄러웠던 걸 떠올리며 미지근한 표정을 지었다.
저 표정을 보아하니 왠지 지태는 자신이 그 사건의 증인으로 불려왔다고 굳게 믿는 듯했다. 그 일로 증언 받을 건 딱히 없는데.
“범인은 젊은 남녀일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졌으며, 이 과정에서 이한주 님과 한가람 님, 그리고 이가윤 님과 박세훈 님이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이상이 이 자리가 있기까지의 사건 개요입니다.”
여자의 사무적인 말에 지태가 식겁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한주 씨도 한가람 씨도! 그리고 가윤 님도 박세훈 씨도 그런 흉악한 사건의 범인일 리 없습니다!”
쩌렁쩌렁한 지태의 목소리에 회의실 테이블에 앉은 대부분의 사람이 짜증이 난 듯 표정을 찌푸렸다. 몇몇 사람만이 다른 표정을 지었다.
“가윤 님?”
차현이 의아한 듯 지태의 말을 되풀이했다. 지태한테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가윤도 저 문외한이 왜 이 자리에 앉아있는지 깨달은 표정으로 지태를 응시했다.
“아, 과연.”
가윤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 방에 들어와 처음으로 한주를 응시했다. 한주도 피하지 않고 이가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두 자매가 무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는 와중에 진행자가 지태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정숙하고 자리에 앉아주세요.”
그 말에 지태가 어정쩡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서로를 노려보는 가윤과 한주가 의아한 듯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지태를 잠시 불쌍한 것 보듯 쳐다봤다. 한주의 의도를 완벽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분위기가 다소 진정되자 진행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공적인 자리에서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부디 논리적으로 오해를 풀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행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가윤이 입을 열었다.
“이런다고 무슨 의미가 있니?”
그 눈은 한주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한주 역시 부질없는 짓이란 걸 알고 있는 표정이었으나 물러서지는 않겠다는 분위기를 풍기며 대답했다.
“적어도 내 명예는 지킬 수 있겠지.”
“언제부터 그런 걸 생각했다고 그러니.”
이가윤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지 말고 진행 좀 제대로 합시다.”
자리에 앉은 영능력자 중 누군가가 볼멘소리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 말에 한주가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이가윤은 민망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동생하고 오랜만에 만난 거라.”
“동생?”
이가윤의 말에 누군가 의아한 듯 반문했다. 서로가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만 알지, 자매라는 사실까진 알지 못한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가윤이 난감한 듯 슬픈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해할 일이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오게 돼서 너무 속상하네요.”
사람들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가윤의 언행도 그렇지만 알게 모르게 풀어놓은 감정을 조종하는 능력에 감화된 것 같았다.
분위기가 이가윤 쪽으로 돌기 시작해 걱정스레 한주를 쳐다봤다. 가만히 이가윤이 하는 꼴을 지켜보던 한주가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 살인자예요.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게 특기죠.”
그러니까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한주가 단호하게 못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