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스트 호더-72화 (72/84)

[72] 대면 (1)

─ 어때? 나랑 거래하지 않을래요?

동전이 요란하게 떨어지는 소리에 정신이 들어 눈을 뜨자, 가윤이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는 게 보였다. 얌전해보이는 얼굴에 탐욕이 깃들어 있는 게 빤히 보였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요즘과 같이 날이 미지근하던 때였다. 이따금 강한 바람이 불어오는 늦여름. 하늘하늘 흔들리는 가윤의 긴 머리가 꼭 검은 거미줄처럼 느껴졌다.

침착하게, 참을성 있게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가 눈앞에서 상냥한 얼굴로 웃었다.

─ 무엇을 원해요? 내가 다 들어줄게요. 전부 말씀하세요.

내가 원하는 것? 원하는 것을 말해달라고?

처음이었다. 누군가 나의 소원을 물어온 건. 그 누가 내게 저런 말을 하겠는가. 나는 소원을 들어주는 신인데. 사람들은 늘 자신의 염원을 떠넘겨오기만 했었는데.

─ 어서 말해봐요. 망설이지 말고.

마음이 술렁였다. 눈앞의 여자의 목소리엔 마음을 간질이는 힘이 담겨 있었다. 친절한 척 나약한 부분을 단단히 옭아매었다.

들어선 안 될 목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었다.

─ 사람이…… 되고 싶어.

안쪽에서 그런 목소리가 울렸다. 내 안에서 울렸지만,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위화감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꼈다. 한들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듣는다고 생각하면서 문득 정신을 차렸다.

저 멀리 가윤의 뒤로 언젠가 봤던 얼굴이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의식하며 빠르게 지나가는 게 눈에 보였다. 한주와 일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만났던 의뢰인의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늦여름쯤이랬지. 의뢰인이 한들 앞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을 봤다고 했던 게.

그럼 이건 작년 이맘때의 일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겠구나. 한들과 가윤의 대화를 들으면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 ……사람이 되게 해줄 테니, 환생궤도를 빼앗을 사람을 점지해 놓으세요.

가윤의 악랄한 말에 반발감을 느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 좋아.

그렇게 대답하는 한들에게 섭섭함을 느껴도, 이때 한들은 나를 알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숨을 내쉬면 어느새 주변의 풍경이 변해 있었다. 나는 한들의 안에 있지 않았고, 과거의 풍경이 눈앞에서 뿌옇게 사그라들었다.

남은 것은 완연한 어둠이었다. 하지만 무섭지 않았다. 한들의 꿈을 꿀 때면 늘 보았던 풍경이니까.

“미안해.”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턴가 옆에 있던 한들이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들답지 않게 상당히 기가 죽은 표정에, 아까 느꼈던 섭섭함도 잊고 웃어보였다.

“뭐가?”

모른척 시치미를 떼며 묻자, 한들이 기운 없는 얼굴을 하면서도 가볍게 미소지었다.

“저 말에 응하는 게 아니었는데.”

한들이 그렇게 말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대화가 끊기자 무서울 정도의 침묵이 가라앉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어둠 속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게 어쩐지 견디기 어려웠다. 혼자일 땐 오히려 괜찮았는데.

“그러게.”

괜찮다고 위로하려다 한 번 입을 다물고 이내 가만히 한들의 말을 수긍했다.

간절한 바람을 안은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이가윤의 손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이가윤의 방식이 잘못이니 한들에겐 잘못이 없다고도 할 수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을 희생시키는 방법에 동의했으니까. 그리고 스스로 사람을 해치려고 했으니까.

더 기가 죽은 듯한 한들을 조용히 지켜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잖아. 이가윤도 너도 더 반성해야 해. ……그리고 나도.”

한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올려다봤다.

“넌 왜?”

오랜만에 보는 순진무구한 얼굴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부드럽게 웃으며 한들에게 마음의 응어리를 고백했다.

“이가윤도 이가윤이 희생시킨 사람들도 전부 이용할 생각이거든.”

그렇게 털어놓아도 한들의 얼굴에는 비난의 기색이 깃들지 않았다. 다만 소년 같이 높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어올 뿐이었다.

“진심이야?”

“응.”

단호한 내 대답에 한들이 킥킥 웃었다.

“내가 사람 하나 다 버려놨네.”

장난스러운 한들의 얼굴 한구석에 숨길 수 없는 씁쓸함이 녹아들어 있었다.

* * *

조금 후련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오랜만에 만난 한들은 함께 있을 때와 같이 변함이 없어 보였다. 답지 않은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그건 상황이 상황이니까.

상황이 급한 것에 반비례해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래서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약간의 경건함마저 느끼며 옷을 갈아입고, 씻었다.

그래서 아침을 먹기 위해 주방으로 향하자마자 한껏 굳은 얼굴의 세훈과 마주쳐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전부 다.

“한들의 상태가 급변했어요. 이젠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야 해요.”

그 말에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저도 알아요.”

한들이 내 꿈에 등장한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던 거다. 불길하고 또 불길한 사태를 알리는 꿈이었다.

그 대화로부터 한참 후에 일어난 한주가 멍한 얼굴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가윤이랑 연락이 닿았대. 날 잡을 테니까 대면할 준비하라는데.”

졸린 듯한 목소리가 전하는 말에 사과를 깎던 손을 잠시 멈추고 물었다.

“협회에서 찾은 거래요 아니면 직접 나온 거래요?”

한주의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늦은 아침에 흐르는 느슨한 분위기에 조금씩 긴장감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한주가 바로 대답하지 않아 한동안 사락사락, 날붙이가 과육을 갈라내는 미세한 소리만이 울렸다. 이내 한주가 가볍게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몰라. 그런 얘기는 안 하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는 뒤늦게 현실을 자각한 듯 이제야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고동소리를 느끼며 대답했다.

“스스로 나온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느꼈듯 가윤도 이제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아챘을 테니까.

여유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까딱하면 한들을 포함한 우리 세 사람 모두 답이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버릴 테니까.

“그래?”

내 말에 한주는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내가 깎아놓은 사과를 주워먹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그마저의 관심도 없는 모양이다.

어쩌면 거기까지 신경쓰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문득 든 생각에 한주를 슬쩍 쳐다봤다. 야금야금 사과를 먹던 한주가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마주쳐왔다.

“왜?”

그렇게 묻는 한주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보이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물었다.

“한주 씨는 괜찮아요?”

아무리 가윤이 답이 없는 쓰레기고 밉다고 해도 피가 이어진 가족인데. 그럴 리는 없지만, 연주가 이가윤처럼 행동했다면 나는 한주처럼 독하게 연주를 잘라내지는 못했을 거다.

친남매가 아니라 사촌인데도 그런데, 자매는 오죽할까.

내 질문의 의도를 단숨에 눈치챈 듯 한주가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내가 걔 환생까지 일일히 신경써줘야 해?”

그것도 문제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흉악한 사건에서 자매끼리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거나 다름없지 않나. 한주가 원한 일이 아니고,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보기 흉한 집안싸움인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한주 씨가 나를 발견해서 고용하지만 않았어도…… 한주 씨는 이가윤이랑 이렇게까지 엮이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지금까지 그랬듯 혼자서 유유히 일을 해결하면서 악령석을 모아왔겠지. 이가윤의 계획 따윈 모르는 채로. 마음 편히.

나를 살피듯 쳐다보던 한주가 소파에 몸을 편하게 기대며 말했다.

“내 말이. 나도 요즘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야.”

그렇게 말하며 한주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가 입을 열지 않자, 한주가 말을 이었다.

“넌 나랑 못 만났으면 지금쯤 죽어 있었을까?”

가벼운 말투였지만 내용만은 무거웠다. 그 말에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가윤이 마지막 악령석을 지금껏 모으지 못했던 것은 나와 한주가 손을 잡고 지금껏 방해해왔기 때문이다. 거의 우연이었지만.

그러니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하게 한주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환생궤도를 빼앗겼을 거다. 아니면 한들의 손에 이미 죽어 있었거나.

“그러게요. 천운이었네요. 저한테는.”

솔직하게 대답하자 한주가 내게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나도 운이 좋았어.”

그 말에 의아한 얼굴로 한주를 쳐다봤다. 한주가 픽 웃으며 말했다.

“너랑 만나지 않았다면 속편하게 지내다 이가윤한테 한방에 당했겠지. 그러니까 나도 운이 좋았어. 이렇게 대비할 수 있게 됐잖아.”

한주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확실히, 그렇네요.”

작게 한숨을 내쉰 한주가 들고있는 포크를 빙빙 돌리며 말했다.

“범인이 누구라는 소문에 대한 건 내가 알아서 할 건데, 넌 잘할 수 있겠어?”

이가윤을 잘 등쳐먹을 수 있겠냐고, 한주가 완곡히 질문했다. 한들이 내게 물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씩씩한 내 대답에 잠시 입을 다문 한주가 이내 입꼬리를 씩, 올려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쟁이.”

그 말에 힘없이 웃었다. 한주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한주가 말했다.

“마음 단단히 먹어.”

고개를 끄덕이자 한주는 더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주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가윤의 환생궤도를 한들에게 바치겠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음 속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하나 그 존재들을 이용하는 게 정말 괜찮은 건지,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이가윤을 이용해도 되는 건지.

대의를 위한 거라고 해도 납득이 되지 않을 텐데, 한들 한 사람만을 위한 일이니까 양심이 더 아팠다.

한편으로는 악령석이 된 사람들도 나쁜 짓을 했고 이미 죽은 존재들이니 괜찮지 않을까, 이가윤도 이걸로 죗값을 치르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눈을 감았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답이 나오지 않는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았다. 하기사 인생사 하나하나에 선악을 구분짓고 정답을 찾으려 했다면 이미 성인군자나 현자가 되어 있었겠지.

이게 나쁜 일일지 몰라도,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다. 지금은 그 마음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다녀오세요.”

그렇게 인사하는 세훈을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쳐다봤다. 본인도 착잡한 듯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평하게 지냈지만 늘 따랐던 가윤을 실시간으로 배신하고 있는 거다. 이 일은 어떤 식으로든 곧 결론이 나게 될 테고.

“딴마음 먹지 말고 얌전히 집 지키고 있어.”

한주가 명령하는 투로 말했다. 그 말에 세훈이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가자.”

한주가 날 보며 말해 고개를 끄덕이고 그 뒤를 따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이가윤과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면하는 날이 다가왔다. 약속된 시간은 오후 일곱 시. 약속 장소는 차로 가면 한 시간쯤 걸리는 곳에 있다.

조수석에 올라타며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시간은 네 시 삼십 분쯤. 약속 장소로 향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다. 혹시 모르니 삼십 분 정도는 일찍 가도 좋겠지만, 한 시간 반이나 일찍 갈 필요는 없다.

한주가 이럴 때 성급하게 행동한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오늘은 정도가 좀 심했다.

“혹시 어디 들를 데 있어요?”

그게 아니고서는 지금 이 시간에 나가자고 날 닦달할 리가 없다. 안전벨트를 하며 묻자 한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응. 데려갈 사람이 있어.”

그 말에 한주 자매와 관련된 사람들을 떠올렸다.

“동훈 씨?”

묻자, 한주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걔를 왜 데려가?”

“아니, 동훈 씨는 한주 씨랑 이가윤 둘 다 아는 사이고, 우리 편…… 이라고 하면 좀 오글거리지만 아무튼 우리 쪽에 호의적인 사람이니까요.”

내 말에 한주가 흥,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없긴 해도 두둔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또 모르는 거니까…… 나는 살짝 고민하며 다음 후보를 입에 담았다.

“그럼 수화 씨요?”

한주가 내게 슬쩍 시선을 던졌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걘 또 왜?”

그렇겠지. 수화는 한주랑 이가윤이 부딪치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는 듯했고.

그럼 누구지? 내가 모르는 사람일까? 그럴 가능성도 있긴 했다. 내가 한주와 알게 된 건 채 일 년이 되지 않았으니까.

궁금하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고민하고 있자, 한주가 정적을 깨고 말을 걸어왔다.

“더 있잖아. 나도 알고 이가윤도 아는 사람.”

그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장마 씨랑 김차현 씨요? 두 분은 데리러 가지 않아도 온다는 것 같던데요. 설마 송남헌 씨는 아닐 테고.”

그밖에 또 누가 있었던가? 동업자 중에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장은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진짜 누구한테 가는 건데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조르는 투로 묻자, 한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돌려줬어.”

뭐를?

또 뜬금없는 소리다.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한주를 빤히 응시하자, 한주가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캠코더 말이야.”

그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한 얼굴을 하다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 사람은 왜? 그런 표정으로 한주를 쳐다봐도, 한주는 이쪽으로 시선을 돌려주지 않았다.

“한가람 씨!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씩씩하게 말하는 지태를 빤히 쳐다보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내 대답에 지태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이한주 씨께 저 때문에 곤혹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서요! 꼭 만회하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지태의 얼굴을 쳐다보다 한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주는 그렇지? 더 있었지? 하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확실히…… 내가 언급했던 사람들 외에 또 있었다. 한주와 가윤을 둘 다 알고 있는 사람이. 두 사람이 자매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만.

지태의 얼굴을 보아하니, 지금부터 가게 될 곳에 이가윤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괜찮을지 굉장히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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