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배신자 (2)
마가 알려준 장소에 도착해 간판을 올려다봤다. 세계적인 햄버거 체인점. 가게 밖에도 가게 안에도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둘러보자 먼저 날 발견한 세훈이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마는 그 맞은편에 앉아 이쪽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친구끼리 놀러 나온 것 같은 광경이었다.
“허…….”
태평하고 일상적인 분위기에 헛웃음을 터뜨리고 가까이 다가가자 세훈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식사 전이죠? 앉으세요. 한가람 씨 거는 제가 적당히 주문했어요.”
그 말을 무시하고 슬쩍 마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마가 어깨를 움츠리더니 말했다.
“배…… 배고프니까 밥이라도 간단히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세훈이 끼어들었다.
“괜찮잖아요. 저 만나서 길거리에서 얘기할 생각인 것도 아니셨을 테고요.”
나는 세훈을 떨떠름하게 쳐다보다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세훈은 기죽은 기색은커녕 편히 앉아 감자튀김을 주워 먹었다.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던데 먹으면서 하자 싶어 햄버거 포장을 뜯었다.
“장마 씨도 드세요.”
햄버거 포장을 앞에 두고 머뭇거리는 마에게 권하고 세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박세훈 씨.”
세훈이 고개를 들어 날 응시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이가윤 씨를 만나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세훈이 말없이 날 살펴보더니 곧 피식 웃으며 말했다.
“유감이지만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이유도 묻지 않고 거절당할 줄은 몰랐는데. 세훈은 다시 내게서 관심을 돌려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태도였다. 평소엔 신경 쓰는 척이라도 할 텐데. 오늘은 의식적으로 신경 쓰지 않는 척하는 것 같았다. 내가 자기를 빤히 응시하는데도 무시하는 걸 보면.
“왜요?”
내가 포기하지 않고 묻자 세훈 역시 날 빤히 응시하며 되물었다.
“그러는 한가람 씨는 왜요? 가윤 님을 만나서 뭘 하시려고.”
그렇게 묻지만 딱히 의도를 살피려는 듯한 분위기는 풍기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유치한 신경전을 하는 기분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진 않고 그 주위만 빙빙 맴돌게 될 것 같은 예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세훈은 웃고는 있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빠 보였다. 오늘은 괜히 싸우지 말고 좋게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는데. 약간 피로감을 느끼며 세훈의 질문에 대답했다.
“협상하고 싶어서요. 시간이 없다는 걸 그쪽도 알 텐데요.”
“무슨 시간? 모르겠는데요. 전 오늘 한가해서.”
거봐. 다 알면서 모른 척 말을 빙빙 돌리려 한다. 나는 짜증 난 티를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말장난하기 싫어요. 한들과 관련해서 나한테도 이가윤한테도 시간이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내 말에 세훈이 픽 웃더니 말했다.
“아까는 이가윤 씨라고 그래도 신경은 써서 부르더니 이젠 그냥 이가윤이네요.”
“내가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잖아요. 괜히 말 돌리지 마세요.”
짜증스럽게 대답하자 세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하긴, 상관없죠.”
“이가윤 지금 어디 있어요? 만나서 한들에 대해 상의하고 싶은데요.”
세훈이 픽 웃었다.
“상의라.”
그렇게 말한 세훈이 날 빤히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가윤 님을 믿을 수는 있겠어요? 가윤 님은 한가람 씨의 어딜 믿어야 하고요?”
나 역시 지지 않고 말했다.
“만나서 얘기를 해야 믿고 안 믿고도 할 수 있겠죠. 지금 어디 있어요?”
그러자 세훈이 뭔가를 작게 중얼거렸다. 뭔가 말했다는 건 알겠는데 가게 안이 소란스러워 들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들려주려고 한 말도 아닌 것 같았고.
세훈이 뭔가 짜증이 났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왜 저래?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대답을 재촉하려는데 세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만나서 뭘 상의하시려고요?”
그렇게 말하며 세훈은 날 곧게 쳐다봤다. 탐색하는 듯한 시선에 내심 드디어 이야기가 진전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거래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요. 저도 이가윤도 아직 공물을 채 준비하지 못했으니까요.”
“한가람 씨가 바쁜 와중에 가윤 님이 끝마쳤을 수도 있잖아요.”
세훈의 대답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뇨, 아직 아홉 개 그대로예요.”
내 단호한 대답에 세훈이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확신하시는데요?”
나는 감자튀김을 하나 주워 괜히 손장난하며 대답했다.
“다 모았으면 당신들이 진작 뭔가를 했겠죠. 그리고 나오기 전에 한들을 살펴봤는데, 한들은 평소 그대로였어요. 공물이 다 준비되었다면 한들도 그걸 느꼈을 텐데, 반응이 없었어요.”
내 말에 눈치를 보며 얌전히 햄버거를 먹던 마가 움찔 몸을 떨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마를 무시하고 세훈을 응시했다.
세훈은 그런 마의 반응을 보지 못 한 건지, 보고도 무시하는 건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긴, 그렇군요.”
혹시나 해서 시험 삼아 한 말이었는데, 세훈이 간단히 걸려들었다. 세훈은 지금 한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됐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이걸 전하면 좀 더 쉽게 이가윤과 접촉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세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시고 싶은 건데요? 한들과의 거래요.”
그 말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모은 공물과 이가윤이 모은 공물을 합쳐 거래할 거예요. 그게 한들을 하루빨리 환생시키는 방법이니까.”
내 말에 세훈이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거래 내용은요? 누가 신이 될 건데요?”
작게 심호흡했다. 터무니없는 대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가게 내부가 원체 소란스러워 이쪽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세훈은 계속 날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가윤이 신이 돼도 좋아요. 단, 환생궤도도 이가윤 것을 바쳐야 해요.”
세훈이 픽 웃더니 즉답했다.
“거짓말.”
“진심이에요.”
나도 지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세훈이 여전히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윤 님이 신이 되면 당신들이 위험해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 보죠?”
그렇게 말하며 세훈이 날 살폈다.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해봤어요. 하지만 난 신이 되고 싶지 않으니 어쩔 수 없죠. 공물을 이쪽에서 나눠주는 조건으로 우리한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할 거예요.”
“가윤 님이 그걸 지켜줄 거라고 믿어요?”
“아뇨.”
내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뜬 세훈이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그런데 왜 그런 소릴 하세요?”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묻는 세훈에 어깨를 으쓱였다.
“이판사판이에요. 당장 다가올 확실한 위험보다는 닥쳐올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위험이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한가람 씨 당신은 괜찮을지 몰라도 이한주 씨는 위험해질걸요. 가윤 님은 이한주 씨를 아주 싫어하시니까. 그래도 그러자고 할 생각이에요?”
“네.”
내 대답에 세훈이 날 탐색하는 듯 쳐다봤다. 나는 세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가윤이 한주 씨를 싫어하는 건 열등감 때문이었잖아요. 신이 된 마당에 더 싫어할 이유도 남지 않은 것 아닌가요? 살려둬야 우월감도 느낄 수 있을 테고요.”
“글쎄요.”
그렇게 말한 세훈이 여전히 의심하는 얼굴로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가윤 님을 배신하고 이한주 씨에게 신의 힘을 주려는 건 아닌가요?”
“한주 씨는 신이 되는 게 싫다고 했어요.”
세훈의 의심에 기분 나쁜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대답했다. 세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한주 씨가 거짓말한 것일 수도 있죠.”
“아뇨. 한주 씨는 진심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날 살피던 세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런 거예요.”
유치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지지 않고 덧붙였다. 세훈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런데 한가람 씨가 그렇다고 해도 이한주 씨에겐 다른 꿍꿍이가 있을 수 있잖아요.”
“꿍꿍이라뇨?”
왠지 벌써 기분이 나빠 눈살을 찌푸리고 묻자 세훈이 특유의 웃는 얼굴로 말했다.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한들을 악령석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든가 하면요?”
“……무슨 뜻이에요? 그럴 리도 없고 한주 씨에겐 그럴 힘도 없어요.”
거의 노려보듯 쳐다보며 말하자 세훈이 과장스럽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혹시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이한주 씨는 유명한 악령석 수집가고, 한가람 씨도 그것 때문에 곁에 두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따지면 한들은 최상의 재료잖아요.”
“아뇨!”
거의 윽박지르듯 소리쳤다. 주변의 소음이 멎고 사람들이 이쪽을 돌아보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말했다.
“그럴 리 없어요. 그럴 힘도 없고요.”
내 강한 부정에도 세훈은 기죽지 않고 약 올리듯 살살 내 신경을 건들며 말했다.
“글쎄요. 한들은 지금 이한주 씨의 집에 묶여있는 상태 아닌가요? 가벼운 봉인으로 잡아 놓고 집 안의 악령석의 힘을 빌린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뭐라고 말해도 아닌 건 아닌 거예요.”
단단히 못 박았다. 하지만 세훈도 끈질겼다.
“속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 이한주 씨는 가윤 님 동생이잖아요. 자매인데, 닮은 구석이 있을 수도 있죠.”
세훈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런 생각 안 해요. 한주 씨를 믿어요.”
그렇게 말한 순간, 와장창! 무언가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났다. 마도 들었는지 옆에서 흠칫 몸을 굳히는 게 느껴졌다.
어느새 일상의 소란이 살아난 주변에서는…… 와하하, 발랄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깨지는 소리 같은 건 인지하지 못했다는 듯이. 그렇게도 날카롭고 시끄러운 소리였는데.
얼떨떨한 기분으로 마와 시선을 맞추는데 앞에서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세훈을 쳐다보자, 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었다.
“대단하시네요.”
그렇게 말한 세훈이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그 저주에 홀린 상태에서 남을 믿는단 소리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얘기를 듣고 뒤늦게 눈치챘다. 방금 그 소리가 저주가 깨지는 소리였다는 걸. 내가 알아챘다는 걸 세훈도 알았는지 상큼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좋아요, 합격입니다.”
뜬금없는 개소리였다. 합격은 무슨 합격? 상황과 맞물리지 않는 듯한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마를 쳐다봤다. 설마 둘이 짜고 상황극 하는 건 아니지?
하지만 역시 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할 뿐이었다. 나는 퍼뜩 떠오른 생각에 물었다.
“이가윤을 만나게 해줄 건가요?”
한주를 믿어서 저주를 스스로 풀어냈으니까 이가윤을 만날 자격이 있다는 건가? 전혀 아닌 것 같지만 일단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아니요. 가윤 님을 만나게 해드릴 수는 없어요.”
역시 그런 의미의 합격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처음의 감상을 입에 담았다.
“그럼 무슨 개소리세요.”
세훈이 실실 웃으며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랑 거래하지 않으실래요?”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던 세훈이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한들을 봉인하는 데 중심적으로 작용한 방이 있다고 말씀하셨죠. 어디인가요?”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세훈을 한주의 컬렉션 룸으로 안내했다. 천천히 신중하게 방을 살피는 세훈을 뒤에서 감시하듯 쳐다보면서 살짝 한숨을 삼켰다.
‘이게 잘하는 걸까.’
세훈과의 거래를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의심이 남은 상태였다. 아니, 의심이라기보다는 찝찝함에 가까웠다.
세훈은 거래 제의를 꺼낸 데 이어,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 실은 가윤 님께 버림받았거든요.
그 말을 믿지 못하고 노골적인 의심을 담아 자신을 응시하는 나에게, 세훈은 차근차근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지태의 캠코더에 걸린 주술이 풀린 순간, 추격당할 위험성을 깨달았다고. 그리고 그걸 안 가윤이, 위험을 안고 있는 세훈을 버리고 떠났다고.
─ 당신이 없었다면 아마 버려지기까지 하진 않았을 거예요.
세훈은 그렇게 말하며 마를 쳐다봤다. 나에게도 한주에게도 세훈을 추적할 만한 기술은 없으니까. 하지만 마가 우리에게 협력하고 있으니, 위험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살짝 어깨를 움츠린 마의 등을 두드려주며 자기가 잘못해놓고 괜히 남 탓하지 말라고 노려보자, 세훈이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덕분에 차라리 잘됐어요.
그리고 세훈은 더욱더 의외인 이야기를 꺼냈다. 믿을지 말지는 내 마음이라면서. 나는 일단 그 말을 믿고, 세훈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내가 한들에 대해 사실대로 털어놓자 세훈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협력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과연.”
방을 살펴보던 세훈이 입을 열었다. 나는 계속 세훈을 응시하며 말했다.
“어떤데요?”
한주는 부재중이라 상황을 살필 수 없고, 내게는 결계를 볼 기술이 없었다. 하지만 한들은 분명히 이 집 안에 있고, 내 노크에 응답하기도 했다.
세훈이 말했다.
“이한주 씨 예상대로, 김지태 씨가 범인일 것 같네요.”
“하지만 김지태 씨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는데요.”
내 말에 세훈이 설명할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 말했다.
“결계가…… 팽팽하게 당겨진 실 같은 상태였다고 보면 돼요. 한들의 상태에 계속 변화가 생기면서 결계도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김지태 씨가 눈치 없이 난입한 거죠. 일반인이기도 하고, 김지태 씨는 특히 양의 기운이 강해서…….”
“그냥 잠깐 들어온 것만으로도 결계가 깨져버렸다고요?”
내 말에 세훈이 고개를 끄덕이다 멈칫했다.
“아니요.”
그 대답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왜 이랬다 저랬다예요. 그럼 결계가 어떻게 된 건데요?”
세훈이 방을 한 번 더 둘러보더니 말했다.
“결계가 깨질 뻔했는데…… 깨지지 않도록 강제적으로 붙잡았어요. 한들이.”
“그럼 지금…….”
“결계가 억지로 유지되는 중이에요. 그 긴장감을 유지하느라 한들도 정신이 없는 상태고. 확실히 한가람 씨 말대로 시간이 없네요. 이러면 언제 결계가 깨질지 모르겠어요.”
그 말을 듣자 어쩐지 초조해졌다. 한들에게 고맙고, 미안하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방 안에 침묵이 가라앉은 순간이었다.
삑, 삑삑삑.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나고, 곧 문의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훈도 들었는지 현관 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누가 왔나 본데요. 올 사람이 있어요?”
그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동훈인가 싶었지만, 동훈이 올 거면 내게 미리 연락을 해줬을 거다.
그럼 혹시……? 이 집의 비밀번호를 알고 말도 없이 열고 들어올 단 한 사람을 떠올리며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뒤에서 세훈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복도를 천천히 걷고 모퉁이를 돌자 이내 신발장에서 구두를 벗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주 씨.”
내가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든 한주가 내 뒤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녀석이 왜 거기 있어?”
세훈은 집주인의 그런 반응에도 기죽은 기색 없이 반가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와,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어요? 그간 별 탈은 없으셨고요?”
탈이 있어서 잘 지내지 못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뻔뻔하지 그지없는 안부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