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배신자 (1)
“한주 씨.”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주를 부르자 조용한 대답이 돌아왔다.
─ 응.
그리고 나도 한주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조금씩 마음이 차분해지는 게 느껴졌다. 혼란이 조금 걷히고 겨우 목소리를 냈다.
“저 뭔가 이상해요.”
한심한 목소리였다. 한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조용히 들어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무거워서 떨어지지 않았던 입술이 어느샌가 술술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요즘 뭔가 난폭해진 것 같고…… 거기에 죄책감도 안 느끼게 됐고. 장마 씨랑 김차현 씨가 연락 달라고 했는데 무시하기도 했어요. 왠지 엮이기 싫어서.”
─ 응.
“한주 씨한테도 연락 안 하고.”
한주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 그건 나도 안 했잖아. 난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했지.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습관적으로 투덜거렸다.
“아니었어요. 완전 안 좋았어요. 나한테 신경 좀 써주면 안 돼요?”
─ 나도 그럴 상황 아니었거든.
한주가 살짝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성격 어디 안 간다고 익숙한 반응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잊고 지냈던 일상이 차츰 돌아오는 감각이었다.
하지만 다음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침묵이 내렸다. 한참을 우물거리는데 한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 그리고? 끝이야?
한주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망설이던 말이 바로 나왔다.
“한들이 없어진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내 말에 전화 건너편에서 한주가 숨을 삼키는 게 느껴졌다.
─ 걔가 없어졌다고? 언제부터?
그 목소리에 멍하니 되물었다.
“몰랐어요?”
그러자 한주가 황당한 듯 대꾸했다.
─ 알았으면 내가 가만히 있었겠니?
나도 황당함에 반박했다.
“아니, 한들을 봉인한 건 한주 씨잖아요! 한들한테 뭔가 이상이 생겼으면 알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진짜 아무것도 몰랐어요?”
─ 몰라, 멍청아! 집에 걸어놓은 봉인인데 내가 그걸 어떻게 일일이 알아? 너야말로 걔 없어지는 동안 뭐 했어?
한주의 말에 억울함을 담아 변명했다.
“나도 이래저래 정신없고 바빴단 말이에요! 혼자서 의뢰도 받고 사람들한테 시달리고.”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한주도 다시 말이 없었다.
소리치느라 흥분했던 가슴을 가라앉히고 냉정히 생각해보니…… 방금까지의 대화가 꼭 집 나간 아들을 둔 부모의 싸움 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김이 빠졌다.
한주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언제부터 없었는데?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확실한 건 메탈릭 어쩌고 슬라임을 맡기 전부터 한들이 없었다는 거였다. 그때 한들이 있었다면 분명 관심을 보였을 테고…… 내가 아닌 밤중에 생쇼를 할 때도 나와봤을 터였다.
그럼 언제부터였지? 잠시 고민하던 새에, 머릿속에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스쳤다.
─ 조심해.
집을 나서던 내게 답지 않은 인사를 건넸던 날이었다. 그게 내가 본 한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기억났어요. 며칠 전에 수화 씨랑 장마 씨 그리고 김지태 씨가 집에 왔던 날이었어요. 그 날 이후로 안 보여요.”
전화 너머로 한주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 많이도 왔었네. 다 네가 부른 거야?
한주의 말에 보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부른 건 장마 씨만…….”
거기까지 말하고 그날, 수화가 집을 나선 직후 가윤을 만났던 걸 떠올렸다. 수화는 원래부터 가윤을 알고 있었던 데다가 사이도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
섬마을 저택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영광의증명에서 가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직접 봤을 텐데도.
……수화가 집에 다녀간 날, 한들이 보이지 않게 된 게 과연 우연일까?
순간 든 생각에 숨을 삼키는데 그 낌새를 눈치챈 한주가 입을 열었다.
─ 왜? 뭐 또 생각났어?
그 말에 더듬더듬 방금 든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들이 보이지 않는 게 수화 씨가 다녀간 날 이후잖아요. 사실 그날 수화 씨가 이가윤을 만나기도 했고요. 이상하지 않아요? 생각해보니 게임기 때도 수상해요. 그거 수화 씨가 장마 씨네에게 준 거라면서요.”
얌전히 내 말을 들은 한주가 음,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뒤늦게 입을 열었다.
─ 수화는 너무 믿어도 안 되지만, 너무 의심할 필요도 없어.
이해가 안 되는 말에 되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 걔는 박쥐 같은 애거든. 동물에 붙었다가 새에 붙었다가 하면서 자기 이익은 귀신같이 취하는 애라서, 한쪽을 완전히 배신하진 않아. 게임기는 좀 의심스럽지만.
그 말은, 한들을 건든 게 수화가 아닐 거라는 뜻인가? 하지만 수화가 아니면 달리 의심할 만한 사람이…… 고민하는데 한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장마랑 김지태도 왔었다며. 뭐 이상한 행동 안 했어?
이상한 행동? 그 말에 그날의 일을 읊어보며 되새겼다.
“장마 씨가 김지태 씨의 캠코더에 이상한 주술이 걸려있다는 걸 알아냈고…… 김지태 씨는…… 아!”
생각났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때 지태가 이상한 소리를 했었다. 내 목소리가 높아진 거로 눈치챘는지 한주가 대답을 재촉했다.
─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 말에 숙제 안 했다고 털어놓는 아이의 심정으로 그날의 일을 고했다.
“그…… 얘기하는 틈에 지태 씨가 집 구경한다고 방을 나서서…….”
─ 나서서?
“나중에 장식장만 있는 방은 뭐냐고 묻던데…….”
말을 흐리며 살짝 시선을 돌렸다. 눈앞에 한주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동으로 쭈구리 모드가 됐다. 한주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내 말을 되풀이했다.
─ 장식장만 있는 방…….
잠시 침묵이 가라앉았다. 이윽고 전화 저편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 그럼 그 새끼가 범인이잖아!
빽! 귀가 웅웅거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한주가 소리쳤다. 멍멍한 귀를 문지르며 이렇게 소리칠 정도면 다 나았네! 뭘, 하고 생각했다.
한주한테 단단히 혼났다. 게다가 몇 번이나 마에게 연락하겠다고 다짐해야 했다. 문제가 있고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솔직하게 도움받으라고 귀에 딱지가 얹도록 잔소리를 들었다.
그런데도 화가 나지 않았다. 요즘의 나라면 화를 내고 싸웠을 수도 있는데. 아마 상대가 한주였기 때문일 거다. 내 감정을 느끼고 진정시켜줄 수 있으니까.
거리가 멀어서 그런 건지 뭔지 패닉을 느낄 때가 돼서야 도와준 게 얄밉긴 해도, 일단 고맙긴 고마웠다. 고맙다곤 입이 찢어져도 말 안 할 거지만.
─ 하, 한가람 씨…….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장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기껏 생각해줬는데 지금까지 무시했던 것이 미안해, 나는 기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해요. 저주 때문에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렇게 말하자, 마는 순순히 나와주겠다고 말했다. 새삼스럽지만, 고마운 사람을 알게 됐다는 걸 느꼈다.
“저, 저주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종결이 되어버린 것 같은데…….”
나를 잠시 살펴보던 마가 그렇게 말했다. 아리송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마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저주가 다 완성되기 전에…… 방해를 받아서…… 음, 방해를 받으면 저주가 더 발전하지 않고 그대로 완성되어버리도록…… 수를 쓴 것 같은데…….”
마의 말을 잠시 곱씹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한 저주는 술사에게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가윤은 대놓고 내게 저주를 걸었고, 실패할 경우의 패널티도 생각해둘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러니 중간에 일이 꼬여 저주가 실패할 지경에 이르면 그 상태에서 저주가 완성되어버리도록 수를 쓴 것 같다. 정말 얄밉다.
내가 인상을 팍 찌푸리는 걸 보고 마는 내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는 걸 알았는지 말을 이었다.
“상황을 보면…… 이간질하는 종류의 저주 같은데…….”
그렇게 말한 마가 살짝 내 눈치를 봤다. 지금은 괜찮은지 살피는 것 같은 눈이었다.
애매하게 조기 완결되어버린 저주라도 여전히 내게 남아 있었다. 언제 화를 내고 돌아설지 모르는 일이다. 나도 나 자신이 불안한데 마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저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어제 한주 씨와 전화한 다음엔 많이 차분해진 것 같은데…… 사실 언제 어떻게 될지 아직 확신이 없어요.”
저주가 완성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완성되어버렸다면 한주도 손쓰기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내 눈치를 보던 마가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아마…… 한들, 님과의 계약 때문에…… 저주가 더 잘 통했던 것 같은데…… 그, 악령화 되고 있다고 말씀하셨으니까…….”
마는 거기서 입을 다물었지만 할 말이 남아 있는 눈치였다. 내 상태 때문에 평소에도 소극적이던 마가 더 몸을 사리는 게 보여, 나는 의식적으로 맞장구를 쳐줬다.
“네. 그런데요?”
“……아마 저주가…… 한들 님의 악령화를…… 더 가속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멍하니 마의 말을 되풀이했다.
“저주가 한들의 악령화를 가속했다고요?”
내가 한들의 변화에 영향을 받듯 한들도 계약자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면 확실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 가능성을 떠올리고 나는 최악의 상황 역시 떠올려냈다.
한들의 계약자는 나뿐만이 아니다. 만약 한들이 이가윤의 감정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있었다면…… 최악이다.
한들의 악령화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마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냥 제 가설이지만…… 가능성은 염두에 두시는 게……. 혹시 하, 한들 님 상태는 어때 보였어요……?”
마의 질문에 멈칫했다. 내가 입을 닫자 마가 안절부절못해하며 덧붙였다.
“대, 대답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되는…….”
그 말을 듣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니요. 실은…… 저번에 장마 씨가 김지태 씨한테 캠코더를 받아간 날이요. 그날부터 한들이 안 보여요.”
내 말에 마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지, 지, 진짜……? 어, 어, 어, 어떡하면…….”
당황해서 말을 심하게 더듬는 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해 보이며 대답했다.
“아직은 괜찮을 거예요. 왠지 느낌이 그래요. 한들의 힘도 문제없이 잘 쓸 수 있고요.”
내 말에 마가 여전히 못 미덥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그렇게 말한 마가 잠시 입을 다물고 테이블을 응시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한가람 씨에게 걸린 저주는…… 까다로운 저주예요. 저주를 걸 때도 많이 번거로웠을 거예요…….”
나는 얌전히 앉아 이어질 마의 말을 기다렸다. 마가 조금 고민하는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박세훈 씨의 주술은…… 두 번이나 깨봤고…… 공정 과정이 많은 저주는 꼬리도 길어서…… 한가람 씨가 원한다면…… 추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내가 즉답하자 마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조금쯤은 고민할 거라고 여긴 모양이다.
하지만 난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협박하든 협상하든 이가윤과 담판을 지어야만 했다.
……어떻게 할지 마음도 정했고.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해보는 수밖에 없다.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연락 드릴 테니까…… 그동안 한가람 씨는…… 한들 님을 한번 찾아보세요…….”
“네. 부탁드립니다.”
마가 돌아가고 다시 집 안에 혼자 남았다. 눈을 감고 집중도 해보고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살펴도 봤지만,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지태가 뭔가 건드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주의 컬렉션 룸에도 들어가 봤다. 천장을 올려다보자 거울에서 희미하게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안녕.”
인사를 건네자 이전에 한들에게 습격당했을 때 나를 도와줬던 파란 얼굴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안녕.’
인사를 받아준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내려 주변을 살펴봤다.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녀석을 쳐다봤다.
“있잖아. 며칠 전에 여기 덩치 큰 남자가 들어왔을 때, 혹시 뭐 건드렸어?”
녀석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역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것 같다. 지태 본인도 뭔가를 건들지는 않았다고 했었고.
하지만 지금 가장 의심되는 사람은 지태밖에 없다. 지태가 의도적으로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을 거다.
방을 한참이나 서성거리며 살펴봐도 결국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해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와 가만히 멈춰 서면 이따금 근처 도로에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집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거의 없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한들과 한주의 모습이 없는 것을 빼면 달라진 게 없는 집안이었다. 뭔가 기운이라도 달라졌으면 눈치챌 수 있을 텐데. 기운마저도 평소와 비슷했다.
아마 한들은 이 집 안에 있을 거다. 한들과 같은 거대한 기운의 덩어리가 사라졌다면 아무리 둔한 상태였어도 알아챌 수밖에 없었을 테니.
그런데도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숨은 거야, 진짜.”
작게 투덜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굳게 닫힌 컬렉션 룸의 문이 보였다. 한들이 처음 이 집에 왔던 날, 이 문을 그렇게도 두드려댔었는데.
팔을 들어 똑똑, 노크했다. 대답을 기대하고 한 건 아니었다. 그냥 문득 그날의 생각이 나서,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문의 안쪽에서 똑똑, 하고 답장이 되돌아왔다. 방금 살펴보고 나와 거울 귀신 외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는데.
벌컥 문을 열고 외쳤다.
“야, 한들!”
하지만 빈방 안에 내 목소리가 웅웅 울릴 뿐이었다. 고개를 쳐들고 위를 올려다봤다.
“네가 노크했어?”
질문하자 파란 얼굴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럼 여기 한들이 있었어?”
파란 얼굴이 눈만 깜빡였다.
“있었어?”
재차 묻자 잠시 요지부동이던 파란 얼굴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녀석이 입을 벙긋거렸다. 짧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의 입 모양을 따라하며 더듬더듬 그 내용을 읊었다.
“모…… 르…… 겠…… 어…….”
내 입으로 소리내 말하고 그 의미를 깨닫자 어깨가 축 처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안쪽에서 노크했다는 건 알아도, 모습을 보지는 못 한 걸까.
기운이 빠졌지만,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한들이 이 집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입술을 꽉 깨무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마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 박세훈 씨랑 만났습니다. 지금 대화 중입니다. 한가람 씨도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