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관점 (1)
한결 차분해진 머리로 새벽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산책하다 귀신의 장터로 끌려 들어갔고, 물물교환하다 저승사자에게 흰 국화 유리 공예품을 받았고, 지태를 만나 귀신에게서 도망쳤다.
“허어…….”
진짜 있었던 일인가? 꿈꾼 거 아닌가? 흰 국화는 어느샌가 잃어버린 듯 보이질 않고…… 늘 그렇지만 현실감이 없었다.
유일한 증거라고는 꺼놓은 휴대폰뿐이었다.
까만 화면을 빤히 응시하다 전원을 켰다. 곧 켜진 휴대폰에 그사이 쌓였던 연락들이 표시됐다.
─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전화 좀 받아 보십쇼
─ 혹시 돌아오지 못ㅎㅏ신 겁니까?!
─ ㅈㅔ가 경찬에 연락하게습니다!! ㅠㅠㅠ
등등…… 지태가 엄청나게 메시지를 보내놨다. 점점 오타가 심해지는 게, 굉장히 당황한 눈치였다. 근데 경찰에 연락한다는 건 진짜 했을까. 해봤자 미친놈 취급만 받았을 텐데.
메시지를 조금 더 넘기자, 아니나 다를까 경찰들이 자기를 상대해주지 않는다고 찡찡거리고 있었다. 지태 성격에 분명 귀신들의 시장이니 뭐니 그대로 이실직고했겠지.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일까. 한숨을 내쉬다가 퍼뜩 떠올렸다.
그런데 왜 귀신들이 지태는 사람인 걸 알아보고, 나는 못 알아봤지? 지태가 혼자 나대다가 들킨 건가? 아니면 내가 영능력자라서?
한 번 전화해서 대체 뭘 하고 다녔길래 들켰냐고 물어볼까, 생각하던 참에 다른 사람이 보낸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 장마입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문자 남깁니다. 시간 되실 때 연락 주세요.
지태한테는 나중에 연락하자. 나는 당연한 듯 지태의 순서를 뒤로 밀어버렸다.
─ 아…… 지, 지금 전화 가능하세요……?
마에게 전화를 걸자 금방 연결됐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대답했다.
“네. 무슨 일인데요?”
전화 건너편에서 잠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곧 마가 입을 열었다.
─ 김지태 씨 캠코더…… 주술을 풀어서…… 혹시 뭐 달라진 건 없나 하고…….
캠코더를 집어 드는 소리였나 보다. 지태의 캠코더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아직 달라진 건 잘 모르겠어요. 그럼 이제 그 캠코더에는 문제없는 거예요?”
─ 네…… 그런 것 같은데…… 일단 이거 돌려드리고…… 뭐 변화 생기면 연락 달라고 말씀드리려고…….
캠코더를 찾으러 가야 하나. 결국 지태한테 연락을 하긴 해야겠네. 그러고 보니 장마네 집이 어디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지태 씨께 전달해 드릴게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 아, 그…… 제가 그 동네로 갈 일이 있어서…… 한가람 씨 편한 곳에서 뵈면…….
집까지 오라고 하기에는 외진 곳이라 좀 미안하고. 나도 오래간만에 나가볼까 생각하며 말했다.
“그럼 카페에서 보죠. 제가 메시지로 주소 보내드릴 테니까 거기로 오세요.”
“야! 너 여기 오는 거 오랜만이다?”
카페 앞에 도착하자 나를 발견한 연주가 반갑게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게. 근데 너 아직도 알바 하고 있었어?”
“나 이제 커피도 완전 잘 내리거든.”
그러십니까.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졸업하면 전공이고 뭐고 바리스타 되겠다고 나설 분위기였다.
“하, 한가람 씨…….”
한참 연주와 수다를 떠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가 어색해하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셨어요. 그거예요?”
마가 든 종이봉투를 가리키며 묻자 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봉투를 내게 건넸다.
“저는 그럼 가볼 데가 있어서 이만…….”
봉투만 달랑 건네고 가려는 마를 붙잡았다.
“커피 하나 들고 가세요. 제가 사드릴게요. 얘가 커피를 그렇게 잘 내린다고 자랑하는데, 맛 좀 봐주세요.”
연주를 가리키며 말하자 연주가 빽 소리쳤다.
“야!”
“왜? 너 이제 커피 맛있게 잘한다며.”
연주에게 그렇게 대답하고 부담스러워하는 마를 붙잡았다. 아마 연주가 있어서 불편한 모양이지만, 이것저것 부탁하고 그냥 보내기도 좀 미안했다.
결국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 마와 함께 동훈의 카페에 들어섰다. 무언가에 열중하던 동훈이 나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가람 씨.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그 후로 몸은 괜찮으셨어요?”
“괜찮았어요. 한주 씨는 좀 어때요?”
동훈의 얼굴을 보자 그제야 한동안 한주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내 질문에 동훈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한주도 이젠 많이 괜찮은 것 같아요. 우리 부모님이 워낙 극성이라 푹 쉬고 있다고 하거든요.”
“그거 다행이네요.”
그렇게 대답하고 마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 드실래요?”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갑자기 떠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저주 걸린 물건을 부탁받았는데요.”
내 말에 세 사람 다 반응했다. 가장 놀란 표정을 지은 연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주? 그게 뭐야, 무섭게. 그런 걸 왜 너한테 부탁해?”
“저주 걸린 물건이 갑자기 많이 늘었다나 봐. 그래서 부탁할 수 있는 영능력자들에겐 다 부탁하고 다닌다던데.”
내 말에 이해가 됐다는 표정으로 마가 입을 열었다.
“아…… 그래서. 저, 저도 부탁받았어요…….”
“장마 씨는 이런 일이 전공이니까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야기를 듣던 동훈이 말했다.
“저도 소문은 들었어요. 영능력자들 사이에서 분위기가 흉흉해진 것 같더라고요.”
“뭐야, 갑자기 늘어났다니……. 누군가가 나쁜 마음 먹고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에요?”
연주가 나와 동훈을 보며 말했다. 굉장히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 게 괜히 말했다 싶은 마음이 살짝 들었다.
동훈이 난감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실은…… 그럴지도 몰라요.”
그 말에 마가 동의했다.
“저도…… 그, 그렇게 생각하는데…….”
두 사람은 뭔가 아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내 질문에 마가 표정을 흐리며 대답했다.
“실은…… 차현이 형한테 들은 건데…… 범인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범인의 특징까지 소문이 돌고 있다고…….”
“저도 들었어요. 젊은 남녀 두 사람이라던데요.”
동훈이 마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차현은 원래 발이 넓으니 이런저런 소문을 많이 들을 거다. 동훈이 아는 것은 좀 의외였지만.
그건 그렇고 젊은 남녀 두 사람이라면…… 대충 예상이 갔다. 지긋지긋한 젊은 남녀 두 사람을 알고 있으니까.
마와 동훈이 말한 소문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가윤과 세훈이 범인일 가능성은 컸다. 이번엔 뭘 노리고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가윤의 이름을 꺼내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연주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을지도 모르는 사건을 굳이 다시 언급하고 싶진 않았다.
보니 동훈도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에게 커피를 하나 들려 보내고 나도 마찬가지로 커피를 테이크아웃 한 뒤 다시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한주의 집은 외진 곳에 있어 어느 정도 거리를 벗어나자 인적이 확 줄어들었다. 마음이 다소 차분해져, 걸으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직까지 이따금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지태를 확인하자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걱정해서 저러는 건데 메시지 하나는 남겨줄걸 그랬다 싶었다.
전화를…… 하는 건 그만두자. 흥분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칠 걸 생각하니 벌써 정신 사나웠다.
메시지 답장으로 나는 괜찮고 캠코더도 돌아왔으니 받으러 오라는 문자를 입력하던 때였다.
“너로군.”
노인 특유의 낮고 쉰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낯선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풍채가 좋은 할머니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어디로 보나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시선에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허!”
내 질문에 코웃음을 친 할머니가 사나운 눈매로 나를 노려봤다. 진한 화장하며 화려한 옷차림하며 한 성격 하시는 분 같았다.
“한가람인가 뭔가 하는 꼬마야.”
한가람이면 한가람이지 한가람인가 뭔가는 또 뭐야.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라면 표정 관리를 하겠지만 초면에 무례한 사람 앞에선 그것도 시원찮았다.
“불쌍하니 충고해주마. 이한주하고 엮이지 마. 어른 말씀이니 새겨들어.”
“……혹시 그거 말하러 여기까지 찾아오신 거예요?”
여긴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한주의 집을 찾아오려는 게 아니면 굳이 올 필요가 없다.
살짝 황당함을 담은 물음에 할머니가 아니꼽다는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그래. 어른된 도리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겠더구나. 네가 영능력자로서 활약하고 싶다면 이한주 곁을 떠나는 게 좋을 게다. 결국 네 발목만 잡게 될 거야.”
“……아, 네.”
굳이 한주 편들면서 모르는 어른이랑 싸우고 싶지도 않고. 어른 잔소리에 질린 사춘기 청소년마냥 설렁설렁 대답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련히 돌아가겠지.
“무슨 대답이 그래? 어른이 충고해줬으면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해야 할 것 아냐.”
끈질긴 어른이었다.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계약 기간이 남아서요.”
같이 평생 일하자고 한 거에 날름 지장 찍어버렸거든요, 제가.
결국 거의 삼십 분을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다가 겨우 빠져 나왔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이게 뭔가 싶었다.
굉장히 집요하고 악착스러운 게…… 혹시 한주가 저 사람한테도 뭔가 한 적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전 경험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나중에 또 우리한테 화를 입힐만한 인물이면 미리 대비를 해두는 게 좋겠지.
그리고 이럴 때 물어볼 만한 사람은 수화 정도밖에 없다.
이전, 우리 집에서 나와 바로 가윤과 만났던 걸 떠올리면 그리 내키진 않지만…….
잠시 고민하다 수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가람 씨? 무슨 일이에요?
수화는 다행히 바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속으로 말을 고르며 이야기했다.
“수화 씨, 저번에…… 섬에 갔을 때요. 저한테 충고해주셨던 거 기억하세요?”
─ 어떤 충고요?
“한주 씨는 미움을 많이 받으니까 조심하라고요.”
그때도 다른 퇴마사들하고 시비가 걸렸었다. 거의 모든 게 처음일 나를 걱정해서 그랬던 건지 수화가 내게 해줬던 충고를, 나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 아…… 혹시 또 무슨 일 있어요?
수화의 질문을 듣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놀리기 시작하며 대답했다.
“별건 아니고요.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충고라면서 한주 씨랑 일하지 말라고 그러더라고요.”
─ 굳이 찾아와서 그 말만 하고 간 거예요?
수화도 황당한 듯 살짝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그 할머니의 특징을 떠올리며 말했다.
“네. 너무 집요하셔서, 혹시 또 한주 씨랑 트러블이 있었던 사람인가 해서요.”
내 말에 수화가 그런 사람이 있나 생각하는 듯 어…… 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할머니의 특징을 덧붙였다.
“좀 무섭게 생긴 분이었어요. 덩치도 좀 있으시고 차림새도 화려하시고.”
─ 아, 아아. 알 것 같아요. 그분이구나. 원래 참견이 좀 많으신 분이에요.
수화가 말하는 동안 집 앞에 도착해 문을 열며 물었다.
“그럼 한주 씨랑 특별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신발을 벗는데 수화가 난감한 듯 신음하는 소리를 냈다.
─ 심각한 일은 아니었는데요. 한주가 그분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만든 적이 한 번…….
“……그렇군요.”
트러블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장지은 때처럼 심각하게 복수하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뜬금없이 찾아와서 저러시니 당황스럽긴 하네요.”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앉은 순간,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수화의 목소리에 어려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 가람 씨.
“네.”
왜 그러지? 살짝 불안해하며 대답하는데, 수화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 이왕 통화하는 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뭔데요?”
소파에 몸을 의식적으로 편하게 묻고 물었다. 수화가 말을 이었다.
─ 소문이 도는 게 있어요. 요즘 영능력자 사이에 도는 저주 물품들은 누군가의 소행이라고.
마침 동훈의 카페에서 나왔던 얘기다. 아는 체를 하며 대답했다.
“네. 안 그래도 그 얘기 듣고 들어오는 길이에요. 젊은 남녀 두 명이 그랬다는 소문이 돈다면서요.”
─ ……혹시 그 소문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묻는 방식이 어쩐지 찝찝해 살짝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이가윤이랑 박세훈이요.”
수화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진 뒤 수화가 말했다.
─ 가람 씨. 저는 소문이 진짜라든가 가짜라든가 누가 범인이라든가 그런 얘길 할 생각은 없어요.
뭐길래 이렇게 운을 뗄까. 얌전히 수화의 말을 기다렸다.
─ 그런데…… 그 소문이요. 그 소문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은…… 가람 씨와 한주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수화의 말을 곱씹었다. 그래도 결국 내 입 밖으로 나온 건 멍청한 목소리였다.
“……네?”
수화는 어려운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말을 이었다.
─ 실은 가람 씨가 말한 소문의 내용뿐만 아니라, 하나 더 도는 이야기가 있어요. 저주 물품엔 악령석이 사용된 경우가 많다고.
그 말에 이전 한주, 마와 같이 끌려들어 갔던 게임기를 떠올렸다. 그건 명확한 가윤의 짓이었다. 이번 저주 걸린 물건들과 비슷하게.
그러니 그런 수화의 설명은 내게 범인이 이가윤이란 확신만 줄 뿐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범인이라고 의심받는 건지…….
내가 생각하는 틈에 수화가 말을 이었다.
─ 악령석을 많이 가지고 있고, 힘도 있고, 젊은 남녀인 영능력자라면 다들 당연히 한주와 가람 씨를 떠올려요. 가람 씨가 한주랑 일한 지 어느 정도 지났으니까 한주가 조수를 들였다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수화는 범인을 잡자고 말하는 게 아니라 소문의 내용을 전하고 있을 뿐이란 건 알았지만, 억울함에 변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한주 씨는 지금 입원 중이잖아요!”
─ 그렇죠. 근데 다들 한주의 실력 하난 믿는다고 해야 하나…… 한주가 하려고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번에 말씀드렸듯 한주가 미움받는 게 좀 있어서, 이전부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의심받는 경우가 꽤 많았어요.
거기까지 말한 수화가 잠시 고민하는듯하다가 말했다.
─ 아마 그 할머니도 뜬금없이 찾아간 건 아닐 거예요. 상황이 이러니까 가람 씨도 알고 계시라고요.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가윤 언니를 몰라요. 한주는 알아도.
그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소문의 조건이 나와 한주와 일치하기도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아까 동훈의 어두운 표정은 이가윤을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와 한주 씨에게 쓰인 누명을 생각했기 때문일까. 마음이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