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환상상가 (2)
“여긴 뭣 하러 왔어?”
성큼성큼 내가 있는 곳까지 다가온 저승사자가 대뜸 성을 내며 물었다. 나도 지지 않고 말했다.
“바쁘다고 우리도 내팽개쳐 놓더니, 시장 놀러 올 시간은 있나 봐요.”
내 말에 저승사자가 움찔 몸을 떨더니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휴일도 즐기면 안 되냐!”
“그럼 휴일 즐기세요. 저한테 신경 쓰지 말고. 우리가 반갑게 인사할 사인 아니잖아요.”
상대하기 귀찮아서 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한 번 더 성을 내려던 저승사자가 멈칫하더니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혹시 그새 죽었나?”
뭐라는 거야. 재수 없는 소리나 하다니. 인상을 팍 찌푸리고 대답했다.
“안 죽었는데요. 마음대로 죽은 사람 만들지 마세요.”
내 말에 저승사자가 노골적으로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산 사람인 주제에 여길 왔다고!”
저승사자의 외침에 주변을 걷던 귀신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봤다. 동시에 소란스럽던 주변의 소음이 딱 그쳤다.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였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굳혔다. 저승사자도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 쳤다.
“에, 에헤이, 이 친구…… 농담도 참 잘하네. 그럴 리가 있나.”
그렇게 말하는 저승사자의 눈빛이 필사적이었다. ‘나랑 말 맞춰!’ 텔레파시라도 통하게 된 듯 그 의도가 명확하게 느껴졌다.
“그, 그렇게 진지하게 믿으실 줄 몰랐죠. 하, 하하…….”
나도 어색하게 웃으며 저승사자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러자 멎었던 시장의 소음이 되살아났다. 그 자리에 정체되어 있던 귀신들도 다시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이제 됐다고 생각했는지 저승사자가 속닥거리는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자네! 무슨 화를 입으려고 여길 기어들어 왔어!”
나도 같이 목소리를 낮춰 변명했다.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거든요! 산책하다 보니 어느새 여기였다고요!”
내 말에 저승사자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도 어마어마한 길치로구먼.”
……이계에 잘못 들어가는 것도 역시 길치의 범주에 드는 건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저승사자를 응시했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짓든 말든 저승사자는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하여튼 너도 기구한 팔자야. 별별 일에 다 말려드니 말이야. 아까 분위기 봤지? 빨리 집에 돌아가는 게 좋아.”
“저도 집에 가고 싶거든요. 아까 다른 귀신한테 물어보니까 하계로 가려면 장이 파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던데요.”
내 말에 저승사자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하긴, 그게 가장 간단하긴 하겠네. 해도 곧 뜨고 말이야. 너, 산 사람이란 거 들키지 마.”
“들키면 어떻게 되는데요?”
아까 귀신들이 일제히 돌아본 게 좀 소름 끼치긴 했는데. 순수하게 궁금하긴 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당할지. 솔직히…… 무슨 짓을 해도 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긴 했지만.
내 질문에 저승사자가 혀를 쯧, 차며 말했다.
“귀신들의 땅에 들어왔으니……. 들어왔을 땐 산 사람이었어도, 들키면 그때부턴…….”
거기까지 말한 저승사자가 입을 다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저승사자를 쳐다보는데, 저승사자가 재빨리 외쳤다.
“자네! 그거, 혹시……!”
저승사자가 가리키는 건 아까 돌멩이와 바꾼 복주머니였다. 이게 왜? 살짝 들어 보이자, 저승사자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래그래! 그거! 그거 일을 줄여주는 복주머니가 아닌가!”
일을 줄여주는 복주머니? 무슨 소리래?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눈이 삐었나. 흥분한 저승사자를 보며 차근차근 말해줬다.
“행운을 부르는 복주머니인데요?”
내 설명에 저승사자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그게 그거지!”
뭐가 그게 그거냐. 엄연히 다른데.
저승사자는 복주머니를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뚫어지라 보며 말했다.
“그거 나한테 주게!”
“싫은데요?”
어디서 뻔뻔한 부탁이야. 색종이랑 바꾼 돌멩이랑 바꿔 얻은 복주머니지만, 시작은 엄연히 내 돈을 낸 물건이다. 음료수나 사 마실 잔돈이긴 했어도.
단호한 거절에 저승사자가 이를 악물더니 주섬주섬 제 품을 뒤졌다. 그리고 곧 무언가를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그럼 이거랑 바꿔주게!”
솔직히 너도냐, 싶었지만 일단 내민 물건부터 확인했다. 형태가 특이하지만, 꽃봉오리를 표현한 것 같은 유리 공예품이었다. 반투명한 흰색이 오묘하게 빛나는 게 꽤 예뻐 보였다.
“그게 뭐예요?”
내가 관심을 보이며 묻자 저승사자가 이때다 싶은 표정으로 친절하게 설명했다.
“만개하기 전의 겸육설봉 유리 모형이라네. 좋은 물건이야.”
“겸육설봉? 처음 들어보는 꽃인데요.”
저승에서만 나는 꽃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유리 모형을 응시하는데, 저승사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자네도 아는 꽃일 거야. 국화의 일종이니까.”
아, 국화. 꽃봉오리라 못 알아봤지만, 얘기를 듣고 보니 국화처럼 보였다. 국화도 여러 종류가 있구나. 멍하니 생각하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따졌다.
“흰 국화면 죽은 사람한테 바치는 거잖아요! 재수 없게!”
그러자 저승사자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말했다.
“산 몸으로 귀신 세계 오는 건 재수 있고? 그것도 여러 번이나 말이야. 내 눈엔 그게 더 재수 없게 보이네.”
좀 분하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입을 다물고 저승사자의 손에 들린 흰 국화 공예품을 노려봤다.
“어떤 효과가 있는 물건인데요?”
머뭇거리며 묻자 저승사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실은 나도 자세히는 몰라. 하지만 이 물건은 가을에 쓸모가 있다더군. 국화가 가을꽃이라 그런가? 곧 가을이잖아. 속는 셈 치고 바꿔봐.”
“그런 식으로 말하는데 누가 바꾸고 싶겠어요?”
예쁘긴 하지만 흰 국화는 받기에 찜찜하고, 운이 좋게 만들어준다는 복주머니에 비해서 효과도 불투명하고.
내 마음이 떠나는 걸 눈치챘는지 저승사자가 황급히 외쳤다.
“아니, 이게 얼마나 좋은 물건인데! 죽은 자에게 바친다고 다 재수 없는 물건인 건 아니야! 흰 국화는 환생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정말?”
결국 환생이라는 말에 넘어가 복주머니와 유리 국화를 바꿔버렸다. 사실 처음부터 내가 필요해서 바꾼 건 없기도 했고…….
해가 뜰 때까지 산 사람인 걸 들키지 말라는 충고를 듣고 저승사자와 헤어졌다. 얘기가 꽤 길어졌던 모양인지 어느새 주변 귀신들이 꽤 사라진 상태였다.
펼쳐놓은 돗자리의 수도 줄고 어느새 파장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죽은 사람한테나 헌화하는 하얀 국화라 좀 찜찜하긴 하지만, 처음 내밀었던 잔돈으로 이걸 샀다고 생각하니 거의 득템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이러나저러나 장식품이라고만 생각해도 될 정도로 유리 공예의 퀄리티가 상당히 좋았으니까.
이제부터는 유유자적 걸으며 집으로 돌아갈 시간만 기다리면 될 것 같았다. 물건들도 재미있지만, 각양각색으로 생긴 귀신의 얼굴들도 재미있어 주변 녀석들을 구경하며 걷던 때였다.
“여기야! 여기! 이쪽이라고!”
다소 조용해졌던 환상상가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목소리가 들린 저 앞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그쪽에서 잰걸음으로 이쪽으로 도망치는 무리가 있어 붙잡고 물었다.
“저기에 무슨 일 있어?”
내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묻자, 손톱이 기다란 귀신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말도 마. 살아있는 사람이 들어왔다니까.”
“사, 살아있는 사람이?”
찔려서 말을 더듬었지만, 손톱이 기다란 귀신은 겁먹어서 그랬다고 생각한 듯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그치? 소름 끼치지? 눈치 없게 잔칫날에 찬물을 끼얹고 난리라니까.”
귀신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사람이라곤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나도 마음을 다잡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러게. 그런데 그 사람은 이제 어떻게 될까?”
내 질문에 귀신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환상상가에 익숙하지 않구나.”
내가 또 당연한 질문을 한 모양이다. 아까 저승사자에게 들었을 땐 맥락상 귀신으로 만든다는 것 같았는데 끝까지 듣진 못했고.
아직 나를 의심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아 솔직하게 대답했다.
“응. 처음 와봐.”
“저런, 처음인데 운도 나쁘지.”
나를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본 귀신이 곧 말을 이어 설명했다.
“귀신의 축제에 참여했으니 우리의 동료로 만들어야지. 하지만 그게 쉽진 않아. 이런 날 울고불고 난리 치는 사람 아이를 보는 건 딱 질색이야.”
역시. 예상대로 귀신으로 만들어 돌아갈 수 없게 하나 보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뭘.”
손톱이 긴 귀신을 보내고 소동으로 요란하게 된 앞의 풍경을 응시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온 건지, 아니면 내가 들어온 흔적을 발견한 건지 아직 확실치 않다.
이대로 편안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귀신의 무리로 다가갔다. 귀찮고 불안하긴 하지만 일단은 확인을 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무리 끝자락에 있는 귀신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여기 사람이 있어?”
내 질문에 흥분한 표정으로 돌아본 귀신이 말했다.
“남자 사람이야! 키가 크대!”
그렇게 말하는 귀신의 키는 일 미터 초반대로 보였다. 너로서는 꼬마가 아닌 이상에야 다 커 보일 텐데.
하지만 일단 지금 말하는 정보는 나랑 일치했다.
나는 조금 성가신 느낌을 억누르며 다시 질문했다.
“네가 직접 보진 않은 거야?”
“나 봤어!”
내 질문에 답한 건 다른 귀신이었다. 나보다 약간 작은 키의 눈이 한 개인 귀신이었다.
“좀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나보다도 크던걸. 그렇지?”
그렇게 말한 귀신이 제 옆에 선 친구 귀신을 보며 말했다. 친구 귀신은 나보다도 키가 컸다.
키가 큰 귀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나랑 비슷한 것 같았어. 아마도.”
둘이 말하는 걸 보니 내가 아니라 제삼자가 또 들어온 것 같다. 확실하게 본 게 아닌 것 같으니 아직 내 흔적을 발견한 것일 뿐일 가능성은 남아 있지만.
“알겠어. 고마워.”
귀신들이 너도나도 떠들기 시작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적당히 끊고 나왔다. 귀신의 틈을 헤치고 점점 안쪽으로 나아갈수록 귀신들의 야유하는 목소리가 격해졌다.
“죽여버려!”
“동료로 만들어!”
누가 봐도 흔적에 대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벌써 나 이외에 끌려 들어온 사람을 붙잡았는지, 안쪽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 악의 서린 외침들 사이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어쩐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귀신들은 키가 큰 남자 인간이라고 했다. 아마도 나보다 덩치가 큰. 정말로 아니길 바라지만……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과 특징까지 일치했다.
‘젠장.’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귀신들 틈바구니를 한층 더 거칠게 헤치고 나갔다.
아무래도 흥분해있기 때문인지 지나갈 때마다 귀신들이 내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분위기면 잡힌 사람이 어떻게 취급당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으억억억…… 살려주십쇼!”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인물이 귀신들한테 포박당해 무릎 꿇려 있었다.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며 이름을 중얼거렸다.
“김지태 씨…….”
거의 오컬트 오타쿠 수준인 양반이니 또 관련된 정보를 기웃거리다 여기까지 굴러들어왔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끙 신음했다.
조용히 유유자적 나가고 싶었는데…….
평소 지태를 따로 크게 걱정하거나 동정하진 않지만, 오늘만은 좀 불쌍하게 보였다. 수많은 귀신에게 둘러싸여 찌그러져 있는 폼이 거의 역적죄인이었다.
귀신들 입장에선 역적죄인이 맞을지도 모르고. 즐거운 잔치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니까. 분위기로 봐서는 찬물이 아니라 불을 지른 것 같지만.
“에휴…….”
결국 한숨을 푹 내쉬는데 지태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봤다. 이 소란 속에서 용케 내 목소리를 알아챘나 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물 콧물로 더러운 지태의 얼굴이 입을 떡 벌렸다.
“하, 한가람 씨……!”
지태의 매달리는 듯한 외침에 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긴장의 실이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가 느껴졌다. 내 옆에 선 귀신이 날 보며 물었다.
“너 저 인간이랑 아는 사이냐?”
나는 살짝 어깨를 으쓱이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뭐, 좀.”
귀신들이 하도 빤히 쳐다봐 시선이 아프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나는 최대한 웃는 얼굴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랑 아는 사이니까 내가 처리해도 될까?”
“하, 하, 하, 한가람…….”
지태가 울먹이는 소리를 내며 내게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잽싸게 말을 끊었다.
“확실하게 할 테니까.”
지태를 무릎 꿇린 귀신들은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게 넘길지 말지를 재는 표정이지, 나를 의심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다행히 나는 아직 녀석들의 동료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았다.
슬쩍 시간을 살폈다. 검은 하늘에 어느새 맑은 기운이 돌고 있었다. 아주 조금만 더 버티면 아침이 된다.
“나한테 넘겨줘.”
한 번 더 재촉하자 지태를 잡고 있던 귀신들이 살짝 비켜섰다.
“확실하게 해야 해.”
다짐받듯 물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웃으며 대답하고 지태에게 다가섰다. 내가 지태를 묶은 줄을 끄르기 시작하자 자리를 비켜준 귀신이 소리쳤다.
“야! 뭐해!”
나는 그 귀신을 보고 씩 웃어주며 태연한 척 말했다.
“괜찮다니까. 나만 믿어.”
그렇게 말하며 지태를 묶고 있던 끈을 완전히 제거했다. 나는 지태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일어나봐.”
지태는 끅끅거리며 울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비틀거렸어도 일어나는 폼이 다리가 완전히 풀린 것 같지는 않았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심호흡하고 외쳤다.
“도망가요!”
그리고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으, 에? 예?”
멍한 표정을 짓던 지태도 곧 깨달았는지 빠르게 내 뒤를 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금세 나를 지나쳐 앞서기 시작했다.
“잡아! 잡으라고!”
뒤에서 다급하게 외쳐대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더 빨리 다리를 놀렸다. 그리고 눈앞의 지태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저놈이랑 엮여서 일이 잘 풀린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하긴, 내가 언제 이런 곳에 엮여서 원활하게 나간 적이 있었던가. 매번 이랬지…….
“거기 서! 거기 서지 못해!”
‘너 같으면 서겠냐.’
그렇게 생각하며 다리에 더 힘을 줬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새벽의 맑은 기운이 한층 더 짙어져 있는 게 느껴졌다.
아주 조금만 더 버티면 아침이 온다. 나는 이 술래잡기가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아무 걱정 없이 뛰기만 했다. 속으로 이런저런 욕은 좀 했지만.
뛰고, 또 뛰길 한참. 곧 눈앞에서 뛰던 지태의 등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집 근처에 서 있었다. 딱 산책을 끝마치고 돌아가려던 지점이었다.
지태도 아마 환상상가로 들어가기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갔을 거다. 아마 돌아왔다면 곧 나한테 전화해서 찡얼거리기 시작하겠지.
……휴대폰 꺼두고 한 번 더 잘까.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이 남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