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굴러온 돌 (3)
“이걸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한가람 씨 저주를 풀 단서가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한 마가 지태가 나간 쪽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당분간 이걸 좀 빌리고 싶은데…….”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제가 말씀드려볼게요.”
그런 교환을 하는데, 가만히 있던 수화가 입을 열었다.
“장마 씨랑…… 한들 님 말씀은, 성격이 이상해진 사람들은 쓰여서 자아를 빼앗긴 상태란 거죠.”
그 말에 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의 대답을 들은 수화의 시선이 한들 쪽으로 옮겨갔다.
한들도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가짜 귀신들은 자기들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 것 같고. 거기에서 괴리감을 느끼고 주변에 의구심을 갖는 것 같은데.”
“그렇군요.”
뭔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한들의 말에 대답한 수화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전 그만 빠질게요.”
“네?”
갑작스러운 말에 무심코 되묻자 수화가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이런 건 제 전공도 아니고요. 클라이언트들이 쓰였다고 해도 제가 거기까지 해줄 의리는 없어요. 애초에 이런 술수에 쉽게 걸려드는 사람들이 모아도 될 만한 물건이 아니라서요.”
즉, 이 건을 알아서 해결하지 못하는 고객하고 굳이 거래할 생각이 없단 소리였다.
하긴. 한주 곁에 있느라 무뎌져서 그렇지, 악령석은 위험한 물건이니까.
어쩐지 수화도 당연히 이 일에 참여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태도 아니고.
잡을 명분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어, 아쉽지만 인사를 건넸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제가 괜히 붙잡고 있었네요.”
“아뇨. 죄송해요. 오늘 감사했어요.”
꾸벅 고개를 숙인 수화가 마, 한들하고도 가볍게 인사하고 지태에게도 인사 전해달라고 전한 뒤 가방을 챙겼다.
현관까지 배웅하고 수화가 나가자 한들이 투덜대는 말투로 쏘아붙였다.
“너도 쟤만큼 융통성 있게 좀 행동하지 그러냐.”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여기저기 끼어드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래도 신경 쓰이고…….”
“하여튼.”
혀를 차면서도 더 잔소리하지 않는 게 한들다웠다.
다시 마가 있는 응접실로 돌아가려고 걷는데, 한들이 움찔 몸을 떨고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의아하게 묻는데 한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야. 아까 그 덩치가…….”
덩치? 지태? 이어질 한들의 말을 기다리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댔다고 때마침 지태가 외쳤다.
“한가람 씨! 저 방은 무슨 방입니까?”
여기에 있다는 걸 마에게 들었는지 곧장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온 지태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장식장만 늘어선 빈방 말입니다. 뭔가 묘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뭡니까.”
그게 무슨 방이지? 이 집에 그런 빈방은 없는데. 의아하게 생각하며 지태의 얼굴을 보다 흠칫 몸을 굳혔다.
지태의 눈동자엔 내 옆에 있을 한들이 비치지 않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래도 내게는 너무 생생한 녀석이라 보이지 않는 귀신이란 걸 자꾸만 까먹는다. 지태가 아까도 한들을 보지 못했는데도.
한들뿐만 아니라, 이 집엔 지태가 볼 수 없는 게 아주 많다. 이를테면, 악령석 같은 것이.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닫고 숨을 삼켰다. 장식장만 있는 빈방이라고 인식할 만한 방이라면 한주의 컬렉션 룸밖에 없었다.
“거기서 뭐 건드렸어요?”
따지듯 묻자 지태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안 건드렸습니다.”
고개를 돌려 한들을 쳐다봤다.
한들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지태를 노려보긴 했어도 더 말을 꺼내지 않고 얌전히 응접실로 돌아갔다.
……괜찮은 건가? 지태 본인도 건들지 않았다고 하고.
차현에게서 언제 연락이 올지는 불투명하다.
아마 며칠은 더 기다려야 할 가능성이 크다.
찝찝해도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모임을 파하고 싶었는데…… 지태가 얌전히 따라주지 않았다.
“그동안 모찌파이 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어떡합니까! 도와주십쇼!”
“그러니까, 지금은 단서가 딱히 없다니까요.”
타일러도 듣질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마가 타협점을 제시했다.
“일단…… 지금 방송 중이니까…… 같이 보면서 이상이 없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게…….”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장마 씨!”
냉큼 외치는 지태를 살짝 노려보고 하는 수 없이 모여 앉아 모찌파이의 방송을 마저 시청했다.
모찌파이는 때때로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아슬아슬 방송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만하면 당분간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찌파이가 시청자 상담을 받기 시작하자 지태가 다시 시끄럽게 굴기 시작했다.
“연락해볼 찬스입니다! 모찌파이 님께 지금 쓰여 있다고 알려주는 겁니다!”
오늘따라 더 끈질겼다.
연락이 닿아봤자 이상한 놈으로밖에 안 보일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씨름하기 싫어 설렁설렁 전화 연결을 노렸다.
“이것만 하면 집에 가시는 거예요.”
다짐을 받기 위해 말하자 지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결국, 두어 번 실패한 끝에 전화 연결에 성공해버렸다.
끝까지 실패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 안녕하세요. 제가 뭐라고 불러드리면 될까요?
하이톤의 목소리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뭐라고 긴장됐다.
“한가람입니다.”
지태가 옆에서 제 딴엔 속삭인다고 생각하는 듯한 음량으로, 함부로 기분을 거스르면 일방적으로 연결이 끊길 수 있다든가 채팅에서 강제퇴장 당할 수 있다든가 부산스럽게 떠들어댔다.
─ 한가람 님. 어떤 걸 상담받고 싶으세요?
“음…… 제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이 있는데, 잘 될까 해서요.”
그렇게 말하자 모찌파이가 능숙한 손길로 카드를 섞으며 물었다.
─ 직장 상담이세요? 하려는 일은 언제쯤 하려고 하는데요?
“네, 뭐. 직장 상담이에요. 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고요.”
널 포함해서 상태가 이상해진 사람들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범인을 찾는 게 목적이니까.
할 수 있는 한 진솔하게 전했는데, 모찌파이가 뭔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손을 멈추고 화면을 노려봤다.
─ 뭐가 이렇게 모호해? 나 떠보려는 것 아냐? 내 점이 진짜인지 시험해보려고?
참. 모찌파이는 의심병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시작도 해보기 전에 전화가 끊길라 다급하게 변명했다.
“아뇨. 아니에요. 그…… 프라이버시라 해야 하나, 밝히기 그런 게 좀 있어서…….”
사실 떠보려는 건 맞지만. 최대한 순진한 척하며 모찌파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모찌파이는 영 의심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익숙한 손길로 카드를 펼쳤다.
─ 흠.
빠른 손길로 카드 몇 장을 뽑은 모찌파이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 결과를 해석했다.
─ 일은 해결 될 거예요. 해결은 될 건데, 그 과정에서 난처한 일을 겪을 수도 있겠네. 하지만 난처한 일을 겪더라도 이 일을 마무리하는 게 좋을 운세예요.
“그렇군요.”
맞장구치자 모찌파이가 화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 또 뭐 궁금한 거 있어요?
그 질문에 통화가 끊길 걸 각오하고 말했다.
“이 일 관련해서 어떤 사람한테 꼭 전해줘야만 하는 정보가 있는데. 그 사람이 내 말을 곧이 들어줄까요?”
─ 직장 동료인가요?
“아니요.”
─ 그럼?
내 두루뭉술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모찌파이는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나는 심호흡하고 내 목소리가 단호하게 들리도록 의식하며 말했다.
“당신이요. 당신한테 할 말이 있는데, 들어줄지 모르겠어요.”
그 말에 모찌파이가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어딘가를 흘긋 쳐다봤다.
전화가 연결된 휴대폰을 보는 것 같았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모찌파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
─ 뭔데?
“당신이 가짜라는 거요. 당신은 그냥 모찌파이에게 쓰인 귀신이지, 모찌파이 본인이 아니에요.”
모찌파이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 무슨 개소리야.
내 갑작스러운 발언에 채팅창에서 관종이라느니 중2병이라느니 하는 비아냥이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이상하다고 느꼈죠? 매사에 위화감을 느끼고 알던 사람들도 어딘가 빌려온 사람들인 것 같고. 내 것이 내 것이 아닌 느낌이 계속 들었죠?”
사실 나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뻔뻔하게 얼굴에 철판을 두르고 강행돌파를 계속했다.
“가짜면서 진짜라고 믿고 행동하려니 그랬겠죠. 이제 그만하고 진짜한테 몸을 돌려주세요.”
─ 허.
헛웃음을 내뱉은 모찌파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네가 잘 모르나 본데 내가 웬만한 영능력자들은 다 알거든. 한가람이라는 영능력자는 들어본 적도 없어.
생각도 못한 반박이다. 그야 나는 햇병아리고 한주 일을 거드는 게 지금까지의 내 역할이었으니까.
영능력자들 사이에서 내 이름이 생소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별로 내키진 않지만 수월한 대화를 위해 한주의 이름을 팔기로 했다.
“저는 이한주 씨 조수입니다.”
내 말에 모찌파이가 멈칫했다. 한주의 이름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 조수라고 우기는 건 개나 소나 할 수 있어. 증거는?
“없습니다.”
증거를 댈 수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은 이한주의 조수가 맞니 아니니로 기운 빼고 싶지 않았다. 굳이 조수라고 확신시켜줘야만 할 이유도 없고.
이한주라는 이름을 댄 것만으로도 내가 이 업계와 관련된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 그런데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네.”
망설이지 않고 뻔뻔하게 나가자 모찌파이가 주춤하는 게 보였다.
내심 어린애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표정관리도 잘 못하고 아직 순진한 면모가 돋보였으니까.
“그만 몸에서 나가주세요. 진짜 모찌파이 님이 깨어날 수 있게.”
─ 뭐라는 거야, 진짜. 미친 새끼가.
모지파이가 휴대폰으로 손을 뻗는 게 보였다. 그걸 보고 대뜸 고함을 쳤다.
“끊지 마!”
내 목소리에 놀랐는지 모찌파이가 손을 움츠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빨리 눈 떠. 영능력자가 돼선 가짜 귀신한테 홀린 게 부끄럽지도 않아? 알아서 좀 쫓아내버리라고!”
소리치는 것에 온 신경을 몰두하는데, 지태가 답지 않은 소심한 손길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왜요.”
살짝 목소리를 죽여 뒤를 돌아봤는데 지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태가 더듬더듬 말했다.
“저 뒤에 말입니다.”
뒤? 지태가 말하는 뒤는 모찌파이의 뒤인 것 같았다.
뭐길래 그러지? 의아한 얼굴로 다시 화면을 응시하는데, 아까보다 훨씬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채팅이 눈에 띄었다.
채팅들을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뒤에’ ‘손이’ ‘무서워’
모찌파이도 불안한 얼굴로 채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모찌파이의 뒤를 응시했다.
바로 뒤엔 커다란 유리문이 있었다.
유리문 밖엔 화분 등이 늘어선 베란다의 풍경이 보였다.
보이는 걸로 판단해 볼 때 층수는 어느 정도 높은 것 같았다.
아직은 잠잠한 화면을 조용히 응시했다.
모찌파이는 왜 그러냐고 물으며 채팅과 자신의 후방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윽고 예의 그 손이 나타났다. 우측 벽에 몸이 가려진 채로 바닥에서 슬금슬금 하얀 손이 나왔다.
모찌파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당황한 듯 모찌파이가 손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화면을 바라본 순간.
베란다 바닥을 기던 하얀 손이 모찌파이의 어깨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놀라 굳은 모찌파이의 얼굴 뒤로 긴 생머리의 여자가 흘긋 보이고,
방송이 꺼졌다.
방송보다 뒤늦게 끊긴 전화 너머에서 모찌파이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 꺄아아악!!
갑작스러운 사태에 굳어 숨을 삼키는데, 정적을 깨듯 경쾌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방금 통화가 끊긴 모찌파이의 번호로 다시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여보, 세요? 모찌파이 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전화 건너편에서 숨소리가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 힉…… 힉힉…….
모찌파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당신 누구야?”
그렇게 묻자, 우는 듯 웃는 듯한 숨소리가 더 커졌다.
─ 힉힉힉, 힉…….
“말을…….”
하라고 다그치려는데 전화 건너편에서 대뜸 호통이 돌아왔다.
─ 한가람!
기이한 목소리였다. 음성변조를 한 듯 사람 목소리로 느껴지지 않는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 네가 내 장난감을 부쉈어.
“뭐라고?”
장난감? 이게 무슨 소리야. 인상을 팍 찡그리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건너편의 상대는 원하는 설명을 돌려주지 않았다.
─ 네가 내 장난감을 부쉈어. 네가 내 장난감을 부쉈어. 네가 내 장난감을 부쉈어!
조금씩 미묘하게 목소리가 격해져갔다.
나는 휴대폰을 잡은 손에 힘을 쥐고 그 말에 대답했다.
“장난감이라니. 설마 홀린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대답은 없다. 헉헉,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대답해.”
재촉해도 한동안 말이 없던 전화 건너편의 상대가 겨우 입을 열었다.
─ 이한주의 조수라고.
방금 히스테릭하게 외쳤던 사람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이성적인 목소리였다.
픽, 비웃는 듯한 소리를 낸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년 지금 누워있잖아. 산 헤매다 혼자 뒈진 병신한테 찔려서.
순간 욱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변조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 병신한테 찔려 죽을 뻔한 무능아 조수짓 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안 부끄러워.”
단호하게 못박자 킥킥 웃는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 하긴. 넌 그것보다 더 무능할 테니까. 안 그래? 이한주 없으면 뭣도 아닌 듣보잡이잖아.
“……모찌파이한테 무슨 짓 했어.”
여기서 싸워봐야 메리트가 없다. 말을 돌리자 변조된 목소리가 재미없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 알 거 없어.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재빨리 다시 걸어봤지만 아무리 걸어도 받질 않았다.
초조하게 내가 하는 걸 지켜보던 지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모찌파이 님은 어떻게 된겁니까?”
나는 모찌파이에게 전화를 거는 걸 포기하고 지태에게 대답했다.
“집에 괴한이 든 모양입니다. 이 사건의 범인인 듯한데.”
그러자 지태가 얼굴을 울상으로 일그러뜨렸다.
“그럼 위험하지 않습니까! 구하러 갑시다!”
“어딘 줄 알고요.”
부러 차갑게 대답했다. 열 받고 걱정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당장 방법이 없는 건 없는 거였다.
“그런데 장마 씨는요?”
어느샌가 없어진 마에 대해 묻자, 꿍한 지태 대신 한들이 대답했다.
“걔도 전화 받더니 나가던데. 차현이 형한테 전화 왔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