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스트 호더-56화 (56/84)

[56] 굴러온 돌 (1)

“너, 약속한 거 기억해?”

내 말에 한들이 눈을 깜빡였다.

“약속? 사람이 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한 거?”

“응.”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들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왜 까먹겠어?”

말없이 한들의 눈을 들여다봤다. 한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곧장 눈을 마주쳐왔다.

그 눈동자엔 의문이 담겨있을지언정 불안이나 초조, 죄책감 등은 담겨있지 않았다.

한낱 인간이 신의 뜻을 꿰뚫어 볼 수야 있겠느냐마는. 눈앞의 아이는 신이기 이전에 지금껏 함께해온 친구니까.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믿기로 했다.

그래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람이 될 수 있으면, 도와주는 사람이 누구라도 상관없어?”

한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 그런 걸 물어봐?”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얼굴만 들여다보자 한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도움받으면 안 돼?”

“……만약 그 사람이 다른 여러 사람을 희생시켜서라도 도와주겠다고 하면?”

한들이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너랑 만나기 전이었으면…… 아마 도와달라고 했을 것 같아.”

“그럼 지금은?”

한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됐다고 할 거야. 그게…… 저번에 저주하려다 실패한 남자도 그랬잖아. 어설프게 다른 사람 죽여서 힘을 얻으려다 자기도 큰코다쳤었고. 그런 거 되게 멍청해 보이잖아?”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렇지.”

한들이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근데 왜? 도와주겠다고 한 사람이 있어?”

그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있었어.”

머릿속에선 언젠가 들었던 첫 의뢰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 물어보셨었죠, 근처에 있었던 화재 사건이요. 바로 거기서 봤어요. 어떤 여자가 엄청나게 많은 동전을 쏟아내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을요.

그게 이가윤이었을 줄이야.

아마 이가윤은, 그리고 한들은 나를 희생양으로 삼을 생각이었을 거다.

신이 되는 비결을 들었을 때 한주가 말했던 것처럼, 힘만 받고 환생궤도는 남의 것을 건네줄 수도 있을 테니까.

한들은 벼락을 맞았을 때 혼란스러워했다. 강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들의 본체와 만나고 돌아가는 길, 그렇게도 생생한 꿈을 꿨으니까. 기억하고 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한들은 천벌을 받았던 거다. 삿된 약속을 해버렸으니까.

이가윤은 꿈에도 몰랐겠지. 한들이 기억을 잃어버릴 것을. 희생양 삼으려 했던 사람이 하필이면 한주와 손을 잡을 것을.

‘사람 인연 참 복잡하다.’

그런 약속을 해버렸지만, 한들은 아직 돌이킬 수 있다. 이가윤과 한들이 희생양 삼으려 했던 내가 이렇게도 팔팔하니까.

더 빠르게 악령석을 모아서 거래를 해야 한다. 악귀가 되어버리기 전에.

‘하지만…….’

눈을 감고 깊은 상념에 빠져드는데, 조용한 방 안에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화면을 보자 액정에 적힌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 내가 그냥 그렇게 가서 연락이 없으니, 답답해서 전화를 건 모양인데.

받지 않고 멍하니 화면을 쳐다봤다.

시간 내에 결정해야만 했다.

* * *

“우리 집이 아니에요.”

남자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남자가 우물쭈물하더니 말했다.

“우리 집에 가는데, 우리 집이 아니라고요.”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남자가 더듬더듬 이야기를 시작했다.

“귀신이 날 홀리고 있는 게 분명해요. 교묘하게 수작을 부렸지만, 난 알 수 있어요. 가짜라는 걸. 내가 속고 있다는 걸.”

“……그렇군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 남자가 하는 얘기가 진짜인지 아니면 피해망상인지 가늠했다.

이 남자도 영능력자라니까 아마 뭔가 있기야 하겠지만, 영 미덥지가 않았다.

남자가 날 슬쩍슬쩍 쳐다보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진짜인가요?”

“…….”

“……가짜일지도 모르니까.”

한주가 있었으면 정신병원이나 가보라고 말했을 텐데.

한주가 병원에 있는 동안 혼자서 의뢰를 받기로 했다. 이가윤이 악령석을 만드는 것도 막아야 하고, 나도 악령석을 수집해야 하니까.

그간 여러 영능력자들을 만나보고 또 이번에 힘이 생기면서 내가 그리 약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으니 자신감이 있었다.

감당이 안 될 것 같은 의뢰는 거절하면 되고.

그런데 혼자서 받는 첫 의뢰는…… 진짜 의뢰인지 정신병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귀기가 보이는 것도 같고 안 보이는 것도 같고.

영능력자 의뢰인이라 더 헷갈렸다.

“안내해주실래요?”

그렇게 부탁하고 의뢰인과 함께 집을 나와 걷기 시작했다. 의뢰인은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면서 잰걸음으로 걸었다.

남이 보면 굉장히 수상해 보일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얌전히 의뢰인의 뒤를 따랐다.

의뢰인은 길을 쭉쭉 나아가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아서 돌아다니는 사람도 꽤 많고,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지도 않았다.

“……왜 그러세요?”

앞서 걷던 의뢰인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선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내가 묻자, 불안한 눈동자로 아파트를 쳐다보던 의뢰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가시죠.”

하지만 발걸음은 아까와 달리 미덥지 못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망설임이 느껴졌다.

‘왜 이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을 삼키고 의뢰인을 따라갔다. 곧 건물 내부로 들어간 의뢰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소리 죽여 말했다.

“보세요. 이상하잖아요.”

“……뭐가요?”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건물 내부는 깨끗하고, 관리사무소에서 붙여놨을 안내문들도 하나같이 평범한 것들이고, 엘리베이터도 멀쩡히 작동하는 것 같았다.

의뢰인이 정말 모르겠냐고 따지는 듯한 표정으로 벽을 가리켰다.

“이거 말이에요.”

음…… 문제없는데? 딱히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의식하지 않고 봤을 때는 흰색인 줄 알았는데, 의식하고 보니 존재감 없는 패턴이 있었다는 것 정도?

인상을 찌푸리고 의뢰인을 다시 쳐다보자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 벽이 아니란 말이에요.”

“네?”

“이렇게 생긴 벽이 아니었다고요. 여기는 가짜 건물이에요.”

……집에 가도 되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애매하게 흔들거리던 천칭이 피해망상 쪽으로 크게 기운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기분이 상하지 않게 정신병원 내원을 권유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의뢰인을 쳐다봤다.

의뢰인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집에 들어가 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예요.”

아무리 봐도 집이 아니라 의뢰인이 이상한 것 같았지만 이대로 버려두고 갈 수도 없으니, 나는 미지근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봐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걸어 번호키를 누르고. 평범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집 안에 들어왔다. 그동안 감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살펴봤지만 역시 이상한 건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봐요! 우리 집이 아니잖아요!”

내 생각엔 너희 집이 맞는 것 같은데……. 하지만 함부로 입을 열지 않고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의뢰인이 불안하게 호흡하며 의심스럽게 여기는 걸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 집 번호키 소리는 저렇지 않았어요. 좀 더 선명했다고요.”

건전지를 바꿔보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은 해도 일단은 얌전히 말을 들었다.

“그리고 저 창문 손잡이…… 저렇게 길지 않았어요. 저것보단 짧았어요. 또…… 이 바닥. 뭔가…… 뭔가 그냥 이상하잖아요.”

한숨을 삼켰다.

“네, 그…… 알아볼 테니까요.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당장은 위험해 보이지 않으니 쉬고 계세요.”

나는 생판 남인데 병원을 권유한다고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 일단은 보류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문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아, 가람 씨. 다행이네요. 연락이 안 돼서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수화였다.

“어쩐 일이세요?”

내가 묻자 수화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주 얘기를 들었거든요. 걱정돼서 와봤어요.”

“한주 씨는 지금 집에 안 계세요.”

내 말에 수화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뇨. 한주는 벌써 만나고 왔어요. 가람 씨가 어떻게 하고 있나 궁금해서. 혼자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면서요.”

“네, 뭐……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실래요?”

예의상 묻자 의외로 수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간단한 용무인 줄 알았는데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걸까? 의아했지만 수화를 집으로 안내했다.

소파에 앉은 수화가 탁자 위에 봉투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거, 별건 아니지만 사 왔어요.”

프랜차이즈 빵집의 롤케이크였다.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며 롤케이크를 잘라 커피와 함께 내놓자 수화가 얌전히 받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수화가 빵을 자르던 포크를 놓고 말했다.

“사실 좀…… 난감한 일이 생겼거든요. 한주한테 조언을 구하고 싶었는데 누워있는 걸 보니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여기로 오신 거예요?”

“네. 그게…….”

수화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수화가 입을 다물더니 다시 말했다.

“누가 오셨나 보네요. 전 괜찮으니까 나가보세요.”

“죄송합니다.”

또 의뢰인인가 생각하며 나가보자 불청객의 얼굴이 보였다.

“한가람 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지태 씨.”

지태를 일단 돌려보내고 수화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앗 하는 사이 지태가 집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결국, 수화의 배려로 응접실에서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마주 앉게 됐다.

“안녕하십니까, 김지태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함수화예요.”

통성명하는 둘을 지켜보다가 수화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러자 수화가 애매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당장 급한 것도 아니고요. 오셨는데 저 때문에 돌아가라고 하면 죄송하잖아요.”

그 말에 지태가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손님이 계신 줄도 모르고 찾아왔습니다. 함수화 씨 먼저 말씀하십쇼.”

괜찮을까? 지태가 듣지 않았으면 하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슬쩍 수화를 보자 수화가 괜찮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실은 클라이언트 상태가 이상해서요.”

클라이언트? 악령석을 사는 사람을 말하는 걸까. 수화를 쳐다보며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자꾸 자기에게서 손을 떼려는 게 아닌지 의심하세요. 숨겨둔 물건이 있는 게 아니냐고요. 그런 의심을 하는 분이 꽤 계셔서…….”

“지금까지는 이런 일 없었어요?”

내가 묻자 수화가 표정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떠보는 분들은 계셨지만 여러 클라이언트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의심하는 건 처음이에요. 꼭 피해망상이라도 앓는 것처럼……. 그래서 물건 관련해서 뭐 떠도는 소문이라도 있는 건가 해서.”

“꼭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봐 불안해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수화의 말에 지태가 끼어들어 말했다. 수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태가 말했다.

“실은 저도 비슷한 문제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비슷한 문제? 의아한 표정으로 지태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묻자 지태가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한가람 씨는 인터넷 방송을 보십니까?”

였다.

“아니요.”

대답하자 지태가 말했다.

“그럼 스트리머 모찌파이 님도 모르시겠네요.”

“모찌파이……요?”

뭐야 그 부끄러운 이름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지태를 응시하자 지태가 한 영상을 화면에 띄워 보여줬다.

영상엔 어려 보이는 여자애가 이어폰을 끼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영상을 틀며 지태가 입을 열었다.

“타로점을 주력 콘텐츠로 하는 방송입니다. 근데 요즘 하는 말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방송 플랫폼이나 시청자들을 의심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점점 심해집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인상을 찌푸리고 지태를 쳐다보는데 의외로 수화가 아는 체를 했다.

“어? 이 애는…….”

수화의 말에 지태가 반가워하며 말했다.

“함수화 씨도 모찌파이 님 방송 보십니까?”

수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인터넷 방송을 보지는 않는데요, 이 애는 좀 알아요.”

수화의 말에 지태가 흥분해서 외쳤다.

“모찌파이 님이랑 아는 사이입니까?”

수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지태에게 그렇게 말한 수화가 날 보며 말했다.

“가람 씨, 얘도 영능력자예요. 제 기억으론 퇴마 쪽은 아니고 주술 계열 능력자였는데.”

그 말에 지태가 더욱더 흥분해 외쳤다.

“헉……. 혹시 함수화 님도 영능력자이십니까?”

“네, 뭐…….”

수화의 대답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기 시작한 지태가 수화에게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두 사람이 하는 걸 지켜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수화의 손님들도 이상해졌고, 지태가 보는 스트리머도 이상해졌다고. 근데 다들 영능력자라고?

나는 오늘 만난 의뢰인을 떠올렸다. 피해망상을 겪는 것 같은 영능력자였다.

이렇게 주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피해망상증을 보이는 사람이, 그것도 영능력자들 사이에서만 나타날 가능성이 몇이나 되지?

……혹시 우연이 아닌가?

“수화 씨.”

난감해하며 지태의 질문 공세를 받던 수화를 부르자, 수화가 내심 반기는 분위기를 풍기며 대답했다.

“네?”

“혹시 악…… 물건에 대해 뭐 소문 들은 거 없나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갑자기 영능력자들을 이상하게 만들었을 정도면 아마 악령석의 힘이 연관되어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묻자 수화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저도 그게 궁금해서 물어보러 온 건데…….”

그렇게 말은 했지만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수화가 입을 열었다.

“하나 신경 쓰이는 소문이 있어요. 손이 큰 콜렉터가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더라고요. 여기가 워낙 좁은 업계라, 입문자가 나타나면 소문이 돌거든요. 근데…….”

“근데요?”

내가 대답을 재촉하자 수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게 누군지를 모르겠대요. 보통은 다들 협회에 가입부터 하죠. 물건을 모으기 시작하는 건 어느 정도 짬이 생긴 다음에 하는 거고. 그래서 입문자가 생겨도 그게 누군지 대충 아는데…… 이번 콜렉터는 그런 정보가 하나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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