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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호더-54화 (54/84)

[54] 능귀의 객 (2)

“으앙앙앙! 못 지나간다! 못 지나간다!”

빼액 울음을 터뜨린 괴물에 한주가 쯧, 혀를 찼다. 어르고 달래고 애원하고…… 참다못해 한 대 쥐어박았더니 이렇게 되어버렸다.

“저기…… 때려서 미안해. 근데 우리가 좀 급해서. 비켜줄 수 없을까?”

아쉬운 사람이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고 불쌍한 척 말을 걸었더니 괴물의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못 지나간다!! 못 지나간다!!”

대화가 안 통할 것 같다. 슬쩍 한주를 째려보며 말했다.

“이제 어쩔 거예요?”

한주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비켜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은데, 돌아가는 길을 찾아보자.”

그렇게 말하며 가리키는 쪽엔 좁은 샛길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봐도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아예 엉뚱한 곳으로 가는 길 같아 보였지만.

“괜찮을까요?”

길이 어디로 통해있는지는 둘째치고 저승에서 함부로 다른 길로 들어서도 되는지가 걱정됐다.

귀신이 얽히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 샛길로 들어가 나왔는데 삼도천 건너편이거나 하면 정말 답이 없다.

“여기서 시간 낭비하는 것보단 나을 거라고 생각해. 쟤는 아무리 봐도 안 비킬 것 같고.”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며 괴물을 슬쩍 쳐다봤다. 확실히. 비켜줄 분위기가 아니다.

잠시 한주와 샛길 그리고 괴물을 번갈아 보고 나는 마음을 굳혔다.

“좋아요. 가죠.”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자 한주가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샛길은 좁고 어두웠지만, 사람이 많이 지나다닌 길인 듯 그리 험하지 않았다. 조금 긴장은 돼도 불안감을 달래며 걷는데, 어디선가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앞에 누가 있나.”

뒤따라오던 한주도 그 소리를 들은 듯 말했다. 그러자 콧노래 소리가 뚝 끊기고 낯선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 있어요?”

발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곧 젊은 남자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 안녕하세요. 망자 손님은 또 오랜만이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손은 알록달록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인가?

“실례지만…… 누구세요? 손님이라뇨?”

인상이 좀 불량해 보이긴 해도 나쁜 기운이 느껴지진 않는 사람이라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남자가 우리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뭐…… 이왕 오신 거, 일단 들어오세요.”

그러더니 앞장서서 걷는다. 슬쩍 한주를 뒤돌아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따라가 보자는 거였다.

혹시 괴물을 비키게 만드는 방법이나 인연의 끈을 찾는 법에 대한 팁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순순히 남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약간 더 걷자 앞에 작은 초가집이 나타났다. 민속촌에서나 봤을 법한 집이었는데 생활감이 꽤 느껴졌다. 마루 위엔 선풍기가 나와 있는가 하면 열린 문 안쪽엔 컴퓨터가 켜져 있는 게 보였다.

옛날집 같은 부분도 있긴 했다. 아궁이가 있고 그 옆엔 장작이 쌓여있고 또 그 옆엔 지게…… 가 아니라 이젤?

“손님이라고 하셨는데, 여기가 가게 같아 보이진 않는데요?”

내가 이젤을 빤히 쳐다보는 사이 한주가 남자한테 물었다.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프리랜서거든요. 가끔 저승사자님들 찾아오시면 도와드리거나 합니다.”

“저승사자가 뭘 부탁하는데요?”

한주가 묻자 남자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길을 막는 괴물이 나왔죠? 그 녀석은 한번 나오면 적어도 한 달에서 넉 달은 비키질 않아요. 거기가 운명의 기둥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거기가 유일한 길이라니……. 근데 저승사자들도 난감해한다고? 나는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승사자들은 강을 건너서 가면 되잖아요?”

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강 건너는 완전한 망자의 영역이니까요. 운명의 기둥은 산 사람의 것이고요. 강을 건너지 않고 일직선으로 가야지만 도착할 수 있어요.”

남자의 말에 한주가 물었다.

“그럼 저승사자들이 길이 막혔을 때는 당신한테 부탁하나요?”

“그렇죠. 저 괴물은 저래 봬도 외골수라 한번 트집을 잡으면 거기에만 집착해서……. 그 부분만 해결하면 지나갈 수 있게 해줘요.”

뭔가 굉장히 전문가의 포스가 느껴진다. 믿고 따라가도 될 것만 같은 느낌. 저승사자들도 의지한다니 틀림없을 거다.

믿음을 가지고 남자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실은 저희가 지나가려는데 도병재 운운하면서 비켜주질 않더라고요.”

그렇게 말하자 남자가 눈을 깜빡였다.

“도병재가 누구지?”

“…….”

“…….”

한주도 나도 입을 다물었다. 차올랐던 믿음이 빠르게 식었다.

남자가 앗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아아! 도병재! 알죠, 도병재! 망자 손님이 하도 오랜만이라.”

그렇게 말해도 이미 잃은 믿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도병재가 누군데요?”

내가 묻자 남자가 빨개진 얼굴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누구긴. 사람 이름이 아니잖아요. 무기에 입은 해를 말하는 거지.”

한껏 당황해서 말하는 게 정말 아는 듯했다. 뭐…… 잠깐 헷갈렸던 모양이니 이해해주기로 마음먹고 다시 물었다.

“어떡해야 괴물이 비켜줄까요?”

묻자 남자가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도병재 탓을 했으면 비키게 하는 거야 쉬운데. 나도 땅 파서 장사하는 건 아니라서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그림쟁이라 돈을 받아야 하는데.”

남자가 나와 한주를 번갈아 보더니 말을 이었다.

“있어요?”

……없다. 살아 숨 쉬는 상태였다면 있었겠지만, 이곳은 저승이고 나와 한주는 땡전 한 푼 없이 이곳에 끌려온 상태였다.

남자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보아하니 노잣돈도 못 받은 모양인데…… 그러고 보니 저승사자도 안 붙어있네요. 이런 경우 드문데. 담당 저승사자 못 만났어요?”

그 말에 한주가 대답했다.

“만났어요. 근데 우리가 죽은 게 아니라 다른 여자가 죽어야 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 말에 남자가 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임시 망자였어요? 그럼 더더욱 저승사자가 옆에 있어야죠. 대체 어디 갔어요?”

우리 편을 들어주는 듯한 말에 울컥해 사연을 털어놨다.

“자기 바쁘다고 놓고 가더라니까요. 알아서 원래 죽을 사람 데려다 놓으라고. 일주일 안에 못 하면 우리가 대신 죽는다는 둥…….”

“허, 참…….”

내 말을 들은 남자가 헛웃음을 짓더니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 찾아야 하는 운명의 기둥이 뭔지 아세요?”

남자의 질문에 한주가 대답했다.

“둘 중 하나는 죽을 운명의 기둥이라던데요.”

그 말에 남자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아…….”

뭔가 애매한 목소리다. 기둥 이름이 고약해서 그런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우리의 표정을 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 운명의 기둥이라는 게. 괴물 뒤에 실루엣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많거든요. 굉장히.”

“네. 한두 개는 아닌 것 같더라고요.”

내가 대답하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런데 그게…… 감정이 옅은 기둥일수록 앞에 있고 짙은 기둥일수록 뒤에 있어서요.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운명이면, 모르긴 몰라도 꽤 뒤에 있을 텐데…….”

“뭐 문제 있나요?”

한주가 묻자 남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명의 기둥이 있는 땅에 도착해서도 꼬박 며칠은 걸어야 할 겁니다. 그만큼 많은 기둥이 있어서. 일주일 안에 찾아야 한다면 최대한 서둘러야 해요.”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기둥 근처에만 닿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출발 앞두고 기차역에만 도착하면 될 줄 알았더니, 기다란 줄 뒤에 서서 티켓 수령까지 해야 한단 소리 아닌가.

“헉…… 어떻게…… 도와주시면 안 돼요?”

내가 애원하듯 묻자 남자가 유감이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돈을 못 받으면 도와주질 못해요.”

미안함이 담겨는 있지만 단호한 그 말에 한주가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그럼 돈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알려주실래요?”

그 말에 남자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혹시 담당 저승사자 얼굴을 기억하시나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쪽으로 쭉 가보세요. 저승사자 사무소가 나올 텐데, 담당 저승사자 찾으러 왔다고 말하면 아마 혼비백산해서 뛰어나올 겁니다. 가서 돈 달라고 하세요.”

그 말에 한주가 의아하단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혼비백산해서 나오는 거죠?”

“그…… 강도 건너지 않은 망자를 저승에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거든요. 염라대왕 귀에라도 들어갔다간 그날은 큰일 나는 거예요.”

“그럼 돈을 받을 게 아니라 그냥 해결해달라고 하면 되지 않아요?”

내가 묻자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도와주면 좋겠지만, 저승사자들은 다 한패라서……. 일 늘어나는 걸 반기진 않을 거예요. 워낙 바쁘다고 하니. 자기들 실수고 뭐고 해결 안 하고 대충 덮어버리려고 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기겁해서 외쳤다.

“그래도 되는 거예요?”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안 되지만, 염라대왕께 들키지만 않으면 장땡이니까요.”

그러니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적당히 도움만 받으란 뜻이었다.

억울해도 하는 수 없었다. 편하게 해결하려다 말짱 도루묵이 될 바에야, 좀 굴러도 안전한 편을 택하는 게 낫겠지.

“갈까요?”

한주를 보며 묻자 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지.”

우리의 대화를 들은 남자가 말했다.

“네. 다녀오세요.”

다른 곳도 보고 오겠다고 말했을 때 점원이 말하는 것 같은 투였다.

남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얼마쯤 걷자 굉장히 높고 큰 한옥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맞겠죠?”

한주에게 굳이 묻자 한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겠지.”

한옥을 향해 곧장 걷자 커다란 문 앞에 서 있던 저승사자가 외쳤다.

“누구냐!”

그 서슬 퍼런 외침에 한주가 기죽지 않고 대답했다.

“당신들 실수로 잘못 죽은 사람입니다. 담당 저승사자를 찾으러 왔는데요.”

그 말에 평상시에도 하얗게 분칠 돼 창백한 얼굴이 더 창백하게 질렸다.

“뭐! 잔업거리라고!”

그 무례한 외침에 고개를 저으며 정정해줬다.

“아뇨. 실수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라고요.”

그러자 저승사자가 울상으로 외쳤다.

“살아있는 잔업거리가 제 발로 찾아왔다!”

사람 면전에 대고 잔업거리라니……. 황당한 기분으로 하는 걸 지켜보는데, 안쪽에서 또 다른 저승사자가 튀어나왔다.

“젠장 누구야! 이런 터무니없는 실수를 한 게! 너희! 담당 얼굴은 알아?”

그 말에 담당 저승사자의 외모를 설명하자 튀어나온 저승사자가 뒤를 보며 외쳤다.

“자네들! 가서 진 씨 잡아 와!”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남자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절대 일거리를 늘리지 않겠다는 필사적인 기운이 피부로 전해져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낯익은 얼굴의 저승사자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우리를 본 담당 저승사자가 놀란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자네들! 여긴 왜 왔어! 운명의 기둥을 찾으러 가라고 했잖아!”

대답 여부에 따라서 너희를 담가버리겠다는 기색이 여실히 느껴져, 나는 몸을 사리며 대답했다.

“아니, 가려고 했는데…… 괴물이 막고 있잖아요. 지나가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괴물? 돈? 혹시 초가집 그림쟁이를 만난 거야?”

“네.”

내 대답에 저승사자가 자기 품을 뒤적거리며 투덜거렸다.

“젠장, 그 양반이! 괜한 소리나 하고! 죽게 놔둘 것이지!”

“뭐라고?”

저승사자의 말에 한주가 짜증 난 듯이 말했다. 저승사자도 기죽지 않고 으르렁거리며 팩 손을 내밀었다.

“가져가기나 해! 바쁘니까 또 오지 마!”

저승사자가 내민 건 작은 돈 꾸러미였다. 한주가 돈을 받자마자 호다닥 도망가는 꼴이, 바쁘긴 바쁜 모양이었다.

“오셨군요.”

왔던 길을 되돌아가 초가집에 도착하자, 남자가 마당 한쪽에 이젤을 놓고 그림 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돈 받아왔어요.”

한주가 돈을 내밀자 남자가 씩 웃으며 돈을 받아들었다.

“뭐 그리세요?”

나는 질문하며 남자 뒤로 가 섰다.

“새?”

내 옆에 선 한주도 그림을 보더니 말했다. 남자가 돈을 내려놓고 말했다.

“네. 매예요. 머리는 셋이고 다리는 하나인 매.”

그 말에 한주가 반응했다.

“아…… 삼두일족응?”

“그게 뭔데요?”

내가 묻자 한주가 설명해줬다.

“삼재를 쫓는다는 신수야. 재를 입어서 싫다고 했으니까, 이 그림을 그려주면 괴물도 입을 다물겠네.”

남자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금방 그려드릴 테니까 편하게 계세요.”

남자의 말대로 그림은 금방 완성됐다. 그림을 받아들고 떠날 채비를 하는데, 남자가 말했다.

“앞부분은 확인해봐야 시간 낭비니까 곧장 달려가세요. 뒤에 검은 기둥이 보이면 거기만 각별히 확인하시면 될 거예요. 건투를 빌게요.”

“여러 가지로 고마워요.”

마지막까지 조언을 아끼지 않는 남자를 향해, 한주가 솔직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나도 꾸벅 고개를 숙이고 처음 들어왔던 샛길을 거꾸로 걸었다.

“매 그림. 도병재도 쫓아.”

괴물에게 그림을 건네주자 괴물은 그렇게 말하며 순순히 길을 비켜줬다. 나랑 한주는 길이 트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저승이라 몇 날 며칠을 걷고 뛰어도 별로 힘들지 않고, 운명의 기둥 사이를 또 며칠을 가야 한다고 했으니 가능하면 서두르고 싶었다.

괴물이 막은 길을 얼마 가지 않아 여러 의미로 끝이 보이지 않는 기둥의 숲에 도착했다. 기둥은 하나하나가 아득히 먼 하늘까지 뻗어 있었고, 앞과 옆을 봐도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기둥들 사이에 색색의 끈이 얽히고설켜 있어 굉장히 장관을 이루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감상할 시간은 없었다.

초입의 파스텔 색조로 예쁘던 색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짙어져 가는 게 눈에 보였다.

기둥도 끈도 색이 쨍해져 있을 때쯤에는 그 장관도 눈에 익은 경치가 되어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낮도 밤도 없고 지치지도 졸리지도 않아, 시간의 흐름이 당최 느껴지질 않았다. 그래도 늦지 않았길 바라면서 필사적으로 달렸다.

곧 알록달록하던 기둥들 사이사이로 거뭇거뭇한 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연을 담당하는 기둥이 이제야 나타나기 시작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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