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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호더-34화 (34/84)

[34] 인어공주 콤플렉스 (2)

저주는 천천히 내 오감을 잠식해가고 있다. 미각이 그 첫 번째 희생자라 그나마 다행이다.

한주에게 언짢음을 느꼈던 것도 잊고 날 걱정하는 연주를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떨어져봤자 나올 목소리는 없지만.

시각이나 청력을 잃으면 진짜 난감해지겠지. 속으로 몰래 한숨을 내쉬는데 한주가 되돌아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내 쪽을 본 한주가 당당한 자태로 말했다.

“못 찾았어.”

잘 숨는 귀신이란 명성은 괜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완전히 어두워지면 찾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한다. 결국 내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데려다줄까?”

한주가 동훈에게 묻자 동훈과 연주가 동시에 대답했다.

“아니, 나도…….”

“저, 저도요!”

기세 좋게 대답하고 얼굴이 새빨개진 연주를 보며, 점잖게 거절하려던 동훈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게.”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한주가 픽 웃었다.

“됐어. 알아서 가. 연주가 혼자 가기 무서운가 본데, 네가 데려다 줘.”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더 깜빡였다. 팔을 들어 눈가를 문질렀다.

이상하다. 진짜 이상하다.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

몸이 붕 떠 있는 듯한 꿈을 꾸는 듯한 이상한 기분. 머리가 멍한 것 같다. 그런 기분이다.

손을 눈앞에 대고 쫙 펼쳤다. 접었다, 폈다 반복했다. 평소랑 다를 거 없는 광경인데. 하룻밤 사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아무런 느낌도 느껴지지 않는다.

“미각 다음엔 촉각이라.”

웬일로 일찍 일어난 한주가 내가 건넨 스케치북을 멍하니 쳐다보며 말했다. 그 순간 시야가 살짝 흔들렸다.

“진짜 아무것도 안 느껴져?”

바로 옆에서 그렇게 물어오는 한들에게 팔을 들어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

맞은 머리를 감싸 쥐는 한들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람이 아무것도 못 느끼기로서니 때리는 건 또 뭐냐.

한들이 나를 살짝 노려봤다.

“확인해 본 건데 왜 때려.”

왜 때리긴. 기분 나쁘니까 때렸지. 나도 한들을 살짝 노려보는데 한주가 하품하며 말했다.

“어제 찾아보면서 느낀 거지만.”

한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한주를 쳐다보자 한주가 졸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 혼자 찾긴 어렵겠어. 어딘지 대충은 알겠는데, 너한테 저주를 걸고 잡귀로 변신해서 숨어다니는 모양이야.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구분을 할 수 있어야지.”

한주의 말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대로 소멸당하는 건 아니겠지? 잡귀로 변신했어도 뭔가 특징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퍼뜩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머리를 움켜쥐던 내가 갑자기 고개를 팩 들자 한주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날 응시했다.

“왜?”

그렇게 묻는 한주에 다급한 표정으로 펜을 집어 스케치북 위에 휘갈겼다.

내가 쓴 글자를 본 한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키다리 그림자?”

그 말에 한들이 아는 체를 했다.

“아, 걔?”

“알아?”

한주가 묻자 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신들의 정보통 같은 거야. 난 써본 적 없어서 잘 모르지만. 근데 귀신들도 아는 애들만 아는 건데, 네가 어떻게 알아?”

“그러게. 누구한테 들었어?”

한들과 한주의 질문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누구랑 달라서 덕을 많이 쌓았거든요. 그러니까 친절한 꼬마 귀신이 알려줬죠.

당연히 말은 못 하고 표정만 지어 보였을 뿐인데 감이 좋은 한주가 날 노려봤다.

아무튼, 키다리 그림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 뭔가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한주가 대뜸 누군가에게 전활 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강동훈.”

그렇게 말하며 밖으로 나갔으니 아마 동훈과 오늘 탐색에 대해 상의할 게 있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금방 돌아온 한주가 출발하자는 사인을 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그럼…….”

한주와 동훈을 번갈아 보며 멍한 표정을 짓는 연주에 동훈이 살짝 미소지었다.

“오전만 한주한테 맡길 거예요.”

“한주 씨 커피 내릴 수 있어요?”

연주의 질문에 한주가 카페 앞치마를 매며 대답했다.

“응. 동훈이 배울 때 같이 배웠으니까.”

“한주도 커피를 좋아해서. 꽤 잘해요. 저 대신 카페 봐줄 때도 있거든요. 정말 가끔이지만.”

그랬구나. ……근데 손님들한테 커피 내가는 건 왜 매번 나일까?

내 생각을 귀신같이 눈치챘는지 한주가 날 응시하며 말했다.

“카페도 아닌데 전문적으로 커피 내갈 필요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내가 꿍얼거리는 동안 연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동훈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훈은 웃으며 연주를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위험한 귀신은 아니라고 하고.”

키다리 그림자의 도움을 받기 위해선 떨어진 동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키가 필요하다.

경험상 키다리 그림자의 도움을 받기 위해선 성인 남자의 평균적인 신장 정도는 필요해 보였는데 한주 키로는 무리다.

나는 말을 할 수 없는 데다 상태가 불안하고. 연주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얘는 체질도 체질이고 귀신이 보이지도 않고.

결국, 나설 수 있는 게 동훈밖에 없었다.

동훈에게 또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했으나, 한주가 거리 귀신을 청소해 준 거로 퉁치기로 한 모양이다.

한주 말로는 말끔히 청소하진 못했지만 뭔가 수를 써뒀으니 시간을 두고 차차 귀신들이 줄어갈 거라고 한다.

동훈이 나가고 동훈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한주를 보자 기분이 묘해졌다. 나야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봐서 그런 거지만, 연주는 어떠려나.

계속 한주와 동훈 사이를 걱정해왔으니 연주로선 지금 이 상황이 그다지 달갑지 않겠지.

슬쩍 연주를 쳐다봤다. 연주 역시 묘한 표정으로 한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뭔가를 결심한 표정을 지은 연주가 한주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가끔 들어와 테이크아웃 해가는 직장인들을 제외하면 한가한 시간. 졸린 표정을 짓고 있던 한주가 연주를 올려다봤다.

연주가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장님 여자친구 있어요?”

그렇게 묻는 얼굴이 새빨갰다. ……너 그거 아직 못 물어봤구나. 연주의 엉뚱한 질문에 눈을 깜빡이던 한주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없어.”

한주의 말에 연주가 반색하며 날 돌아봤다.

“없대, 가람아!”

그러십니까…….

그러고 보니 한주한테 물었으면 쉽고 빨랐겠다. 내 알 바 아니긴 하지만.

연주는 딱히 숨길 생각도 없는지 한주에게 동훈에 대한 걸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다.

한참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놀라 나를 돌아봤다.

“       ?”

“    ,              .”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억양만이 웅웅거리다가 이내 완전한 침묵이 찾아왔다.

[ 괜찮아? ]

그렇게 적은 종이를 내미는 연주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연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살폈다.

정말 괜찮다는 뜻으로 살짝 웃어주었지만 연주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어쩐지 목소리가 점점 멀게 느껴진다 했더니. 집중력이 떨어진 탓이 아니고 청력이 사라지는 중이었나 보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 시작했을 땐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은 꽤 진정됐다. 미각에 촉각, 그리고 청력까지 잃어 많이 불안하긴 하지만.

손님에게 커피를 내준 한주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 보나마나 동훈에게 재촉 전화를 하는 거겠지.

이제 남은 건 후각과 시각. 이 두 가지만 사라지면 내 존재 자체도 소멸한다.

처음엔 별생각 없었는데, 이렇게 되자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라지고 있다는 실감이 서서히 나를 뒤흔들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도 한주가 계속 전화를 걸고만 있었다.

연주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한주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 한주를 응시하던 연주가 참을 수 없었는지 한주 쪽으로 다가갔다.

연주와 한주가 무언가 대화를 나눈 뒤 연주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동훈 씨가 전화를 안 받나?’

불안감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주 역시 불안한 얼굴로 전활 걸고 있었다.

한주는 포기한 듯 조금 짜증스러운 얼굴로 유리창 밖 귀신들이 득실거리는 풍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몇 번 전화를 시도해 보던 연주가 초조하게 유리창 밖을 쳐다봤다.

연주의 눈엔 그저 평범한 길거리가 보일 뿐이겠지만, 밖에 미지의 무언가가 있다는 걸 이해는 하고 있을 거다. 그게 연주의 불안감을 더 부추기는 것 같았다.

잠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연주가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한주를 돌아봤다.

연주가 무어라 말하자 한주가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주가 팔을 뻗어 연주의 어깨를 잡을 새도 없이 연주가 카페 밖으로 달려나가 버렸다.

나 역시 당황해 연주를 따라 달렸다.

왜 이렇게 초조하고 불안한지 모르겠다. 꿈을 꾸는 듯하고 몸이 둥실거리는 것 같고…….

말도 못 하고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고 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니 그냥……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다리가 다 나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픈 줄도 모르고 재빨리 내달렸을 테니까. 그만큼 정상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 진짜인진 모르겠지만 뒤에서 굉장한 노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얘도 쟤도 달려나가 버리니 한주로서는 화가 나긴 하겠지.

한참을 달렸다. 여러모로 달리기 어려운 나와 달리 연주는 쭉쭉 길을 달려나갔다. 평소엔 내가 훨씬 더 빨랐는데.

어느 순간 연주의 뒷모습조차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 멈춰 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연주의 모습을 확인하며 따라갈 수는 없게 됐지만, 미묘하게 귀신의 수가 줄어든 방향이 있었다.

귀신을 쫓아내는 연주의 체질상 지나간 자리에 그런 식으로 흔적이 남는 듯했다.

그 방향을 따라 걸으며 계속 주변을 의식했다. 미묘한 차이가 있을 뿐이기 때문에 뛰면서 살펴보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는데 눈앞이 점점 뿌옇게 변해갔다. 풍경이 점점 흐릿해지고 조금씩 어둠이 찾아들었다.

그렇게 눈앞이 점멸해버렸다. 눈마저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어……?’

당황해 눈을 더듬거려봤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뒷걸음질 쳤는지 한 걸음 더 나아갔는지도 모를 막연함.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섰다.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로 아무것도. 그 무엇도.

소리를 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 우주 어딘가에 버려진 듯한 막막한 기분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앉은 게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마도 나왔을 거다.

내게 남은 건 후각뿐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풀냄새가 훅 끼쳐왔다.

길 한복판에 웬 풀냄새. 어지러운 머리 한복판에서 태평한 생각들이 자꾸 솟아났다.

맞다, 길 근처에 작은 화단이 있었다. 존재감이 하도 없어 그러려니 지나치던 화단이었다. 주저앉은 채로 후각에만 집중하다 보니 그제야 풀냄새가 느껴졌다.

평소엔 나는지도 몰랐던 이 냄새가, 이제는 나를 이 땅에 발붙이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유일한 끈이 됐다.

그리고 그마저도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이 냄새마저 맡지 못하게 되면, 나는 이대로 사라져 버린다.

사라지는 건, 사라지는 감각은 느낄 수 있을까? 설마 이대로, 막연한 채로 여기에 남게 되는 건 아니겠지?

누가 날 찾아주더라도 절대로 알아챌 수 없게 이런 상태로 영원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건 아니겠지.

무섭다. 무섭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게 됐다.

싫다. 싫어. 싫다는 생각만 계속 드는 와중에 점점 풀냄새가 강해졌다.

억울하고 분하고, 분하고 또 분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매번. 매번 이런 식이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걸 바란 적이 없는데.

왜 나를 멋대로 이렇게 만들어서.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거지. 왜 이런 괴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지. 왜.

내가 지금 울고 있는지,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지, 근처에 어떤 존재가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막연하고 또 막막해서.

숨을 들이켰다고 생각한 순간, 어쩐지 멀리서 비명이 들려오고 사라졌던 감각들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감각에 놀란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저 멀리 연주가 놀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게 보이고, 그 뒤에 동훈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 앞엔 녀석이 쓰러져 있었다. 내게 저주를 걸었던 녀석이 거친 숨을 토하며 조금씩 조금씩 쪼그라들고 있었다.

쨍, 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들은 순간 온몸의 기운이 쫙 빠져나가 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둠 속에 있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데 단단한 쇠의 울림이 내 시선을 이끌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크고 단단해 보이는 철문이 거기에 있었다. 익숙하고 또 복잡한 마음이 들게 하는 철문.

손안을 들여다봤다. 오묘한 빛을 띠는 검은 진주가 손 위에서 데구루루 굴렀다.

악령석. 공물. 신이 되는 비결.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해 몰랐지만, 또 한들과 동화해 폭주해버린 것 같다. 일이 해결된 건 참 다행이지만…….

그 앞에 남은 일들을 생각하면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 발을 뗐다. 여기서 고민한다고 뭔가 달라질 것도 아니고, 일단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자물쇠에 악령석을 끼워 넣었다. 또 한 번 잠금이 풀렸다.

“가람아!”

눈을 뜨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연주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거기서 정신을 잃고 다시 카페로 되돌아온 모양이다.

“걱정했어요.”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 연주 뒤쪽을 쳐다보니 동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보였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안절부절못한 기분이 드는데 순식간에 멱살이 잡혔다.

“야, 한가람.”

한주였다. 한주가 내 멱살을 쥐고 날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잖아.”

씹어뱉듯 말하는 그 목소리에 딸꾹질이 나왔다. 옆에서 연주가 눈물을 찔끔 흘리는 걸 보니 연주는 벌써 혼난 모양이다.

“아, 안 들렸는데요…….”

이런 상황이지만 해명하는 내 목소리가 새삼 반가웠다. 나와 달리 한주는 내 변명에 더 열 받은 표정을 지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멍청아. 왜 거기서 따라 나가는 건데? 미쳤어? 잘못됐으면 어쩌려고 그랬는데?”

그땐 확실히 나도 어떻게 되긴 했었다. 그게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걸. 머리는 안 돌아가고 거의 본능적으로 연주를 따라 달렸다.

시선을 살살 피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인정했다.

“그, 그러게요……. 정말 면목 없습니다.”

잠시 나를 노려보던 한주가 내 멱살을 내팽개치듯 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태에 한주도 꽤 놀랐던 모양이다.

“죄송해요…….”

연주도 기죽은 표정으로 한주의 눈치를 살폈다. 진짜 단단히 혼났나 보다. 동훈이 난감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 잘 해결돼서 다행이네요. 저도 죄송해요. 전화 안 받아서. 귀신 장난에 휘둘리느라…….”

동훈의 표정이 뭔가 씁쓸해 보였다. 연주와 동훈을 보자, 쓰러지기 전 연주와 동훈의 모습이 보였던 게 떠올랐다.

“저…… 근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정신 차려보니 내가 녀석을 잡아 놓고 있어서.”

내 질문에 동훈과 연주가 서로를 쳐다봤다. 잠시 동훈을 보던 연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어. 그냥 큰 소리가 나서 가봤는데 네가 혼자 울고 있더라고. 깜짝 놀라서 가까이 가려고 했는데 뭔가…… 분위기가 무섭고 갑자기 밝은 빛이 나서.”

“저는 연주 씨 목소리가 들려서 가봤더니, 그런 상황이더라고요.”

동훈이 연주의 말을 이어 설명했다. 잠시 날 쳐다보던 연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거야? 잘 모르겠지만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건 느껴졌어. 아까 봤을 때 뭔가, 네가 한가람이 아닌 것 같고…… 그냥 무서웠어.”

연주가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야 그렇게 느껴졌겠지. 한들과 동화된 상태였으니까.

……만약 이대로 신이 된다면 가족들하고 지금처럼 지내는 것마저 불가능하게 돼버리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일이야 많지만, 가람인 내가 돌볼 테니까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무거운 마음으로 고민하는데 한주가 연주의 질문에 대신 답해줬다.

뒤늦게 연주한테 괜찮다고 대답해주고 한주의 차에 탔다. 말없이 집을 향해 가는데 한주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한들에 대한 건 천천히 생각해보자.”

그렇게 말하는 한주는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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