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앨버트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미쳤지! 한주가 무시하랄 때 그냥 무시할걸.
아니, 한주는 처음부터 귀신인 걸 알고 무시하라고 했던 건가? 그럼 더 적극적으로 말려줬어야지! 나는 진짜 어린앤 줄 알았잖아!
속으로 괜히 한주를 욕하며 몸을 팩 틀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모른 척하자. 안 보이는 척하자.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걷는데 아이가 뒤에서 옷자락을 꽉 잡아챘다.
“가지 마! 도와줘! 부탁이야!”
울음기 가득 담긴 필사적인 목소리. 악의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느껴지지 않지만…… 언제 돌변할 줄 알고?
마음 약해지지 말자. 속으로 다짐하며 마저 걷기 위해 발을 떼는데 아이가 한층 더 옷자락을 강하게 잡아 왔다.
“앨버트가 돌아오질 않아. 앨버트가 잘못됐을까 봐 너무 무서워.”
“…….”
“제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래. 내가 호구지, 호구야. 체념하는 심정으로 다시 뒤를 돌아봤다.
시선보다 한참 아래에 울먹이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어린 얼굴이 있었다.
“……앨버트가 누군데?”
내 질문에 아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래. 귀신이라고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란 법은 없으니까.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앨버트는 내 친구야.”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섬주섬 호주머니를 뒤졌다.
이어폰을 가지고 나와 다행이었다. 끼고 있으면 적어도 혼자 중얼거리는 미친놈으로 보이진 않겠지.
“둘이서 같이 살 곳을 찾는 중이었는데 앨버트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
“내가 같이 찾아주면 되는 거야?”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앨버트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갑자기 없어질 리가 없는데…….”
걱정스러워하는 아이를 잠시 내려다보다 손을 내밀었다.
의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찾아보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잡았다. 작고 차가운 아이의 손을 조심스레 쥐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는 아이에게 물었다.
“근데 앨버트가 어떻게 생겼어?”
“고양이야. 턱시도 옷을 입은 것 같은 고양이.”
아이의 말에 살짝 당황해 되물었다.
“고양이? 살아있는 고양이?”
아이가 고개를 좌우로 젓고는 내 말을 정정했다.
“아니. 인형 고양이.”
“인형?”
“응.”
턱시도 고양이…… 인형이라고? 왠지 뭔가가 생각날 것 같았다. 비슷한 걸 아는 듯한 느낌이…….
“아!”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이미지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래, 턱시도 고양이 앨버트. 알고 있다. 어릴 적에 한참 유행했던 만화에 나오던 주인공이었다.
인기가 많아서 웬만한 집은 다 앨버트 인형을 가지고 있었다.
“나 알아. 앨버트.”
내 말에 아이가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정말?”
“응. 어렸을 때 나도 가지고 있었어.”
그렇게 말한 직후에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앨버트 인형이라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는 건 왠지 살아있는 상대를 얘기하는 것 같은 표현인데.
“앨버트는 인형이지?”
“응!”
“그냥 인형이야?”
“무슨 말이야?”
신비한 눈망울을 깜빡거리는 아이를 잠시 바라보며 말을 골랐다. 어떻게 얘기해야 말이 통하지?
“그러니까…… 인형인데 말도 하고 움직이는 거야?”
“응? 당연히 말도 하고 움직이지. 내 친구라니까.”
아니 인형은 보통 당연히 말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는데…….
다시 말을 걸려고 입을 열었다가 그냥 얌전히 닫았다. 잠시 뜸을 들인 후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렇구나.”
이 말 외에 할 말이 뭐가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네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게 아니고?’라고 묻고 싶었으나, 그냥 고이 접어 담아두기로 했다.
아무리 귀신이라도 동심을 깨는 질문을 하는 건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니까.
응응, 하며 혼자 결론짓고 이대로 넘어가려는데 아이가 무언가 떠오른 듯 “아!” 하며 다시 나를 올려다봤다.
“형 혹시 몰라?”
“뭘?”
“잊힌 물건은 쉽게 귀신이 돼. 앨버트도 그래서 귀신이 된 거야. 내 상상 속의 친구가 아닐까 생각한 거지?”
“……설명 고마워.”
아이가 씩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가 금방 다시 나를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불쑥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근데 동전은 어디에 많이 떨어져 있을까?”
“응?”
뜬금없는 질문에 눈만 깜빡이고 있자 아이가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동전 말야.”
“동전?”
“응. 떨어진 동전.”
“떨어진 동전은 왜?”
아니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봐? 앨버트를 찾아달랄 땐 언제고 갑자기 동전 찾는 사람이 누군데?
아이가 이상하단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같이 찾아준다면서?”
병원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 수풀을 뒤지는 아이를 난감하게 쳐다봤다.
부스럭거리며 수풀을 뒤지던 아이가 몸을 뒤로 빼더니 날 올려다봤다.
“형 뭐해? 안 찾아?”
“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왜?”
아이의 천진난만한 물음에 한숨을 삼켰다. 넌 어리고 사람들 눈에 안 보이니까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거든.
작다고는 해도 병원 근처 공원이라 방문객이 나름 있는 편이다.
다 큰 몸뚱아리로 눈에 띄는 행동을 해댈 만큼 얼굴에 철판을 깔진 않았다.
“내가 그러면 뭔가 이상해 보이잖아. 궁상맞아 보이기도 하고.”
아이에게 솔직하게 대답하자 아이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이상하거나 궁상맞아 보이면 안 되는 거야?”
“…….”
“도와준다고 했잖아.”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는데.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아이가 순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랬어. 앨버트가.”
그야 앨버트라면 그렇게 말했겠지. 그래도 그 말을 듣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십여 년 전에나 봤던 만화영화 주인공에게 새삼스레 잔소리를 들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묘하게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비현실적인 상황이 맞기는 하지만.
잠시 고민하다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뭐 어때. 저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나도 저 사람들이 누군지 모를 텐데.
땅을 짚은 손에 닿는 잔디의 느낌이 묘했다.
아이가 내가 하는 것을 보더니 다시 수풀을 헤치며 말했다.
“동전이면 아무거나 상관없어. 장난감 동전이어도 돼.”
아무리 그래도 떨어진 동전을 찾으라니. 별것 아닌 것 같이 들려도, 직접 하려니 여간 수고스럽고 부끄러운 게 아니다.
“그냥 어디서 구해오면 안 돼? 줍는 것보다 이게 더 빠르고 쉬울 것 같은데.”
장난감 동전이어도 되면 근처 가게에서 사도 되고. 이 짓은 역시 하기 싫어서 물었지만 아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키다리 그림자는 주운 동전만 받아.”
그것참 성가신 귀신이다.
아이 말로는 키다리 그림자는 자신의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꿰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앨버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분명 알고 있을 거라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키다리 그림자는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아서 동전을 눈앞에 내밀어야만 질문에 대답해준단다.
아이 키로는 어떻게 해도 눈앞에 동전을 내밀 수 없어서 곤란했다고.
“근데 왜 하필 떨어진 동전이야?”
가뜩이나 요즘엔 동전 자체를 잘 쓰지 않게 됐는데. 예전 같으면 공중전화나 자판기 밑이라도 찾아봤을 텐데.
그러고 보니 공중전화는 그렇다 쳐도 자판기도 길거리에서 못 본 지 꽤 됐다.
……이 녀석들도 남아있으면 귀신이 되려나? 앨버트처럼?
“떨어진 물건은 줍지 않는 게 좋아. 특히 돈은.”
“으응?”
생각이 딴 길로 새고 있는데 아이가 또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떨어진 동전을 찾으라면서 줍지 않는 게 좋다니?
“떨어진 돈을 주우면 재수가 없다고 하잖아.”
“그런 말이 있어?”
“있어. 나쁜 것이 숨어들기 쉽게 되거든. 키다리 그림자 같은 귀신들한텐 그게 좋은 밥이지만 사람들한텐 좋지 않으니까.”
영 미신 같고 괴담 같은 이야기지만 귀신이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니까 틀림없겠지. 더 묻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아이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형은 진짜 좋은 사람 같아.”
“뭐야 갑자기.”
낯부끄러워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아이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랑 앨버트는 작고 힘도 약하니까. 매번 살 곳을 못 찾고 쫓겨나기만 했거든. 도와주겠다는 사람은 처음이야.”
그러고 보니 둘이서 살 곳을 찾고 있다고 말했지. 이렇게 조그만데 머무를 곳조차 찾지 못한 거구나.
“귀신으로 사는 것도 쉽진 않구나.”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아이가 “후후” 소리 내 웃었다.
“아, 찾았다.”
풀 그림자 밑에 은근히 반짝거리는 게 있었다.
손을 뻗어 백 원짜리 동전을 주워들었다. 이게 뭐라고 이 고생을 시키는지.
동전을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보는데 아이가 벌떡 일어나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럼 이제 키다리 그림자한테 가자!”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며 아이를 진정시켰다.
“기다려. 천천히 좀 가. 나 다리 다쳐서 못 뛴단 말야.”
그러자 아이는 마음 급한 얼굴을 하면서도 걸음을 늦춰주었다. 아이의 작고 동그란 뒤통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근데 키다리 그림자는 뭐 하는 녀석이야?”
“몰라?”
응, 하고 대답하자 아이가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런 걸 CCTV라고 부르는 거지? 거리를 감시하는 거라고 들었어.”
아이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아이가 가리킨 쪽에는 확실히 CCTV가 있었다.
“응. 맞아.”
“키다리 그림자는 귀신들의 CCTV 같은 거야. 저렇게 한 곳에만 붙어있지는 않지만.”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형은 귀신이 보이니까, 키다리 그림자에게 질문하는 법을 알아두면 좋을 거야. 도와줬으니까, 내가 형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이거라도 알려줄게.”
그렇게 말한 아이가 내게서 눈을 떼 어딘가를 바라봤다. 나도 아이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의식하지 않고 있을 땐 몰랐지만 의식하고 보니 희미한 그림자 같은 게 흔들흔들 지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응. 키다리 그림자야.”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확실히 키가 컸다.
나보다도 머리 두세 개 정도는 더 큰 키였다. 아이가 내 팔을 살짝 잡아끌었다.
“질문하는 방법을 알려줄게. 틀리면 안 되니까 잘 기억해야 해.”
아이가 알려준 방법은 이러했다.
우선 키다리 그림자의 눈앞에 동전을 내밀고 키다리 그림자가 동전을 가져가면 바로 질문을 할 것.
질문이 끝나면 바로 키다리 그림자 앞에서 비켜서고, 대답을 들을 때까지 얌전히 뒤를 따라 걸을 것.
간단해 보이지만 순서를 틀리거나 다음 단계가 지체되면 그날의 질문 기회가 날아가 버리니 잘 기억해야 한다며 아이가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나는 속으로 순서를 한 번 되뇐 뒤 키다리 그림자 앞을 가로막고 서 동전을 내밀었다.
키다리 그림자가 동전을 빤히 쳐다보더니 내 손에서 동전을 빼갔다.
“고양이 앨버트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줘.”
그런 다음 얌전히 키다리 그림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생각을 떠올리는 건지 정보를 취합하는 중인지 한참 말이 없던 키다리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앨버트는 새가 물어갔어. 지금은 탈출해서 친구랑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중이야.”
그렇게 말한 키다리 그림자는 스스스 자연스럽게 사라져버렸다. 그 자리에 멈춰서서 아이와 서로 마주 봤다.
“새가 물어갔다니…….”
“앨버트가 그렇게 작아?”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게나 작구나. 확실히. 인기 있던 인형인 만큼 다양한 크기가 출시됐었다.
그나저나 결국 처음의 장소라니. 황당하면서도 다행이란 생각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미안…….”
“미안할 게 뭐 있어. 덕분에 나도 여러 가지 얘길 들었는걸.”
내 말에 아이가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웃었다.
“고마워.”
“나야말로.”
그 이후론 말없이 쭉 걸어 다시 가로수 앞에 도착했다. 때마침 앨버트도 그곳에 도착했는지 아이가
“앨버트!”
하고 외치며 어딘가로 달려나갔다.
……내 눈엔 안 보이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땅바닥을 유심히 쳐다보자, 저 멀리 작은 검은색 무언가가 꾸물거리는 게 보였다.
감동의 상봉을 하는 두 아이의 근처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이가 훽 나를 돌아보더니 내 눈앞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얘가 내 친구 앨버트야!”
성인 손가락만 한 크기의 인형이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되게 귀엽네, 이거.
귀여워서 비실비실 나오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고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넸다.
꼬질꼬질 더러워진 앨버트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마주 인사했다.
“안녕. 넌 누구야?”
앨버트의 물음에 내 대신 아이가 대답했다.
“이 형이 널 찾는 걸 도와줬어.”
“정말?”
“응. 정말.”
앨버트가 말없이 나를 올려다봤다. 왜 그러지? 웃어서 기분 나쁜가?
조금 당황해 앨버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앨버트의 눈동자에 물기가 고인 것을 알아챘다.
앨버트가 작디작은 팔을 들어 내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정말 고마워. 친구가 혼자서 무섭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네가 같이 있어 줘서 다행이야.”
말랑말랑하고 간질간질한 느낌. 손에서 나는 느낌도 그렇지만 기분 역시 그런 느낌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결국 내가 한 건 딱히 없는데. 왠지 어릴 적 내 영웅에게 이제 와 인정을 받은 느낌이라…… 잘 표현하기 어렵지만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귀신을 보니까 정말 별일이 다 생기는구나. 그 별일이 꼭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구나.
그렇게 데이고 힘들었는데. 그런데도 한들이나 이 아이들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왠지 그냥 보내기 어려워 더 도와줄까 했지만, 아이들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내 도움을 거절했다.
동쪽 어딘가에 살 수 있는 곳이 있어 그곳으로 간다면서.
저렇게 말하니까 걱정 안 해도 괜찮겠지.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여러 이야기를 나눈 후 두 아이를 배웅했다.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아이와 앨버트의 목소리가 왠지 오랫동안 귀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집엔 어떻게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