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종이 상자 (4)
토끼의 카드 패에서 카드 하나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버렸다.
이걸로 버려지지 않고 살아있는 카드는 총 세 장. 스페이드 J의 짝과 조커.
토끼의 차례다.
토끼가 내 카드 패에서 스페이드 J를 가져가면 그걸로 게임 끝. 조커를 가져가면 게임 종료까지 유예가 생긴다.
내 카드 패를 향해 팔을 뻗는 토끼에게 외쳤다.
“잠깐 기다려!”
“응?”
토끼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한다. 나는 토끼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카드 두 장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비스크도 토끼도 그리고 나조차도 카드를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서툴지만 신중하게 두 장밖에 안 되는 카드를 섞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섞었다고 생각됐을 때 카드를 다시 테이블 밖으로 꺼냈다.
카드 안쪽이 내 눈동자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토끼나 비스크조차 쳐다보지 않는 상태로 팔을 내밀었다.
“이제 됐어.”
─ 너 뭐해?
한들이 황당해하며 물었지만 집중하기 위해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 쪽에 있는 카드가 조커인지 나도 모른다.
눈동자 속에 비친 카드가 함정이었다는 건 내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내겐 더 이상 희망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래도 뭐라도 해봐야지.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눈에 비치는 선물상자들을 노려봤다. 카드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방에 들어온 뒤로 계속 저 녀석들 때문에 떠들썩했는데.
처음으로 이어지는 기이한 정적과 무리수일지도 모르는 최후의 발악. 긴장되는 상황에 식은땀이 절로 나왔다.
─ 뭐지? 고장 났나?
차라리 이대로 끝나지 않고 이 상황이 이어졌으면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토끼가 내 손에서 카드를 빼가면 분명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치겠지.
─ 한가람? 고장 났어? 뭐야, 이게 통신장애인가 뭔가 그거야?
‘조용히 좀 해봐. 접신하기 일보 직전이야. 그 정도로 몰려 있다고.’
─ 야,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뭔가 이상하잖아. 근데 너 왜 대답 안 했어?
‘집중하는 중이야. 방해하지 말아봐.’
─ 무슨 집중?
끈질긴 한들의 질문에 살짝 짜증이 나 대꾸했다.
‘이대로 게임이 끝날지도 모르니까 최후의 발악 중이야!’
─ 근데 있잖아.
‘또 뭐!’
─ 쟤넨 왜 갑자기 조용해?
‘그거야…… 어?’
정말로. 왜 아직 반응이 없지?
멍한 눈으로 선물상자를 응시하면서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움직이는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 너 뭐하냐느니 그럼 이제 뽑겠다느니 뭐라도 얘기하면서 꺅꺅 시끄러워야 할 녀석들인데.
왜 조용하지? 고장 났나?
침을 꿀꺽 삼켰다. 쟤네가 갑자기 조용해진 건, 내가 눈을 돌리고 난 다음부터다.
그럼 내 눈이 뭔가 상관이 있을 거다.
……그러고 보니. 감옥에서 비스크를 만났을 때도 내가 본 다음부터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 방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인형들은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본 다음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말은 내 시선이 떨어지면 녀석은 다시 멈춘다는 소리인가? 지금 이 상황처럼?
그렇다면 지금이 찬스다. 결박된 다리와 팔을 흔들어봤다. 아까보다 느슨해지긴 했지만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카드 패를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묶여 있는 왼 다리 쪽으로 팔을 뻗었다.
손은 수갑으로 묶여 있으니 풀 수 없다 쳐도, 다리는 밧줄 같은 거로 묶여 있으니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매듭을 찾기 위해 밧줄 위를 열심히 더듬었다.
……매듭이 없다. 이럴 수가 있나? 끈 재질도 단단해 손으로는 절대 풀 수 없을 것 같다. 주변에 날카로운 것도 없고.
하는 수 없이 다시 팔을 들어 테이블 위를 더듬어, 내가 내려놓았던 카드 패를 찾았다.
어쩌지. 어떡해야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순간 어떤 생각이 번뜩였다. 게임 시작 전에 룰 같은 거 따로 안 말했지?
그냥 단순하게 ‘마지막에 조커를 가진 사람의 패배’라는 내용으로 게임 하고 있었던 거지?
룰이 없는데 반칙 좀 하면 뭐 어때? 애초에 반칙이랄 걸 정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카드를 바꿔놓든 말든, 바꾸기 전에 제지를 못 했으면 그걸로 끝이잖아?
이런 억지스러운 논리가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녀석들은 어린애 같고 단순한 녀석들이다.
뻔뻔하게 모른 척 밀고 나가면 통할지도 모른다. 그럴 필요도 없이 게임 마지막에 조커를 들고 있는 거로 고장이 나는 거라면 더더욱 내겐 유리하고.
토끼의 카드가 있는 쪽으로 팔을 뻗었다.
손끝에 극세사 천의 부드럽고 푹신한 느낌이 전해졌다. 손을 천천히 옆으로 옮기며 내가 닿은 곳이 어디쯤인지 파악했다.
자수의 조금 단단한 느낌이 전해져 와 내가 토끼의 눈을 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형의 눈일 뿐이지만 이 녀석이 보고 움직였던 녀석인 걸 상기하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당장이라도 손을 떼고 싶은 걸 참으며 둥근 턱의 곡선을 따라 손을 아래로 내렸다.
손이 얼굴과 어깨가 맞닿은 부분의 봉제선을 훑었다. 토끼의 어깨로 내려오고 팔을 따라 쭉 뻗어 겨우 카드에 닿았다.
토끼의 손에서 카드를 빼 내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다시 테이블 위를 더듬어 내 카드를 찾았다.
스페이드 J 두 장과 조커가 모두 내 손 안에 있다.
─ 지금 무슨 상황이야?
시야에 남은 카드가 모두 들어오자 한들이 다시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한들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고 조커를 골라내 다시 팔을 뻗었다.
토끼를 보지 않고 카드를 다시 끼워 넣는 건 카드를 빼앗는 것보다 힘들었다.
─ 불안하네. 이게 통할까?
‘통하길 바라는 수밖에.’
카드를 꽂는 손이 자꾸만 허공을 갈랐다. 이 녀석 손이 어디 있는 거지? 식은땀이 났다.
─ 통한다 치더라도. 쟤네가 가만히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토끼만 망가뜨리면 팔은 빼낼 수 있을 것 같아. 몸이 또 작아지면.’
다리를 묶은 것에 비해 수갑은 생각보다 팔을 꽉 조이고 있진 않으니까.
당장은 그것보다는 토끼에게 조커를 들려주는 것이 문제였다. 자꾸만 실패하고 미끄러지는 손에 점점 초조해졌다.
혹시라도 카드를 놓치지 않도록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제발 들어가!
다시 한번 토끼의 손이 있다고 추정되는 곳에 카드를 꽂은 순간, 힘이 들어간 손이 나도 모르게 토끼의 몸을 쳐버렸다.
스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 털썩, 하고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토끼가 의자에서 넘어졌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도 모르게 카드를 놓고 토끼 쪽을 쳐다봐버렸다.
넘어진 토끼 위로 조커 카드가 팔락팔락 가볍게 떨어지고 있었다.
내 시선을 받은 토끼가 다시 살아나 고개를 돌려 떨어지는 카드를 바라봤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토끼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끔찍한 비명에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어찌할 바를 몰라 그대로 몸을 굳힌 채 누워 비명을 지르는 토끼를 내려다봤다.
여유롭게 떨어져 내린 조커 카드가 토끼의 얼굴을 덮은 순간, 토끼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정적이 이어졌다. 한참이나.
“……렸어.”
“……뭐?”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 겨우 토끼에게서 시선을 떼고 비스크 쪽을 바라봤다.
비스크의 눈 아래 물감이 엉망으로 번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란 걸 뒤늦게 눈치챘다.
“망가뜨렸어. 곰돌이도 토끼도. 내 친구들…… 망가뜨렸어망가뜨렸어망가뜨렸어망가뜨렸어망가뜨렸어망가뜨렸어!”
비스크가 앉은 자리에서 덜커덕거리며 몸을 떨더니 순간 온몸의 움직임을 멈췄다.
심상치 않다. 나는 결박이 풀린 양다리로 발버둥 치며 묶인 손을 풀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갑을 잡아당겼다.
비스크가 정면에 있는 날 바라보며 외쳤다.
“너 때문이야!!”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비스크가 테이블 위에 엎어져 내 머리가 있는 쪽으로 팔을 뻗었다. 위험하다거나 무섭다거나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비스크의 차가운 손끝이 내 이마에 닿은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시야가 급변했다.
뭐지? 당황해 아무 생각도 못 하고 있던 나보다 한들의 판단이 빨랐다.
─ 빨리 도망가!
한들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의자 아래로 뛰어내리면서, 뒤늦게 내가 인형의 크기 정도로 작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의자가 높아 의자 아래로 떨어졌을 때 ‘똑각’하는 소리가 들린 기분이 들었다. 발목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발목을 접질렸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발목을 살필 겨를도 없이 반대쪽에서 쨍!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스크가 의자 아래로 떨어져 엎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몸 왼쪽 부분에 잔뜩 실금이 가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비스크가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내 쪽으로 기기 시작했다.
“돌려놔돌려놔돌려놔돌려놔!”
─ 눈 돌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한들의 외침을 따랐다.
“돌…… 려…… 놔…….”
비스크가 있던 쪽에서 숨을 들이켜며 말하는 듯한 꺽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을 기는 소리도 아주 느려졌다.
내가 보지 않아도 움직일 수는 있지만, 내 시선이 닿으면 피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선물상자 쪽으로 향했다.
이 방 안에 문 같은 건 없었다. 있다 치더라도 지금 상태론 열 수 없다.
그렇다면 몸을 숨길 목적이든 다른 길을 찾아볼 목적이든, 사람의 크기였을 땐 볼 수 없었던 곳을 찾아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쪽에 느리지만 꾸준한 기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원래대로 돌려놓으라는 원망의 목소리 역시.
비스크의 움직임이 느려졌더라도 체구 차이가 너무 크다. 방심할 순 없다.
이를 악물고 뛰어 선물상자의 틈으로 들어갔다.
선물상자 사이의 좁다란 길을 뛰며 슬쩍 뒤를 돌아봤다. 선물상자를 걷어내며 기어오는 비스크 인형의 기괴한 모습에 식겁해 다시 앞을 바라봤다.
저 앞, 상자들 사이에 가려져 있던 곳에 쥐구멍 같은 것이 보였다.
등을 훑는 차가운 느낌에 덜덜 떨면서 쥐구멍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쿨럭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 풍경을 봤다기보단, 이번엔 어떤 녀석이 튀어나올지 불안해 주변을 둘러본 거였다.
“……?”
아무도 없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든 해 질 녘의 숲속. 저 멀리서 새 울음소리가 울리는 것 외에는 고요했다.
그제야 아래를 내려다봤다. 발아래 익숙한 종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연핑크 배경에 흰 꽃이 그려져 있는 평범한 상자가.
상자 뚜껑이 스르르 미끄러져 떨어졌다.
상자 안쪽엔 내가 아까까지 있던 방 안의 풍경이 미니어처로 재현돼 있었다. 상자 더미에 깔려 엎드려 있는 비스크 인형을 잠시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 두 시 사십 분이야.
‘……고마워.’
─ 빨리 나와야 하는데. 이번엔 뭔지 모르겠네.
숲을 둘러봤다. 정말로 조금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빰! 하며 누군가 튀어나와 곤란한 과제를 내줄 것 같은데 그런 낌새가 없다.
불안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통증에 움찔 몸을 굳혔다. 접질린 발목이 그새 엄청나게 부어 있었다.
─ 으…… 아프겠다.
‘이번엔 안 뛰어도 되는 거면 좋겠어.’
─ 일단 뭐가 나와야 알지.
몸을 일으키는데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옆에 있는 나무를 짚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째 이 상태로 혼자 걷다간 금세 넘어질 것 같고. 그렇다고 기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환상공간은 무슨 환상공간이야. 개고생만 실컷 하는구만.
속으로 투덜거리며 마침 바닥에 뒹굴던 적당한 지팡이를 주워들었다. 걷기 쉽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버팀목으로 쓸 수 있었다.
한 발 한 발 느리게 내디디며 주변을 살폈다.
마냥 환하지도 마냥 어둡지도 않은 어중간한 시간. 곧 어두워질 것을 알리는 노을이 꼭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죽일 수도 없으니, 일단은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걷고 또 걸었다. 느린 걸음이지만 멈춰서지 않고 꾸준히 걸었다.
이상할 정도로 숨이 차올랐다.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 괜찮아? 왜 그래?
‘모르겠어. 너무 힘들어.’
─ 그 정도로 걷진 않았잖아.
코끝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쉬지 않고 걸었지만 끽해야 이삼십 분 정도 걸었을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힘들어서 기절할 것 같을 정도로 걷지는 않았는데.
‘몇 시야?’
─ 세 시 삼 분.
세 시간도 남지 않았다.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펴봤다.
어딜 봐도 똑같은 나무 똑같은 돌.
도시와는 달리 어딜 가나 거기서 거기 같아 보이는 숲의 풍경은 내 능력으론 분간하기 어려웠다.
얼마나 온 건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고 왜 아무도 나오지 않는 건지.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숲속. 조용하고 끝없는 공간 한가운데서 혼자, 아무런 방법도 모른 채.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거 아닐까? 그냥 이대로 나의 시간이 끝나가길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이 공간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끝나있던 게 아닐까.
아픈 발목을 붙잡고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종일 긴장했다 풀어지길 반복했더니 노곤하고, 실컷 굴러댔더니 온몸이 아픈 것 같고, 땀을 잔뜩 흘려 찝찝하고 냄새나고…….
뭐든 좋으니 그냥 제발 빨리 끝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앉아 있을 시간 없어.
‘알아.’
─ 그만 일어나야 해.
‘안다고.’
아는데. 힘든 걸 어떡해. 자꾸만 나약한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한심하지만 피곤함에 절은 머리가 자꾸만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했다. 감정적이고 회피적인 생각만 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 근데 왜 안 일어나?
한들이 조금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 나 역시 살짝 발끈했으나, 바로 대답하지 않고 심호흡했다.
진정하자. 너무 예민해진 것 같다. 최대한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려 노력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한들과 대화해봤자 싸우게 될 뿐이다. 나도 한껏 짜증이 오른 상태고, 한들 역시 내 태도에 울컥한 상태.
대화하는 것도 숨 돌릴 틈이 있어야 한다.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막막하다. 막막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끝이 있기는 할까? 여기서 벗어나도 또 다음이 있으면? 다음에 다음만 잇다가 그대로 끝나버리면?
땅을 내려다보며 숨을 헉헉 내뱉었다. 땀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다.
내가 여기서 또 주저앉아버리면 한들은 ‘왜 또 앉냐’는 핀잔을 줄 테고 그럼 나는 나대로 변명하고…… 싸우게 될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간 낭비하지 말자. 저기 저 나무까지만이라도 쉬지 말고 걷자. 그다음엔 또 저기 있는 바위까지만이라도.
정말로 아무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도대체 어떡하라는 거야. 어쩌란 거냐고.
막막하고 또 막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