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종이 상자 (3)
빽빽거리며 안 된다고 떼를 써대는 통에 머리가 살살 아파졌다. 한들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 뭐야. 완전 손해 보는 게임이잖아. 쟤네 널 탈출 시켜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그러게. 어떡해야 하지.’
─ 일단 방법이 없으니까 게임은 해야겠지만…… 게임 하면서 방법 좀 생각해 봐야겠네.
한들의 말대로 묶여 있는 상태니 일단은 게임을 하는 수밖에 없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밖으로 통하는 문은 보이질 않고 이기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카드를 모두 버리고 나니 내 손에는 여덟 장, 비스크와 토끼 손에는 아홉 장씩. 곰돌이 손에는 열한 장이 남았다.
시작은 내가 유리하다.
모두가 버릴 카드를 전부 버렸다는 걸 확인한 비스크가 특유의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 토끼, 사람, 곰돌이 방향으로 하는 거야. 재밌겠다!”
까딱 운 나빴다간 팔다리가 날아가는, 살벌한 카드게임이 시작됐다.
토끼가 내 카드에서 클로버 2를 가져가 자기 패에 넣었다.
토끼의 차례가 끝난 것을 확인하고 곰돌이의 패에서 하트 3을 가져왔다. 짝이 맞는다.
하트 3을 버리고 나니 이제 손안엔 카드가 딱 두 장 남아있게 됐다.
녀석들보다 내가 앞서있다. 이번 판은 다행히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얻는 거 없이 또 다음 판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 좋은 생각이 나질 않네.
‘나도 그래.’
이길 수 있어도 막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위험을 넘어야 하는 상황이 날 정신적으로 지치게 했다.
슬쩍 고개를 들어 인형들의 얼굴을 살폈다. 포커페이스라고 해야 할지, 인형이라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질 않았다.
검은 실로 자수를 놓아 만든 곰돌이와 토끼의 눈엔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섬세하게 그려진 비스크의 눈 역시 마찬가지.
인형 특유의 귀엽고 섬세하고 하지만 정적인 무생물다움이 나를 기죽게 했다.
─ 뭐, 일단 힘내.
한들의 요란 떨지 않는 담백한 응원이 그나마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줬다.
스페이드 8 두 장을 내려놓는 것으로 내 차례가 완전히 끝났다. 인형들은 아직 손에 카드를 쥐고 있었다.
비스크 인형이 나를 보고 불만을 표했다.
“잉!”
투정을 부리듯 발을 구르며 우는 소리를 냈다.
“사람 벌써 끝나버렸어!”
비스크의 징징거림을 무시하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긴장이 다소 풀려서 그런지 앉은 자세랄까 앉은 자리가 묘하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한껏 힘이 들어갔던 어깨에 의식적으로 힘을 뺐다. 어깨가 뻐근해 묶이지 않은 왼팔로 양어깨를 통통 두드렸다.
이 와중에도 비스크는 내가 가장 먼저 이겼다는 사실이 분한지 찡찡찡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토끼와 곰돌이도 비스크에게 동조한 건지 함께 목소리를 냈다.
“또 해! 또 해! 왼 다리 갖고 싶어!”
“다시 해! 오른 다리 가질 거야!”
내용이 살벌한 어린애 투정에 살짝 질려 지친 목소리로 반박했다.
“일단 너희끼리 먼저 끝내야 할 것 아냐.”
어차피 이 판은 내가 이미 이겨버렸고 더 해봤자 아무도 목적 달성은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쟤들의 주장대로 여기서 접고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게 시간 절약이 될 수도 있겠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상황이 단 하나도 개선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일단 중간중간 숨 좀 돌리고 싶기도 하고.
여기를 빠져나갈 단서가 꼭 카드 게임 속에 있다는 확신도 없고.
인형들은 내 말에 납득한 듯 실망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자기들끼리 도둑 잡기를 재개했다.
나는 몸에서 힘을 빼고 앉아 녀석들이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예쁘고 귀여운 인형들이 알록달록한 방에서 자기들끼리 카드 게임을 하는 모습…….
꼭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손발이 묶인 내가 억지로 앉혀져 있지만 않았어도 그럭저럭 동화 같은 광경이었을까.
……내가 없었어도 무서웠을 것 같은데.
─ 음…….
절묘한 타이밍에 고민하는 듯한 한들의 목소리가 들려, 혹시 내 생각이 그대로 한들에게 전해졌나 싶었다.
딴생각한다고 한소리 들으려나. 하지만 그건 아닌 듯 한들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뭔가 이상한데.
‘뭐가?’
멍하니 딴생각을 하는 사이 한들은 뭔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잠시 말이 없던 한들이 긴가민가한 기색으로 말했다.
─ 뭔가 보이는 게…… 네가 자세 바꿔서 그런가? 자세 바꿨지?
‘응. 힘 빼고 의자에 기댔는데.’
─ 기분 탓인가. 아냐, 일단 좀 더 보고 확실해지면 다시 말할게.
‘그래.’
뭔가 변화가 있었나? 주변을 살폈지만 나는 별다른 변화가 있었는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한껏 긴장하고 있어 주변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한들은 나와 달리 차분한 상태로 내 시야를 공유하고 있었을 테니, 한들이 뭔가 느꼈다면 정말로 뭔가가 달라졌을 확률이 높다.
그게 뭘까. 분명히 내가 보고 있던 것이었을 텐데 지금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꺅!”
내가 생각하는 사이 결국 곰돌이가 최후를 맞이했는지 토끼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카드 한 장을 손에 쥔 곰돌이를 보며 토끼와 비스크가 두 팔을 쳐들고 환호하고 있었다.
“예이! 내가 이겼다!”
“예이! 토끼가 살았다!”
비스크와 토끼가 두 손을 마주치며 난리를 쳐대는 동안, 곰돌이는 카드 한 장을 들고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 인형 두 구는 완전 신이 났는데 쟤는 왜 “우잉”이나 “이잉”거리지 않고 가만히 있지? 불안하게. 투정을 부려야 할 타이밍인데.
……설마 분노조절장애처럼 갑자기 고개 쳐들고 깽판 부리는 거 아니겠지?
인형들끼리 싸워서 자기들끼리 자멸해준다면야 땡큐지만, 나 지금 결박된 상태인데. 그렇게 되면 나는 지금 답이 없는데…….
“고, 곰돌아……?”
네 친구들은 널 전혀 신경도 안 쓰는데. 왜 내가 걱정하는 것처럼 부르고 앉아 있어야 하는 거지.
조금 자괴감이 들었지만 목숨이 걸려 있는 문제라 가만히 곰돌이의 눈치를 살폈다.
“야, 곰돌아?”
내가 두 번째로 곰돌이를 부른 순간 곰돌이가 대뜸 고개를 쳐들어 휙 나를 쳐다봤다.
“힉…….”
그 비정상적으로 빠른 동작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니나 다를까 곰돌이의 몸이 발작하는 것처럼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곰돌이 본인도 스스로의 움직임이 제어가 안 되는 것처럼 머리를 정신없이 흔들며 말하기 시작했다.
“져져져져져졌…… 다. 졌어졌어졌어졌어졌어졌어. 토토토끼 조조조조조조조커 토토토토토토끼가가가가가…… 오른, 오른 다리 가가갖…… 조커조커조커 왜, 왜, 왜…….”
─ 으악. 쟤 또 왜 저래.
‘몰라!’
불안한 눈으로 곰돌이의 발작을 지켜보는 도중에도 비스크와 토끼는 여전히 신난 듯 꺄꺄 신나 하고 있었다.
야! 난 지금 아수라장 벌어지는 거 싫다고!
초조한 마음에 상황파악을 못 하는 인형 두 구에게 윽박지르듯 소리를 높였다.
“지금 그러고 있을 때야? 곰돌이가 이상하잖아!”
그러자 비스크와 토끼가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휙 나를 돌아봤다.
그린 듯한 인형의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것들은 인형이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상기시켜주는 그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몸이 움찔 떨렸다.
잠시 침묵이 유지됐다. 곰돌이의 발악 같은, 고장 난 녹음기에서 나오는 것 같은 이상한 말들의 나열이 방을 가득 메꿨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던 비스크가 다시 밝은 얼굴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음판 해!”
그 순간 격정에 휩싸였던 곰돌이의 몸이 축 늘어졌다. 곰돌이가 들고 있던 조커 카드가 팔락팔락 힘없이 바닥에 가라앉았다.
오른 다리의 결박이 풀렸다.
새롭게 나온 트럼프 카드가 비스크의 앞에는 열일곱 장, 나와 토끼의 앞에는 열여덟 장이 놓였다.
두 구는 곰돌이가 도둑이 된 순간부터 곰돌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곰돌이가 갖고 싶다고 주장했던 오른 다리의 결박도 풀려버렸고…….
잘된 건가? 좋은 신호겠지? 이대로 마지막에 도둑이 되는 녀석이 그대로 끝나버리는 시스템이라면…….
계속 이기면 빠져나갈 수 있다. 계속 이길 것이란 보장은 없지만, 이 판에서 질 확률은 1/3이잖아? 괜찮을 거다.
괜찮을 거야. 괜찮아, 괜찮아. 손을 뻗어 앞에 놓인 카드를 집었다.
내 앞에 놓인 카드를 잡는 손이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 괜찮아?
‘모르겠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이대로 그만둬버리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불안해졌다. 친구들이 곧잘 하던 표현처럼 멘탈이 터진 것 같았다.
후우, 길게 숨을 내뱉고 눈앞의 카드에 집중하려 애썼다.
약해지지 말자. 흔들리지 말자. 이대로 환상 속에 갇히는 건 사양이다.
이렇게 젊고 창창한데 이딴 곳에서 끝나고 싶지 않다.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가 잠시 멈추고 길게 내쉬었다. 의식적으로 천천히 호흡하려 애쓰며 긴장을 풀었다.
하트 2 짝을 골라내고, 다이아몬드 5 짝을 골라내고. 놓치는 것 없이 짝이 맞는 카드를 전부 솎아내려고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다 됐다!”
“나도!”
비스크와 토끼가 각각 열한 장, 열두 장을 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도 입을 열었다.
“나도 됐어.”
비스크가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하자! 나, 토끼, 사람 순서야!”
“좋아!”
인형들은 곰돌이를 완전히 없는 존재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나는 슬쩍 늘어져 있는 곰돌이를 쳐다보고 자세를 바로 했다. 긴장하지 말고 집중하자. 죽기 싫으면 이겨야 해.
비장한 얼굴로 인형들을 쳐다보고 다시 카드로 시선을 돌린 순간, 한들이 뭔가 알아낸 듯 소리를 냈다.
─ 아!
‘왜 그래?’
─ 역시 이상해.
‘그러니까 뭐가?’
─ 넌 긴장해서 눈치 못 챈 모양인데.
“그러니까…….” 하며 한들이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사이 토끼가 내 카드 패에서 카드를 빼 갔고, 나도 손을 뻗어 비스크의 패에서 카드 한 장을 재빨리 빼 왔다.
비스크에게서 가져온 카드를 확인한 순간.
─ 책상이 뭔가 높아졌어. 쟤네들 키도 더 커진 것 같고. 꼭 네가 줄어든 것처럼.
한들의 말에 나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스크와 토끼가 내 표정을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왜 그래?”
“조커 뽑았어?”
“조커 뽑았어!”
비스크의 발랄한 목소리에 아차 싶었다. 타이밍 나쁘게 정말로 조커를 뽑았다.
비스크와 토끼가 신난 듯 꺅꺅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이 조커 가지고 있대요!”
“조커는 사람한테 있대요!”
“…….”
조커를 카드 패 사이에 넣고 하나로 뭉쳐 간단하게 섞었다. 동요하지 말자. 내게 조커가 있는 것을 알아도 아직 카드는 많다.
지금 카드가 많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조커를 들켜도 치명적인 실수는 아니다.
─ 어…… 미안.
‘괜찮아.’
한들 역시 타이밍이 나빴다는 걸 알았는지 순순히 사과했다.
하지만 정말 괜찮다. 아직은. 그것보다는 시야가 낮아진 것 같다는 한들의 말이 신경 쓰였다.
그러고 보니 앉은 게 갑자기 불편해진 것 같았는데. 그래서였을까?
다리를 살짝 움직여봤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꽉 묶여 있던 결박이 조금 느슨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뭔가 달라졌다. 이제서야 눈치채다니. 한들이 아니었으면 전혀 몰랐을지도 모른다.
내가 작아지고 있는 건가? 왜?
작아진 타이밍은 아마도 카드 게임에서 이긴 순간일 것이다. 이기면 작아지는 건가? 확실치 않다.
나쁜 신호일지도 모른다. 내가 점점 소멸하고 있다든가 하는…….
하지만 이대로 작아진다면 결박에서 벗어날 수는 있겠지. 그 후가 문제긴 하지만.
‘근데 지금 몇 시야?’
─ 오후 한 시 오십이 분.
벌써 오십이 분이 지났단 말이야? 뭘 했다고? 심장박동이 순식간에 확 빨라졌다.
시간 압박 같은 거 딱 질색인데. 입을 꾹 다물고 눈앞의 인형들을 노려봤다.
지게 만들어서 고장 나게 하든 내가 작아져서 빠져나오든 일단 빨리 벗어나야 한다.
결박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다음 방법이 막막하지만, 인형이랑 싸우든지 방이라도 뒤져보든지 하려면 이 자리에서 풀려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도둑 잡기에 임하는 와중에도 토끼는 조커를 귀신 같이 피해가며 카드를 가져가고 있었다.
무슨 방법을 쓰든지 일단은 여기서 이겨야 하는데. 제발.
“자, 사람 차례야!”
팔을 뻗는 비스크의 카드 패로 향하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비스크가 클로버 10 두 장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이제 비스크의 손엔 카드가 남아 있지 않다.
“와! 이겼다!”
신나 함성을 내지르는 비스크에게서 눈을 떼고 토끼를 바라봤다.
토끼의 손에 남은 것은 세 장. 내 손에는 네 장이 남았다. 두 번째 게임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초반에 내가 비스크에게서 가져온 조커는 한 번도 이동하지 않고 여전히 내 손에 들려있는 채.
이대로 조커를 빼앗기지 않고 게임이 끝나버리는 불길한 미래가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토끼가 내 손에서 클로버 A를 뽑아갔다. 클로버 A 두 장이 트럼프 카드 더미 위로 떨어졌다.
이제 토끼는 두 장, 나는 세 장.
내가 토끼 손에서 무슨 카드를 뽑든 짝이 맞을 테니 토끼는 한 장, 나는 조커까지 두 장이 남게 되는 상황이 온다.
마지막에 토끼가 조커를 뽑지 않으면 정말 끝이다.
이대로 운에 맡겨도 정말로 괜찮은 걸까? 혹시 이 녀석들이 뭔가 사기를 치고 있는 건 아닐까?
흘끗 토끼를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친 토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안 뽑아?”
“……기다려봐.”
자수 실로 그려진 아기자기한 얼굴에선 감정의 낌새를 읽어내기 어려웠다. 귀엽고 순진해 보이는 그뿐인 얼굴.
꼭 정해진 대본을 읊는 것 같은, 어린이 프로그램 특유의 가식적이고 과장된 느낌이 들었다.
……잠깐, 자수실로 그려진 얼굴? 아까 생각했던 대로 눈에는 당연히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눈…… 눈이라.
이 녀석들의 감각기관이 과연 나와 같을까? 혹시 나보다 더 민감하고 뛰어나다면? 내 눈동자에 비친 카드를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면?
아까는 운 좋게 내가 조커를 가져가지 않아서 이겼을 뿐이고, 혹시 조커를 뽑은 순간 내 패배가 확정된 거라면.
벌써 벼랑 끝이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여기서 지면 오른팔하고 왼 다리가 날아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