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귀신 소동 (3)
세훈이 우리를 보고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지태가 크게 걱정했던 것 치곤 다행히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많이 걱정하신 것 같네요.”
보던 책을 내리며 말하는 세훈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다친 건 괜찮아요?”
세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좀 놀라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게…….”
지태의 질문에 세훈이 표정을 흐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리에 누워 낮에 세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세훈은 혼자 길을 가다가 봉변을 당했다고 했다. 그것도 악귀한테.
다행히 근처에 있던 가윤의 도움을 받아 크게 다치지 않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요즘 세훈 말고도 이런 식으로 습격받는 신도들이 많다고 한다.
이러나저러나 부지 안에 악귀를 불러내고 있는 건 나다.
처음 계획을 세웠을 때도 사람들이 어느 정도 다치는 것은 감수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이 다친 것을 보게 되니, 찝찝하고 죄책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형제님. 그만 불 끄겠습니다.”
지태의 말에 잡념이 깨졌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세훈이 없을 침대 일 층을 의식했다.
세훈은 당분간 기숙사에 돌아오지 않고 치료를 받겠다고 했다.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이 영 가시질 않을 것 같았다.
* * *
남자는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서 웃고 있다. 저 녀석 때문에 이 답답한 곳에서 나갈 수 없게 됐다.
“미안. 답답하지?”
남자가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나와 눈을 맞췄다.
생김새를 보니 나이가 많은 녀석은 아닌 것 같다. 남자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계속 내게 말을 걸었다.
“교주를 압박할 게 필요해. 너희가 여기저기서 말썽을 좀 피워줘야겠어.”
그딴 이유로 이딴 곳에 갇혀있어야 한다니. 분하고 분해서 남자를 노려봤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기도를 하는 내내 꿈에 대해 생각했다.
물귀신의 꿈을 통해 결계를 친 사람이 젊은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생김새까지는 볼 수 없었으니 여전히 정체를 파악할 수는 없는 상태지만, 목적이 교주라는 사실 하난 알게 됐다.
귀신으로 교주를 압박하려는 계획은 처음 내가 세웠던 계획이랑 같았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더 질이 나쁜 것 같기도 했다.
그 남자는 잡귀들을 이용했고 나는 악귀를 이용하려던 것이었으니까.
교주를 압박해서 뭘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손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적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지만.
전에 세훈과 지태를 통해 확인해 봤을 때 간부 중엔 영적인 능력이 있는 남자가 없다고 했다.
아마 그냥 신도, 그것도 기숙사생일 확률이 높다.
그래 봤자 단서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다.
층 이동은 자유롭게 가능하니 삼 층만 제한적으로 생각할 순 없고, 지금은 퇴실한 상태일 가능성도 있으니까.
어제 지태가 말했던 벤치 귀신을 찾아가 봐야겠다. 목각 귀신 쪽도 더 적극적으로 해결해보고.
그러면 더 많은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 개째 찾은 별 그림을 지우며 몸서리쳤다.
익숙해지기 어려운 소름 끼치는 감각이다.
내가 그림을 찾아다니며 지우고 있는 걸 알았는지, 목각 귀신이 이쪽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나도 마주 꾸벅여줬다.
바로 벤치 귀신을 찾아가 볼까도 했지만, 운동장엔 사람이 꽤 많아 밤에 몰래 가기로 했다. 낮에는 강제 참가해야 하는 수련 시간이 있기도 했고.
운동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교주의 개인 주택도 있으니, 그 근처를 몰래 살펴보기에도 밤이 더 좋을 테고.
물론 감시는 있겠지만…… 조심하면 어떻게든 될 거다. 당장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니니까.
삼 층에서 별 그림을 더 찾아보고 싶지만,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수련에 참여해야 할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숙사를 나서 수련장 쪽을 향해 걸었다.
당장 걱정은 밤에 어떻게 기숙사 밖으로 나갈지에 대한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지태는 코골이가 있어 깊이 잠들었는지 확인하기가 수월하다. 삼 층이라 애매하게 높으니 창문으로 나가는 건 좀 어려울 것 같고…….
“저기, 거기 가시는 갈색 머리 남자분.”
“네?”
한참 생각에 잠겨있다가,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키가 작고 곱슬거리는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가 반갑게 웃으며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얼떨떨해하며 마주 인사하자 여자가 조금 난감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혹시 바쁘세요? 약속에 늦었는데 제가 길을 잘 몰라서……. 여긴 뭐 지도 같은 것도 없고요.”
여기 신도가 아닌가?
신도라기엔 지금 여기가 매우 낯설어 보이는 모습이고, 외부인이라기엔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게 뭔가 이상했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 대답했다.
“어디 가시는데요?”
내 대답이 긍정적이자 여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나도 수련장에 가야 하지만,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까 여자를 데려다주는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여기 교주님 집이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여자가 찾는 장소가 뜻밖이라 나도 모르게 놀란 얼굴을 했다. 사실 방금까지 생각하던 게 있어 찔린 것도 있었다.
“거긴 왜……?”
내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자가 당황해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일 때문에 여기 교주님하고 개인적인 약속이 있어서요. 그런데 제가 길치라 길을 찾을 수가 없어서…….”
일? 기자 같은 건가?
나는 찔려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여자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교주의 저택 쪽으로 걷기 시작하자 여자도 옆에 붙어 따라오기 시작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함수화라고 해요.”
“한가람입니다.”
“가람 씨구나. 가람 씨는 여기 입교하신 지 오래되셨어요?”
“아니요. 며칠 안 됐어요.”
초면에 길을 걷는 것인데도 별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수화가 붙임성이 좋기 때문일까.
“어쩌다 입교하게 되신 거예요?”
이런 질문을 하는 걸 보면 역시 기자일까? 교주와 약속이 있다고 하니 호의적인 기사를 쓰는 쪽이겠지?
나는 괜한 소리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대답했다.
“그냥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요.”
“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나요? 초면에 실례했네요.”
“아니, 괜찮아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금방 교주의 저택이 눈에 보였다. 곧 있으면 도착할 것 같다.
내가 보는 곳을 확인하고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수화가 다시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긴가요?”
“네.”
수화가 갑자기 발을 멈췄다. 나도 멈춘 채 수화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왜 갑자기 멈추지? 내 의문을 알아챈 듯 수화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데려다주셨으니 감사의 의미로 말씀해드릴게요.”
“뭘요?”
수화가 주변을 둘러본 뒤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교주의 저택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악령석을 만드는 사람이에요. 교주의 의뢰를 받고 왔죠.”
“네?”
악령석. 익숙한 걸 넘어 지긋지긋한 이름에 살짝 멍해졌다.
수화가 시선을 돌려 내 눈을 바라봤다.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이었다.
나는 잠자코 수화의 말을 기다렸다.
“악령석은요, 내성이 생기거든요.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 많은 악령석이 필요하게 되죠. 정말 질 나쁜 장난감 아니에요?”
수화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가방을 고쳐 맸다.
“그리고 전언도요. 한주가 데리러 갈 테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으래요. 가윤 언니도 믿지 말라던데요?”
“……당신 누구예요?”
대뜸 악령석 이야기를 하더니 이번엔 한주와 가윤을 언급한다. 단숨에 경계심이 심해졌다.
수화는 내 반응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이름은 함수화고, 악령석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니까요. 한주나 가윤 언니하고는 동업자라 예전부터 좀 알았고요.”
“일부러 나한테 접근한 거예요?”
“아니요. 우연이지만…… 딱 보니 알겠던데요. 그 정도로 악귀 꼬여내는 체질은 별로 없거든요. 한주나 가윤 언니가 관심 가질 만하네요. 발등에 불 떨어진 교주도요.”
수화가 교주의 저택 쪽으로 걷기 시작하며 말했다.
“여기서부턴 혼자 갈게요. 참고로 난 당신들 일엔 별 관심 없어요. 한주의 말도 그냥 마침 만나서 전해준 것뿐이고……. 교주나 가윤 언니한텐 쓸데없는 얘기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가볼게요. 감사했어요.”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교주의 저택 쪽으로 걷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수화가 말한 그대로, 떠본다거나 함정에 빠뜨리려는 기색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 다 믿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수화가 전하고 간 정보들은 꽤 컸다.
악령석에는 내성이 생긴다는 것, 교주가 악령석을 만드는 수화를 불렀다는 것, 한주의 전언…….
수화의 말대로라면, 힘이 약해진 교주가 지금 가진 악령석의 힘을 감당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더 많은 악령석을 만들려고 하고 있단 얘기다.
새로운 악령석의 재료는 아마도 나를 이용해서 모으고 있을 테고.
……이게 사실이라면 연주가 위험하다.
예린으로 봉인을 더한 악령석 외에 새로운 악령석이 더 생겨난다는 이야기니까.
그 뒤에 교주가 어떻게 할지는 뻔했다.
한주가 곧 데리러 온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이상한 말은 가윤을 믿지 말라는 것. 한주는 여기에 가윤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믿지 말라니?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수화는 ‘한주나 가윤 언니하고는 동업자’라고 말했다. 자신을 퇴마사가 아니라 굳이 악령석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가윤도 악령석을 만드는 사람이 된다. 악령석을 그렇게도 경계하는 가윤이 악령석을 만드는 동업자라니?
내가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걸까. 아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악귀를 부르는 체질이고, 이 체질을 이용해 교주는 새로운 악령석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나를 이곳에 넣은 건 교주가 아니라 가윤.
가윤은 연주를 구하고 날 한주에게서 떼어 놓을 요량으로 날 여기에 넣었다고 말했지만…….
내가 가윤이라면 날 여기에 넣어놓진 않았을 거다. 가윤은 교주를 막을 목적으로 여기에 들어온 거니까.
오랫동안 악령석을 접해온 가윤이라면 알았겠지. 힘이 약해진 교주가 더 많은 악령석을 갈구하게 될 것이란 걸.
날 붙여놓는 건 교주에게 그럴 기회를 만들어 주는 지름길이란 걸.
의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혼자 생각만 해선 풀리지 않을 문제였다.
결국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밤이 됐다.
지태의 요란스러운 코골이 소리를 들으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한주도 가윤도 뭐 이리 비밀이 많은지. 괜히 사이에 끼어서 고생하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살짝 열어 복도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 영광의증명은 소문으로 들어온 다른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보다 감시가 덜한 게 참 다행이었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의미고 실제로도 그런 감이 있지만.
슬쩍 밖으로 나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살금살금 복도를 걸으며 나온 김에 주위를 둘러봤다.
아니나 다를까 옆방 문 옆에 별 그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조심히 다가가 그림을 지웠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제 삼 층 복도의 별 그림은 두 개 남았다.
찝찝한 감각이 남은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소등시간이 한참 지난 새벽이라, 부지 내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딱히 없다.
다만 아예 감시를 포기하지는 않았는지 순찰을 하는 듯한 무리가 종종 있어 방심할 수 없었다.
최대한 엄폐물 옆에 붙어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거리를 걸었다.
탁 트인 운동장에 들어가야 하는 게 문제지만, 목적이 있는 벤치는 운동장 안쪽에 있으니 도착하기만 하면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을 거다.
신중하게 걷느라 시간을 꽤 들여 벤치까지 얼마 남지 않은 위치에 다다랐을 때, 벤치에 누군가 앉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언뜻 사람처럼 보였으나 그간 당해온 게 있어 감이 늘었는지 단번에 귀신이란 확신이 들었다.
근처까지 다가가 귀신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반팔 티에 츄리닝 바지를 입고 있는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의 모습.
봄 치고 차림이 가볍지만 운동장이다 보니 그렇게 특이해 보이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새벽만 아니었다면.
남자는 가만히 땅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내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알아챘는지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내가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하자 잠시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하던 남자가 마주 고개를 꾸벅여줬다.
“예, 안녕하세요. 제가 보이시나 봅니다?”
다행히 말이 통할 것 같은 상대였다. 무섭지도 않고 정보도 얻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남자의 옆에 앉았다.
“퇴마 사무소 직원이거든요.”
“아…… 날 퇴마하러 오신 겁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저한테 그럴 능력은 없어서…….”
“난 또. 날 보고 놀라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결국 누군가 온 줄 알았는데.”
정말로 그냥 평범한 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이 났다. 악의 같은 것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그런데도 이 남자의 귀신 소문이 퍼졌다는 게 신기했다.
내 표정에 의문이 드러났는지 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 눈에 내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나 봅니다. 그 사람이 다녀간 다음부터 그렇더라고요.”
그 사람. 남자도 누군가를 만난 다음부터 곤란을 겪고 있는 듯하다.
이 남자가 말하는 그 사람도 아마 교주를 압박하기 위해 귀신들을 묶어두고 다니는 젊은 남자겠지.
“그 사람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요. 젊은 남자였나요? 별 그림을 그리는 남자 말이에요.”
“아십니까?”
“다른 귀신들을 통해서 좀 알게 됐어요. 지금은 그 사람의 정체가 궁금해서 찾아다니는 중이고요. 선생님도 별 그림 때문에 여기 묶여 계신 건가요?”
내 질문에 남자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요.”
“아니라고요?”
아까는 누가 다녀갔다는 식으로 얘기해놓고?
남자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나는 원래부터 이 벤치에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요. 그런데 당신이 말하는 그 별 그림이 그려지고 나서부터는 사람들한테 내가 보이나 보더라고요.”
묶이게 된 것이 아니라, 보이게 됐다고.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지금까지는 단순히 귀신들을 한 장소에 묶어뒀다고만 생각해왔는데……. 생각해 보니, 단순히 묶어둔 정도로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초래하긴 어려웠을 거다.
그 별 그림엔 묶어두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기능도 있다는 의미다.
“이제 궁금한 건 더 없습니까?”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뇨. 좀 더 여쭤봐도 될까요? 선생님이 원하시면 별 그림도 지워드릴 수 있어요.”
남자는 말없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시선을 다시 처음처럼 땅으로 돌려버렸다.
“괜찮습니다. 나는 딱히 불편하지 않으니까. 궁금한 게 더 있으면 그냥 편하게 물어보세요.”
나는 감사 인사를 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생김새를 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 남자를 찾고 있어서요.”
“생김새라…….”
남자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젊은 남자였습니다. 당신 또래로 보였어요. 성실하고 성격 좋을 것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생긴 건 평범해서…… 뭐라고 설명하긴 어렵군요. 키는 보통이고 좀 마른 편이었는데. 아, 생김새 얘기는 아니지만, 여기의 높아 보이는 분하고 같이 있는 걸 몇 번 봤습니다.”
남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별다른 특징은 없는 사람인가 보다.
그런데 그것보다 높아 보이는 분들하고 같이 있는 걸 봤다는 부분이 걸렸다.
“높아 보이는 분이요?”
“예. 검은 생머리에 예쁘장하게 생긴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전엔 자주 같이 있는 걸 봤습니다. 사람들 잘 안 돌아다니는 밤에 주로.”
여자에 대한 특징도 평범한 편이었지만, 찝찝하게도 가윤의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설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