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신목 (4)
젖은 맨발이 찬 바닥에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숨죽여 웃는 것처럼 기이하게 떨리는 숨소리.
기척을 죽이고 카운터 뒤에 숨어 녀석의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녀석은 조금 뛰다 멈추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슬쩍 옆을 쳐다봤다. 동훈도 나처럼 긴장한 채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영문을 모르는 나와 달리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철떡거리는 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그와 동시에 비명 같은 웃음소리가 또다시 터져 나왔다.
불 꺼진 가게에 광기 들린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동훈이 내 손목을 꽉 잡더니 살금살금 이동하기 시작했다.
“안쪽, 탕비실로 갈 거예요.”
동훈이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빠르게 내게 전했다.
돌연 웃음소리가 멎었다. 그러자 동훈도 이동을 멈추고 몸을 벽에 바짝 기댔다.
나는 그저 동훈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빠른 발소리가 짧게 들리고 멈추고를 반복했다. 소리는 가까워지기도 했고 멀어지기도 했다.
저건 무엇이고 뭘 하는 걸까. 물어볼 수는 없다. 목소리가 들리면 녀석이 이곳을 눈치챌 테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들켜선 안 된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이해했다.
동훈에게 잡힌 손목이 으스러질 것 같이 아파 와서, 동훈이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손목보다도 빠르게 뛰는 심장이 더 아픈 나는 그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었고.
카운터 너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 그리고 가구와 함께 살덩이가 넘어지는 소리.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난 직후 카운터 벽이 쿵 흔들렸다. 그 소리에 몸이 절로 튀어 올랐다.
조금이라도 놀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다시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그 소리를 신호삼아 동훈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운터 벽에서 몸이 멀어질수록 심장 소리가 커졌다.
몸을 기댈 엄폐물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엄청나게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서두르면 안 된다.
바닥을 기듯이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신중하게 이동했다.
탕비실 문턱을 코앞에 둔 순간, 웃음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녀석이 카운터 벽을 훑으며 몸을 일으키고 있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아래서부터 위로 벽을 훑는 젖은 소리가 들리고, 곧 턱 하고 무언가를 잡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한 동훈이 나를 돌아보며 무언가 제스처를 했다.
자신을 가리키며 숨을 멈춘 동훈이 이번엔 나를 가리키며 입을 막고 코를 움켜쥐었다. 따라서 숨을 참으라는 것 같았다.
나도 따라 숨을 참은 순간, 뒤에서
“히.”
하는, 떨리는 숨소리 같기도 웃음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숨을 참은 채인 동훈이 내 뒤의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동훈의 시선이 점점 움직이고, 찰딱거리는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녀석이 나와 동훈의 사이에 앉았다.
그냥 하나의 덩어리였다. 얇디얇은 다리가 달려있긴 하지만, 상반신은 덩어리라고 표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귀나 눈, 코, 입으로 추정되는 구멍이 뚫려있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촉수 같은 팔이 길게 늘어진 울퉁불퉁한 살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습이었다.
이 덩어리가 나와 동훈 가까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갸웃거리는 듯한 움직임.
간을 보는 듯 내 쪽을 쳐다보고 또 동훈 쪽을 쳐다봤다.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녀석에게서 눈을 뗀 동훈이 강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 한 마디, 신호 하나도 주고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이기 때문일까 동훈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절대 숨 쉬지 마세요. 움직이지 마세요.’
기껏해야 몇 초나 흘렀을까.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던 순간이 끝났다.
녀석이 다시 몸을 일으켜 카운터 밖으로 나갔다.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져 간다. 그리고 다시 들리는 웃음소리.
동훈과 나는 조심스럽게 숨을 내뱉고 헐떡거리는 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탕비실 창 밑에 몸을 바짝 붙였다.
탕비실은 가로등 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어 가게 안보다 조금 밝았다.
조심스럽게 메모지와 펜을 꺼낸 동훈이 녀석의 기척에 주의하며 무언가를 써 내리기 시작했다.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귀신. 시력 퇴화. 온도에 둔함. 청각 뛰어남.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림. 그 순간에만 움직여야 함. 움직임 없으면 가구와 생물 구분 잘 못 함. 한 장소에 1~3시간 머무르다 사라짐. 보기보다 예민하고 발이 빠름. 어설프게 도망치는 것보다 숨어서 버티는 것이 안전. ]
희미한 빛 아래서 급하게 흘려 쓴 글씨를 읽어야 했지만 어찌어찌 알아볼 수 있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니.
하긴, 확실히 규칙이 비슷한 것 같긴 했다.
술래가 보는 동안 움직여선 안 되고, 소리가 날 때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
내가 글을 읽는 동안 동훈은 웃음소리를 경계하며 우리 근처에 잡동사니들을 끌어다 놓았다.
귀신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곁에 있고, 허술하게나마 몸을 가려주는 것이 있어 마음이 좀 놓였다.
발소리는 가까워지기도 했고 멀어지기도 했지만, 녀석이 탕비실로 들어올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은신처를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밖에서 헤매는 소리가 주는 불안감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이대로 무사히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혹시나 녀석이 이곳에 들어오게 된다면, 좁은 공간에서 나가지 않고 줄곧 대치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
막연한 시간의 흐름이 자꾸만 잡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시간이 도대체 얼마나 흘렀을까. 녀석은 대체 언제 사라질까. 이 상황에서 도대체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지 모를 시간 동안 갑자기 기침이나 딸꾹질이 터지진 않을까 불안했다.
의식하니 괜히 목이 간질간질한 것 같았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침을 삼켰다.
나는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이런 상황을 또 겪고 있는 걸까.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가게 저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동훈의 손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 동훈을 보니 동훈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눈 가리면 안 돼요.’
그런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 같았다. 시야를 차단하고 어둠 속에서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절실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눈을 가리면 위험이 닥쳐도 반응하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곧 녀석의 상체가 탕비실을 빼꼼히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호흡이 멎었다. 동훈도 바짝 긴장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녀석이 여기로 들어오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벽에 어중간하게 걸친 신체가 녀석의 진입을 막았다.
녀석이 미끄러졌는지 그 자리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얇은 다리가 육중한 몸을 일으켜보려는 듯 파닥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뒤집힌 벌레처럼 기괴하게 몸을 흔들던 녀석이 촉수 같은 팔을 어딘가로 쭉 뻗었다.
몸이 질질 끌려가며 녀석이 다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행히 발소리가 멀어진다. 광기 들린 웃음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졌다.
“하아…….”
그 소리에 참았던 숨을 조심스럽게 내쉬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잡히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잡아먹히는 걸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타깃이 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는 걸까.
저 녀석들한텐 그딴 거 알 바 아니겠지. 귀신들의 불합리함이 사무치게 무서웠다.
동훈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탕비실 입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기가 약해 온갖 귀신에게 휘둘려왔다고 했다.
한주는 쓸 만한 귀신은 별로 없었다는 듯 말했지만, 이런 경험을 차고 넘치게 해왔을 것이다.
나와 달리 살아남을 방법을 열심히 연구해왔겠지.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그토록 빨리 반응하고 귀신의 정체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귀신은 나 때문에 불려온 걸까, 아니면 동훈 때문에 불려온 걸까. 그것도 아니면 우리 둘만 있었기 때문에 불려온 것일까.
어느 쪽이든 아마 내 책임이 더 크지 않을까.
이 시간까지 동훈을 붙들고 있던 건 나였고, 귀신을 부르는 힘도 내 쪽이 더 강하다고 했으니까.
그런 주제에 이런 식으로 도움만 받고 있다. 동훈이 아니었다면, 나는 벌써 죽지 않았을까.
이 순간, 스스로 몸을 지킬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게 못 견디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한주한테 물어봤으면 말해줬을지도 모르는데.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한주한테 연락해볼까? 녀석은 지금 밖에 있고, 기척에 주의하면 문자를 보낼 틈은 충분히 있을 것 같다.
아까 그렇게 나오긴 했지만, 한주 성격에 그딴 건 별로 신경도 안 썼을 테고.
나를 지켜주겠단 약속도 했으니 분명 나와 줄 것이다.
하지만 저번처럼 통신장애가 있다면. 아니, 분명히 통신장애가 있지 않을까.
한주한테 연락할 방법이 있었다면 동훈이 이미 하지 않았을까?
자꾸만 떠오르는 잡념의 강을 한창 헤엄치고 있는데, 갑자기 경쾌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내 호주머니에서.
화들짝 놀라 본능적으로 도망가려고 몸을 일으켰을 때, 녀석의 팔이 내 몸을 휘감았다.
뱀이 먹이를 조이듯 순식간에 몸을 꽉 죄어들었다.
“가람 씨!”
동훈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를 죈 팔을 떼어놓으려고 달려들었지만, 그럴 틈도 없이 동훈마저 녀석에게 붙잡혀버렸다.
“으윽……!”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압박감에 숨쉬기가 어렵다.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짧게 여러 번 숨을 들이켰다.
괴롭다. 아프다. 무섭다. 그런 원초적인 감정만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를 도우려 했던 동훈을 쳐다볼 여유조차 없었다.
의식이 점점 멀어진다. 흐린 시야에 녀석의 입이 크게 벌려지는 것이 보였다.
장정 둘 정도 충분히 삼킬 수 있을 만큼 큰 입.
저런 것에 먹혀 죽는 걸까. 이대로 죽는 걸까.
죽기 싫어. 살고 싶다. 살고 싶다고, 죽는 것은 무섭다고, 그런 감정만이 폭발적으로 솟아올랐다.
하지만 내 감정이 얼마나 강렬한 것이어도 포식자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것일 뿐.
약한 존재가 강한 존재에게 잡아먹힌다는 것은, 이렇게도 잔인한 일이었다.
까맣고 축축하고 절망뿐인 입속으로 몸이 점점 가까워졌다.
의식이 완전히 끊길 것 같은 순간,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빛이 보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술 밖으로 새어 나왔다.
“한…… 들…….”
그 순간 신목이 나에게 응했다.
한순간 눈앞이 점멸하는 듯하더니 몸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내가 내쉬는 숨에서 나무 향기가 났다.
밝은 초록이 방 안을 감싸 안고 있었다. 초록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빛.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그림자가 살랑거렸다.
청량한 나무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머릿속에 ‘한들신목 님’ 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목을 키운 염원들이었다.
한들이라고 하는구나, 네 이름.
그런 생각을 하자 어딘가에서 “그래.” 하는 응답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온갖 소리와 감정이 내게로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
소란스럽고 어지러운 세상의 소리 위로 외로움과 혼란이 솟아올랐다. 식은땀에 젖은 피부 위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나 자신을 잃을 것 같은 격정이 나를 뒤흔들었다.
나를 옭아맨 팔을 뿌리쳤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끔찍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혼란스러운 상태론 그 비명이 누구의 비명인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씨!”
어딘가 먼 곳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저 멀리 희미하게 깜빡이는 등대의 불빛처럼 들릴 듯 말 듯한 외침에 애써 귀를 기울였다.
“가람 씨!”
그 외침이 내 이름이라는 걸 인식한 순간, 첫 숨을 내쉬는 것처럼 멎었던 숨을 어렵게 내쉬었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심호흡했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도록 어지러운 마음을 억지로 억눌렀다.
이어져 있다는 느낌. 이어져 있다는 것 외에 이 감각을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한들의 강한 힘과 감정이 내 몸을 매개로 이곳에 강림해 있었다.
천천히 손을 내리고 탕비실 안의 상황을 살폈다.
놀란 얼굴로 날 응시하는 동훈에게 애써 이제 괜찮다는 눈짓을 보냈다.
바닥에선 녀석이 두 팔이 잘린 채 바닥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무서운 존재였는데, 이제는 미물을 보는 것처럼 하찮았다.
강하다는 건, 이렇게나 강한 것이었구나.
헛웃음이 나왔다. 녀석에게 한 걸음 다가가자 녀석이 뒷걸음질 쳤다.
그저 구멍이 났을 뿐인 덩어리에서도 혼란과 두려움과 삶에 대한 갈망이 전해져왔다.
지금 내게는 한들의 힘이 있다. 녀석의 퇴마 따위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녀석을 내려다보며 망설였다.
녀석을 향한 동정심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 이 녀석을 찢어발기고 싶은 내 심정이 정말 내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남을 해치는 것이 악귀의 본능.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 다른 존재를 해하는 것이 아니라, 해하는 것 자체가 살아가는 이유인 존재.
그래도 이대로 소멸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냥 이 녀석의 의지를 통째로 빼앗아버리자.
해악을 끼치는 것만이 이 녀석의 성질이라면 그냥 자유를 꺾어버리자.
이런 결정이 오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힘을 함부로 파괴에 사용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렇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도망치려는 녀석을 짓밟고 녀석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녀석이 괴상한 비명을 질러댔다. 손끝에 힘을 주자 녀석이 조금씩 쪼그라들었다.
쪼그라들고 쪼그라들어서 쨍, 째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게 안에 어둠이 걷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발밑에 반짝이는 보석 하나가 놓여있었다. 타원형으로 동그랗고 반투명한 우윳빛 보석이.
한눈에 이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을 주워들기 위해 몸을 숙이는데, 힘이 급격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가람 씨!”
놀란 동훈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