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스트 호더-2화 (2/84)

[2] 못돼 처먹은 여자

“힉!”

기괴한 광경에 비명이 절로 나는 걸 참고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오늘은 좀 일찍 마칠까. 다들 점심 맛있게들 드세요.”

하필이면 이런 날 강의가 빨리 끝났다.

주변이 어수선해지고 사람이 하나둘 강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지만, 내 목덜미는 여전히 간질거렸다.

이제는 차가운 손가락이 목덜미 뼈를 훑는 것까지 느껴졌다.

제발 누가 살려줘! 소리치고 싶어도 막상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으으으…….”

하는 중얼거림이었다.

목덜미에 닿은 머리카락이 스르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이 살짝 울렸다.

기분 나쁜 악취가 확 풍겨왔다. 스륵스륵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 옆으로 무언가가 가까워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생명줄이라도 부여잡듯 급하게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누가 좀.

울 것 같아 이를 악물었을 때, 갑자기 팍하고 등을 얻어맞았다.

“야, 한가람! 왜 그러고 있어, 어디 아파?”

그 순간 기분 나쁜 감각이 모두 사라지고, 굳었던 몸이 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옆에 연주가 서 있었다.

“야……. 정말 고맙다.”

“뭐가?”

“있어, 그런 게.”

연주가 이상한 놈이라고 투덜거리더니 아무래도 좋다는 듯 화제를 바꿨다.

“너 밥 학교에서 먹을 거지? 같이 먹자.”

“니 친구랑 안 먹고 왜?”

“조별과제 모임 있대.”

“아, 딴 사람 찾아.”

“있으면 너한테 왔겠냐?”

“친구 없냐?”

“너보단 많아.”

김연주는 나랑 동갑인 사촌으로, 과는 다르지만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

옆에 사람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좋은 나와는 달리 혼자면 외롭고 심심한 듯, 무언가를 혼자서 해야 할 상황이 닥치면 나를 찾아오곤 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런 상황에만 나를 찾곤 했다.

연주와 함께 학교 근처 샌드위치 가게에 앉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야.” 하고 운을 떼며 가방을 뒤졌다.

“이거 봐봐.”

“뭐?”

관심을 보이는 연주에게, 한주가 건네주었던 계약서를 보여줬다.

“어떻게 생각해?”

“풋, 뭐야 이거. 이한주가 누군데?”

“알바…… 사장님……?”

연주의 질문에 당황해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진짜? 진심?”

연주는 황당해하며 웃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 사람 되게 특이하네. 그냥 서명하든가.”

“진심?”

“뭐 어때? 장난인데.”

그리고 내게 계약서를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근데 시급은 좋아?”

“안 물어봤어.”

“알바 구하면서 시급도 안 봐? 바보야?”

확실히. 일리가 있다고 할까, 당연한 말이었다.

일자리를 구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한주의 제안을 수락하는 건 일을 하게 된다는 소리였으니까.

일단 급여는 물어봐 둘걸,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또 막다른 길이다. 이상하게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전혀 생각나질 않았다.

초조하게 걷는 동안 여러 번 막다른 길에 부닥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에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휴대폰도 통신이 터지지 않아 무용지물이고, 길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으로 접어들었다.

예쁘고 반듯하게 포장돼있던 길이 조금씩 조금씩 축축한 진흙 길로 변해가고 있었다.

드문드문 있던 가로등이나 간판의 불빛도 점점 사라져 스산한 풀과 나무로 바뀌고 있었다.

분명히 도시 한가운데 있었는데 어느새 깊고 어두운 어딘가에 고립돼 있었다.

저 멀리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며, 점점 사람의 목소리가 되어갔다.

어느새 그 소리가 귓가에,

‘사라져사라져사라져사라져사라져―’

작고 빠르게 속삭여오기 시작했다.

소름이 돋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소리를 떨쳐내기 위해 몸부림치며 뒤를 돌아보니, 오늘 나를 괴롭혔던 붉은 옷의 여자가 천천히 내 뒤를 따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백팔십도 돌아갔던 목이 끼기긱 소리를 내며 조금씩 원상태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기 일보 직전,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줘가며 달리기 시작했다.

진흙이 다리에 엉겨 속력이 나지 않았다.

붉은 옷의 여자는 느린 걸음으로,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나를 따라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바로 뒤에서 차갑고 역겨운 숨결이 느껴졌다.

‘잡히면 죽는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통신장애로 사용할 수 없었던 휴대폰에서 경쾌한 벨 소리가 울렸다.

뒤에 있던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급하게 휴대폰을 꺼내자 한주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 아, 가람…….

“한주 씨!! 살려주세요!!”

─ 가람 씨?

“제, 제가 길, 길을 이, 잃어버렸는데, 근데 귀신이, 귀신이…… 그러니까 귀신이 길을…… 귀신이이이 으어엉…….”

─ 일단 진정 좀 해요.

“귀, 귀신이…… 길을 잃어버렸는데요오오…….”

─ 네?

“이렇게 죽기 싫은데…… 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진짜…… 난 도, 도와주려는 것 뿐이었는 데에에…… 왜냐고오오…… 무섭다고오오오…….”

─ 가람 씨, 일단 진정하고…….

“진짜 싫어! 이런 거 진짜 싫다고오오! 망할 나무귀신아! 나는 그냥 좋은 일 하고 좋은 기분으로 두 다리 쭉 뻗고 자고 싶어서! 도와준다고! 그랬던! 거라고!”

─ 가람…….

“빨간 귀신! 넌 뭔데 갑자기! 내가 진짜 억울해서! 으엉엉엉!”

정신없이 말하는 와중에 전화 건너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 야! 진정하라고!

“……히끅,”

전화 건너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얌전히 한주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 진정됐어?

한주가 은근슬쩍 반말하기 시작했지만,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라 얌전히 대답했다.

“네…….”

─ 무서운 일에 휘말린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줄 수는 있어. 근데…….

“근데?”

─ 나 자선사업 하는 사람 아니거든.

“…….”

─ 나도 얻는 게 있어야 일을 하지?

네가 내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라며, 한주가 거래를 제안했다.

나는 잠시 코를 훌쩍이다 대답했다.

“……저기요, 저번에 지장 찍을 마음이 들면 연락하라고 했잖아요.”

─ 그랬지.

“……월급 얼마예요?”

─ 뭐?

“……아니, 사촌이 그건 당연히 따져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해서…….”

전화 건너편에서 허, 하는 헛웃음 소리가 들려오고 서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한주는 지금부터 갈 테니 전화를 끊지 말라고 말했다. 나도 죽고 싶지는 않았으니, 얌전히 전화를 연결한 채 한주를 기다렸다.

이곳이 숲인지 늪인지, 아니면 다른 어딘가인지 내게 분간할 능력은 없다. 내가 아는 건 이곳이 축축하고 퀴퀴하고 으스스하다는 것뿐이었다.

한주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굳이 질문하지 않았다.

다만 네가 어디에 있는지는 뻔히 알고 있으니 얌전히 기다리기나 하라는 듯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 출발할게

나는 한주의 그 말이 못내 믿음직스럽고 안심이 돼 놀란 가슴을 조금 진정시킬 수 있었다.

길 한복판에 망연히 서서 한주가 도착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바람이 불자 젖은 흙의 냄새가 확 풍겨왔다. 콧잔등에 톡 하고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뺨에도, 눈꺼풀에도.

위를 올려다보니 답답하리만치 새까만 하늘에서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톡톡톡 떨어지던 물방울이 순식간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낙비였다.

재빨리 나무 아래로 몸을 피했다. 젖은 몸이 추위를 호소하며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비는 점점 기운을 더해갔다.

얼마쯤 지났을까, 이 세찬 빗속에서 이상하게도 마른 모래를 긁어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세하고 느릿했던 소리가 점점, 점점 빠르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다 갑자기 뚝, 순식간에 소리가 멎었다.

어둡고 흐린 시야 한가운데, 새하얀 팔 하나가 진흙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 팔이 몸부림치듯 지면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어깨가 나오고, 목이 나오고, 머리가 튀어나왔다.

그 머리가 한 바퀴를 휙 돌아 나와 눈이 맞았다. 시체처럼 창백한, 표정이라곤 없는 마네킹 같은 얼굴.

머리는 플라스틱 같은 입술을 쩌억, 한계까지 벌리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입안은 온통 빨강이었다. 선명하고 밝은 빨간색만이 가득했다.

귀신이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나는 힘 빠진 다리로 바닥을 기어서라도 도망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때, 뒤에서 얇고 차가운 팔이 내 목을 감싸 안았다. 나무 냄새가 훅 풍겨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 얇은 팔이 더욱더 단단하게 나를 옭아맸다.

귀신은 이제 진흙에서 빠져나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내게 기어오기 시작했다.

귓가 바로 옆에서 높고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나랑 약속했잖아.”

조용히 읊조리는 목소리였다.

그 소년이다. 신목.

그 사이에 귀신이 바로 앞까지 들이닥쳤다.

귀신이 내 머리를 향해 팔을 뻗었다. 손을 쫙 펼치고 얼굴 전체를 우악스럽게 잡아 눌렀다. 나는 끅끅거리며 눈을 꽉 감았다.

바로 그때,

끼이익, 쾅!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나를 옭아매던 힘이 사라지고 비명도 멎었다. 뭉개버릴 듯 얼굴을 잡아 오던 손의 감촉도 없어졌다.

하지만 확인해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여전히 끅끅 울며 몸을 웅크렸다. 눈을 뜨면 또 악몽 같은 현실이 눈에 들어올 것 같았다.

“괜찮아요?”

머리 위에서 들어본 기억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와, 살짝 눈을 뜨고 올려다보았다.

카페 사장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아는 사람을 보자 긴장이 탁 풀렸다.

안 그래도 눈물로 흥건했던 얼굴 위로 주먹 같은 눈물방울이 방울방울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엉엉 소리 높여 대성통곡하자 사장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저, 저기…….”

사장이 안절부절 난감해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때 탁탁! 하는 소리가 내 의식을 이끌었다.

나는 그제서야 사장의 뒤에 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 반대편 운전석 쪽에 한주가 서 있었다. 한주는 내가 자신을 이제서야 눈치챘다는 걸 알았는지, 한숨을 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귀신은 아는 사람으로 둔갑하는 것도 잘해.”

한심한 놈을 보는 눈빛이었다.

“야!”

사장이 그런 한주를 나무라듯 소리쳤다. 두 사람이 말다툼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비가 완전히 멎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내 몸도 언제 젖었냐는 듯 멀쩡해져 있었다.

악몽에서 현실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전히 이상한 곳에 있기는 했지만.

차에 탄 채 얼마간 달리자 사람이라곤 하나 없는 으스스한 도로가 나오고,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평범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차 안은 적막했다.

한주는 말없이 운전만 했고 사장은 나를 달래고 위로하려는 듯 종종 말을 걸어오긴 했지만, 그러는 족족 한주가 시비를 걸어 투닥거리게 되는 게 싫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사장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조용한 분위기 덕분에 차분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거의 다 왔어.”

한주의 목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차는 조금 외진 곳으로 접어들어, 현대적인 외관의 이 층 주택 앞에서 멈춰섰다. 주변에 건물이 거의 없어 한적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집이었다.

한주는 나와 사장을 내려주었다.

“먼저 들어가. 차 대고 올 테니까.”

한주가 탄 차가 조금 멀어지자, 사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주 말로는 성함이 한가람이라고 하던데요. 맞나요?”

“네, 맞아요.”

“저는 강동훈이라고 합니다.”

“아, 네. 저…… 아까는 감사했어요.”

“저는 그냥 한주 따라갔던 것뿐인데요.”

사장, 동훈은 뭔가 복잡미묘한 표정을 하더니,

“일단 들어갈까요?”

하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안내하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번에 한주의 제안을 거절하라고 말했던 건 죄송해요. 저번에 말했듯이 한주가 좀 미친…… 아니, 성격이 좀 나쁘거든요.”

잠시 말을 멈춘 동훈이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가람 씨는…… 차라리 한주 옆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보이네요.”

“…….”

“한주가 좀…… 그래도 실력은 확실하거든요.”

동훈은 한주가 나를 휘두르는 게 못내 못마땅하면서도, 내가 오늘 큰일을 치른 것엔 자신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 건지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우리 주위로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분위기를 좀 전환하기 위해 화제를 돌리려 말했다.

“동훈 씨랑 한주 씨는 연인 사이인 거예요? 아니면 부부 사이?”

“…….”

앞서가던 동훈이 나를 바라봤다. 굉장히 기분 나쁘단 표정이었다.

응접실로 사용되는 듯 마주 보게 배치된 소파에 앉아 조금 기다리자 동훈이 차를 내왔다.

릴랙스 효과가 있는 차라는 설명처럼 은은한 향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한주와 동훈은 소꿉친구로, 동훈이 기가 약해 귀신들에게 시달리는 걸 한주가 도와주곤 했다고 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도와주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나는 찻잔을 향해 있던 시선을 한주에게로 옮겼다. 무심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두드리던 한주도 나와 눈을 맞췄다.

“너, 내일 일 있어?”

한주가 대뜸 질문해왔다. 나는 잠깐 생각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요.”

“잘됐네.”

“근데…….”

“근데?”

“왜 반말이세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한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 모습이 어쩐지 무서워, 물어본 것이 그새 후회되기 시작했다.

“내가 반말하는데 불만 있어?”

“이한주, 너…….”

당당한 한주의 대답에 동훈이 끼어든 순간, 잔잔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동훈이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바라보더니 한주를 째려보았다.

무슨 일인지 몰라 눈만 깜빡이며 두 사람을 지켜봤다. 한주는 그런 동훈을 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짧게 한숨을 내쉰 동훈이 나를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가볼게요.”

간단히 인사한 동훈이 전화를 받으며 방을 나갔다.

“잔소리쟁이가 드디어 사라졌네.”

후련하다는 듯 혼잣말을 한 한주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일 한가하면 짐정리 바로 해버리자.”

“네?”

뜬금없이 짐을 정리하라니.

내가 되묻자 한주가 뻔뻔한 태도로 대답했다.

“나랑 일할 거잖아? 신변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우리 집으로 이사 와.”

“아니, 갑자기 그렇게 말해도…….”

“네가 쓸 방은 마련해뒀어. 일단 필요한 것만 가지고 넘어와. 세세한 건 천천히 정리하고. 동훈이 녀석이 쓸데없는 소리만 안 했어도 벌써 다 정리했겠네. 정말이지, 어쩐지 연락이 안 온다고 생각했어.”

“저 아직 일한다는 소리도 안 했는데…….”

내 말에 한주가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한 얼굴로 대꾸했다.

“할 거잖아?”

여기서 일하는 것 외에 너한테 다른 선택지가 있기나 하냐는 말투였다.

한주의 말대로라면 앞으론 오늘처럼 귀신들의 장난에 계속 휘말리게 될 테니, 확실히 선택지가 없는 것 같긴 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 가지고 있어?”

“네. 가지고 있긴 한데요.”

“꺼내봐.”

얌전히 계약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주가 테이블 위에 있던 인장 뚜껑을 열어 계약서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단순명료하게 말했다.

“찍어.”

나는 엄지에 인주를 묻히려다 말고 망설이다 물었다.

“근데요.”

“뭔데.”

“이 계약서 진짜 효력 있는 거예요? 법적인 효력 같은 거…….”

한주가 진심으로 묻는 거냐고 다그치는 듯한 표정으로 날 응시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이런 계약서에 법적인 효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건 그랬다.

나도 받고 나서 장난치는 건지 뭔지 몰라 한참을 읽어봤으니까.

법적인 효력도 없는 계약서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근데 왜 찍어요?”

내가 또 묻자 한주가 귀찮은 듯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 계약서는 원래 귀신들을 사역할 때 주는 거야. 일종의 주술 같은 거지. 사람한테 준 건 네가 처음이야.”

“…….”

귀신한테나 주는 걸 나한테 내밀었다고. 기분이 착잡했다.

“뭐해? 이제 찍어.”

“저…… 근데요.”

“이번엔 또 뭔데.”

벌써 몇 번째 튀어나온 ‘근데’에 한주가 슬슬 짜증이 나는지 예민하게 반응했다.

나는 그 매서운 표정에 움찔 몸을 떨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생각해보니 저, 계약 조건이나 하는 일 같은 거 하나도 못 들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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