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 화
빌로스 제국의 수도 상데르.
샹데르 북쪽 산 어귀에는 현대식 한옥을 재현한 고풍스런 집 한 채가 있었다.
한옥의 마당에선 흑발 단발머리에 청순한 인상을 지닌 여인이 빨래를 너는 중이었다.
탁! 탁!
산더미 같은 세탁물을 하나하나 강 하게 털며 빨랫줄에 걸었다.
햇살은 따스하고 포근한 산들바람 이 부는 걸로 봐선 빨래가 굉장히 잘 마를 것 같다.
기다란 빨랫줄에 빨래를 너는데 대
부분의 빨랫감이 아동복이었다. 빨래를 거의 다 널었을 즈음에 대 문에서 똘망똘망한 인상의 귀여운 여자아이가 뛰어 들어왔다.
“엄마? 나 왔어? 배고파!”
김혜림은 빨래를 널다가 딸아이의 옷차림을 보곤 양 허리에 손을 얹으 며 얼굴에 힘을 주었다.
“얘! 지영아! 옷이 그게 뭐야. 또 남자애들이랑 싸웠지?”
뛰어 들어온 여자아이는 김혜림의 딸 최지영이였다.
누굴 닮았는지 성격이 억세고 괄괄 해서 허구한 날 남자애마냥 다치고 들어온다.
조금은 얌전하게 놀면 좋으련만.
누구 딸 아니라고 당하고 못 사는 건 똑같네.
최지영은 씩씩거리면서 싸운 이유 를 옮었다.
“애들이 자꾸 아빠 얘기로 괴롭힌 단 말이야.”
“그래도 싸우면 안 되지. 오늘은 얼마나 때렸어?”
“그란데 백작가 말라깽이랑 몽발리 후작가 뚱땡이랑……
“2 명?”
“……슈바르트 남작가 쌍둥이 녀석 들이랑 빅터 주니어.”
“5명이랑 싸웠어?”
“아니. 5명 전부랑 싸우진 않았
어.”
“5명 중에 몇 명이나 때렸는데?”
“전부를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벅 차니까 한 명씩 때려 줬어. 잘했 지?”
“에휴,말해서 뭐하겠니. 들어가서 씻고 옷 갈아입어. 금방 밥 해 줄 게.”
“엄마,아빠는 언제 와?”
아침에도 묻더니 저녁에도 묻는다.
매일같이 아빠만 찾는 아이다.
빨래 바구니를 집어 들던 김혜림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씁쓸한 미소 를 지었다.
금방 온다고 해 놓고 돌아올 기미 가 안 보인다.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돌아오기만 한다면…….
김혜림은 씁쓸한 미소를 지우고 기 운 찬 표정을 지었다.
애 앞에서 쓴 미소 짓는 건 교육 상 안 좋으니까.
“금방 돌아오실 거야.”
“피? 맨날 그 소리. 빨리 아빠 왔 으면 좋겠다.”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어.”
강현이 창조급 웨이브에 들어간 뒤 로 이세계에 많은 변화가 찾아들었 다.
더 이상 웨이브 보석이 발생하지 않게 되었고,강제로 이세계로 소환 되는 이세계인이 사라졌다.
끝까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이세계에 넘어와 버린 자들은 순응하고 현지에 정착하기로 하였 다.
스렛,스킬,보구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살아 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커뮤니티는 코반의 주도 하에 카니 발 정부로 이름 바꾸고 하위차원의 약자들을 카니발로 이주시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었다. 카니발에서 그간 등한시되었던 각 종 자원을 개발하게 되면서 급속도 로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는 중이었 다.
아무래도 원래 세계와 같은 현대
사회를 이룩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 다.
김혜림의 경우엔 빌로스 제국으로 되돌아왔다.
그간 벌어 둔 돈으로 업자에게 부 탁하여 한국식 집을 지었고,현재는 한 아이의 엄마이자 빌로스 제국 여 제의 조언자로서 간간이 황궁에 출 근하고 있다.
“뀨우!”
빨래 바구니를 들고 집 안으로 들 어가려는데 위에서 니아의 울음소리 가 들려왔다.
니아의 등에는 루나가 타고 있었 다.
루나의 외견은 몇 년 전과 똑같았
다.
사역마라서 외견상 나이를 먹지는 않는 대신 몇 년간 학생 신분으로 많은 것을 배우면서 정신적으로 성 숙해져 있었다.
니아를 타고 마당으로 바로 착지하 려 했기에 김혜림이 서둘러 루나를 불렀다.
“루나! 빨래 다 날아가! 집 밖에서 착지해!”
루나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담장 바깥에 착지했다.
니아를 소환석을 되돌린 루나는 대 문으로 들어와선 활기차게 인사를 했다.
“혜림 언니,오랜만이야. 잘 지냈 어?”
씻으러 들어가려던 최지영이 냉큼 뒤돌아서선 루나에게 와락 달려들어 그녀를 부등켜안았다.
“루나 언니!”
“후후,지영이 많이 컸네. 조금만 있으면 나보다 더 커지겠는걸?”
“후헤헤,언니 선물은 없어?”
“이거 섭섭하네. 내가 반가운 게 아니라 선물이 반가운 거였어?”
“어떻게 알았지? 들켰네.”
“아휴,신기해라. 어떻게 혜림 언니 같은 사람 밑에서 이리 깜찍하게 자 랄 수가 있었을까?”
“그게 무슨 말일까,루나? 너도 몇
년 전만 해도 저랬어. 하여간 점점 세이아나 언니를 닮아 가네. 그나저 나 세이아나 언니는 뵙고 왔어?”
“집에 갔는데 없더라고. 황궁에서 도 퇴근했다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럼 우리 집에서 저녁 먹고 가.”
“와? 좋아라. 유학 생활 동안에 언 니 요리가 제일 그립더라고. 언니 요리 솜씨를 따라잡을 사람이 있어 야 말이지.”
세이아나와 루나는 모녀 관계를 유 지하며 같이 살게 되었다.
세이아나는 학비가 전액 무료인 학 교를 열어서 운영 중이었다.
황재욱과 엘레나가 그녀의 곁을 보
좌하고 있고,루나는 제대로 마법을 배워 보고 싶다고 해서 작년부터 마 탑에서 유학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성격도 성격이거니와 본인이 루나 한 명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해서 여 전히 미혼으로 지내고 있다.
그래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저녁을 먹으러 들르는 걸 봐선 쓸쓸하긴 쓸 쓸한 모양이다.
루나까지 포함하여 세 명이서 시끌 벅적하게 식사를 하던 중.
대문 쪽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딸랑딸랑!
손님이 방문하여 대문 바깥에 달아 둔 종을 흔드는 것이었다.
김혜림은 루나와 최지영에게 계속
먹으라고 하곤 직접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대문 바깥에는 장진혜가 서 있었 다.
김윤중과 장진혜는 신 혁명군을 해 체하고 가이아 대륙으로 내려와 자 리를 잡았다. 그리고 정식으로 혼인 신고를 하고 기사양성소 교관으로 근무하며 오순도순 노후생활을 보내 고 있었다.
김혜림은 아버지인 김윤중의 방문 에 화색을 띠었다.
“그냥 들어오시라니까 매번 종을 울리시네요.”
“너도 네 생활이라는 게 있는데, 부모라고 함부로 집에 드나들면 안되지.”
“꼭 이상한데서 고집을 부리신다니 까. 들어오세요. 마침 식사 중이었어 요.”
“금방 가 봐야 해. 네 아빠가 기다 리고 있거든. 퇴근하다가 옷가게에 서 예쁜 옷 팔길래 지영이한테 어떨 까 싶어서 사 왔어.”
“또 사 오셨어요? 오늘 아침에 아 버지도 옷 주고 가셨는데.”
“그랬어? 하여간 네 아빠도 극성이 라니까.”
“두 분 다 극성이셔요. 기왕 왔는 데 지영이 얼굴이나 보고 가셔요. 지영아?”
“됐대도. 한 번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되잖니. 네 아빠 요즘 잔소리가 얼마나 많아졌는지 몰라. 밥 때 늦으면 또 삐질 테니까 내일 같이 올게. 정말이지 말수 적을 때 가 그립다니까.”
“잘 지내는 거 보니까 저도 기분 좋네요.”
“그리고 최 서방은…… 아직 안 왔 니?”
“네.”
“에휴,힘내렴.”
“걱정 마세요. 돌아오면 한 소리 하죠 뭐.”
장진혜가 힘내라는 말을 남기며 떠 났다.
김혜림은 장진혜에게서 받은 옷상
자를 끌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끌벅적한 저녁식사가 끝나면서 루나가 집으로 돌아갔다.
지영이와 함께 목욕을 마치고 재울 시간이 다 되어 갈 즈음.
집에 한 남성이 들어왔다.
“나 왔어?”
최지영은 침실로 가려다가 굵직한 목소리를 듣곤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상태에서 현관으로 달려갔 다.
“아빠!”
들어온 남자가 최지영을 번쩍 들어 올리며 아빠 미소를 지었다.
“하하,우리 지영이. 오늘은 얼마나 귀여운지 한번 볼까? 어이쿠,어제보다 더 귀엽네?”
“으? 아빠 술 냄새!”
뒤따라 침실에서 나온 김혜림이 수 건으로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리다가 손으로 매섭게 강현의 팔뚝을 때렸 다.
찰싹!
“내가 못 살아 정말. 금방 온다면 서! 오늘도 술 마시고 왔지?”
“하하, 미안. 세이아나가 놔주질 않 더라고. 3차 가자는 걸 재욱이를 던 져 주고 빠져나왔지.”
“으이그,자랑이다 자랑이야. 애 아 빠란 사람이 매일매일 술이나 마시 고 있고. 잘한다,잘해.”
“이거 왜 이래. 10시 전이면 일찍
들어온 거지.”
“말이나 못하면 입지나 않지. 어후, 술 냄새. 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데. 빨리 씻고 양치질해.”
강현은 알았다고 말하며 최지영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수년 전,룰을 처리하고 나서 탈출 구가 없어서 창조급 웨이브에 갇혔 었다.
거기서 창조급 웨이브 안에 남아 있던 웨이브 보석들을 공략하여 웨 이브 공략 횟수 300회를 채웠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한 달.
업적의 서 효과에 의해 '차원 스크 롤’이란 이름의 창조급 보구가 나왔 다.
1회에 한하여 어떤 차원이든,어떤 장소든 갈 수 있는 보구였다. 그야말로 타임로드가 강현을 위해 남겨 둔 최후의 비책이라 할 수 있 었다.
보구를 사용하면 원래 세계로 돌아 가는 것도 가능했다.
근데 이제 와서 혼자 원래 세계에 돌아가서 뭐하겠는가.
강현은 주저 없이 김혜림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그 뒤에 가이아 대륙으로 되돌아왔 고,에르델의 간청을 받아 황제의 기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강현이 세안을 하고 나왔는데 계속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지영이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빠 아빠,오늘 남자애들 다섯 명한테 이겼어.”
“어쩐지,빅터네 아들이 울면서 빅 터를 찾아오더라. 이긴 게 아니라 괴롭힌 거겠지.”
“괴롭힘은 내가 당했어! 개네들이 자꾸 아빠 사인 받아 달라면서 귀찮 게 군단 말야!”
“어쩌면 지영이가 좋아서 귀찮게 구는 걸 수도 있어.”
“글쎄. 개네들이 아빠만큼 강해지 면 생각해 볼래.”
침실 문에 기대어 있던 김혜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불가능한 일임을 피력했다.
“너도 세이아나 언니처럼 평생 혼 자 살 팔자인가 보네.”
“그래,차라리 결혼하지 말고 아빠 랑 같이 살자.”
“응응,나 아빠한테 시집갈래.”
“재는 항상 아빠만 찾는다니까.”
아침저녁으로 아빠만 찾는 지영이 다.
김혜림은 섭섭하다는 양 쓸쓸한 미 소를 지었다.
그걸 또 놓치지 않고 알아차린 강 현이었다.
강현이 김혜림의 볼에 입을 맞추며 넉살 좋게 말했다.
“대신 내가 당신만 찾잖아?”
“정말이지 당신에겐 못 당하겠어.
지영아,이제 자자. 지금 자야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가야지.”
“싫어,아빠랑 놀 거야?”
“졸려서 눈 비비면서 왜 이리 고집
을 부린데. 아빠도 일하고 와서 피 곤하니까 코하고 자자.”
“어차피 금방 잘 건데 조금만 놀아 주지 뭐.”
“당신은 애한테 너무 물러. 그러니 까 딸바보 소리 듣지.”
“딸천재 소리 듣는 것보단 낫잖 아?”
“최강현 아저씨 다 됐네. 농담에서 아저씨 냄새가 나는걸?”
“자,지영아 조금만 놀고 자는 거 다? 알겠지?”
“응!”
일하고 한잔 한 후에도 딸 상대까 지 해 주는 강현이었다.
예상대로 최지영은 얼마 못 가 잠 이 들었다.
꾸벅꾸벅 조는 딸을 침대에 뉘인 강현이 침실에서 나오고 있는데 김 혜림이 찻잔을 내밀었다.
강현이 최지영을 재울 동안 숙취를 예방할 겸 차를 타 온 것이었다. 마시는 차는 항상 똑같다.
강현은 커피,김혜림은 밀크티. 강현과 김혜림은 거실 창문 앞에 나란히 서서 샹데르의 야경을 보며 조용히 찻잔을 기울였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문득 김혜림
이 강현을 불렀다.
“여보.”
“왜?”
“언제 나랑 결혼할 생각이 들었 어?”
한동안 말이 없던 강현은 함박 미 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처음으로 김치찌개 끓여 줬 을 때.”
“흐응? 거짓말 같은데?”
“여기 증거가 있잖아?”
강현이 손을 들어 손가락에 낀 반
지를 보여 주었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반지.
마찬가지로 김혜림의 손에도 같은 반지가 있다.
서로의 반지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시선이 중간에서 마주쳤다.
동시에 거실에 드리워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졌다.
(각성하는 플레이어 완결)
[작품 후기]
안녕하세요,뫼신입니다.
준비기간까지 포함해서 1년 넘도록 작업해 온 각성하는 플레이어가 끝 을 맞이했습니다.
연재 초반부터 구설수가 많아서 여 러모로 심적인 부담이 컸었습니다. 특히 표절 논란은 충격 그 자체였 죠. 제게 아들이 있는데 이웃 사람 들이 “저 아이 옆동네 아저씨랑 닮 았네요. 그 집에서 납치해 온 아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격이었으니 까요.
안 한 걸 안했다고 증명할 길도 없고 해서 끙끙 앓기만 했었고 연중 도 고려했었죠.
그래도 즐겁게 봐주시는 분들도 있 다는 게 엄청 힘이 되더군요. 여러분들 덕분에 각성하는 플레이 어를 끝까지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합 니다.
정말이지 몇 번을 감사 드려도 모 자라네요.
모자란 점이 많은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차기작에선 좀 더 나아진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