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하는 플레이어-376화 (376/381)

376화

강현이 찾아왔다.

그 말인즉 강현이 카심과 줄리앙을 누르고 제3신화급 웨이브를 공략했 음을 의미했다.

강현 걱정이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 는 걱정이다라고 입에 달고 다니는 김혜림이긴 하다.

그렇다 해서 정말로 걱정을 안 했 겠는가.

두 눈으로 직접 강현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나니 안심이 되어 저도 모 르게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다녀오셨어요?”

“다녀왔어.”

무법지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 로 두 사람 사이에서만 뭉글뭉글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쳇,현실 벌레들 같으니.

부러우면 지는 거다.

세이아나는 스킬북 습득을 중단하 곤 헛기침부터 했다.

“음! 음음! 아이고,눈꼴 시려라.”

“몸부림치는군.”

“몸부림이네요.”

“쌍으로 잘들 논다. 그만하고 공략 이나 하자. 넌 빨리 보구부터 챙겨.”

제3신화급 웨이브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보구를 김혜림에게 맡겼었다. 공략에 임하기 앞서 김혜림에게서 아공간 주머니를 돌려받았다.

요정의 신발을 신고,아이로스 팔 찌를 착용하고,업화의 불꽃반지를 끼고,마지막으로 빙백검을 꺼냈다. 부서지기 직전의 허물검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고 대신 빙백검을 혁대 에 끼워 넣었다.

허물검보다 몇 배는 가벼운데도 불 구하고 몇 배는 더 충실감이 느껴진 다.

고수는 장비를 가리지 않는다는 헛 소리가 있는데 다 거짓부렁이다. 고수일수록 개인장비를 꼭 소지하 고 다닌다는 건 모처에서 확인되지 않은가.

손에 맞는 검이 명검이라고 강현에 게 있어 명검은 빙백검이었다.

강현은 혁대의 조임을 조절하여 빙 백검의 검집을 꽉 묶어 매곤 세이아 나가 쥐고 있는 스킬북에 시선을 두 었다.

“그거 예전에 금서라고 했지 않았 었나?”

“이거? 지금 무기 뽑고 있는데 쓸 만한 무기가 안 나와서 말이야. 스 킬의 힘이라도 빌려 볼까 했지.”

그러면서 세이아나는 제4신화급 웨 이브의 특성과 수라도 구간의 공략 방법,항시 유체화 상태인 유령 전 사들을 공략하려면 토템에서 횃불이 부여된 무기를 뽑아야 한다는 것까 지 모두 알려 주었다.

사정을 들은 강현은 도박꾼의 부적

스킬북을 덥석 쥐어선 세이아나의 손에서 빼냈다.

“도박을 안 하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하는 사람은 없다지?”

“사용 안 하고 공략할 수만 있다면 야 그것만큼 좋은 게 없긴 하지. 그 래서 말인데 너 혹시 여기 있는 무 기들 사용할 줄 알아?”

바닥에 떨어지는 원앙월과 방패를 가리키는 세이아나였다.

혹시 강현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 른다.

워낙에 잡학다식한 사람이니까.

강현은 스킬북을 도로 세이아나에 게 돌려주면서 빙백검을 뽑았다.

“가만히 보고나 있어.”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토템을 지 나치는 강현이었다.

관통 능력은 유체화엔 안 먹히는데 따로 계책이라도 있는 걸까?

허세를 부리는 사람은 아니다. 방법이 있으니까 저리 자신만만하 게 나서는 거겠지.

세이아나는 물론이고 김혜림까지 뭘 어떻게 하려는 건지 궁금해서 강 현의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막상 강현이 취한 행동이라곤 단순 하기 그지없었다.

마나폭검 스킬 발동. 공격.

그게 끝이었다.

뭐 특별할 만한 게 있다면 빙백검 에 부여한 마나량일까.

빙백검에 마나를 얼마나 부여한 건 지 황금색 오러가 짙어지다 못해 아 예 광원마냥 눈부시게 빛났다.

빙백검을 휘둘러 마나폭검을 가하 자 너른 벌판 전 구역이 깊게 패이 면서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과과과과!

이전에도 마나폭검의 범위가 넓긴 했었는데 방금 막 시전된 마나폭검 의 범위는 이전의 몇 배나 되었다. 마치 마나에 제한이 없어진 사람이 시전한 것처럼 말이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라 앉을 기미가 안 보인다.

누가 이를 두고 검을 휘둘러 만들 어 낸 결과라 여기겠는가.

이쯤 되면 재해에 비견해도 모자람 이 없다.

검짓 한 번이 루나의 해일에 준하 는 위력을 선보인다고 생각하면 현 재 마나폭검의 위력을 가늠할 수 있 을 거다.

홁먼지가 가라앉을 때.

벌판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 다.

마나폭검으로 유령 전사들을 모두 베어 낸 것이다.

유체화 상태였는데 베어 냈다고?

김혜림과 세이아나는 영문을 알 수 가 없어 강현을 멀뚱멀뚱 쳐다보았 다.

그에 강현이 말하길.

“유체화 상태의 적도 공격할 수 있 는 보구가 있거든.”

전설급 마법석 보구 퇴마사의 영혼 석.

하위차원 정복 계획을 저지하러 내 려갔을 적에 웨이브 봉인석을 대량 으로 소멸시켰었지 않은가.

그때 업적의 서 효과로 얻은 물건 이다.

유체화 상태라 해 봤자 퇴마사의 영혼석이 박힌 빙백검 앞에선 바람 앞의 등불과 다를 바 없다.

엉망진창이 된 벌판 너머에 다음 구간으로 갈 수 있는 문이 생겨났 다.

강현은 대수롭지도 않은 일을 치른

것마냥 쿨하게 엄지로 문을 가리켰 다.

“문 열렸네. 가자.”

*

그것은 다음 구간으로 넘어갔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 표지판마저 없는 인간도 구간에 들 어서자 한없이 하얀빛이 눈앞을 가 득 메웠다.

*

“현아? 자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현이 정신 을 차렸다.

비몽사몽인 와중에 풍성하게 차린 밥상과 맞은편에 앉아 있는 부모님 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현과 똑닮은 인상에 안경을 쓰고 살이 좀 찐 모습의 아버지.

짧은 단발에 얼마 전에 병치레를 하셔서 걱정될 정도로 마른 모습의 어머니.

두 분 다 자상하시고 자나 깨나 내 생각만 해 주시는 분들이다. 강현은 위화감 없이 곧바로 수저를 들었다.

“아뇨,안 잤어요. 와, 오늘 무슨 날이에요? 아침부터 웬 갈비찜이래.”

“얘가 아직 잠이 덜 쨌네. 오늘 네 아빠 생신이잖니.”

아,맞다.

오늘 아버지 생신이셨지.

선물까지 준비해 놓고 깜빡했네.

어머니는 아버지 생신임을 강조하 면서도 내 그릇에 푹 익은 고기를 덜어 주었다.

따끈따끈한 흰 쌀밥 위에 깝조롬한 고기국물을 얹던 아버지가 내 편을 들어 주었다.

“현이 이 달 말에 시험 친다고 열 심히 공부하니까 피곤해서 그럴 수 도 있지.”

“전교 1등도 좋은데 쉬엄쉬엄하렴.

밥 더 줄까?”

“아뇨,괜찮아요. 너무 많이 먹으면 배불러서 공부할 때 잠 와요.”

“꼭 1등 안 해도 되니까 몸 돌보 면서 해. 15살이면 한창 자랄 나이 인데 그리 안 먹어서 되겠니? 신장 은 진짜 평생 간다. 키 크면 나중에 연애할 때 반은 먹고 들어간다니 까.”

“성적 잘 나와서 나중에 좋은데 취 직하면 키보다 더 잘 먹힐 걸요?”

“얘도 참.”

“하하하.”

화기애애한 분위기.

어릴 때부터 우리집은 항상 화목했 다.

부모님은 두 분 다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고, 금슬이 좋으셔 서 부부싸움 한 번 해 본 적 없으 시다.

내게는 항상 행복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 거라며 성적만 쫓는다 고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말란 말을 자주 하신다.

어릴 적부터 느끼는 거지만 아버지 의 말씀은 하나같이 주옥같다.

가리지 않고 책을 읽는 습관이나, 항상 다방면으로 생각하는 습관,가 능성에 제한을 두지 않고 판단하는 사고방식.

모두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 난 습관이었다.

뭔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기 분이 다.

매일같이 드나드는 집인데도 오늘 따라 낯설게 느껴진다.

아까부터 마음 한 켠에 편하게 있 으면 안 될 것 같은 위화감이 머무 르고 있다.

‘뭔가 잊은 것 같은 느낌이……

계속 생각해 내려고 하는데도 떠오 롤 듯 말 듯 떠오르지 않는다.

원래 한 번 잊은 것은 기억해 내 려고 의식할수록 떠오르지 않기 마 련이다.

정답은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식사 중에 튀어나온 한 마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한 마디가 강

현의 인생에 있어 가장 충격적이었 던 사건을 떠오르게 했다.

“오늘 저녁에 어디 놀러 갈까 하는 데 어디 가고 싶은데 없니?”

생일을 맞이해서 오랜만에 가족끼 리 어디 놀러 가고 싶으신 모양이었 다.

한국에서 사춘기 아들과 외출을 할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평일에는 학교 가지,주말에는 과 외나 학원에서 공부 하지.

가끔 시간이 나도 친구들과 놀기로 했다며 거부하기 일쑤다.

강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같은 반 친구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편이었고,친구들과 약속이 없을 때엔 항상 공 부나 독서하는 쪽을 선택하면 선택 했지,부모님과는 거의 시간을 보내 지 않았었다.

강현은 은근히 기대를 내비치는 아 버지를 두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이 어떤 날이었는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깨달아 버렸기에.

'그래. 오늘이구나. 오늘 저녁에 부 모님이 돌아가셨었지.’

15살이 되던 해 가을.

아버지 생신 때,어디 놀러가고 싶 은 곳 없냐고 물으시는 아버지께 공 부할 게 많다며 부모님끼리 오붓하 게 시간을 보내고 오라고 했었다.

당일 저녁에 부모님은 외출 나가셨 다가 돌아오는 길에 사고로 돌아가 셨다.

나 잘되라고 등불이라도 달고 오시 려고 산속에 있는 절에 가셨다가 사 고를 당하셨다.

두 분이서 오붓한 시간 보내시라고 사양했던 건데.

그 시간마저도 부모님은 나를 위해 쓰고 싶으셨던 거다.

오붓하게 보내시라는 말.

나도 안다.

핑계에 불과했다는 걸.

그저 다른 사춘기 소년과 다를 바 없이 부모님과 어디 나가는 게 귀찮 았을 뿐이다.

왜 좀 더 시간을 보내려 하지 않 았을까.

나랑 같이 나가는 것만으로도 기뻐 하시는 분들이 었는데.

납골당에 두 분의 유골함을 넣고 추모 편지를 쓸 때.

편지를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너무 눈물이 나서.

닦아도 닦아도 자꾸만 눈앞이 흐려 져서.

보고픈 마음을 이렇게나 빽빽하게 쓰는데도 답장을 받을 수가 없어서. 편지지를 가득 적시고 말았다. 어느덧 눈가에 핑하고 돌고 있었 다.

아아,오래전에 메마른 줄 알았는

데 아직도 눈물이란 놈이 나오긴 나 오는구나.

인간도 구간의 공략이 무엇인지 이 제야 깨닫게 되었다.

인간도 구간은 사람이 가장 바라던 상황을 겪게 만들어선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곳이었다.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신 지금 상황 이야말로 강현이 수십 번,수백 번 도 더 바랐던 상황이다.

허구란 걸 알게 되었는데도 이 순 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다.

부모님은 강현의 눈에 눈물이 고이 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이유를 물 었다.

“왜 그러니? 학교에서 무슨 일 있 니?”

“힘든 거 있으면 솔직하게 말해 주 렴. 괜찮으니까 응?”

다정하게 대해 주실수록 더더욱 가 슴이 아려 온다.

이 모든 게 허구이며 이별은 예정 되어 있다.

무척 짧은 시간이었지만 잊고 있었 던 다정함을 되새길 수 있어서 다행 이었다.

강현은 목 안 가득 들어차 있는 먹먹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어머니. 제겐 돌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긴 설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

버지는 자상한 미소를 지어 주며 강 현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 었다.

“네가 필요한 곳인가 보구나.”

“네.”

“현아,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엄마 아빠는 널 응원하고 있다는 걸 기억하렴.”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야가 비 틀리기 시작했다.

환각이 걷히고 있는 것이었다.

두 분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강현은 두 분을 잃은 후에 줄곧 가슴에 품어 왔던 말을 꺼냈다.

“아버지,어머니. 낳아 주셔서 감사 합니다.”

추모 편지에 수도 없이 적었던 말.

쉽사리 말하지 못해 입안에서만 맴 돌던 말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말했다.

오랫동안 가슴을 누르고 있던 짐을 치워 낸 기분이다.

비틀리는 시야 속에서 희미하게 대 답이 돌아왔다.

“현아,우리 아들로 태어나 줘서 고맙다.”

원래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기 위해 만들어진 구간인데,오히려 개 운함을 느끼며 나가게 되었다.

이내 곧 비틀렸던 시야가 원상복구 되었다.

먼저 환각에서 벗어난 것인지 김혜

림이 강현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강현 씨! 강현 씨! 정신 차려요! 에잇! 어쩔 수 없네! 비장의 수단을 쓸 수밖에!”

잠자는 왕자라도 깨울 작정인지 눈 을 감고 얼굴을 가져다 대는 김혜림 이었다.

강현은 김혜림의 이마에 검지를 튕 겼다.

따악!

“아얏!”

“잠든 사이에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비장의 수단이 제대로 먹혔네요. 강현 씨는 기습을 싫어하니까 깨어 날 줄 알고 있었어요.”

“되는 대로 갖다 붙이긴. 다른 사 람은 어떻게 됐어?”

“강현 씨가 마지막이에요. 저희는 거의 환각 걸리자마자 알아차렸거든 요. 강현 씨랑 식 올리는데 이상하 게 엄청 상냥한 거예요. 바로 알아 됐죠.”

“알아차릴 만하군.”

“자각하고 있는데도 고칠 생각이 없는 그 당당함. 그런 점까지 사랑 스러워서 탈이라니까요.”

환각에서 벗어나면 바로 다음 구간 으로 갈 수 있는 거였는지 다음 구 간과 이어지는 문이 생겨나 있었다. 제4신화급 웨이브도 이제 마지막 구간만 남아 있었다.

강현이 일어나는데 김혜림이 고개 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다.

“근데 오래 걸렸네요. 강현 씨가 일착으로 깨어날 줄 알았는데 말이 죠. 어떤 환각이었어요?”

강현은 자리에서 일어나선 몸을 탁 탁 털며 평소보다 감정을 담은 목소 리로 옮조렸다.

“오래전에 보낸 편지의 답장을 받 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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