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 화
투시 스킬을 사용하고 있기에 바위 아래에 통로가 있다는 것도,통로 중간 부근에 카심이 몸을 숨기고 있 다는 것도.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참 다소곳이도 자고 있다.
카니발 대륙 전역에 위세를 떨치던 카리스마 수장도 이리 보니 가엾게 느껴질 따름이다.
부하들에게 배신당하고,죽지 않으 려고 아등바등 라이프 크리스털을 지니다가 영문도 모른 채 칼침 맞고 죽는 삶.
카니발을 뒤흔든 명성의 죽음치고
는 허무한 감이 있다.
뭐 어쩌겠나.
누구에게나 유다나 브루투스는 존 재하는 법이다.
줄리앙은 레이피어에 그랜드 오러 를 부여하며 바위를 반으로 쪼겠다. 쩌억! 우우우응!
바위가 갈라지면서 막혀 있던 통로 가 훤히 드러났다.
더불어 막혀 있던 숨통이 트인 듯 통로에서 고둥 부는 소리마냥 응대 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드 컨트롤로 레이피어를 움직여 선 열린 구멍을 향해 쏘아 보냈다. 투시 능력으로 카심이 누워 있는 지점을 확인하며 레이피어를 조종하고 있던 중.
누워 있던 카심이 갑자기 벌떡 일 어나며 레이피어를 손으로 덥석 잡 았다.
가지고 있던 아다만티음 건틀릿은 분신에게 있다.
허면 맨손으로 잡았다는 건데.
어느덧 카심의 손에는 그랜드 오러 가 맺혀 있었다.
분신을 조종하다가 본체의 위험을 감지하고,금세 일어나 그랜드 오러 를 부여해서 날아드는 검을 낚아챔 셈이었다.
말로 늘어놓으면 길어서 그렇지 모 든 공정이 이루어지는데 걸린 시간 고작 수 초.
줄리앙은 투시를 통해 통로 속에서 카심이 뛰어나오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았다.
‘나온다! 빨라!’
부유술을 쓰고 있는 건지 미끄러지 듯 통로 위로 솟아오르는 카심이었 다.
나오자마자 공격할 작정인지 카심 의 양팔에 대량의 마나가 맺혀 있었 다.
지형상 줄리앙이 훨씬 유리했다.
줄리앙은 해안 절벽 위에 있는 반 면,카심은 여전히 좁은 통로에 있 으니까.
지형의 유리함을 살려야 한다.
‘올라오기 전에 친다!’
줄리앙은 통로 입구에 손을 뻗으며 마나번 성질을 지닌 혼령불을 쏟아 냈다.
화르륵!
푸른 불꽃이 방사기의 불꽃처럼 거 세게 뿜어져 나오며 통로 안을 가득 채웠다.
알고 있다.
카심이 가진 실드 스텟의 수치를 감안하면 이만한 불꽃으로 피해를 주는 건 어림도 없다.
불꽃은 시야를 가리는 용도이며 결 정타는 레이피어로 날릴 생각이다. 마나번 성질을 가진 불꽃을 통로에 쏟아 내며 레이피어에 래퍼드 커터 를 부여했다.
‘래퍼드 커터’는 상대방의 실드에 공격이 닿는 순간.
시전자의 공격력보다 상대의 실드 스렛이 높으면 실드 무시 능력을, 시전자의 공격력보다 상대의 실드 스렛이 낮으면 실드 파괴 능력이 부 여되는 스킬이었다.
한데 불꽃 속으로 레이피어를 날려 서 카심을 관통하려는 찰나.
통로 속에 있던 카심의 모습이 사 라졌다.
'사라졌어? 이동 스킬인가! 어디냐, 놈은 어디에 있지?’
카심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위험을 경고하듯 머리카락이 쭈뻣쭈 뻣 곤두섰다.
더불어 머리 위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급하게 고개를 드니 언제 이동했는 지 카심이 부유술로 공중에 떠선 주 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흐읍!”
짤막한 기합과 함께 주먹의 형태를 띤 마나덩어리가 뿜어져 나왔다. 강현의 투영검을 상대했던 것처럼. 줄리앙은 습관적으로 마나번 스킬 인 혼령불을 날려서 마나덩어리를 태웠다.
화르륵!
마나덩어리에 혼령불이 닿자 마나 덩어리가 증발했다.
마나덩어리에 마나를 얼마나 때려
넣은 건지 증발하는데 한참 걸렸다. 이글거리는 불꽃 사이로 카심이 빠 져나오더니 줄리앙에게 주먹을 내리 꽂았다.
줄리앙은 이동 스킬로 10미터가량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여 카심의 주 먹을 피했다.
줄리앙이 서 있던 자리에 카심의 주먹이 꽂히면서 돌바닥에 거미줄과 같은 균열이 생겨났다.
쿵! 쩌저적!
카심은 땅에 박아 넣은 주먹을 당 기면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경솔하게 마나번 스킬을 써서 스스 로의 시야를 제한한 것,재사용대기 시간이 존재하는 이동 스킬을 서슴없이 사용한 것.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는 걸 반증하 는 모습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줄리앙을 상대로 는 질 것 같은 느낌이 안 든다.
그나저나 아이작과 룬이 갑자기 무 단이탈을 한 이후에 줄리앙이 본체 를 찾으러 왔다는 건…….
“아이작과 룬에게 무슨 헛소리를 한 것이냐?”
줄리앙은 예비 레이피어를 꺼내어 역수로 쥐었다.
“커뮤니티의 일 따윈 이 세상의 진 리에 비하면 보잘것없다고 알려 준 게 전부랍니다.”
“혀로 사람을 홀렸나. 과연 쓰레기
가 생각해 낼 법한 행동이로구나.”
“그리 여유만만하게 있어도 될까 요? 라이프 크리스털이 공격당하고 있습니다만?”
“흥! 우쭐거리지 마라. 네놈을 정 리하는데 몇 분이나 쓸 성싶더냐?”
벌써 30회 차가 넘어가고 있는 마 당이다.
레벨300짜리 몬스터인 블루 서번 트가 소환되고 있었다.
레벨300짜리 몬스터가 맹공격 속 에서 라이프 크리스털이 얼마나 버 틸 수 있을까?
줄리앙의 라이프 크리스털은 3급 사제 3명과 아이작,룬이 지키고 있 다.
지부장급 5명이면 레벨300짜리 몬 스터는 거뜬히 잡아 낼 수 있을 테 니 줄리앙의 라이프 크리스털은 무 사만만이다.
시간만 끌면 승리.
이 얼마나 쉬운 싸움이란 말인가.
시간을 끌기 위해 수비 일변도로 나서려고 마음먹었다.
헌데 하늘에 떠 있던 카심이 볼품 없는 인간을 보듯 한심하단 눈빛을 띠더니 동쪽 해변 방향으로 몸을 틀 었다.
자신을 무시하고 라이프 크리스털 을 지키러 갈 속셈인가!
줄리앙은 레이피어를 날리며 카심 을 도발했다.
“순순히 보내 줄 것 같습니까? 사 람 얕보지 마십시오.”
“얕보는 건 네놈이다.”
“죽을 시점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군요. 그래 도 죽기 전까지 초연하게 구는 대범 함은 인정해 드리죠.”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군. 내 얘 기를 하고 있는 것 같나? 내 부하 들을 얕보지 말라 이 말이다.”
카심의 부하라면 아이작과 룬을 일 컴는 것일 터.
그들을 얕보지 말라니.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죽을 때가 되니 헛소리를 하는 거 라 여겼다.
그런데 아까부터 발끝의 감각이 느 껴지지 않는다.
이상한 나머지 아래를 보았는데 발 끝부터 서서히 몸이 가루가 되어 흩 날리고 있었다.
줄리앙은 자신의 몸이 붕괴되고 있 다는 걸 알곤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게 뭐야! 몸이…… 어째서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고!”
카심이 무언가 수작을 부린 것처럼 보이진 않다.
헌데도 줄리앙의 몸에 죽음이 닥쳐 들고 있다.
설마 서쪽 해변에 있는 라이프 크 리스털이 부서졌단 말인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3급 사제가 3명이나 있고 아이작 과 룬이 가세했는데…….
순간 뒤통수가 얼얼했다.
부하들을 얕보지 말라는 카심의 말.
설마 아이작과 룬이 무언가 수작 을?
아이작과 룬이 카심을 배신한 척하 고 서쪽 해변으로 가서 3급 사제들 을 베었다.
그러고선 줄리앙의 라이프 크리스 털을 방치.
완전히 포섭했다고 여겼던 이들이 사실은 카심을 배신한 게 아니었고, 역으로 포섭당한 척하며 줄리앙을 쳤다.
뒤통수를 치려 했던 자.
되려 뒤통수를 맞았으니.
그 허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줄리앙은 사라져 가는 자신의 몸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 다.
“바보 같은"?… 아이작과 룬은 네 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언 제 배신 명령을……
도청 벌레 스킬로 아이작과 룬의 대화를 계속 엿들어 왔다.
단 한 번도 카심에게 줄리앙의 얘 기를 한 적 없었거늘 언제 뒤통수를 칠 작전을 짰단 말인가.
카심은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부하들도 사람이다. 배신할 생각
을 품을 수도 있고,중간에 마음을 고쳐먹을 수도 있지. 녀석들은 나와 너 사이에서 갈등했고 끝에는 날 택 한 거겠지. 억울해 마라. 네 그릇이 작아서 진 것일 뿐이니까.”
줄리앙의 작전은 잘못되지 않았다. 특기를 살려 사람을 홀리려 했고 거의 넘어왔었다.
3단계의 특성을 이용한 작전까지 가미하여 카심이 빠져나갈 길이 없 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에,그릇의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
말을 통해 사람을 다루려는 자와 행동을 통해 사람을 다루는 자의 차 이.
말은 불완전하다.
때론 만들지 않아도 될 오해를 낳 기도 한다.
동쪽 해변으로 날아가려 했던 카심 은 방향을 수정하여 해안 동굴 쪽으 로 내려갔다.
동굴 안에 몸을 뉘이고 다시 분신 을 만들 생각이다.
왜냐하면 본체를 위협하던 줄리앙 은 이미 사라졌으니까.
줄리앙이 서 있던 자리에는 그의 몸이 부서지면서 생겨난 잿가루만 풀풀 날리고 있었다.
*
해안 동굴에서 분신을 만든 카심은 분신에 의식을 옮겨 동쪽 해변으로 파견했다.
줄리앙에게 시간을 빼앗긴 탓에 한 동안 라이프 크리스털을 방치한 꼴 이 되어 버렸다.
현재 라이프 크리스털은 레벨300 짜리 몬스터인 블루 서번트의 공격 을 받아 부서지기 일보 직전에 놓여 있었다.
파아아앗!
블루 서번트들이 냉기 브레스를 쁨 어 댄 나머지 라이프 크리스털엔 온 통 서리가 껴 있었다.
드래곤이 되다만 도마뱀 놈들.
지키는 사람이 없다고 아주 신났구
나.
모래사장 위에 아다만티음 건틀릿 이 덩그러니 널브러져 있었다.
본체에 의식을 옮기면서 앞서 소환 해 두었던 분신이 사라져 버렸다.
그 때문에 분신에게 착용시켰던 아 다만티음 건틀릿이 방치된 것이었 다.
카심은 아다만티음 건틀릿을 착용 하고 블루 서번트들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어딜 보고 있느냐! 네놈들의 상대 는 나다! 덤비거라,도마뱀 아류들 아! 통째로 아작을 내주마!”
라이트닝 건틀릿,윈드스톰 건틀릿, 마나광권 등등…….
건틀릿 한정 스킬들을 연사하며 블 루 서번트들에게 압도적인 힘을 선 사하는 카심이었다.
블루 서번트뿐만 아니라 31회 차,
32회 차 몬스터들도 잇따라 소환되 었으나 전력을 발휘하는 카심 앞에 선 무력할 따름이었다.
30회 차,31회 차,32회 차를 거치 면서 마나 스텟이 300, 310, 320씩 계속 오르며 어느덧 마나 스렛 수치 가 5, 000을 넘겼다.
점점 본연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카심을 공격무효화,무적 능력 없이 막는다?
어림없는 소리!
몬스터가 소환되는 족족 사냥하던
차에 서쪽 해변으로 갔던 아이작과 룬이 돌아왔다.
두 사람은 복귀와 동시에 목깃을 젖히며 두 무릎을 꿇었다.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벌 은 달게 받겠습니다.”
“적의 세 치 혀놀림에 놀아나 허튼 마음을 품은 이 모자란 부하를 벌해 주십시오.”
결과적으론 줄리앙을 죽이는데 일 조했으나 배신 직전까지 갔던 건 사 실이 다.
카심이 그토록 자신들을 믿어 주는 데 그 마음을 배신한 스스로를 용서 할 수 없었다.
한때 배신의 마음을 품은 것은 부
정할 수 없는 사실.
죽음으로 사죄하고자 했다.
카심은 사냥에 전념하면서 여느 때 와 똑같이 두 사람을 대했다.
“지금부터 속도를 높여서 최강현을 앞지르겠다. 교대 없이 총 전력을 기울여야 할 테니 움직여라.”
사람은 궁지에 몰릴수록 본성이 드 러난다던데 카심은 언제나 한결같 다.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아이작과 룬은 새삼 카심의 그릇을 실감하며 힘차게 대답했다.
“네,수령님!”
역시 우리 수령님은 최강이시다. 마나 스렛까지 갖춘 지금이라면 최강현을 이길 수 있으실지도 몰라. 그리 생각하며 일말의 희망을 품은 아이작과 룬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희망에 그치 게 된다.
수 시간 뒤에 찾아올 남쪽 해변의 사내에 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