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36억 CP를 취하고 나선 별다른 행 동을 취하지 않고 조용히 시간을 보 냈다.
늪에 빠진 빙백검을 일찍 꺼내면 휴먼 슬라임족이 기형적인 물고기와 오염된 식수를 제공할 테니 적절한 시기에 꺼내는 것이 중요했다.
휴먼 슬라임족이 3시 방향의 통로 를 완전히 뚫을 시점에 맞춰서 빙백 검을 꺼내고자 일부러 빙판을 깎아 내는 속도를 조절했다.
작정하고 계책을 짜내면 CP를 더 울궈 먹을 수 있긴 한데 여기서 더 뜯어냈다간 휴먼 슬라임족의 작업시간이 늘어날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아도 정보 수집과 계책을 부리느라 1일 차와 2일 차를 소모 해 버렸다.
늑장 작업으로 빙백검을 늦게 파내 는 척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 에 여기서 더 작업 시간이 늘어나는 건 좋지 않았다.
소모해 버린 1일 차,2일 차를 제 외하고 3일 차부터 줄곧 개통 작업 이 이어졌다.
1,2일 차를 빼고 계산하면 9일 차 에 개통 작업이 끝날 예정이었다. 헌데 개통 작업 완료까지 이틀을 남겨 둔 시점.
얼렸다곤 하나 오염된 늪에서 지내
는데 몸에 영향이 없을 리 없었다. 가장 먼저 반응이 나타난 사람은 루나였다.
“루나야? 엄마랑 같이 씻자?”
다른 건 몰라도 세이아나의 루나 사랑은 지극했다.
자취하는 자와 부모님과 같이 사는 자의 생활 환경이 극과 극이듯.
평소에는 느끼기 힘든 부분에서 세 이아나는 루나를 위해 굉장히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런 세이아나가 루나의 몸에서 이 상한 점을 발견한 건 저녁에 목욕을 하기 전의 일이었다.
강현 일행은 씻을 때만 잠깐 난쟁 이 하우스를 소환하여 욕실을 사용 했는데 스노우맨을 소환하여 녹인 후,제왕의 화염검으로 데워서 따뜻 한 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오늘도 루나와 씻으려고 욕실에서 탈의를 하던 중.
세이아나는 루나의 등에 보랏빛 반 점이 돋아나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거 뭐야? 애한테 어쩌다 이런 게 생겼지?’
원인이 짐작 안 가는 건 아니다.
아무리 빙백검으로 얼렸다지만 오 염 물질 위에서 생활을 하는데 몸에 이상이 없을 리가 없다.
용해의 늪을 이루고 있는 오염물질 이 조금씩이 몸에 악영향을 미치다 가 체구가 가장 작은 루나에게서 먼저 반응이 나타난 것이었다.
세이아나는 루나가 신경 쓸까 봐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리며 티 나지 않게 물어보았다.
“우리 루나 어디 아픈 곳 없어?”
“아무데도 안 아파.”
혼자 지내 본 자는 알 거다.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면서도 외롭 다는 감정을.
세이아나쯤 되는 경력과 나이가 되 면 감정에 막을 씌운 것처럼 허전함 을 느낀다.
버팀목이 될 만한 존재가 옆에 있 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보람을 느끼 기 마련이다.
그게 세이아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아니,힘이 되는 이상이다.
몸속에 독이 돌고 있어 아이를 가 지면 아이가 중독되어 버리는 절망 적인 체질을 가진 세이아나에게 루 나는 자신의 아이나 다름없는 존재 가 되었다.
이미 세이아나에게 있어 루나는 삶 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배 아파 낳은 아이가 아니라도 얼 마든지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걸 알 려 준 아이.
그 아이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눈치 100단인 세이아나가 걱정할 까 싶어 아픈 사실을 숨기고 있단 걸 모를 리 없었다.
중요한 공략 중에 아프다고 말하면 폐가 될까 봐 일부러 감추고 있었다 는 걸 어찌 모르랴.
세이아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뒤 로하며 루나가 안심하도록 평소와 같은 말투로 말했다.
“등은 언제부터 아팠어?”
“……어제부터.”
어제부터 생겨난 것치곤 등의 절반 에 해당하는 부분에 보랏빛 반점이 번져 나가 있었다.
2일 차 혹은 3일 차 때부터 차츰 차츰 번져 나가다가 이틀 전부터 서 서히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을 거다. 요 며칠 동안 왜 자꾸 혼자 목욕 한다고 하나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샤워야 각자 따로 한다지만 목욕의 경우엔 같이하는 편이었다.
난쟁이 하우스 욕조가 제법 큰지라 혼자 들어가기엔 낭비가 심하고,혼 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적적한지라 같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웬일로 혼자 한다고 고집을 피우나 싶더니 며칠 전부터 몸의 변화를 감 지하고 있었나 보다.
세이아나는 루나의 등을 살피다가 수건을 따뜻한 물로 적셔서 손에 쥐 었다.
“가라앉을 때까진 물 끼얹지 말고 수건으로 닦기만 하자. 알았지?”
“응. 미안.”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사실 엊그제부터 아팠어. 걱정할 까 봐 말을 못해서 거짓말했어.”
“후후,거짓말인 거 들킬까 봐 현 이한텐 안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구나?”
“ o ,,
■方'
“못된 아이네. 거짓말이나 하고.”
“잘못했어.”
“농담이야. 엄마가 현이한테 말해 볼게.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혼자서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본바탕은 사역마인 아이이다.
겉으로는 밝게 행동해도 항상 자신 은 사역마이니 폐를 끼치면 안 되고,무조건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을 터.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말해 주었으 면 좋았을 텐데.
그마저도 어른의 이기심이겠지. 아이에겐 아이만의 고민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걸 탓하는 건 어른의 이기심일 뿐이다.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 그럴 수 없다는 게 가슴을 저민다. 세이아나는 톡톡 두드리듯 조심스 럽게 루나의 등을 닦아 주며 억지로 웃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루나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
용해의 늪 3시 방향에 위로 높이 뻗어 있는 절벽.
절벽 위는 구역의 끄트머리임을 증 명하듯 보이지 않는 벽으로 막혀 있 다.
황갈색 절벽 아랫부분의 어느 한곳 에 적갈색 바위가 박혀 있었는데, 해당 바위 너머엔 옆 구역과 이어진 길이 있었다.
즉 적갈색 바위가 통로가 있는 지 점을 알려 주는 표식인 셈이었다. 바위 앞에는 표지판이 박혀 있는데 표지판에 이리 적혀 있었다.
[휴먼 슬라임족의 애시드 볼이 아 니면 절벽에 피해를 입힐 수 없습니 다.]
현재 작업이 8할가량 진행되었다고 한다.
강현과 김혜림,세이아나는 바위가 녹아내려 휑하게 뚫린 통로 속으로 들어갔다.
통로 안으로 얼마쯤 걸어 들어가다 보니 길을 막고 있는 바위가 나타났 다.
지금까지 걸어 들어온 깊이를 통해 남은 바위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 다.
강현은 표면에 녹은 흔적이 남아
있는 바위를 살피며 관찰 결과를 입 밖으로 내었다.
“바위가 빈틈없이 꽉 차 있어서 빼 내는 건 무리야. 이 이상 시간을 단 축하는 건 힘들어.”
세이아나로부터 루나의 상태를 전 해 듣곤 타개책을 마련하기 위해 동 굴을 찾아왔다.
하지만 현장을 유심히 살펴봐도 달 리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오염된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될 상 황을 만들었고,휴먼 슬라임족이 교 대로 주야간 작업을 해 주고 있다.
거기에 36억 CP까지 취했다.
1-B구역에서 할 수 있는 건 모두 한 셈이었다.
여기서 더 나은 방법을 바라는 건 욕심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이아나에겐 빨리 이곳을 벗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세이아나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 정으로 통로 안을 살폈다.
“분명 다른 수가 있을 거야. 없어 도 만들어야 해.”
현재 강현 일행의 구조는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는 편이었다.
강현과 김혜림 커플 한 쌍,세이아 나와 루나 모녀.
강현이 루나를 일개 사역마 취급이 아닌 한 명의 인격체로 대해 주면서 억지로 옆에 붙어 있지 않아도 됨을 인정한 바였다.
만약 모든 공략이 끝난다면 루나는 강현이 아닌 세이아나가 데려가기로 했었다.
루나 본인도 그걸 바라고 있고 하 니 분쟁의 여지는 없었다.
강현과 세이아나가 이어지면 여태 까지처럼 쭈욱 같이 지내게 되겠지 만 그건 지극히 희박한 확률이었다. 때문에 강현과 김혜림이 루나를 대 하는 태도와 세이아나가 루나를 대 하는 태도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 었다.
강현과 김혜림이 루나를 남처럼 여 긴다는 게 아니다.
세이아나가 두 사람 이상으로 루나 를 지극히 아끼고 있다는 거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강현과 김 혜림은 루나에 대한 세이아나의 깊 은 애정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았 다.
세이아나는 통로 벽과 천장,바닥, 길을 막고 있는 바위까지 전부 훑어 보다가 주먹만큼 작은 틈을 발견했 다.
“찾았다! 여기 틈이 있어!”
김혜림은 쥐고 있던 발광이끼 등불 을 가까이 대어 세이아나가 발견한 틈을 살폈다.
“건너편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아 요?”
“어, 저 멀리에 발광이끼 불빛이 보여.”
“틈이 있긴 한데 이걸로 뭘 할 수 있을지……
“현아,지금 빙백검 뽑아 올 수 있 지?”
빙백검이 필요하다는 말만으로도 어떤 작전인지 대번에 감이 왔다. 작은 틈을 통해서 w미터 길이의 원통형 바위를 치우는 건 불가능하 다.
하지만 치우는 게 아니라 빼내면 어떻게 될까?
빼낸다는 가정 하에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라이의 ‘식용 정령’,강현의 ‘빙백 검’,세이아나의 ‘파이어 필드’를 이 용하면 힘들게나마 바위를 빼낼 수 있다.
강현은 빙백검을 가지러 가기 앞서 세이아나에게 결심이 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어. 이론상으로는 가능해.”
“이론상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우리 모두 그만한 능력 은 있잖아?”
“하는 수 없군. 억지에 어울려 주 지.”
정상적이라 부를 만한 방식은 아니 다.
어쩌겠나.
세이아나가 저리도 루나를 아끼는 것을.
더군다나 루나가 먼저 몸에 이상이 생겼다 뿐이지 강현과 김혜림,세이 아나의 몸도 조금씩 악화되고 있는 증이 다.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빨리 나가서 나쁠 건 없다.
강현은 못 이기는 척 동굴 바깥으 로 나가서 빙백검을 빠뜨린 곳으로 돌아갔다.
얼음에 갇혀 있는 빙백검을 빼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몽환검에 그랜드 오러를 부여하여 단단히 얼어붙은 얼음을 가르곤 금 고에서 물건 꺼내듯 손쉽게 빙백검 을 빼냈다.
얼음에서 빠져나온 빙백검은 왜 혼
자 놔뒀냐고 시위하듯 냉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빙백검에 담아 둔 마나를 방출하여 냉기 방출을 중단시키고 3시 방향으 로 돌아가자 세이아나가 바위를 빼 낼 준비를 마쳐 두고 기다리는 중이 었다.
“가져왔지? 시작하자. 혜림이 넌 나가 있어.”
“어떻게 하려고요? 우리 파티는 항 상 중요한 부분만 쏙 빼놓고 일을 진행해서 문제라니까요.”
“우리 잘난 청일점의 영향 아니겠 어? 얘가 제 잘난 맛에 말을 안 하 니까 우리도 덩달아 말을 아끼게 된 다니까.”
“말은 오해를 사기 쉬워.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게 낫지.”
“여자는 말에서 확신을 얻거든. 그 부분은 공부가 더 필요하겠어,최강 현 군?”
“타조가 닭에게 나는 법 가르치는 격이군.”
“피이? ,노처녀가 연애 강의하니까 우습다 이거지?”
“농담은 그쯤하고 시작하도록 하 지.”
강현은 라이를 소환하여 물의 식용 정령을 소환하라 일렀다. 그러곤 라 이가 소환한 물의 식용정령을 주먹 만 한 틈으로 통과시켜서 건너편에 물을 채우도록 지시했다.
바위 너머에서 물 채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돠? 아? 이??
이어서 라이가 땅의 식용 정령을 소환하여 욕조에 마개 끼우듯 바위 아래의 틈을 흙으로 메웠다.
건너편에선 계속 물이 들어차고 있 을 거다.
30분가량 지났을 즈음.
바위 아래의 틈에 메워 둔 홁이 조금씩 바깥으로 밀려나오면서 물이 괄괄 쏟아졌다.
바위 건너편에 물이 가득 차서 유 일한 구멍인 바위 아래의 틈으로 빠 져나오는 것이었다.
둑이 터진 듯 물이 빠져나온 순간.
강현이 틈 사이로 빙백검을 쑤욱 집어넣었다.
즈즈즉!
빙백검에 마나를 한껏 불어넣어 냉 기를 방출하자,빙백검이 들어간 틈 을 기점으로 물이 얼기 시작했다. 물이 얼음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부피가 늘어난다.
물을 가득 채운 병을 냉동실에 넣 으면 내용물의 부피가 늘어나 병이 깨지는 것처럼.
바위 건너편 통로에 가득 찬 물이 얼면서 부피가 늘어나 바위를 밀어 냈다.
드드드득!
물의 양이 많다 보니 늘어나는 부
피 또한 상당했기에 바위가 천천히 밀려나면서 5? 6cm가량 이동했다. 마무리로 강현이 빙백검을 빼내고 세이아나가 바위 아래의 틈에 메모 라이즈 스태프를 끼워 넣었다. 그러 곤 실드를 한껏 끌어을리며 파이어 필드를 시전했다.
화르륵!
통로 바닥에 불꽃이 피어오르면서 바위 건너편에 있는 얼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물을 채우고 얼려서 바위를 밀어내 고,얼음을 녹인 후 다시 물을 채우 고 얼려서 바위를 밀어내고.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원통형 바위가 빠져나올 것이다.
여태까지 휴먼 슬라임족이 바위를 녹이면서 애시드 볼로 통로 바닥을 녹여 두었기에,일정 구간부턴 바위 의 지름보다 통로의 지름이 더 커서 힘으로 끌고 나올 수 있다.
그러나 1회에 고작 5? 6cm가량 움 직이고 있다.
수 미터를 이동시키려면 앞으로 수 십 회를 반복해야 할 거다.
정상적인 공략법이 아니기에 고생 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현은 흔쾌히 세이아나의 억지에 어울려 주었다.
억지를 부리는 동기가 인간이 인간 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애정이라 는 것을 알기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만약 세이아나가 루나를 잃게 된다 면 어떻게 될까?
강현은 빙백검으로 세이아나와 라 이의 주변을 냉기로 감싸 열기로부 터 그들을 보호하면서 생각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앞서 걱정 해 봤자 의미 없지.’
걱정을 일축하며 다시 작업에 착수 했다.
물을 채우고,얼리고,녹이고,다시 물을 채우고.
작업을 반복하는 동안 어느덧 해가 뜨고 휴먼 슬라임족이 일어날 시간 이 되었다.
오늘도 작업을 위해 3시 방향으로
몰려든 휴먼 슬라임족은 믿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
통로에 박혀 있어야 할 원통형 적 갈색 바위가 늪 밖으로 빠져나와 있 는 게 아닌가!
더불어 강현과 김혜림, 세이아 나…… 그리고 루나까지 모두 사라 졌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1-B구역 전체가 시커먼 어둠에 물 들면서 초기화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