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하는 플레이어-326화 (326/381)

326 화

리리의 가짜 오빠 역이자 수발을 드는 사람으로 전락한 최진철은 나 날이 지루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병기로서 채택되었지만 표면상 직 책은 성녀다.

성녀로서 예배나 각종 행사에 참가 할 때 힘이 폭주하기라도 하면 의도 치 않은 참사가 벌어진다.

참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모 든 일정마다 최진철이 따라붙었다.

최진철이 있어도 이따금씩 폭주의 기미를 보이긴 했다.

폭주 원인은 대부분 강한 스트레스 를 받았을 때였다.

특히 오빠의 죽음을 계기로 폐인이 되었기에 죽음에 매우 민감해져서 누군가가 죽거나,직접 죽이는 것을 극도로 꺼려 하고 있었다.

악마 같은 라파엘라는 병기로 활용 하려면 죽음에 익숙해져야 한다며 매일같이 최진철에게 이리 명령하고 있다.

“병기가 살인을 꺼려 해선 안 되 지. 적을 죽이려고 있는 게 병기잖 아? 죽이는 것에 익숙해질 때까지 매일 살인을 하게 하도록. 훈련에 필요한 제물은 얼마든지 조달해 주 지.”

최진철도 항상 목적을 위해 누군가 를 뒤에서 찌른 적은 있다.

그러나 라파엘라가 생명을 대하는 태도는 남들과 많이 다르다.

필요에 의해 죽인다기보단 좀 더 근본적인…….

사람 목숨의 가치를 낮게 잡고 있 는 느낌이다.

주변 사람이든,전혀 모르는 타인 이든,자신의 목숨이든.

오늘도 리리는 윗선에서 조달해 온 떠돌이를 연습상대 삼아 죽여야만 했다.

나무기둥에 묶여 재갈에 물린 떠돌 이 사내가 겁에 질려 실험용 쥐처럼 바둥거렸다.

“읍! 읍읍! 으으읍!”

클로이를 포함한 3급 사제들이 훈

련장 주변에 일렬로 서선 리리의 행 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리는 또다시 찾아온 사냥 시간이 너무나도 싫어 최진철에게 아등바등 매달렸다.

“어어어,어어어어어.”

울먹거리며 싫다고 떼를 쓰고 있 다.

아직까지도 그녀는 오빠란 단어 외 에는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가끔씩 내뱉는 경우가 허 다했다.

말을 하지 못하니 보채듯이 울먹거 리는 게 유일한 저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진철은 이를 악물며 매달려 있는

리리를 몸에서 떨어뜨렸다.

“싫어도 해야 해. 오늘은 한 명만 하자. 알았지?”

“어어어? ,으어어.”

“오빠 힘들게 하지 말고 한 번만 부탁할게. 자꾸 이러면 힘들어.”

“어으으으 ”

“자,스킬 쓰고 갔다 오자. 가까이 갔다가 다시 오빠한테 오면 돼. 리 리 착하지? 잘하면 리리가 해 달라 는 거 다 해 줄 테니까 한 번만 힘 내자,응?”

싫다고 보채는 애를 달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리리를 통제하지 못하면 최진철의

목숨이 위험했다.

안 그래도 계속 클로이가 최진철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리리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 속되면 클로이가 라파엘라에게 보고 를 올릴 것이다.

최진철을 이용하여 성녀를 통제하 는 방법은 실패한 것 같다고. 그리되면 최진철은 바로 팽 당할게 분명했다.

죽이는 것이 힘들지도 않다.

제노스의 독충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 터트리기만 하면 최진철의 몸 안에 있는 독충이 터진다.

살기 위해서라도 리리에게 살인을 강요해야 하는 처지였다.

최진철은 마음을 독하게 먹으며 강 하게 나갔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아. 대신 다시는 내 얼굴 볼 생각하지 마.”

리리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말라고 붙잡아도 떠나 버리던 니케의 모습 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트라우마가 되살아남에 따라 리리 가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묶여 있는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몸에서 소멸의 기운이 피어 나나 싶더니 금세 사내를 흔적도 없 이 지워 버렸다.

소멸의 기운을 통해 생명이 꺼질 때 발생하는 복합적인 감정이 전달되기라도 하는 걸까.

리리는 죽은 자의 공포를 떠안은

듯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며 떨었 다.

얼굴은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물들 었고,당장이라도 폭주할 것처럼 소 멸의 기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다시 최진철이 나설 차례다. 폭주하는 리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발을 떼었다.

그런데 웬일로 소멸의 기운이 줄어 들더니 리리 스스로 스킬을 중단하 였다.

드디어 처음으로 상대를 제거하고 도 폭주하지 않았다.

다만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느

낌이 남아 있는지 곧바로 최진철의 품에 안기는 리리였다.

“으어어.”

최진철은 손으로 리리의 등을 쓸어 주며 클로이를 쳐다보았다. 훈련성과를 측정하는 건 순전히 클 로이의 몫이다.

훈련 종료와 함께 언제나처럼 클로 이의 평가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차트에 훈련 내용을 끄적이 며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협박성 멘트가 다그쳤을 때보다 반응시간이 1분 정도 빠름. 폭주를 스스로 컨트롤하게 되었음. 스킬 사 용 후 니케를 찾음. 니케 의존성은 여전함.”

차트에 적는 내용을 입으로 말하고 있었다.

병기 테스트를 할 때도 저리 딱딱 하게 말하진 않을 거다.

역설적이게도 최진철의 마음속에선 역겨움과 안도감이 공존하는 중이었 다.

오늘도 자신의 이용가치를 증명함 으로서 살아남았다.

자신을 오빠라고 철썩 믿고 있는 벙어리를 떠밀어서 살아남았다. 자신의 품에 안겨 바들바들 떠는 이 가날픈 아이를 이용해서…….

깊게 생각하지 말자.

살아남았다는 게 중요하다.

원래부터 이용할 작정이었지 않은

가.

리리를 통제할 수 있게 될수록 세 븐즈 교에서도 날 함부로 할 수 없 겠지.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리리.

원래 가진 능력으로 상대방을 제압 하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이야.

싫어도 할 수밖에 없어.

너나 나나 살기 위해선 힘을 발휘 해야만 한다고.

리리의 떨림이 차차 가라앉던 중에 클로이가 차트 작성을 마치며 중얼 거렸다.

“이제 실전 투입을 할 수 있는 레 벨이 되었음.”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최진철은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 게 목소리를 높였다.

“실전 투입이라니요! 무리인 걸 아 시지 않습니까!”

갑작스럽게 큰 소리를 내자 클로이 와 3급 사제들이 일제히 최진철을 쳐다보았다.

멸시의 감정을 품은 눈빛으로 말이 다.

감정을 배제한 차가운 눈동자가, 어딜 주제도 모르고 나서냐고 말하 는 듯했다.

리리가 병기라면 최진철은 병기를 조종하는 컨트롤러에 불과하다. 조종자가 버튼을 입력하는 족족 병 기에 명령을 전달하는 부속품 주제에 어디서 의견을 내냐는 듯한 시선 이었다.

클로이는 늘상 그래 왔던 것처럼 가식적인 미소를 띠었다.

“성녀님이 걱정되시나 보군요. 하 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아서 요. 카심이 아이스 에어리어의 사제 들을 몰살시켰다는 소식은 들으셨 죠?”

“지나가는 소리로 듣긴 했습니다. 그래도……

“라파엘라 님이 성녀님의 투입을 서두르자고 하시더라고요. 안 된다 고 전해 드릴까요?”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라파엘라를 거역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그를 언급하는 것이 다.

빈 말이 아니라 정말로 리리를 투 입하는 건 시기상조다. 그리고 리리 가 투입되면 리리의 제어역할인 최 진철도 전장에 따라나서야 한다. 살고 싶으면 전장에서 필사적으로 리리를 제어하라고 강요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최진철은 무리한 명령이라는 걸 알 면서도 분을 삼키며 예스맨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들었습니 다. 현장에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전장에 가는 것이니 당신에게도

최소한의 장비는 지급할 예정이에 요. 웬만하면 다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있어 줬으면 하네요. 불필요 한 사태가 발생하는 건 피하고 싶거 든요.”

“명심하겠습니다.”

클로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 러나며 3급 사제들이 그 뒤를 따랐 다.

3급 사제들은 몸을 돌리면서 들릴 락 말락한 음량으로 비웃음 섞인 목 소리를 흘렸다.

“고자는 달라도 다르네. 목소리가 아주 앙칼져.”

“성녀님도 오빠라 불러야 할지,언 니라 불러야 할지 헷갈리시겠어.”

무모한 처사와 한결 같은 모욕.

불구가 되어 버린 몸.

요즘 따라 자꾸 의문이 든다.

이것을 과연 살아남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불구의 몸이 되어 호르몬 균형이 깨진 탓인지는 몰라도 뭘 하든 허무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최진철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가운데 리리가 그의 손을 잡았다.

“어어어.”

여전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 르겠다.

훈련이 끝났으니 돌아가자는 걸 테 지.

바보는 좋겠군.

속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서.

최진철은 맡은 바 가짜 오빠 행세 를 하며 리리와 함께 숙소로 돌아갔 다.

*

며칠 후,최진철과 리리는 불칸 지 방의 신전으로 이동했다.

최진철이 세븐즈 교 신도들의 함정 에 걸려 붙잡힌 지역이기도 했다. 클로이와 3급 사제들과 함께 배를 타고 이동했기에 아이스 에어리어를 거치지 않고 도착한 참이었다.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카심의 부대는 아직 대신전의 위치까지는 알아 차리지 못하고 대신 불칸 신전만 알 아냈다고 한다.

그래서 앞서 배를 타고 불칸 신전 에 도착하여 카심이 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카심을 상대하기 위해 키운 병기이 다 보니 카심의 움직임에 맞춰 배치 한 것이다만 상황이 예상대로만 흘 러가진 않았다.

카니발 차이나타운과 스타더스트의 지부장들이 차례차례 병력을 이끌고 불칸 신전에 쳐들어왔다.

카심이 도착하기 전에 세븐즈 교의 신전 하나를 무너뜨려 공적을 어필 할 속셈으로 단독 작전을 펼친 것이었다.

세븐즈 교 입장에서도 커뮤니티의 단독 작전은 반길 만한 일이었다.

리리의 좋은 스파링 상대로 써먹을 수 있으니까.

실제로 가장 먼저 도착한 카니발 차이나타운의 병력은 1시간도 안 되 어 제압되었다.

리리 혼자서 나서서 말이다.

두 번째로 도착한 스타더스트의 병 력마저도 제압하는데 1시간도 채 걸 리지 않았다.

퍼석!

리리가 접근하여 손을 뻗기만 했는 데도 스타더스트 지부장의 팔이 소 멸 되었다.

팔만이 아니다.

전투를 거듭하면서 스타더스트 지 부장의 몸은 산탄을 맞은 나무벽 마 냥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스타더스트 지부장은 절망에 절은 표정을 지으며 서서히 몸뚱이가 기 울어졌다.

“고,고메즈 지역장님과 같은 스킬 이라니……

최진철과 클로이,3급 사제들은 멀 찍이 떨어져 리리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실전을 거듭할수록 리리의 전투 능 력이 향상되고 있다.

적을 섬멸할 때까지 절대로 소멸의 기운을 풀지 않는다.

훈련 마지막 날,최진철이 다시는 얼굴 볼 생각하지 말라고 한 게 제 대로 전환점으로 작용한 모양이다. 클로이는 전투가 끝났음을 확인하 며 원거리 정찰 스킬을 해제하였다.

“이번에도 남김없이 적을 전멸시켰 네요. 저희는 뒷정리를 할 테니 성 녀님을 다독이도록 하세요.”

망설임 없이 적을 죽이게 되었지만 전투 후에는 항상 발작의 기미를 보 이는 리리였다.

그래서 전투 후에 최진철이 그녀를 다독여 주어 심신을 안정시켜야 했 다.

클로이와 3급 사제들이 전투 뒤처 리를 하러 간 동안,최진철은 자신을 향해 돌아오고 있는 리리를 다독 여 주었다.

“괜찮아. 이번에도 잘했어. 계속 이 렇게만 하면 돼.”

다독이며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등 을 쓸어 주는데 뭔가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평소에는 전투가 끝나면 몸을 덜덜 떨었는데 오늘은 떠는 정도가 아니 라 몸 전체가 강하게 흔들리고 있었 다.

이유는 몰라도 몸 상태가 매우 악 화된 느낌이 강하게 풍겼다.

“으으으 ”

입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가 신음 소리에 가깝다.

스트레스 때문인가?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말 때문에 그녀 나름대로 계속 참아 왔던 것이 다.

스트레스가 허용량 이상 누적된 탓 에 발작으로 이어진 것 같다. 발작이면 소멸의 기운이 폭주해야 될 텐데 그것도 아니다.

‘이런 리리는 처음 봐. 평소보다 상태가 심각한데 어쩌지? 클로이를 불러?’ 처음 겪는 일이라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최진철은 마음을 굳게 먹으며 냉정 을 되찾았다.

이번 발작은 클로이로서도 처음 보

는 현상일 터.

클로이를 부를 시간에 리리를 살피 는 게 낫다.

무엇보다 일일이 그녀에게 보고를 해 봤자 돌아오는 게 없다.

최진철과 리리의 숨통을 틀어막으 면 틀어막았지,절대 우군이 되어 줄 여자가 아니다.

“어이,리리. 괜찮아? 오빠 여기 있어. 정신 차려.”

리리의 상태는 점점 심각해져서 실 신 직전까지 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리리를 진정시킬 방법을 찾던 중.

리리의 팔뚝에 가느다란 혈선이 생 겨났다. 그러곤 벌어진 상처에서 보석 몇 조각이 밀려나와 아래로 떨어 졌다.

보석 조각이 몸에서 쑤욱 빠져나옴 과 동시에 리리의 떨림이 멎었다.

최진철은 얼른 리리의 상처에 포션 을 부어 준 후 떨어진 보석 조각을 집어 들었다.

‘이게 뭐지?’

리리의 몸 안에 심어져 있던 어떤 물건이었던 것 같다.

그에 해당하는 물건이라면 하나밖 에 없다.

리리가 소멸의 기운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보구이자 그녀의 성녀 직위를 유지해 주고 있는 것.

리리에게 심어 둔 소멸의 돌밖에

더 있겠는가!

최진철은 얼른 마법석 조각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몸에 심은 보구라 몸 상태에 영향 을 받은 건가. 그렇지 않고선 마법 석이 부서진 이유가 설명이 안 돼. 스트레스가 누적되는 동안 마법석에 도 계속 부담이 걸리고 있던 거였 어!’

소멸의 돌이 부서졌으니 더 이상 리리는 소멸의 힘을 쓰지 못한다. 그뿐이랴.

카심에게 대항하려고 키운 병기가 정작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무용지 물이 되어 버렸지 않은가.

라파엘라는 물론이고 고위사제 전

원이 길길이 날뛰며 리리와 최진철 을 갈가리 찢어 버릴 게 분명했다. 도망치고 싶어도 몸 안에 독충이 있으니 그것도 무리다.

살아남기 위해선 그녀에게 아직 이 용가치가 있는 것처럼 꾸며야 한다.

최진철은 주변 가까이에 아무도 없 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곤 막 정신 을 차린 리리에게 낮은 목소리로 똑 똑히 주의를 주었다.

“리리,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넌 계속 소멸의 능력을 쓸 수 있는 상태인 거야.”

“어어으?.”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않아도 좋 으니까 지금까지처럼 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어. 알겠어?”

“어브브…… 어버.”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보아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만은 알아들은 것 같다.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

소멸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속여야 한다.

여태까지 해 왔던 일을 반복하면 될 일이다.

이번에는 속일 대상이 세븐즈 교와 커뮤니티일 뿐.

그러려면 리리가 계속 성녀여야만 한다.

그녀가 살아야 나도 산다.

최진철은 꺼졌던 의욕이 되살아나

는 것을 느끼며 눈에 생기를 되찾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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