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화
“적들 스스로 물귀신 부적을 제거 해 준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지. 근데 이상론은 누구나 내놓을 수 있네. 모든 계획엔 실행 가능 여부 가 중요한 거 아니겠나.”
아무리 그럴듯한 주장을 해도 근 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헛소리에 불과하다.
유일하게 강현을 억제할 수 있는 수단을 공작군 스스로 포기할 리 없다.
그란데 백작의 정보망을 통해서 알아낸 건 고작해야 물귀신 부적 이 전방에 전달되었다는 게 전부다.
카슈아딘이 누구누구에게 물귀신 부적을 전달했는지까진 알아내지 못했다.
정말 별거 아닌 일개 잡졸에게 줬을 수도 있고,카슈아딘을 호위 하는 자들에게 줬을 수도 있으며, 어쩌면 카슈아딘 본인도 한 장 사 용했을 수도 있다.
확신할 수 있는 정보가 없는 만 큼 어지간히 완벽한 계책이 아니 면 시도하지 않느니만 못했다. 강현은 문제 될 게 없다는 양 태 연하게 계책을 을었다.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을 꺼 낸 것이지요. 먼저……
강현의 입에서 앞으로 시행할 계 책의 과정이 차례차례 흘러나왔다.
계책의 과정을 듣는 내내 그란데 백작의 표정에 감탄이 깃들었다. 모든 설명이 끝났을 때.
그란데 백작은 의혹이 완전히 걷 힌 듯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야. 아주 좋아. 타이 밍만 제대로 맞추면 먹혀들겠어.”
“시행하시겠습니까?”
“당장 시행하지.”
이후에 그란데 백작이 계책에 힘 을 실어 줄 의견을 더해 주었다. 강현과 그란데 백작은 세부적인 조정을 하면서 계책을 더욱 다듬 었다.
계책은 더욱 뻗어 나가 물귀신 부적에 대한 대책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을 노리는 비수가 되었다.
*
서부전선의 요중지 중 한 곳인 베이커 자작령.
황제파에서 그란데 백작령이 뚫 리면 곧장 샹데르로 진격이 가능 한 것처럼, 공작파에선 베이커 자 작령이 뚫리면 곧장 드리안 공작 가로 진격이 가능했다.
때문에 베이커 자작령은 내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요새화 작업을 해 왔다.
지금에 이르러선 베이커 자작령 은 강과 절벽을 끼고 높은 담을 쌓아 올린 천혜의 요새가 되었다. 베이커 자작은 야간 정찰을 마치 고 막 영지에 복귀한 정찰대로부 터 순차적으로 보고를 들었다.
“철야로 정찰을 나갔다 오느라 수 고했네. 적의 동향은 어떤가?”
“제1정찰대에서 보고 드립니다. 카슈아딘이 케시어 근처에서 진을 치고 농성 준비에 들어간다고 합 니다. 조만간 이쪽에 보급을 요구 할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은 이미 전달 받은 사항 일세. 다음.”
“제2정찰대에서 보고 드립니다.
서부전선에 최강현이 합류했다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샹데르에 있 다고 하지 않았나? 합류 속도가 매우 빠르군. 더미 정보일 수도 있 네.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도착 했다고 해서 카슈아딘이 진격하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 두려는 걸 수 도 있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비행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황궁에선 드래곤 해출링을 타고 나타났다는 목격담까지 나왔다더군요.”
솔직히 드래곤 해출링을 타고 다 닌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긴 어 려웠다.
소환석을 쓰면 가능하기야 할 거 다.
그러나 가이아 대륙 현지인에게 있어 드래곤이 가지는 의미는 크 다.
드래곤과 관련된 무시무시한 전 설을 들으며 자라 왔기에 그만큼 드래곤에 대한 경외감이 세포 깊 숙이 박혀 있는 참이었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아무 래도 이번 경우에는 믿어야 할 것 같다.
얼마 전에 정체불명의 무리가 비 행 몬스터를 타고 크레인 공국으 로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었 다.
정체불명의 무리가 최강현임이 밝혀졌으니 사실상 ‘최강현은 비행 수단을 가지고 있다’란 명제가 성 립하는 셈이었다.
“최강현이 도착했다는 말은 사실 이라고 봐야겠군. 카슈아딘이 놈을 막을 수 있을까?”
“아마 무리이지 않을까요? 샹데르 에서 1만의 오크군을 단독으로 쓸 어버렸다고 하니 카슈아딘으론 턱 도 없을 겁니다.”
“카슈아딘 그놈이 목숨 걸고 최강 현과 맞서 싸우기나 할까? 개인적 으로 놈을 믿을 수가 없어. 사이비 종교의 교주이지 않느냐.”
“그 부분은 저희도 공감합니다만
인력 부족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 아니겠습니까.”
카슈아딘과 두 공작 간에 거래가 오갔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신도들을 이끌고 공작파에 가담 하는 대신 두 공작이 제국을 집어 삼켰을 때 카슈아딘의 종교를 국 교로 삼아 주기로 약속했다.
현재 빌로스 제국의 국교는 브리 튼 교다.
공작파가 내전에서 승리하여 카 슈아딘의 사이비 집단이 국교로 선정되면 역으로 브리튼 교가 이 교도 취급을 받게 된다.
카슈아딘은 자신을 이교도로 내
몬 브리튼 교에게 쓴 맛을 보여 주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거래를 통해 협력을 하고 있는 만큼 언제든지 배신할 수도 있다 는 게 베이커 자작의 생각이다. 과거에 카슈아딘이 그랬듯 신도 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여 숨어 버리면 그만이다.
‘사이비 놈들이 우리 공작파 영토 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 고 있을까? 흥,그럴 리가 없지. 녀석으로선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도망치면 될 일이야.’
“혹시 모르니 후방 부대에 서부전 선으로 보낼 지원군 중 일부를 이 쪽으로 돌리라고 전해 두도록. 다 으 ”
'斤' ?
“제3정찰대에서 보고 드립니다. 동부전선으로 이동 중이던 적의 전서구를 격추,전서구에 묶어 두 었던 서신을 탈취했습니다.”
“전서구를 떨어뜨렸다고? 그게 정 말이더냐?”
전쟁 중에는 갖은 수단으로 아군 끼리 연락을 취하기 마련이다.
적이 어떤 내용을 주고받았는지 알아내려고 적의 파발마나 전서구 를 노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중에서도 전서구를 탈취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훈련된 전서구는 화살이 닿지 않 는 높은 위치에서 비행을 한다.
거기다 일부러 깃털을 다른 색으 로 물들여 전서구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다른 새로 위장하는 경우 가 허다했다.
제3정찰대를 이끌던 기사가 전서 구로부터 탈취한 서신을 내밀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전서구가 비행 도중에 다쳤는지 다른 때보다 낮 게 비행 중이더군요. 덕분에 화살 을 맞힐 수 있었습니다.”
“큰일을 해냈군. 서신의 내용에 따라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걸세.”
베이커 자작은 서신을 가져온 기 사를 거듭 칭찬하며 서신을 받아 들었다.
서신에는 간단한 단어들이 나열
되어 있었다.
[카슈아딘 회유 성공. 카슈아딘이 회군하여 드리안 공작가로 진격할 예정. 보름달이 뜨는 날에 파리잡 이 작전 시행.]
파리잡이 작전이란 작전명이 무 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대신 그 앞에 나열된 문구들만큼 은 머릿속에 강행돌파 하듯 팍팍 꽂혔다.
“카슈아딘 회유 성공? 카슈아딘이 놈들에게 넘어갔다니!”
“저도 서신을 보고 놀랐습니다. 오크군이 물러난 마당에 카슈아딘이 배신을 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 까?”
“오크군이 물러난 대신 최강현이 왔지 않느냐. 상대가 상대인 만큼 승산이 희박하다 여긴 걸지도 몰 라.”
“하지만 거짓 정보일 가능성도 염 두에 둬야 합니다. 일부러 전서구 에 부상을 입히고 띄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흐음,직접 카슈아딘을 문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 을 수도 없으니 곤란하게 됐군. 일 단 배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비해 두는 게 좋겠어. 후방 부대 의 모든 병력을 이쪽으로 돌리라고 해 두게.”
“네,지금 당장 전하겠습니다.”
평소에도 카슈아딘의 배신 가능 성을 염두에 두고 있던 차에 물적 증거까지 도착했으니 더더욱 의심 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공작가에도 전달할까 싶었지만 일부러 혼란을 가중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베이커 자작은 차라리 서신이 거 짓 정보이길 바라며 최대한 자신 의 선에서 끝내고자 했다.
*
같은 시각,그란데 백작의 부대에
정찰대가 복귀했다.
정찰대의 보고를 들은 그란데 백 작은 곧바로 강현에게 따끈따끈한 최신 정보를 전달했다.
“적의 정찰대가 전서구를 격추시 켰다는군.”
언제든 출발할 수 있게 준비 중 이던 강현은 로브를 몸에 두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로브 앞단 추를 여미며 입을 열었다.
“베이커 자작에게 전달되었습니 까?”
“베이커 자작의 정찰대 정찰 루트 에서 격추당했으니 베이커 자작에 게 전달되었을 걸세.”
“여기까진 얼추 들어맞았군요.”
“바로 출발할 텐가?”
“그래야죠. 세이아나,루나 데려 와.”
마구간에서 그리폰의 털을 빗겨 주고 있던 세이아나가 빗을 아공 간 목걸이에 넣으며 말했다.
“루나 여기 있어. 아까부터 있었 는데.”
그리폰의 날개 뒤에서 루나가 얼 굴을 빼꼼 내밀며 손을 번쩍 들었 다.
“아까부터 있었어!”
“출발할 거니까 옷 챙겨 입어.”
“이제 카니발로 돌아가?”
“돌아가야지.”
“조금만 더 놀다가 가면 안 돼?”
애당초 가이아 대륙에 와서 논 적이 없는데 놀다 가면 안 되냐고 묻는다.
하긴 카니발과 신화급 웨이브 생 활에 비하면 노는 거나 진배없다. 강현은 루나의 머리에 손을 올리 고 거칠게 쓰담쓰담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중에 또 올 거니까 돌아가자.”
“정말?”
“정말.”
“근데 나중에 돌아오면 에르델 언 니랑 결혼할 거야?”
임모벨 백작과 그란데 백작이 전 부 있는 자리에서 천진난만하게 폭탄을 던지는 루나였다.
끝내주는 타이밍에 말을 꺼내는 군.
그보다 에르델이 청혼할 때 루나 는 없었던 걸로 아는데 말이지.
또 세이아나가 잠자리 동화를 빙 자하여 여러 가지를 말해 준 건가. 세이아나에게 시선을 주니 그녀 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양 빠 르게 고개를 저었다.
“나 아냐. 정말 이번에는 내가 말 해 준 거 아냐.”
노이즈는 섞이지 않았다.
그럼 누가 말해 준 거지?
범인은 루나의 입을 통해 금방 밝혀졌다.
“에르델 언니가 말해 줬어. 차여
서 괴롭지만 열심히 해 보겠데. 그 래서 같이 꿀사탕 먹으면서 위로 해 줬어.”
에르델…… 푸념할 곳이 없어서 애한테 한 거냐.
애한테 푸념할 땐 마지막에 비밀 이라는 말을 덧붙여 뒀었어야지. 이미 사실을 알고 있던 김혜림과 세이아나는 모른 척 시침을 뚝 뗐 고,그란데 백작은 헛기침을 하며 허공을 응시했다.
그렇다면 임모벨 백작은?
임모벨 백작은 간만에 호랑이 영 감이 되어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 로 강현을 보았다.
“방금 매우 흥미로운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 지 설명해 주겠느냐?”
강현은 능청스럽게 임모벨 백작 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약속은 지켰습니다.”
오래전,강현이 임모벨 백작에게 검술을 배울 때 약속한 게 있다. 대련을 하여 한 번도 이기지 못 한다면 에르델에게 접근하지 않겠 다고 한 약속이다.
일부러 강현이 져주긴 했어도 약 속은 약속.
그 약속을 지켰다고 말한 것이었 다.
임모벨 백작은 완전히 잊고 있었
던 약속을 떠올리며 어이없어 하 는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강현은 니아를 소환하여 김혜림과 함께 니아의 등에 올라 탔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 다.”
니아와 그리폰이 날개를 퍼덕여 비행을 시작한 순간.
임모벨 백작은 뒤늦게 정신을 차 리며 멀어지는 강현을 향해 외쳤 다.
“그 약속 안 지켜도 된다고 했잖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