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황제의 침실 안의 세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켰다. 방금 엄청난 발언을 들은 것 같다. 제대로 전달이 안 되었다고 느꼈는 지 에르델이 강현의 손을 더욱 강하 게 움켜잡았다.
그녀는 또박또박 했던 말을 되풀이 해서 말했다.
“강현 경과 혼례를 올리겠어요.”
아놀드는 몇 차례 눈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모,못 들은 게 아닙니다,황녀님. 혼례라뇨. 여기 있는 강현 경과 혼 례를 올리실 생각이십니까?”
“네!”
너무 당차게 대답해서 되려 할 말 이 없었다.
솔직히 나쁜 방법은 아니다.
강현이 트라이어와 1만의 오크군을 개박살 냈으니 전방의 오크군은 더 이상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려 할 거 다.
개인 사정도 어느 정도 섞여 있었 으니 나름 책임을 질 의향은 있다. 책임이라 해 봤자 카니발로 돌아가 는 길에 겸사겸사(?) 두 공작을 박 살 내는 것인데,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강현에게 있어서 겸사겸사 처리하 는 일이지만 가이아 대륙 사람들이 보기엔 대단한 업적이다.
내전을 끝냄과 동시에 강현의 위상 이 하늘로 치솟을 거다.
그런 강현을 남편으로 맞이했을 경 우
누가 감히 에르델을 업신여기겠는 가.
아놀드를 베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강력한 위엄을 갖출 수 있다. 서로의 격을 따져도 절대 강현이 뒤처지지 않는다.
강현이 상위차원에서 거침없는 행 보를 이어 가고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황녀인 에르델이 더 격이 낮지 않을까 여겨질 정도다.
에르델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 으로 강현과 눈을 마주쳤다.
“확실하게 말할게요,강현 경. 아 니,최강현. 저 엘리오스 킨 에르델 은 당신이 좋아요.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아요.”
제대로 불이 붙어 버렸는지 직선 코스로 흑 치고 들어오는 에르델이 었다.
강현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니 예 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갑작스럽 게 치고 들어왔다.
대체 몇 단계나 생략한 거지.
패를 보지도 않고 시작부터 올인을 외친 격이다.
강현은 분위기가 너무 달아올랐단 생각에 잠깐 뜸을 들였다. 그리고 방 안의 열기가 가실 때 즈음에야 찬찬히 입을 뗐다.
“얼마 전에 혜림이와 약혼을 했습 니다.”
이번에는 에르델이 꿀 먹은 벙어리 가 되어 할 말을 잃었다.
약혼이 라니!
그것도 얼마 전에 했다니!
이쪽은 고백의 여파 때문에 아직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건만!
에르델은 모든 걸 태워 버린 양
허망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렸 다.
“아하하,노,농담이었어요. 까,깜 짝 놀랐죠? 아하하,아하하.”
억지로 농담이었던 것으로 성사시 키려고 애를 쓰는 것이 눈물겨웠다. 조용한 방 안에서 에르델의 안쓰러 운 웃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강한 불꽃을 일으키며 화악 달아오 른 탓에 그 반동으로 재도 안 남고 남김없이 타 버린 느낌이었다.
아놀드는 이 이상 에르델에게 자신 을 죽여 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죽여 달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강 현 경과의 혼례는 종났군요!’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았기에.
그보단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한 것 가지고 바로 포기하는 게 이해가 가 지 않았다.
가이아 대륙은 일부다처,일처다부 를 허용하고 있는데 바로 포기하는 건 이른 감이 있었다.
아놀드는 일부다처에 대해 언급하 려고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아놀드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감 을 잡은 세이아나가 입을 달싹였다. 이 상황에서 ‘그거라면’이란 말 뒤 에 을 말이라곤 일부다처에 관한 얘 기밖에 더 없다.
안 돼요! 그랬다간 확인 사살이 되 어 버린다고요!
안타깝게도 세이아나가 막기 전에 아놀드의 발언이 먼저 튀어나왔다.
“……일부다처니까 원만하게 해결 가능한 부분이 아닌지요.”
강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 다.
“제도적으로 가능하다 해서 가벼운 기분으로 여러 명을 들일 생각은 없 습니다.”
아놀드가 질문으로 토스하고,강현 이 대답으로 스파이크를 날렸으며, 덕분에 가만히 있던 에르델만 치명 타를 맞았다.
옆에선 세이아나가 손가락으로 관 자놀이를 꾸욱 누르고 있었다.
어차피 에르델의 라이프 포인트는
0이었는데…….
거기다 대고 확인 사실을 해 버리 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한 명보단 여 러 명이 있는 게 남자로서 더 행복 할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사람의 생애는 무한하지 않 다.
반려자를 만든다는 건 산수처럼 두 사람의 관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상대방의 가족과 친척,친구 등 여 러 가지 복잡한 관계가 늘어나며, 평생 합을 맞춰 가며 살아야 한다. 맺어졌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맺어 진 이후부터 시작인 거다.
매일매일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유
지하기가 어려운 게 사람이다.
잡아 놓은 물고기라고 대충 상대하 는 관계는 사양이다.
매일매일 노력하기에 매일매일 설 렐 수 있는…… 그게 가장 원만한 관계가 아닐까.
강현은 새하얗게 불타 버린 에르델 을 두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언제나처럼 무심 하게 한 마디 날렸다.
“두 공작파는 정리해 두고 카니발 로 가겠습니다. 돌아왔을 때 제국의 평화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 겠군요.”
늘 그렇듯 강현은 어설픈 위로의 말은 하지 않는다.
위로는 진통제 같은 것이라 잠시 통증을 덜어 주는 게 고작이다.
많이 복용할수록 효과가 약해지는 부분까지 똑같다.
그녀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강조하는 것이 그녀를 위한 일 이기도 하다.
강현과 세이아나는 에르델을 거처 안에 남겨 두고 바깥으로 나갔다. 들어올 때 거목 지대를 지나는 길 을 외워 두었기에 안내를 받지 않아 도 나가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방에 남은 에르델은 한참 동안 침 묵을 유지했다.
에르델의 상태가 걱정되어 아놀드 가 말을 걸어 보려던 찰나.
에르델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깨끗하게 뚝 부러져 버렸네
요.”
“괘,괜찮으십니까?”
“정면으로 부딪치면 조금은 흔들리
지 않을까 했는데 어림도 없는 생각 이었네요. 그나저나 약혼이라니 놀 탔어요. 그쪽 방면으론 관심도 없을 줄 알았거든요.”
“뭔가…… 죄송합니다.”
“아놀드 경이 사과할 일이 아네요.
게다가 아직 끝난 것도 아니고요.”
“끝나지 않았다뇨?”
“다시 돌아온다잖아요. 그때 제가
일구어 놓은 제국의 평화로운 광경 을 보면 생각이 바뀌지 않겠어요?”
강현의 성격상 차였다고 징징거리 는 여자에게 다시 눈길을 줄 사람이 아니다.
이쪽에서 무작정 들이댄다고 움직 일 사람이 아니라면,저쪽에서 움직 이도록 매력적인 여자가 되는 수밖 에 없다.
실제로 김혜림이 몸소 증명한 바이 고 말이다.
아놀드는 방금 일을 계기로 에르델 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란 이런 작은 계기로도 확 달라지는구나.
이런 식의 단련 방법도 있는 거구 나.
새삼 강현이 마지막에 왜 기대한다 는 말을 남기고 갔는지 깨닫게 되었 다.
‘그런 거였나. 이래서 기대한다고 한 거였군. 폐하,제대로 된 인물이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안심하 고 쉬셔도 될 것 같습니다.’
짐짓 차분한 공기가 흐르던 중 에 르델이 문득 떠오른 양 혼잣말을 중 얼 거렸다.
“그 책 쓸모가 없네. 별궁에 돌아 가면 버려야겠다.”
오늘의 시도는 ‘여자들의 바이블, 너도 될 수 있다 여우’란 책을 보고 시도해 본 것이었다.
사람 관계에 해답서는 없다더니 오
늘 뼈저리게 느꼈다.
덧붙여 김혜림에 이어 여우 바이블 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걸 까맣게 모 르고 있는 에르델이었다.
*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누 리고 있던 드리안 공작가.
드리안 공작은 그야말로 하니온 북 부의 왕관 없는 왕이었다.
그런데 고작 한 사람의 복귀로 인 해 나는 새를 떨어뜨리긴 고사하고 저택 지붕엔 날마다 까마귀 떼가 날 아들었다.
드리안 공작가 저택 안에선 드리안
공작과 케이델 공작이 자리를 가지 고 있었다.
케이델 공작은 조급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엘딘에 이어 사이런스마저 죽은 것 같네. 최강현 그놈을 막을 수 있 긴 한 건가?”
드리안 공작은 입을 열지 않고 애 완용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안 하는 게 아니었다.
강현을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 니 섣불리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여유로워 보이는 자태는 무의식중 에 나오는 평소 습관일 뿐이지,드리안 공작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 다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생각에 생각이 겹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 이르 렸다.
드리안 공작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설렁설렁 반응했다.
“최강현. 그놈을 직접 마주친 게 빌링턴이었나. 그때도 놈은 당돌했 었지.”
명안을 기대했던 케이델 공작은 뜬 구름 잡는 소리에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놈에 대한 감상을 물은 게 아닐 세! 대책을 짜야 할 것 아닌가 대책 을! 제발 정신 좀 차리게. 이대로 가다간 우리 둘 다 죽어!”
서부전선은 오크군 때문에 밀리고 있고,동부전선은 그나마 약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근데 골 때리게도 크레인 공국에서 까지 황제파를 지원하기 위해 남하 중이라고 한다.
크레인 공국이 천공섬을 경유하여 제국에 도착하면 완전히 난리난다. 천공섬에서 드리안 공작가까지 고 작해야 이틀거리다.
천공섬과 드리안 공작가 사이엔 막 을 수 있는 요새라든지,수비에 용 이한 지형지물이라곤 하나도 없다. 즉 크레인 공국의 군대가 제국에 도착하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
공작파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 다.
한데 어째서인지 드리안 공작에게 쫓기는 자의 패색은 보이지 않았다.
“자네는 걱정도 팔자군. 최강현이 오크군을 몰살시켰다지 않나. 트라 이어는 사형 예정이고. 오크군이 화 가 나서 철수 중이라는 얘기 못 들 었나?”
“오크군이고 뭐고,최강현 그 작자 가 있다는 게 문젤세! 오크군이 몰 살당했다는 건 우리 공작군도 몰살 시킬 수 있다는 거잖나!”
“침착함은 멋진 남자의 기본 덕목 이지. 자네는 이번 생애에 멋진 남 자가 되긴 글렀군.”
“메로우!”
열 받은 나머지 드리안 공작의 성 이 아닌 이름을 소리쳤다.
친하다면 친하고,아니라면 아닌 사이.
두 공작은 이해타산을 기반으로맺 어진 관계이며,오랜 악우이기도 했 다.
드리안 공작은 무릎 위에서 동그랗 게 몸을 말고 있던 고양이의 엉덩이 를 강하게 두드렸다.
탁탁!
“냐',
회색 털에 검은색 줄무늬를 지닌 뚱뚱한 고양이가 화들짝 놀라 카펫 위로 뛰어내렸다.
카펫 위에 쌓여 있던 고양이털이 풀풀 날리는 와중에 드리안 공작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 언젠간 최강현이 나타날 줄 알 고 대비를 해 뒀지.”
수년 전에 드리안 공작이 내전의 최대 걸림돌은 최강현이라며 대비책 을 세워 둬야 한다고 외쳤었다.
대비책을 세우는 데만 수억 골드가 들기에 모두가 미친 짓이라 했었다. 수억 골드를 투자해 놓았는데 강현 이 전쟁에 참가하기 전에 사라지면 말짱 꽝이니까.
차라리 그 돈을 전부 강현에게 주 어 매수하는 편이 빠르지 않겠냐며 온갖 반발에 부딪쳤었다.
반발을 모두 물리치고 준비한 수단 이 이제 와서 쓸 일이 생길 줄 누 가 알았겠는가.
드리안 공작은 손에 깍지를 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두고 보게나. 대 최강현 대비책이 놈의 목을 조를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