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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하는 플레이어-316화 (316/381)

316화

빌로스 황궁에는 두 곳의 불가침 구역이 있다.

한 곳은 궁녀들의 목욕탕,또 한 곳은 황제의 처소다.

제국 내에서 황제의 중요성은 두말 하면 입 아프다.

황제가 가진 상징성 위에 세워진 것이 황궁이니,황제가 없으면 황궁 도 없다.

나아가 제국 전체,제후국인 각 공 국까지 모두 흔들리게 된다.

제국과 각 공국의 관계는 ‘황제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져 있는데,황 제가 없으면 제국에 충성할 이유가 없으니 이는 곧 대륙 전체의 정세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황제가 병에 걸려 공식선상 에 얼굴을 비추지 않아도 누구 하나 의문을 품지 않았다.

계승권자들은 하나같이 어렸고,계 승권자들에게 하나씩 권한을 주어 직접 실전에서 뛰게 하는 것도 스타 르타식 교육이 될 것 같아 모두가 찬성했다.

시간이 흘러 황제는 일선에서 아예 물러나 요양만 하고,계승권자들이 실질적인 일처리를 모두 맡는 형태 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래서 일선에서 황제의 존재는 거 의 잊혀지다시피 했다.

혹시라도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기 면 황제의 기사가 알려 주지 않겠는 가.

그리 생각했는데 십 수 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떴다고 한다.

에르델로선 믿기 힘든 일이었다.

‘아바마마가 그리 오래전에 돌아가 셨었다니 믿을 수 없어. 근데 강현 경도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냐.’

에르델은 앞서 걷고 있는 강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 는데 이리 갑작스럽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오랜만에 봐도 늠름한 모습은 여전 했다.

예전보다 더 남자다워진 것 같기도 하다.

못 보던 동안 에르델의 기억 속에 서 더더욱 미화되었기 때문일까. 황궁 내에서 거친 풍파를 겪으며 드세졌다는 평가를 받는 에르델이건 만 오늘만큼은 조신한 요조숙녀가 되었다.

한편 세 사람 중 맨 뒤에서 걷고 있던 세이아나는 에르델의 분위기가 이상한 걸 두고 눈을 반짝였다. 이거이거,죄 많은 남자로구만. 아 니지,어차피 본인은 흔들릴 것도 없이 일편단심이니까 고생은 혜림이 가 하려나.

마음 같아선 나도 끼어서 군응할거

의 시대를 열고 싶긴 한데. 후후, 뭔 소리람. 나도 참 가끔씩 쓸데없 는 생각을 한다니까. 방금 건 캔슬. 이러저러한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 데 세 사람은 황궁 북서쪽 구석에 다다랐다.

황궁 북서쪽에는 높은 거목이 부채 꼴 모양으로 늘어서 있었다.

거목을 벽 삼아 황제의 거처를 보 호하고 있는 것이었다.

거목마다 환각 마법이 걸려 있어서 정해진 루트대로 들어가지 않으면 원래 있던 장소로 되돌아 나오게 되 어 있었다.

마탑의 초대 수장이 직접 만든 함 정이며,마법진에 의해 매일 루트가 갱신되기 때문에 침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갱신되는 루트는 항상 황제의 거처 안쪽에 표기된다.

때문에 누군가가 안쪽에서 안내하 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공중으로 날아가거나,지하로 가도 환각마법은 적용된다.

더불어 거목은 환영 마법으로 만들 어진 가짜이기 때문에 없애지 못한 다.

거목 지대 앞에는 기다란 나무기둥 에 우체통 같은 상자가 설치되어 있 었다.

상자 안에는 낡은 종 하나가 들어 있었다.

에르델은 상자 안에서 낡은 종을 집어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딸랑딸랑!

두어 번쯤 더 흔들자 거목 안쪽에 서 사람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그림자는 직선으로 오지 않고 거목 을 한 바퀴 돌거나,왔던 길을 되돌 아가는 등 특이한 루트로 움직였다. 그림자가 거목 지대 바깥으로 빠져 나온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이윽고 거목 지대에서 모습을 드러 낸 사람은 갑옷 차림의 건장한 백발 노장이 었다.

노장은 팔을 가로로 들어 가슴팍에 대며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황제의 기사 아놀드가 에르델 황

녀님을 뵙습니다.”

“간만에 뵙네요,아놀드 경. 2년 만인가요?”

“벌써 그리되었는지요? 폐하의 처 소 안에 있으면 시간 감각이 무뎌져 서 날짜 개념이 없어지더군요.”

“오늘 막 드래코프 오라버니가 세 상을 떴어요.”

드래코프가 죽었다는 소식에 아놀 드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메이아는 외딴 섬에 유배되어 진작 에 계승권자 다툼에서 탈락했고,그 뒤로 쭈욱 에르델과 드래코프가 대 치해 왔는데 오늘에 이르러 드래코 프가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로써 계승권을 가진 자는 에르델

만 남은 셈이다.

오래전,황제가 이리 선언했었다.

“너희들에게 황궁의회에서 능력을 펼칠 기회를 주겠다. 최종적으로 한 사람만 남게 되면 내 처소를 찾아오 거라.”

확실히 부모가 자식에게 할 말은 아니다.

그래도 메이아,드래코프,에르델은 납득했다.

가혹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선 드넓 은 제국을 통치할 수 없으니까.

황궁 바깥에선 잔혹한 황제라고 평 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황궁 안에서 생활해 본 자 라면 황제의 방식을 납득할 수밖에 없다.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정 신적인 고통이 어마어마하다.

아무리 다수를 위한 정책을 펼쳐도 이득 보는 자와 손해 보는 자가 발 생하기 마련이다.

정책적인 면에서 볼 때는 소수에 불과하지만,인간적인 면에서 볼 땐 자신으로 인해 수백에서 수천 명, 많으면 수만 명의 사람들이 피해를 보기도 한다.

그 많은 원망을 받아 내다 보면 사고방식을 담당하는 조절 나사가 조금씩 삐걱거린다.

끝내는 정신이 와르르 무너져서 정 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리되지 않기 위해서는 냉혹해져 야 한다.

정에 휘둘리지 않고.

쉽게 꺾이지 않고.

항상 이성을 유지하는.

그런 자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

형제라 할지라도 내칠 땐 내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하기에 지독한 시 련을 주는 건 당연하다.

오늘 이 순간,기나긴 삼파전 끝에 에르델만이 남았으니 사실상 에르델 에게 황제의 자격이 주어진 셈이다. 아놀드는 황제를 맞이하듯 한쪽 무 릎을 꿇으며 한층 더 높은 경의를 표했다.

“에르델 황녀님,오래전 폐하께서 선언하신 대로 이 제국을 물려받을 자격이 있는 자는 에르델 황녀님이 되었습니다.”

“고마워요,아놀드 경. 하지만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아바마마께서 돌아가셨다고 들었 어요.”

아놀드가 어깨를 흠짓거리더니 슬 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에르 델의 뒤에 서 있는 세이아나를 흘깃 보았다.

현자의 팀이 한때 황궁에 머무르며 황제와 함께 있었다는 건,황제의 기사인 아놀드와도 면식이 있다는 말이 된다.

세월이 흘러 많이 자랐다지만 흔치 않은 은발에서 세이아나임을 알아차 렸다.

“세이아나에게 들었습니까?”

“정확히는 강현 경에게서 들었어 요. 현자의 연구소까지 다녀왔다고 하더라고요.”

“현자의 연구소…… 카니발에 있는 연구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그렇다면 저자가 각성의 서 계승 자겠군요. 모두 이해했습니다. 황제 위의 최종 계승자와 각성의 서 계승 자가 동시에 찾아오게 된 것도 인연이겠지요. 두 분 모두에게 진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놀드는 몸을 일으켜 거목 지대로 발을 옮겼다. 그러곤 앞서 거목 지 대에 들어서면서 말하길.

“제가 딛는 자리를 정확히 밟으면 서 따라오셔야 합니다. 한 발자국이 라도 다른 곳을 밟으면 환각에 걸리 니 주의하십시오.”

아놀드의 역할은 그저 황제를 지키 는 것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황제 의 처소로 손님을 안내하는 안내역 도 겸하고 있었다.

강현을 포함한 세 사람은 아놀드를 따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주의하며 걸었다.

맨 뒤에서 걷고 있던 세이아나는 조심조심 발을 내딛다가 익살스레 한 마디 날렸다.

“할아버지,매일 입장 루트 외우려 면 보통 일이 아니겠어요. 머리털 간수 잘하고 있죠?”

“세이아나,넌 여전하구나. 깐족거 리는 성격은 어디 안 갔군.”

“어머,깐족거리다뇨. 항상 수고 많 으시다고 말하려 했을 뿐인 걸요? 데카르트 영감님이랑 똑같이 말씀하 시네.”

“그 입 험한 노인네. 아직도 살아 있었나?”

“아놀드 할아버지보단 먼저 안 죽 는다던데요.”

“그놈 장례식에 축의금을 내려고 봉투에 돈을 넣어 뒀건만 살아 있는 동안에 쓸 일이 있을까 싶군.”

“에이,축의금이 아니라 조의금이 겠죠

“데카르트의 장례식이잖느냐. 그러 니까 축의금이지.”

천년거암마냥 묵직한 분위기를 띠 고 있던 아놀드였건만,세이아나와 대화를 나누자마자 금세 친숙한 분 위기가 되었다.

세이아나는 어딜 가도 아는 사람이 있고,누구와 대화를 하든 친숙해진 다.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아놀드를 따라 걷다 보니 거목 지

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거목 지대 안쪽에는 운동장만 한

크기의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연못과 뇌쇄적으로 꼬리를 흔들며 튀어 오르는 물고기.

작은 텃밭과 과일 나무,축사. 계절을 무시하는 반골 나무라고도 불리는 겨울 벚꽃이 피어나 있었다. 연못 중간에는 작은 섬이 존재했는 데,섬에 2층짜리 건물이 지어져 있 었다.

처소 안에는 아놀드를 비롯하여 요 리사 1명과 궁녀 2명이 머무른다고 한다.

그들도 아놀드처럼 자신의 삶을 황 제에게 바치겠노라 맹세하고 바깥에 나가는 일 없이 처소 안에서만 지내 는 것이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군.’

바깥과 격리된 장소이자,바깥과 교류 없이도 만족스럽게 자급자족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곳이다.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무릉 도원의 일부를 보는 듯했다.

이런 곳에서 살면 안전하기야 안전 하겠지만 굉장히 갑갑할 것 같았다. 강현은 무의식중에 황제의 처소에 대한 감상을 내뱉었다.

“살고 싶은 곳은 아니군.”

혼잣말이었건만 에르델이 얼굴을 굳히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전 황제가 되어도 여기서 살지 않

을 거예요.”

“황제가 되시면 여기서 지내시는 게 나을 겁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 이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아…… 그게…… 가장 중요한 건 데……

“네?”

“아니에요. 혼잣말이었어요.”

강현 일행은 아놀드를 따라 연못 중앙으로 이어진 아치 형태의 다리 를 건녔다.

금박을 칠한 문을 열고 건물 안으 로 들어가니,넓은 홀과 일정 간격 을 두고 떨어져 있는 다수의 문이 나타났다.

황제의 처소답게 대리석 바닥에,

크리스털 샹들리에, 시들지 않는다 는 만년화가 담긴 꽃병 등 내부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아놀드는 늘어선 방문 중에서 한곳 을 골라 문손잡이를 잡았다.

“황제 폐하의 침실입니다. 들어가 기 전에 한 가지만 당부 드려도 되 겠습니까?”

“네,말씀하세요.”

“여기서부터 하는 모든 이야기는 황제 폐하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니 선대의 유지를 이어받아 모 든 것을 받아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여기서 이루어지는 모든 대화 는 비밀에 부쳐 주십시오.”

비밀에 부쳐 달라는 말은 명백히

강현과 세이아나를 두고 한 말이었 다.

각성의 서 계승자이자,각성의 서 를 만든 현자의 팀이었다지만 엄연 히 이세계인이자 외부인이다.

만약을 위해 언질을 넣어 두는 것 이었다.

강현과 세이아나는 고개를 끄덕였 다.

“비밀에 부치도록 하지요.”

“비밀에 부칠게요.”

아놀드는 확언을 받은 후에야 침실 문을 열었다.

침실 안은 휑하니 싸늘한 공기만 감돌고 있었다.

마치 계속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

처럼.

이부자리는 안 쓴 지 꽤 된 것처 럼 주를 한 점 없었고,벽난로에는 장작을 넣지 않아 재 한 톨 남아 있지 않았으며,촛대는 양초를 꽂은 지 오래된 것처럼 먼지가 쌓여 있었 다.

아놀드는 침대 옆,서랍 위에 가지 런히 놓여 있는 황제의 의복을 집어 들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는 십수 년도 전에 돌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의 유 언에 따라 오늘날까지 황제 폐하를 대신해 왔습니다.”

지난 십수 년간,황제는 공식선상 에 수차례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러나 항상 천막 뒤에서 뒤에 숨 어 가끔씩 간단한 말만 했을 뿐,실 제로 그의 모습을 직접 본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죽은 자가 어떻게 공식선상에 드나 들 수 있는가 싶었는데 그 의문이 풀렸다.

아놀드가 황제의 의복을 대신 입고 천막 뒤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었다.

이어서 아놀드는 또 하나 충격적인 사실을 내뱉었다.

“바로 대뜸 이야기하면 어쩌다가 제가 황제 대리까지 됐는지 이해하 시기 어렵겠지요. 현자의 팀을 결성 했던 웨이브 발생 초기 시절부터 얘 기해 드리겠습니다. 발단은 타임로 드란 자가 황제 폐하께 찾아왔을 때 부터 시작됐지요.”

아놀드가 언급한 어떤 존재의 이름 을 들은 강현과 세이아나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타임로드라니.

데카르트에게 비밀의 서와 마도의 서를 만들라며 스킬북 용지를 준 자 아니던가.

더불어 제2신화급 웨이브의 위치를 알려 준 자이기도 하다.

그랬던 자의 이름이 황제의 사정 속에도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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