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빅터를 발견한 건 어디까지나 우연 과 필연의 합작이었다.
그란데 백작령에서 샹데르까지 상 공을 날아 움직이다 보면 샹데르 북 쪽 평야가 한눈에 들여다보인다. 추수가 끝난 평야에서 오밤중에 추 격전이 벌어지고 있으니 눈에 띄기 마련이다.
거기다 원래라면 강현 일행은 어제 샹데르에 도착했어야 했다. 근데 강 한 눈이 내리면서 일정을 하루 늦췄 다.
상공에서 웬 추격전인가 싶어 유심 히 살펴보는데 수레가 엎어지면서 익숙한 인물이 굴러떨어지는 게 아 닌가.
그래서 착지하여 빅터 앞에 선 것 이었다.
드래코프의 기사들은 강하게 고삐 를 휘어잡으며 말을 멈춰 세웠다.
“흐억! 드레이크? 아니,서번트인 가?”
기사들이 멈춰 선 건 떨어진 사람 때문이 아니라 예사롭지 않은 외견 의 마룡 때문이었다.
헤출링이라곤 하나 니아의 몸집은 어지간한 들소보다도 큰 편이었다. 들소보다도 큰 몸집을 가진 생물체 가 앞발을 들고 떡하니 나타났으니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니아는 파충류 특유의 가느다란 눈 동자를 깜빡이다가 입을 열고 울었 다.
“뀨우?”
잔뜩 긴장하고 있던 기사들은 겉모 습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울음소리에 얼이 빠졌다.
그러나 긴장까지 푼 건 아니었다.
니아의 옆에서 강현이 걸어 나왔기 에.
강현은 빙백검을 뽑아 들며 농밀한 마나 블레이드를 부여했다.
“검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사 양하지 않으마.”
덤빌 거면 덤비고,갈 거면 가라는 얘기였다.
나를 우롱할 셈인가!
……라고 말하기엔 마나 블레이드 가 매우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비늘로 이루어진 푸른 검 신이 그들로 하여금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푸른 검신의 마나마스터라면 한 명 밖에 없잖나!
“최,최,최강현이다! 최강현이 돌 아왔다!”
강현은 빙백검을 가볍게 휘둘러 땅 을 그었다.
검의 끄트머리가 땅바닥을 긁으며 요란한 소리가 귀를 긁었다.
과드드득!
위협용으로 검 휘두르는 시늉만 한
건데 기사들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기사들은 치타를 앞에 둔 새끼 임팔라처럼 잔뜩 졸아 있다가 강현의 검짓 시늉 한 번에 화들짝 놀라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곤 곧 죽 을 사람처럼 전력을 다해 말 머리를 돌렸다.
“긴급 상황이다! 돌아가서 최강현 의 복귀 사실을 알려라!”
꽁지 빠져라 도망가는 기사들을 두 고 김혜림이 가이아 보우를 들었다. 시위에 대지의 화살을 먹여 기사들 의 등을 향해 겨누는데 강현이 그녀 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게 놔둬.”
“돌아가서 좋은 얘기를 할 것 같진
않은데요?”
“대신 에르델에게도 우리가 왔다는 게 전달되겠지. 전서구론 딱이야.”
“비싼 연봉을 받는 전서구네요.”
에르델에게 돌아간다고 말하지 않 았으니 이참에 전해 둘 생각이었다. 기사들이 돌아가서 강현의 복귀를 알리면 그 사실이 에르델의 귀까지 들어갈 거다.
말도 안 하고 불쑥 찾아가면 놀랄 테니 미리 전달해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황궁 기사들을 전서구 취급하는 사 람은 강현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훼방꾼들을 쫓아낸 강현은 빅터에 게로 몸을 돌렸다.
척 보기에도 빅터의 몸 상태는 엉 망진창이 었다.
기진맥진한 몰골과 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죄수복.
무엇보다 팔다리 근육에 깊이 패였 다가 아문 자국이 남아 있었다.
포션을 써서 치료한 흔적으로 보이 나 치료한 것치곤 팔다리를 전혀 쓰 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강현은 빅터의 외견만으로 그의 상 태를 정확하게 진단해 냈다.
“힘줄을 잘렸나?”
빅터는 고개를 떨군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무슨 낯으로 강현을 본
단 말인가.
언더그라운드에서 그리 매몰차게 굴었다.
복수한답시고 대차게 나서 놓곤 처 참하게 당하기만 했다.
강현이 쌓아 올린 벤젠 기사단의 명성을 다 말아먹고 이제 와서 도와 달라고 할 순 없잖은가.
빅터는 최소한 정보만이라도 내주 고자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 었다.
“드래코프가 필사적으로 단장…… 당신의 황궁 복귀를 막으려 하고 있 습니다. 어제 제가 드래코프를 암살 하려다 실패했는데 저더러 단…… 당신이 시켰다고 거짓 증언을 하라 더군요. 어떻게든 당신에게 반역죄 를 씌울 작정인 것 같습니다. 조심 하십시오.”
강현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무심한 얼굴로 질문을 되풀이했다.
“힘줄이 잘렸냐고 물었을 텐데?”
드래코프의 계책 같은 건 알 바 아니라는 듯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 다.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상대라는 건 가.
하긴 카니발에서도 최강자로 불리 던 사람인데 하위차원에서 애를 먹 을 리 없지.
정보를 내준다고 애쓸 필요가 없었 구나.
빅터는 자신이 강현에게 무용지물 임을 깨닫곤 이를 악물었다.
벤젠 기사단의 영원한 단장이자, 아직까지도 그를 존경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발목을 잡을 순 없 었다.
단장님,저는 힘줄이 모두 끊겨 화 살받이마저 될 수 없는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무용지물에게 시간을 할애하지 마십시오.
아직도 그를 존경하기에 그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빅 터를 괴롭게 했다.
빅터는 괴로움을 가슴 깊숙이 묻으 며 강현을 무심하게 대했다.
“제 몸은 제가 알아서 챙깁니다.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빅터의 태도를 유심히 지켜보던 김
혜림이 넌지시 한마디 툭 던졌다.
“빅터 경,강현 씨를 따라하는 거라면 거기선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요.”
“따라하는 게 아니라……
“강현 씨라면 아마 이렇게 대답했
을 걸요? ‘내게 빚을 지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일 텐데? 회복될 때까지 도울 수 있게 해 주지’라고 말했을 걸요.”
“혜림 양,따라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강현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며 빅터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곤 손가락 세 개를 펴선 그중 두 개를 접으며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묻지. 힘줄이 잘렸 나?”
이 사람은 진짜…….
무뚝뚝한 성격인 주제에 뭐 이리 사람을....
빅터는 저도 모르게 울컥할 뻔했 다.
입을 열었다간 먹먹한 목소리가 나 올 것 같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강현은 같은 어조,같은 자세를 유 지하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드래코프의 지시였다 했었나?”
“……네.”
“여기엔 어떻게 왔지?”
“에르델 황녀님이 도와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트라이어의 함정이 었고요.”
“트라이어?”
“드래코프를 밀어주고 있는 오크 대족장입니다. 벤젠 기사단이 누명 을 쓴 것도 전부 녀석의 계략에 말 려서……
빅터는 애잔함이 담긴 눈빛으로 누 명을 쓸 당시의 일을 말해 주었다.
김혜림이 강현을 찾으러 가겠다며 떠난 후에도 벤젠 기사단은 여전히 최전방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적의 기습 부대가 아군 점령지를 몰래 통과할 예정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벤젠 기사단은 기습 부대를 처리하 기 위해 잠복했고,예정된 시간에 지정된 장소를 지나가던 무리를 습 격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적의 기 습 부대가 아닌 드래코프 일행이었 다.
최전방 병사 독려를 위해 이동 중 이었다고 한다.
벤젠 기사단은 오해에 의한 것이라 고 변호했으나 모든 상황은 벤젠 기 사단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당시 최전방에서 활동하던 트라이 어는 벤젠 기사단에게 기습 부대에 대한 정보를 준 적이 없다고 잡아뗐고,예전에 김혜림이 드래코프를 죽 일 뻔한 적 있었다는 전례가 역모죄 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벤젠 기사단 체 포령이 떨어졌을 때.
단원들이 방패막이 되어 빅터를 탈 출시켜 줬었다.
그때 당시에 단원들은 빅터에게 모 든 걸 맡겼다.
‘빅터! 어떻게든 누명을 풀고 벤젠 기사단을 재건해!’
‘단장님은 반드시 돌아오실 거야! 돌아오실 거라고!’
'야! 뭘 그리 멀뚱멀뚱 서 있어! 가라고! 우린 걱정 말고 가란 말이 야!’
빅터가 언더그라운드에 도달하는데 엔 많은 과정이 필요치 않았다. 단원들의 사형 소식을 듣고 정처 없이 떠돌던 중 상위차원의 하층민 으로 보낼 떠돌이들을 모집하는 곳 과 연이 닿았다.
그 뒤에 카니발에서 강현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역시나 강현은 강현이라고 카니발 에서도 극강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 카니발에서 바쁘게 활동 중인 강현 이 하위차원으로 내려갈 깜이나 있 겠는가.
그래서 빅터는 스스로 되뇌었다.
강현의 조직 말살 계획은 아직 끝 나지 않았으니 방해하면 안 된다.
커뮤니티가 얼마나 큰 조직인지는 몸소 체험하지 않았냐.
차라리 직접 복수하자. 그러는 게 낫다.
그리 여겨 복수의 칼날을 갈아 암 살시도를 했고 지금에 이른 것이었 다.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내내 빅터의 고생과 죽어 간 단원들을 생각하는 애틋함이 배어 나왔다.
빅터는 팔을 바들거리며 두 손바닥 을 땅에 붙였다. 그리고 억지로 자 세를 유지하며 천천히 머리를 숙였 다.
“단장님,죄송합니다. 벤젠 기사단 을…… 단원들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빅터의 이마가 점점 바닥에 가까워
졌다.
팔을 떨고,몸을 떨고,머리를 떨 었다.
그게 팔에 힘이 없기 때문인지 울 먹이고 있기 때문인지는 고개를 숙 이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오직 강현에게 사과하기 위해 없는 힘을 짜내 할 수 있는 최대의 성의 를 보이려는 중이었다.
빅터의 이마가 흙바닥에 닿기 직 전.
강현이 빅터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의 상체를 위로 올렸다.
위로의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 뿐더러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단지 빅터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 을 통해 굳건함이 전해져 왔다.
‘애썼다.’
너무 애썼다.
혼자서 해야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 렸기에 내색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더 이상은 됐다고,충분 히 애썼다고 말해 줬으면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말보다 더 절 실하게 다가오는 행동이었다.
그제야 빅터는 어깨에 힘을 빼며 편히 주저앉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단장님.”
강현은 빅터의 어깨를 두어 번 두
드린 후 몸을 일으키며 김혜림을 불 렸다.
“혜림 아.”
“듣고 있어요.”
“빅터를 니아에 태워서 브리니아 공국으로 데려가.”
“알겠어요. 공왕 전하께 빅터의 뒤 를 봐 달라고 부탁할게요. 그 이후 에 연락은 어떻게 할까요?”
“갔다가 바로 복귀해. 얼마간 황궁 에 머무를 테니.”
잠시 들리는 게 아니라 ‘얼마간’ 머무른다고 하였다.
시간이 필요한 일을 하겠다는 의미 다.
예를 들면 누군가를 처리한다든지.
김혜림은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빅 터를 부축하여 니아에 태웠다. 김혜림이 브리니아 행에 오르면서 강현과 세이아나,루나만이 남았다. 세이아나는 피바람이 불 것 같은 예감에 넌지시 강현에게 말을 붙였 다.
“내가 조금 거들까?”
강현은 빙백검을 검집에 넣지 않고 그대로 쥔 채로 상데르를 향해 걸었 다.
“혼자서도 충분해.”
*
샹데르 성벽 바깥에선 최전방 출정
을 앞두고 오크를 위한 연회가 벌어 졌다.
1만에 이르는 오크들이 성벽 바깥 에 천막을 치고 자리를 잡아 술과 고기로 배를 채웠다.
먹고,마시고,씹고,뜯고.
적군이 없는 후방지대인데 불침번 을 세울쏘냐.
놀자판이 벌어져 누구 하나 외부의 침입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재앙은 항상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는 법이다.
오크 진영의 외곽 구역에서 푸른 검을 쥔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 왔다.
술에 취한 오크들은 트림을 하며
인간이 들어온 것에 관심을 가졌다.
“어이? 인간. 왜 빈손이냐? 술하
고 고기 가지고 오는 놈들 외엔 인 간 출입금지라고.”
사내는 푸른 검을 앞으로 내밀며 무미건조한 투로 말했다.
“트라이어의 위치를 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