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기사들에 의해 구출된 사이런스의 꼴은 처참했다.
며칠 내내 뙤약볕에 노출되었는지 살갗이 벌겋게 익어 있었고,탈수 증상과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털이 숭숭 빠져선 벌초를 마친 봉분 같은 꼴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사이런스의 오른팔이 없다는 점이었다.
전투 중에 적에게 당하여 팔을 잃 은 모양이었다.
기사들이 사이런스의 입에 수통을 대고 물을 흘려 넣자 사이런스가 기 침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쿨력! 쿨력! 으으……
“정신이 드십니까,사이런스 단장 님?”
“으으.. 여긴.. 어디?”
“서해 군도의 무인도입니다.”
“쿨럭쿨력!”
줄곧 물을 마시지 못하다가 갑자기 물을 마신 탓에 몸이 놀랐는지 사래 가 들린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기침을 하던 사이런스는 진정이 됐는지 스스로 수통을 잡고 물을 마셨다.
벌컥! 벌컥! 벌컥!
수통 하나를 다 비우곤 주변을 두 리번거리더니 프라임과 눈■이 마주쳤 다.
프라임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이곳 이 어디인지 감이 오는지 흐리멍덩 했던 눈이 생기를 되찾았다.
“프라임? 그럼 내가 서해 군도까지 흘러온 건가?”
“사이런스 단장님 무슨 일이 있었 던 겁니까?”
“최강현.”
“네?”
“최강현,그 자식에게 당했어.”
짧고 굵은 설명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사이런스가 왜 당했 는지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사이런스가 쫓던 이름 모를 마나마 스터가 최강현이었으며,최강현에게 당하여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셈이었다.
최강현이 가이아 대륙에 복귀했다!
대륙 전체가 들썩일 초대형 뉴스였 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오레노를 죽인 자를 찾는답시고 무 작정 범인을 쫓았다면 프라임 일행 도 최강현과 마주했을 거 아닌가. 그랬다면 자신들도 지금의 사이런 스와 같은 꼴이 됐을 거다.
아니,프라임은 기껏해야 마나유저 상급이니 살아남지도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됐을지도.
사이런스는 프라임의 표정에서 안 도감을 읽어 내곤 불같이 화를 냈 다.
“뭐야 그 표정은? 네가 당한 게 아니라고 다행이라고 여기는 거야? 죽고 싶어?”
“아,아닙니다. 감히 그 따위 불경 스런 생각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 까.”
“변명은 집어치워. 그보다 최강현 의 일행은 찾았겠지? 아직도 찾지 못한 거면 네놈들의 무능함을 손수 벌해 주겠어.”
“물론 찾았습니다. 무인도 안쪽으 로 들어간 것 같더군요. 발자국 크 기로 가늠컨대 여자 둘. 둘 중에 한 명은 어린아이로 추정됩니다.”
“여자와 어린아이. 좋아. 아? 주 좋 아. 둘 다 잡아 오도록 해. 잡아 와서 최강현과 무슨 사이인지 밝혀내 야겠어.”
“최강현과 깊은 사이라면 인질로 쓸 수 있겠군요.”
“인질로 쓰다마다. 인질이 아니고 선 놈을 죽일 수 없어.”
“아무리 그래도 인질 외엔 방법이 없다는 건 좀……
“뭘 말하고 싶은 거냐? 설마 내가 놈에게 겁을 먹어서 나약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 로 방법이 없어! 놈은 그랜드 마스 터라고!”
“그,그,그랜드 마스터? 사실입니 까?”
최강현의 진면목은 지략에 있다.
그런 놈이 빌로스 최고의 마나마스 터란 호칭까지 가지고 있기에 성가 셨던 것이었다.
한데 갑자기 복귀한 지금은 마나 마스터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랜드 마스터가 됐다고 한다.
그런 최강현이 만약 황제파에 복귀 한다면?
그리되면 사태는 그저 전세가 기울 어지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내전 자체가 순식간에 결판날 거 다.
사이런스가 인질을 잡는 것 외에 답이 없다고 한 것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단 방법을 가림 없이 모조리 쏟
아부어야만 최강현을 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질을 잡느냐 마느냐 로 내전의 승패가 갈리는 셈이다. 프라임은 깜 처리로만 여겼던 일이 내전의 운명을 쥐는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한 명만 남 아서 사이런스 단장님을 보좌해라. 나머지는 정글 안으로 들어간다.”
“나도 가겠다. 기력 포션을 내놔.”
“하지만 사이런스 단장님의 몸 상 태로는……
“네놈들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니까 내가 직접 가 주겠다는 거 아니냐! 잔말 말고 기력 포션 가져와!”
엉망진창인 몸으로 작전에 참가하
겠다며 억지를 쓰는 사이런스였다. 썩어도 준치라고,몸 상태가 엉망 이라지만 마나마스터는 마나마스터 다.
성격은 개차반이어도 없는 것보단 낫다.
프라임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사 이런스의 의사를 받아들였다.
“사이런스 단장님께 기력 포션과 장비,옷을 가져다 드려라.”
*
한편 현자의 옛집에 도착한 세이아 나와 루나는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 었다.
비어 있어야 할 집에 누군가가 살 고 있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기어들어 와 살고 있는 자가 떳떳한 자일 리 없 다.
그리 판단하여 메모라이즈 스태프 를 겨눈 찰나.
열려 있는 현관문을 통해 사람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쯧쯧,스태프 내리라니까. 말 안 듣는 성격은 여전하구나.”
집 밖으로 나타난 사람은 굽은 허 리와 자글자글한 주름이 맺혀 있는 백발노인이었다.
지팡이로 계단을 짚을 때마다 굽으 로 나무 바닥을 딛는 둣 또각또각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이아나는 노인의 얼굴을 알아보 곤 메모라이즈 스태프를 거두었다.
“영감님? 영감님이 왜 여기서 살고 있어요?”
“예끼,이년아. 오랜만에 봤는데 인 사부터 하진 못할망정 왜 사냐고 묻 고 앉았구나.”
“오랜만이네요,영감님.”
“참 빨리도 한다. 이미 마차 떠났 다,이년아.”
“여전히 입이 걸걸하신 거 보니까 벽에 똥칠하고 다니진 않나 보네 요.”
“너도 나불대는 솜씨가 일품인 걸 보니까 기름진 거 먹으면서 사나 보구나. 아주 그냥 뱃살이 중력을 이 기지 못하는구먼.”
“그것보다 마탑 수장이신 분이 왜 여기서 사신데? 아하,마탑 아저씨 들이 수레에 실어다가 여기 버리고 갔구나. 그러게 아저씨들 작작 괴롭 히지 그랬어요.”
“매를 버는구나,매를 벌어. 예전처 럼 원숭이 볼기짝이 되어야 정신을 차리지.”
“어머,또 지팡이 부숴 먹으려고 요? 실드에 막혀서 매번 부서진 거 기억 못하시나 보네.”
노인의 이름은 데카르트.
마탑의 수장이자 마법계의 살아 있 는 화석이라 불리는 7써클 대마법사였다.
50년 전,해저섬과의 분쟁으로 인 해 마탑의 마법사들이 죽어 나가면 서 마탑은 몰락 위기에 처했었다. 보다 못한 빌로스 제국에서 분쟁을 조율하고 마탑을 샹데르로 옮겨 제 국의 병력으로 흡수하려 했었다.
그때 천재 마법사가 나타나 쓰러져 가던 마탑을 일으켰다.
그게 바로 데카르트였다.
당시에도 데카르트는 노인이었는데 50년이 지난 지금도 노인이다. 누구도 데카르트의 진짜 나이를 모 른다.
본인에게 물어도 돌아오는 건 데카 르트 특유의 독설뿐이다.
때문에 맛집의 비법과 데카르트의 나이는 황제가 찾아가도 알려 주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겨나기도 했다.
괴팍한 성질과 험한 입담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데 일가견이 있는 성격이었다.
특히 마탑의 마법사들이 데카르트 에게 많이 시달렸었다.
오두막집을 보호하는 마법 결계의 암호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시달렸 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세이아나도 독설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둘 이 마주치면 항상 독설 대전이 펼쳐 진다.
그런데 또 신기한 건 독설을 주고 받으면서도 사이는 무진장 좋다는 거다.
세이아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자연스럽게 오두막집 현관으로 걸어 갔다.
“영감님,그래서 여기선 왜 살고 있는 거예요?”
“공작가 쭉정이 놈들이 자꾸 전쟁 참가하라고 귀찮게 굴더만. 짜증나 서 아예 여기서 지내는 중이지.”
“여기 들어올 때 영감님 본인이 직 접 암호 읊어서 결계 풀었어요?”
“을었는데 그게 왜? 또 무슨 소리 하려고?”
“수장 엿 먹으라고 낭창낭창 을었
다고 상상하니까 웃기네요.”
“결계 만든 놈들 나중에 확 싸잡아
다가 혼줄을 내 주든가 해야지 원. 그보다 너는 웬일로 여기 왔느냐? 카니발에서 잘 먹고 잘 지내는 줄 알았더만.”
“잘 먹고 잘 지내는 중이에요. 닭 고기는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죠.”
“닭고기? 뭔 헛소리여?”
“그런 게 있어요. 그보다 언제 한
번 영감님 찾아가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네요. 마도의 서랑 비밀의 서 영감님이 등록했어요?”
마지막 남은 스킬북 용지인 줄 알 았던 초월의 서 외에도 스킬북 용지 가 존재했다.
혹시나 현자가 단서를 남긴 게 있 을까 싶어 현자의 집에 들렀다가 마 탑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현자의 집에 마탑의 수장인 데카르트가 있으니 한곳에서 모든 볼일을 해치울 수 있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나무 지팡이로 바닥을 강하게 짚었다.
타악!
“계승자가 나타났느냐?”
“네. 얼마 전까지 같이 다니다가 저랑 루나만 따로 빠져나왔어요.”
“그랬군. 저 아이가 그 사역마인 게로구나. 너같이 괄괄한 애가 결혼 해서 애까지 낳았나 싶어서 의아하 던 참이었지.”
“실례되는 말이지만 듣고 싶은 게 있으니까 참고 넘어가 드릴게요.”
“껄껄껄! 녀석 노처녀 히스테리하 곤. 본제로 돌아가자면 마도의 서와 비밀의 서는 내가 등록했느니라. 언 젠가 계승자의 손에 들어가면 나한 테 찾아오도록 내가 등록했다고 적 어 두었지.”
“본인 스스로 대마법사라고 적었다 는 얘기네요.”
“실제로 그런 걸 어쩌겠느냐.”
“마도의 서와 비밀의 서를 만든 스 킬북 용지는요? 그건 어디서 났어 요?”
데카르트는 기억을 더듬듯 손으로 벗겨진 머리를 연신 쓸어내렸다.
오래전에 등록해서 기억이 가물가 물한 지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고서 야 입을 열었다.
“정확히 몇 년 전인지는 모르겠다 만 어떤 여자가 와서 스킬북 용지를 주고 갔지. 살아생전 그리 미인인 여자는 처음 봤지. 굉장히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미인이었던 걸로 기 억나는구나.”
“여자요? 스킬북 용지를 얻을 만한 사람이면 보통 사람은 아닐 텐 데……
“이름도 특이했었지. 타임로드였었 나? 본명을 밝히기 싫어서 일부러 가명을 쓴 게 아닐까 싶구나. 스킬 북 용지는 두 장만 받았단다. 그리고 언젠가 계승자가 찾아오면 이 말 을 전해 달라더구나.”
“무슨 말이요?”
데카르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오랫동안 품에 넣고 보관해 왔었는 지 꾸깃꾸깃 구겨진 자국이 그득했 다.
종이를 펼치자 구겨진 자국 사이로 한 줄의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이 눈 에 들어왔다.
[제2신화급 웨이브는 앤트 평원 밑 에 묻혀 있습니다.]
지금껏 세간에 위치가 알려진 신화
급 웨이브는 제1신화급 웨이브라 불 리는 그랜드우드의 영역과 제5신화 급 웨이브라 불리는 바몬의 정원 두 곳밖에 없었다.
자칭 타임로드라는 자가 강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일부러 정보를 남 긴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앤트 평원이라면 언더그 라운드가 있는 곳이다.
언더그라운드 밑에 제2신화급 웨이 브가 있었을 줄이야.
언더그라운드도 제법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데 그보다 더 깊숙한 지하 에 묻혀 있으니 못 찾을 수밖에. 세이아나는 표정을 달리하며 종이 를 챙겼다.
“고마워요,영감님. 덕분에 귀중한 정보를 얻었어요.”
“마,징그립게 굴긴. 평소처럼 싹수 없게 굴 거라. 그나마 내 말 받아쳐 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어머,영감님 외로움 타시는가 봐 요? 평생 혼자 있어도 괜찮다던 분 이 어쩌다 이리 약해지셨대?”
“헛소리 말고 볼일 다 봤으면 가 봐. 여긴 내 별장 됐으니까 더 이상 둘러볼 것도 없을 게다.”
“하룻밤 쉬었다 갈게요. 그래도 되 죠?”
“흥! 그러든가!”
세이아나와 데카르트가 주거니 받 거니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갑자기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 다.
“단장님! 여기 오두막이 있습니 다!”
“뭐? 당장 수색해! 여자와 아이, 둘 다 잡아들여라!”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자 다수의 병력이 오두막으로 접근해 오고 있 었다.
마당에는 세이아나가 일 보는 동안 혼자 모비딕 스태프로 땅에 낙서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루나가 남아 있 었다.
불청객들은 마당에 남아 있는 루나 를 보곤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꼼짝 말고 가만히 있거라. 얌전히
붙잡힌다면 거칠게 굴진 않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