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그래서 지트가 오빠 명령이니까 다 먹겠다고 하면서 다 먹었는데 그 다음 날 지트가 소환이 안 됐어.”
“후후후,그랬어? 현이는 아직도 요리 못하나 보네.”
“응! 나날이 실력이 후퇴 중이야!”
“이상한걸? 혜림이가 옆에서 같이 해 주면 실패하진 않을 텐데.”
“아! 그거! 그거 중요해! 혜림 언 니가 국……. 국……. 아,뭐지? 면 요리였는데……”
“파스타?”
“파스타 아냐! 국수! 국수 만든다 고 면만 삶아 달라고 했는데 다른 것도 넣다가 혼났어.”
“뭘 넣었길래?”
“오징어 먹물.”
“오빠가 왜 먹물을 넣었을까? 우리 루나는 왜 그랬다고 생각해?”
“우응,속이 시커매서?”
“후후,속이 시커먼 사람은 검은 음식을 먹는 거야?”
“몰라. 오빠는 맨날맨날 검은 옷이 야. 그 뒤에 언니가 혼내니까 오징 어라서 오징어 요리가 마음에 안 드 는 건가라고 말해 가지고 더 혼났 어.”
세이아나는 루나와 오순도순 대화 를 나누며 그리폰을 몰았다.
수십 미터 아래는 망망대해였다.
현자의 옛집을 찾아 서해 군도로 향하면서 며칠간 비행을 하고 있었 다.
방한복을 입었다지만 바다 한복판 위를 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폰의 비행시간이 니아보다 짧 다는 점과 바다 위라는 특수한 상황 을 감안했을 때,하루에 날 수 있는 비행시간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하필 서해 군도 쪽에 강한 태풍과 비바람이 연일 불어 대서 섬 을 건널 때마다 2? 3일씩 체류하다 보니 이동기간이 더욱 길어지고 말 았다.
서해 군도의 섬들을 징검다리 삼아 비행과 야영을 반복한 결과.
보름이 지나고 나서야 서해 군도 한복판에 있는 작은 섬에 도착했다. 끼룩! 끼룩!
그리폰이 해안가에 착지하자 우글 우글 모여 있던 갈매기 떼가 한꺼번 에 날아올랐다.
오작교를 세우듯 일제히 날아오르 는 갈매기 떼의 풍경은 가히 장관이 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둣 갈매기 깃털만 널려 있는 해안과 열대 나무로 이루어진 작은 숲이 전 부인 무인도였다.
루나는 야자나무 아래에 떨어져 있 는 야자열매를 보곤 쪼르르 달려가 손으로 야자열매를 통통 두드렸다.
통? 통?
“이거 알아. 전설급 웨이브에서 레 비아탄 공략할 때 봤어. 라이! 이거 깨 줘! 앗! 라이 없었지!”
고작 야자열매 하나에 혼자서 난리 법석을 떠는 루나였다.
작은 것으로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도 일종의 축복이다.
자극에 익숙해지면 더 강한 자극이 아니고선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그런 면에서 항상 작은 것을 즐길 줄 아는 루나는 축복 받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사역마를 만든 건 현자와 세이아나 지만 그녀의 인격까진 조정할 순 없는 노릇이다.
루나가 즐길 줄 아는 아이가 된 건 전적으로 강현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세이아나는 야자열매를 들고 요리 조리 돌려 보는 루나를 흐뭇하게 바 라보다가 다가갔다.
“그거 열어도 주스는 안 나을걸?”
“주스 안 나와?”
“다 익은 건 원래 안 나와.”
“히잉,먹고 싶었는데.”
“너무 단것만 찾으면 못써. 슬슬 할아버지 집에 가자. 따라오렴.”
세이아나가 앞장서서 정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루나의 기뻐하 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아? ,고마워 풍풍!”
풍풍은 루나가 제물용 독수리에게 붙여 준 이름이다.
정식 명칭은 바꾸지 않았지만 제물 용 독수리는 너무하다며 루나 혼자 풍풍이라 부르고 있다.
뒤를 보니 그리폰이 덜 익은 야자 열매를 따다가 발톱으로 구멍을 뚫 어 루나에게 주고 있었다.
그리폰 재가 멋대로!
그나저나 이상하네.
나 외에는 아무도 안 따르던 녀석 인데.
언제부터 친해진 건지 아주 그냥 루나의 볼에 부리를 부비며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그리폰! 루나! 빨리 안 오면 두고 간다!”
“응! 갈게! 가자,엄마 화내겠다. 빨리 가자,풍풍.”
“끼유우!”
정글 안은 수풀과 넝쿨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방치된 지 오래된 섬이기에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 다.
그래서 그리폰을 선두에 세우고 녀 석의 발톱으로 풀을 베면서 정글 안 으로 들어갔다.
루나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로브 후 드 앞자락을 위로 올리며 말을 꺼냈 다.
“근데 할아버지는 왜 이런 곳에서 살았어?”
“그게…… 말하자면 좀 길어. 할아 버지가 가이아 대륙에 처음 왔을 땐 이세계인들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 었거든. 그래서 빌로스 제국 황제가 할아버지 보고 여기서 잠시 지내라 고 했다더라고.”
“엄마는?”
“엄마는 한참 뒤에 여기 왔지. 여 기서 한 달 정도 살았었나? 그리 오래 있진 않았어. 그 뒤에 바로 내 륙으로 돌아갔었지.”
십 수 년 전,현자의 팀이 결성되 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웨이브는 재
앙이라 불렸었다.
더불어 이세계인은 재앙의 근원으 로 몰려선 맞아 죽기 일쑤였다. 황제는 웨이브를 조사해 줄 사람들 이 필요하다고 여겼었고,하나둘 재 능 있는 자들을 서해 군도에 모아 팀을 결성한 후 웨이브에 대해 조사 하라는 명을 내렸었다.
당시에 모였던 사람들 중에서 지금 까지 살아남은 자는 세이아나 혼자 였다.
세이아나는 머릿속에 묻어 두었던 케케묵은 기억을 들추며 추억에 잠 겼다.
‘나도 그땐 야자열매 한번 먹어 보 겠다고 열매에 스킬 썼다가 혼났었지. 후후,생각해 보니까 나도 순수 한 시절이 있긴 있었네.’
개인적으로 순수와는 거리가 먼 인 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바구니에 담긴 채로 빈민가의 성당 앞에 버려진 것부터 시작해서,맡겨 진 성당은 아동 인신매매를 하고 있 었고,7살 때 성당을 뛰쳐나와 맨발 로 노숙 생활을 하며 훔친 나이프로 자신을 지켜야 했다.
9살 때 운 좋게 어느 그리스인 부 부에게 거둬져서 양녀로 들어가게 되었으나,해당 부부는 아동을 대상 으로 한 스냅 비디오 제작자였다. 거기서도 도망 나와 변태들의 노리 갯감이 되는 건 면했지만 막 9살이 된 소녀가 혼자 세상을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스 폭동을 틈타 생긴 폐건물에 서 지내며 간간이 거리로 나와 동냥 을 하는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잠깐 한눈을 팔면 다른 이들이 훔쳐 가기에 항상 날이 곤두 선 채로 살아야 했다.
한 번은 너무 배가 고파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졌는데,가게 주인이 나와서 일어나지 못할 때까지 걷어 차였다.
그날 맞은 부위가 끓아서 며칠 동 안 상체를 뉘이지 못해 앉은 채로 쪽잠을 잔 적도 있었다.
그때 가장 부러웠던 건 가방을 매
고 스쿨버스에 오르던 아이들이었 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배우고,모든 것을 평범하게 받아들 일 수 있는 게 너무나도 부러웠다. 그늘에 있는 자는 볕이 그리워서 볕에 서 있는 자들을 동경하게 되기 마련이다.
일반 가정집에서 버려진,항상 1페 이지만 너덜너덜하고 나머지는 매우 깨끗한 책을 가져다가 혼자 수업 놀 이를 하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그랜드 마운틴 쉘터를 지었을 때 학교를 설립한 것도 아이들이 자신 과 같은 경험을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더그라운드에 학교 짓는 건 무 리수인 것 같고……. 가이아 대륙 안정되면 애들 전부 가이아 대륙으 로 옮기는 게 나을까……
생각에 잠긴 채로 묵묵히 걷고 있 는데 앞에서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 가 들려왔다.
쿵!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그리폰이 벽에 이마를 찧은 양 머리 를 휘휘 휘저었다.
“끼유우!”
“도착했나 보네. 그리폰,소환석으 로 돌아가자.”
“끼유?”
그리폰이 얇은 울음소리를 내며 소
환석으로 되돌아갔다.
세이아나는 소환석을 아공간 목걸 이에 넣곤 그리폰이 머리를 부딪친 허공을 더듬었다.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손의 감 각을 통해 투명한 벽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자의 팀이 섬에 체류할 무렵 마 탑의 마도사들이 와서 마법 결계를 설치해 주고 갔었다.
억지로 부수면 무진장 시끄러운 경 보음이 꽥꽥 울리기 때문에 웬만하 면 정식 절차를 거쳐 푸는 게 나았 다.
“이쯤 어디에 타일을 묻어 놨었는 데 어디더라?”
메모라이즈 스태프를 땅에 박고 마 법 결계를 따라 선을 긋자 땅 밑에 서 무언가가 스태프 끄트머리에 부 딪 쳤다.
스태프 끄트머리가 멈춘 지점을 파 내자 원형 마법진이 새겨진 석제 사 각타일이 나타났다.
세이아나는 마법진 중앙에 손바닥 을 얹고 마나를 불어넣으며 암호를 옮었다.
“마탑 수장 엿이나 먹어라.”
또박또박 암호를 을자 보이지 않던 벽이 무지갯빛을 띠다가 사라졌다. 당시 마법 결계를 설치한 마탑의 마법사들이 수장한테 하도 시달려서 수장 엿 먹으라고 암호를 설정해 뒀었다.
워낙에 강렬했던 암호인지라 잊을 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마법 결계가 걷히자 정글 풍경이 사라지며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 중앙에는 결계 덕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오두막집이 있었다. 세이아나는 루나와 함께 오두막집 에 접근하려다가 스태프를 굳게 잡 았다.
“기다려,루나.”
이곳을 떠난 이후,현자의 팀 중 누구 하나 이 무인도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세이아나마저도 십 수 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되돌아온 참이다.
한데 아무도 들를 일이 없는 곳이 건만 오두막집 문이 활짝 열려 있었 다.
마당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장작이 며,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누군가가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다. 세이아나는 오두막집 문을 향해 메 모라이즈 스태프를 겨누며 경계태세 를 취했다.
“가서 누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루나를 대기시키고 누가 사는지 확 인해 보려던 찰나.
오두막집 안쪽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현관에서 나온 이는 세이아나를 지 그시 응시하더니 고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고약한 손님이 왔구나. 경고하는 데 혼줄 나기 전에 그 스태프 내려 놓거라.”
*
현자의 팀이 체류하던 무인도 해안 에 한 척의 배가 도착했다.
배에는 프라임을 비롯한 빌토르 백 작가의 기사들이 타고 있었다. 프라임은 해안가에 발을 내딛자마 자 모래에 남은 발자국을 발견했다.
“발자국이 선명하군. 한 2? 3시간
전에 생긴 발자국 같은데 말이지. 드디어 따라잡은 건가.”
최강현에게서 떨어져 나온 은발 2 인조를 추격하러 나섰던 프라임이었 다.
서해 군도로 향했다는 목격 증언을 바탕으로 곧바로 배를 구해 항해를 시작했었다.
어인 용병들을 고용해서 퍼뜨린 덕 에 은발 2인조의 이동경로를 알아낼 수 있었고,날이 갤 때마다 선원들 을 닦달하여 노를 젓게 하였다.
최강현의 일행이 무슨 목적으로 이 먼 무인도까지 왔는지는 모른다. 용의주도한 작자인 만큼 이유 없이 사람을 보냈을 리 없다.
최강현의 일행을 붙잡으면 필시 놈 의 목을 틀어월 수 있을 거다. 프라임이 검을 뽑으려는데 배에 남 아 있던 기사들이 소리쳤다.
“프라임 단장님!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배 한 척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기사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 을 옮기자 정말 배 한 척이 다가오 고 있었다.
깃발이 없는데다 돛을 펼치지 않아 서 어디 소속 선박인지 알 수가 없 었다.
갑판 위에 있던 기사 중에서 항해 용 망원경을 눈에 가져다 대고 있던 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허억! 사이런스 단장님입니다! 사 이런스 단장님이 갑판에 묶여 있습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