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xxxx년 11월 4일.
-베니스 남작령을 떠난 나와 김혜 림은 쥬리안이란 항구도시로 가기 위해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날씨 가 갈수록 쌀쌀해지고 있다. 3시간 비행 30분 휴식 로테이션으로 날고 있는데 비행 후에 착지하면 옷에 서 리가 맺혀 있다. 중간에 도시가 보 이면 기름 먹인 코트라고 구해야겠 다.
그리고 김혜림 몰래 토끼를 잡아 토끼구이를 시도해 봤다. 한 입 먹 어 봤는데 스컹크가 고기에 대고 방 귀를 뀌고 도망간 것처럼 냄새가 심해서 들개들에게 던져 줬다. 그런데 들개들도 먹지 않고 멀리서 냄새만 맡더니 도망가 버렸다.
비린내를 잡으려고 쓴 향신료가 문 제였던 걸까?
-XXXX년 11월 5일.
-김혜림이 요즘 재채기를 많이 한 다. 요즘 계속 강행군이었던데다 주 요 이동수단이 비행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버섯이라면 몸에도 좋고 베니스 남작가에서 얻어 온 달걀이 남아 있으니 버섯달걀죽을 끓이면 몸이 따뜻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시 도해 봤다.
걱정 마라. 내겐 독자적으로 도전
과 실패를 반복하며 작성한 레시피 노트가 있으니까. 연일 갱신되고 있 는 실패 횟수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
죽이야 곡물이랑 재료 좀 넣고 팔 팔 끓인 다음에 간만 맞추면 되는 거니까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거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제공 받은 쌀을 푸욱 끓이다가 한 가지 공정을 빼먹 은 걸 깜빡했다.
육수를 내고 쌀을 끓였어야 하는 데!
지금이라도 다시마를 넣으면 끓으 면서 육수가 되지 않을까? 다시마라 면 김혜림이 항상 육수 내는 용으로 챙겨 두니까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냄비 뚜껑을 열고 다시마를 넣으려 는데 김혜림의 등짝 스매싱이 날아 들었다. 그러면서 죽에 다시마튀각 을 넣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하더라 고. 그게 그거 아닌가? 덕분에 오늘 도 주방에서 쫓겨났다.
흐음,넣었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 데.
-xxxx년 11월 6일.
-라이는 이제 하도 기미를 많이 봐서 그런지 음식을 줘도 먹지 않는 다. 원래 음식물 없이도 살 수 있는 녀석이 뭘 그리 배탈을 두려워하는 건지.
근데 요리할 만한 재료가 별로 없다. 샐러드나 단순 구이용 재 료는 있긴 한데 샐러드와 바비큐는 ‘내가 요리를 했다’고 인정하고 싶 지 않다. 샐러드 바에서 샐러드에 드레싱 뿌려서 가져오는 거나, 고깃 집에서 고기 굽는 걸 보고 요리했다 고 하진 않는 것처럼 말이다.
최소한 내가 양념을 하거나,최소 한의 조리 공정을 거친 것만 요리로 인정할 거다.
이것만큼은 물러날 수 없다. 실력 은 초짜지만 마음가짐은 장인 정신 으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자신감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김혜림은 요리 에서만큼은 자신감 섭취량을 줄이라고 아우성이지만 남자에겐 알면서도 물러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라이는 더 이상 시험작을 안 먹으 려고 하니까 니아에게나 먹여야겠 군.
-xxxx년 11월 7일.
-니아가 배탈이 심해서 못 날게 되었다. 이하 생략.
*
“거기 앉아 봐요!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아야죠!”
“이번 건 내 잘못이 아냐. 우유 유
통기한이 지났던 걸 몰랐던 거지.”
“사람 말할 때 한 번만에 제대로 안 듣고 딴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렇 죠. 그 우유 제가 유통기한 지나서 목욕용으로 쓰려고 빼놨다고 미리 말해 놨잖아요. 제가 그 말 했어요, 안 했어요?”
“하기야 했지.”
“제대로 들었네요. 근데도 썼어요? 그리고 면은 또 왜 이리 꺼내 놨데. 강현 씨가 칼국수해 달라고 그리 노 래를 불러 대서 면 치대 놨더니 다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셨네요. 자? 알 하는 짓입니다. 아주 자? 알 했어 요.”
“우유칼국수라는 걸 해 보려고 해
서.”
“어휴,끔찍한 혼종을 탄생시키려 고 하셨네.”
“잔소리 할 줄은 알았지만 오늘은 더 심하군.”
“할 줄 알고 있었으면 하면 안 되 죠!”
이놈의 여편네는 갈수록 잔소리가 심해지는군.
내가 잘못했으니 할 말은 없다만. 요리 후에 의례적으로 따라오는 잔 소리 시간이 끝나면서 김혜림이 태 운 콩가루즙을 내왔다.
잔소리 후에는 항상 차를 마시며 냉정을 되찾는 시간을 가진다. 김혜림은 커피를 두어 번 입에 댄 후에야 진정이 되는지 한층 차분해 진 목소리로 말했다.
“니아는 당분간 못 나니까 육로로 이동해야겠어요. 거리 계산부터 해 보죠.”
“비행기준 5일 걸릴 거리 중에서
4일을 날아왔으니 육로로 가도 얼마 안 걸리겠지. 산 하나만 넘으면 되 니 이틀 안에 도착할 거야.”
“강현 씨 혼자 먼저 가는 게 효율 적이지 않을까요? 토끼 사냥에 필요 한 덫은 빨리 설치할수록 좋아요. 토끼들은 덫에 남은 인간 냄새에 민 감하거든요.”
“도착해도 배 수배는 한참 후에 할 거야. 원래라면 일주일 뒤에 배가수배되어야 정상이니까. 너무 빨리 배를 수배하면 오히려 수상하게 보 일 수도 있어.”
“덫을 설치할 때 필요한 물건들을 사 둬야겠네요.”
강현이 습관적으로 턱을 매만졌다.
그가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가 상념 에서 벗어날 때면 항상 괴랄한 계책 이 탄생한다.
물론 적의 입장에서만 괴랄하게 느 껴질 계책이다.
김혜림은 강현이 자신만의 계책에 몰입 중이라는 걸 알곤 눈치 좋게 움직였다.
“생각할 시간 필요해요? 커피 한 잔 더 탈까요?”
“그래 주면 좋지.”
생각에 잠길 때면 항상 시선이 아 래로 내려간다.
고개를 45도 각도로 떨군 채로 땅 을 보고 있는 듯 마는 둣 생각에 잠겼다.
‘쥬리안의 상황을 감안하면 그쪽 시장에서 이것저것 사고……. 배 수 배할 즈음이면 차원관리자가 로산을 데려올 테니까 그때는……
“여기요,커피.”
계책 짜는데 여념이 없어 쳐다보지 도 않고 커피잔을 받아 입에 대었 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달달한 물 이 입안 가득 들어찼다.
강현은 커피를 한 움큼 삼키며 고 개를 들었다.
그러자 쟁반을 끌어안은 채로 장난 기 가득한 애교 미소를 짓고 있는 김혜림이 보였다.
“설탕 넣었어?”
김혜림은 깨소금 맛이라는 듯 즐거 이 웃으며 혀를 낼를 내밀었다.
“후후,니아의 복수예요. 반성하세 요.”
설탕을 넣은 장난이라.
단건 싫어하는데 말이지.
정말이지 달달한 장난이군.
?
크레인 공국의 왕궁 안.
한 사내가 슈앙으로부터 서신을 전 해 받았다.
왕의 외척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 른,크레인 공국의 새로운 공왕이 된 자였다.
크레인 공왕은 서신의 발신인이 슈 앙인 걸 알곤 고유번호가 같은 개방 의 썰을 골라 서신을 열었다.
“슈앙에게서 서신이라. 나탈리아가 조직과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 나 보군.”
나탈리아와 관련된 소식일 줄 알고 서신을 열었는데 예상과 전혀 다른 내용이 튀어나왔다.
최강현이란 자가 조직의 인물을 치
기 위해서 베니스 남작가에 들렀으 며,크레인 공국과 목적이 일치하기 에 정보를 내어 주었다고 한다.
최강현이란 이름 석 자가 너무나도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소문은 많이 들었다.
한때 빌로스 제국 최고의 검사라 불렸으며,최초로 SSS랭크 웨이브를 공략했고, 뛰어난 지략으로 메이아 황녀와 드래코프 황자를 꿇리고 에 르델을 유력 계승자로 끌어올린 자 라 들었다.
크레인 공왕은 서신을 모아 둔 상 자에서 얼마 전에 온 서신을 빼내었 다.
“이 서신 내용이랑 이어지는 것이
었군. 데이낙스 백작은 이름 모를 마나마스터라고만 했건만.”
얼마 전,데이낙스 백작이 엘딘의 사망 소식과 대승을 거둔 사실을 알 리는 승전보를 보내왔다.
엘딘을 죽인 마나마스터가 있는데 사정이 있어 이름을 밝힐 수 없다 했었다.
슈앙의 서신을 보니 그 이유가 명 확해 졌다.
강현이 데이낙스 백작의 협력을 얻 기 위해 남부 전선에 가담해 주었 고,그 뒤에 바로 베니스 남작가로 가서 나탈리아에게 조직에 대한 정 보를 뽑아낸 게 틀림없었다.
‘정체를 숨겨 달라고 한 건 좋은
조치야. 조직에서 최강현 그자의 이 름을 듣고 더욱 몸을 사릴 가능성을 감안하면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이는 게 좋지. 근데 최강현 그자 혼자만 으로 조직의 인물들을 상대하는 건 위험하지 않나?’
몇 해 전에 발생한 엘딘,압둘,카 슈아딘 탈옥 사건을 일으킨 게 조직 의 인물이었다.
그마저도 조직의 끄나풀에 불과했 다고 하니,조직에는 더 뛰어난 인 물이 포진되어 있을 터.
크레인 공왕은 강현 혼자 움직이게 놔둬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에르델 황녀님의 은인이기도 한 사내였지. 에르델 황녀님깬 개인적으로 은혜를 입은 게 많아. 은인의 은인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어. 무엇보다 그 사내가 살아남아 제국 에 복귀하게 된다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에 승리의 빛이 비춰질지도 몰 라. 이건 무조건 지원군을 파견해야 겠군.’
머릿속 정리를 마친 크레인 공왕은 사람을 불렀다.
“여봐라! 지금부터 호명하는 왕궁 의원들을 궁으로 호출하거라!”
그날 밤,크레인 공왕은 ‘신뢰’하는 왕궁 의원 몇몇을 불러다 강현을 지 원할 방책을 논했다.
회의 결과 왕을 호위하기 위해 편 성된 마나유저 상급의 기사들을 파견하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이 나왔 다.
지원 방법이 정해지자마자 왕궁 의 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허나 크레인 공왕은 모르고 있었 다.
그 신뢰하는 왕궁 의원들 중에 공
작군과 내통하는 자가 있었다는 것 으
?
천공섬을 지나 크레인 공국 남부 전선에 합류한 사이런스는 학살자마 냥 미쳐 날뛰었다.
쉬이엉! 서격! 서격!
끈을 매달아 놓은 쿠크리 칼이 길 게 뻗어 나갈 때마다 크레인 병사들 의 목이 짚단처럼 잘려 나갔다.
마나 블레이드가 부여된 칼이 사각 지대에서 날아드는데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사이런스의 보구인 ‘써전 쿠크리’ 가 전장을 누빌 때마다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잘려 나간 머리가 졸업식 의 학사모처럼 동시다발적으로 튀어 오르며 삶의 졸업식을 연출했다.
기껏 엘딘이 죽음으로 남진을 꾀하 던 크레인군은 사이런스의 합류 때 문에 등을 돌려야만 했다.
“퇴각 깃발이 올라갔다! 전군 퇴각 해라!”
“퇴각! 퇴각! 사이런스에게서 최대 한 멀어져! 저 작자의 사정거리에 들어가면 꼼짝없이 머리가 날아간 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라!”
꽁지 빠져라 도망가는 크레인군의 모습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이로써 공작군은 엘딘이 세워 두었 던 중간 거점을 되찾았다.
부관들은 냉큼 사이런스에게 달려 가서 다음 명령을 받고자 했다.
“적군이 진지를 버리고 퇴각에 나 섰습니다. 이대로 협곡까지 추격할 까요?”
“옴마나,이상하네~ 슬슬 내보낼 때가 됐을 거라 생각했는데 안 나오 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얘 좀 봐. 눈치가 그리 없어서야 되겠니? 이름 모를 마나마스터 말이 야. 협곡 앞까지 왔는데도 나올 기 미가 안 보이잖니?”
“사이런스 단장님과 맞부딪치는 걸 꺼려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단장님 은 엘딘 따위완 차원이 다른 실력자 이지 않으십니까.”
“캔디 같은 말이지만 기분 좋게 들 리진 않는걸? 일단 대기? 불안 요 소를 안은 상태에서 협곡에 들어가 는 건 실형?”
싫어라는 말을 꼭 저리 끈적하게 교정해서 말해야 할까.
부관들이야 이미 익숙해진 말투이
기 때문에 내성이 생겨 있었다.
대기 명령이 떨어짐과 함께 또 다 른 부관이 서신을 가져왔다.
“사이런스 단장님. 크레인 왕궁 쪽 에서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옴마나? 돈만 먹고 정보는 안 내 놓던 고장 난 정보 자판기 분이 웬 일이시래. 어디 줘 봐.”
사이런스는 손톱 끝으로 봉인을 뜯 으며 서신 내용을 확인했다.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중.
붉게 칠한 사이런스의 입가가 비릿 하게 말아 올라갔다.
“이름 모를 마나마스터에게 이름이 붙었어.”
“누구인지 알아냈답니까?”
“최강현이 라네.”
“최강현! 이거 비상사태 아닙니까? 최강현이라뇨. 본가에 알려서 증원 을 요청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얘가 뭔 소리래. 증원 기다리다가 놓치면 네가 책임질 거니?”
“놈의 능력을 감안하면 아무리 신 중을 기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어디 가서 썰리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잖니?”
소문만 무성했던 자에게 드디어 이 름이 붙었다.
상대는 최강현이다.
그가 왜 이제야 나타났는지,왜 이 름을 숨기고 활동하는지에 대한 건 아무래도 좋았다.
사정이야 뭐가 됐든 죽여야 할 대 상이란 건 변치 않는다.
사이런스는 쿠크리 칼에 묻은 피를 혀로 할짝이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소문대로 미남이었으면 좋겠네. 난 미남의 비명 소리가 그렇게 좋더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