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하는 플레이어-294화 (294/381)

294화

“취향을 몰라 우유와 홍차를 따로 데웠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설탕은 전시 납입품목이라 다 떨어져서 재 고가 없더군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거면 충분해. 단것은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라서.”

“그거 다행이로군요. 쿠키는 어떠 신지요? 포도는 그나마 납입품목이 아니라서 올해는 건포도가 잘 만들 어 졌습니다.”

“집사 양반이 요리부터 티 세팅, 잡무까지 다 담당하나 보지?”

“청소와 세탁을 제외한 모든 업무 를 보고 있답니다.”

“시골 귀족가의 집사치곤 다재다능 하군. 원래 고위 귀족가 밑에서 일 했던 것처럼 말이야.”

“허허,언제 잘릴지 모르는 늙은이 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

“평소에 이 성질 더러운 여자 상대 하려면 피곤하겠어.”

“허허허,성질이 더럽긴 하셔도 피 곤하다고 할 정도까진 아니랍니다.”

티 테이블 맞은편에서 강현과 슈앙 이 대화를 나누는데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주 주? 오옥 같았다.

나 여기 있거든?

안 보이는 거 아니지?

이것들아,사람 면상에 대고 자꾸 험담할래?

나탈리아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거친 손길로 찻잔을 컵받침에 내리 쳤다.

짤그락!

“적당히들 하지그래? 그렇게 자꾸 사람 무시하다간 큰코다치는 수가 있어.”

“저런 부분이 문제인 거지. 외모만 신경 쓴다고 되는 게 아닌데 말이 야.”

“요즘도 보부상이 미용용품을 싸 들고 오면 전부 사들이시죠.”

“모름지기 외모보다 마음이 예뻐야 하는데 말이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아 좀! 내가 호박씨야? 그만 좀

까 대라고! 됐고. 무슨 용건이야? 너 때문에 망가진 인생 얼마나 더 망가뜨리려고 여기까지 왔냐고?”

강현의 실력을 앎에도 불구하고 나 탈리아는 있는 힘껏 북북거리며 성 질을 내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연의 성격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었 다.

이른바 배 째라는 식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고고하게 굴며 암 중 실세 행세를 할 때보단 낫다. 이제야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은 듯하다.

강현은 찻잔을 입에 대었다 떼며 용건을 꺼냈다.

“디벨롭 이후에 조직의 인물과 연 락한 적 있나?”

“흥! 그깟 걸 물어보려고 찾아온 거야? 확실히 말해 두는데 디벨롭이 죽었다는 걸 알자마자 녀석들하곤 칼같이 연 끊었어.”

“거짓말이군.”

“아,아,아닌데?”

“메이아 황녀의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겠지?”

메이아 황녀가 강현을 물 먹이려다 가 역으로 궁지에 몰려 유배된 이야 기는 매우 유명하다.

메이아 황녀 유배 사건에는 커다란 교훈이 있다.

최강현이란 남자는 여자라고 봐주

지 않는다.

설사 상대가 대륙에서 손꼽히는 미 녀일지라도.

나탈리아가 디벨롭을 통해 성형 수 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미모만 따 지면 메이아 황녀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일단 풍겨져 나오는 페로몬부터가 다르다.

그런 메이아 황녀마저도 가차 없이 쳐낸 강현이 시골 벽지로 좌천된 세 상물정 모르는 아가씨 하나 못 쳐낼 까.

메이아 황녀를 들먹인 효과는 탁월 했다.

나탈리아는 강현의 눈치를 슬금슬

금 보더니 한층 꼬리를 내린 투로 말을 꺼냈다.

“거,거짓말인지 어떻게 알아……

“O 으 ”

? a .

“……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지. 디벨롭 이후에 조직의 인물과 연락한 적 있 나?”

“있을…… 수도?”

“더 확실하게.”

“있어요. 네,연락했어요. 꺄악! 솔 직하게 말했으니까 검에 손 올리지 마요! 으앙! 흐아앙! 슈앙!”

철부지처럼 제멋대로 굴다가 정작 위기에 당면하자 울상을 지으며 슈 앙 뒤에 숨는 나탈리아였다.

이런 여자가 한때 공국을 쥐락펴락 하고 있었다는 게 우스꽝스럽지 않 나?

물론 나탈리아가 수완이 좋아서 암 중 실세로 있었던 건 아니다.

커뮤니티의 힘이 뒷받침되어 있었 기에 가능한 일이지.

때문에 나탈리아가 다시 실세가 되 려면 커뮤니티의 힘이 필수불가결이 다.

커뮤니티로서도 차원의 경계가 위 치한 나라의 실세가 자신들이 조종 하기 쉬운 꼭두각시라면 더할 나위 가 없다.

서로 이해가 일치하는 만큼 서로 연락을 끊을 이유가 없다는 거다.

겁에 질린 나탈리아 대신 슈앙이 대신 답변을 해 주었다.

“이다음은 제가 이어 받는 게 나을 것 같군요,강현 경. 지금은 최강현 씨라고 불러야 할까요?”

방금까지 마음 넓고 수완 좋은 집 사였던 자였건만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렴풋하게나 마 예상은 하고 있었다.

시골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라기 보다 한 수 지닌 자의 여유로움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강현은 어림짐작으로 슈앙의 정체 를 짚어 냈다.

“크레인 왕궁에서 붙여 뒀나 보

지?”

슈앙은 부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인 정했다.

“정확히는 공왕 전하께서 직접 명 령을 하달하셨지요.”

“나탈리아에게 적용시킬 죄목이 없 다는 것도 핑계였군. 나탈리아가 몰 래 조직과 연락을 취하면 꼬리를 밟 을 셈이었나. 그럴 속셈으로 일부러 오지에 보낸 거고.”

“조직의 위험성이라면 데이낙스 백 작을 통해 들었습니다. 당신이 조직 의 우두머리를 치기 위해 한 행동까 지 모두 말입니다. 완전히 뿌리 뽑 기 위해선 이 방법이 최선이었지 요.”

“이제 와서 정체를 밝혔다는 건 내 게 협력하겠는다는 건가?”

“같은 적을 두고 있으니 협력해서 나쁠 건 없지요. 생각보다 조직의 힘이 강력한 듯하고 공국에선 조직 배척에 할당할 인력이 부족합니다.”

“전시 중이니까.”

“그것도 있지만 아시다시피 조직을 상대하려고 키운 마나마스터가 엘딘 에게 당해 버려서 계획이 많이 꼬였 습니다. 당신께서 대신 조직 말살에 힘을 더해 주신다면 저희로선 이보 다 반가운 일이 없겠지요.”

크레인 공국의 유일한 마나마스터 였던 베니스 백작가의 맥이 죽은 이 후에 크레인 공국은 새로운 마나마 스터를 얻었다고 했었다.

어딘가에서 솟아난 마나마스터를 영입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조직을 상대하기 위해 키운 마나마스터였던 가.

그마저도 엘딘에게 당했다고 하니 어느 정도 실력이었는지 알 만하다. 다만 하위차원의 일개 공국이다 보 니 조직을 단순히 국가전복을 노리 는 반란세력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론 커뮤니티라는 강대한 세력 의 일각에 불과한 것을.

카니발과 관련된 부분은 제쳐 두고 서라도 슈앙의 제안은 나쁘지 않다. 강현은 디벨롭의 후임으로 임명된 차원관리자에 대한 정보를,크레인 공국은 조직의 섬멸을 꾀할 수 있으 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

“놈들이 어디 있는지만 알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나탈리아 아가씨가 조직의 인물과 주고받던 서신의 내용을 일일이 적 어서 필사본을 만들어 놨습니다.”

“바로 볼 수 있나?”

“원하신다면요.”

슈앙은 이제부턴 왕가의 손님이 되 었다는 양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필사본을 가지러 갔다.

기존의 서신은 벌써 처분되었을 거 고,나탈리아에게서 증언을 끌어낸다 해도 그녀가 서신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진 않을 테니 정보가 불 분명했을 거다.

그리 따지면 슈앙이 가져올 필사본 이 가장 정확한 정보라 볼 수 있었 다.

그가 필사본을 가지러 간 동안 남 은 차나 마셔야겠군.

왕궁에도 집사는 존재한다.

왕궁에서 집사 노릇이라도 했던 모 양이겠지.

차 끓이는 솜씨가 제법인걸?

식어도 맛있는 홍차는 존재하지 않 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강현이 찻잔에 남은 홍차를 마시려 는데 옆에서 나탈리아가 뒤늦은 반응을 보였다.

“슈앙이 왕궁에서 파견한 사람이었 다고? 조직을 섬멸하려고 날 풀어 둔 거였어? 나 완전히 개털된 거 야?”

고장 난 자명종이 따로 없군.

자신이 벽지로 오게 된 것부터가 크레인 왕궁의 덫이었다는 걸 안 나 탈리아는 끙끙 앓다가 몸져누웠다. 저택에 있는 유일한 하녀가 나탈리 아를 침실로 부축했고,그와 교차하 듯 슈앙이 필사본을 가져왔다.

“제가 얼마간 훑어보긴 했지만 직 접 보시는 게 이해가 더 빠를 겁니 다. 비유적인 표현이 많아서 이쪽에서 임의로 해석해서 알려드려 봤자 선입견만 생기겠지요.”

“옳은 소리만 하는군. 말은 부정확 한 경우가 많지.”

“저도 봐도 돼요?”

아무도 없었던 창가 쪽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줄곧 여유로운 분위기를 품고 있던 슈앙도 이번만큼은 깜짝 놀랄 수밖 에 없었다.

슈앙은 자세를 낮추며 중화 권법과 흡사한 격투 자세를 취했다.

위험을 느끼곤 본능적으로 몸에 배 어 있는 대로 반응하고 만 것이었 다.

국왕의 명을 받고 잠입한 자이니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강현은 슈앙을 향해 손을 저었다.

“내 동료니까 경계 풀어. 김혜림 너도 모습 드러내고.”

“김혜림이라면 단독으로 베니스 백 작가를 쑥대밭으로 만든 그 김혜림 양이십니까?”

“크레인 공국에선 나보다 네가 더 유명한가 보군.”

“그때야 강현 씨 찾는 것 외엔 안 중에 없었거든요. 뒷수습이고 파장 이고 하나도 신경 안 썼었죠.”

창가 쪽에서 녹색빛이 걷히면서 김 혜림이 나타났다.

숨어 있고 싶어서 숨었던 건 아니

다.

슈앙이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기 려 했던 것처럼 강현도 김혜림이란 보험을 들어 둔 것에 불과하다.

크레인 공국에서 슈앙을 심어 둔 것처럼, 커뮤니티에서도 누군가를 심어 두어 나탈리아가 정보를 누설 하기 전에 먼저 제거해 버렸을 수도 있다.

그때를 대비한 보험이었다.

슈앙이 필사본을 내놓으면서 이제 는 나탈리아가 어찌 되든 관계없어 졌지만 말이다.

김혜림이 크레인 공국에서 경악스 런 존재이긴 한지 슈앙의 태도가 급 격하게 딱딱해졌다.

어지간히도 날뛰었나 보군.

김혜림은 의자를 당겨서 강현의 옆 에 바짝 붙었다.

“사본 펼쳐 봐요. 어디 한번 보죠.”

“그럴 생각이야.”

슈앙이 넘긴 필사본을 펼치자 깔끔 한 필체로 대륙공용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내용은 날짜 별로 구분되어 있어서 읽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대부분은 나탈리아가 차원관리자에 게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었다.

한참을 넘기다가 가장 최근에 오간 서신 부분에서 특이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중요한 화물을 빌로스 제국으 로 옮겨야 한다. 배편으로 이동하고 싶으니 쥬리안에 배를 수배해 두고 베니스 남작가에서 파견한 병사란 증명서를 보내라.

수배한 배에는 베 니스 남작가의 문양이 들어간 돛을 달면 알아서 타겠다. 보름 내에 배 가 보이지 않는다면 거절한 걸로 받 아들이마. 거절하는 건 자유지만 앞 으로의 관계는 장담하지 못할 거라 는 말만은 전해 두지.]

“여기서 화물이라는 건 ‘그걸’ 말 하는 거겠죠?”

김혜림이 말하는 ‘그걸’이란 로산

을 뜻했다.

슈앙처럼 제삼자에게 밝혀질 것을 대비하여 대명사를 쓴 것이었다. 화물이 로산을 의미하는 것만은 확 실하다.

“그렇겠지. 슈앙,이 서신이 온 날 짜가 어떻게 되지?”

“이틀 전에 왔습니다.”

“대략 2주 남았나. 2주 안에 베니 스 남작가 이름으로 배를 수배해 줄 수 있겠어?”

“일부러 배를 구해 주고 놈들을 유 인하자는 말씀이시군요. 요즘 배란 배는 다 차출되긴 했지만 제가 직접 연락을 취하면 소형선 한 척 정도는 내줄 겁니다. 근데 시간에 맞출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당장 말 을 타고 가도 보름이 걸리는지라.”

“소개장을 써 줘. 우리라면 5일 안 에 갈 수 있으니까.”

“확실하게 조직 놈들을 말살할 수 만 있다면 얼마든지 써 드려야지 요.”

“말살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걱정 하는 거라면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해 두지.”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 시오.”

“그리고 우리가 여기 왔다는 건 철 저하게 비밀이 붙이도록. 나탈리아 입단속도 철저히 하고.”

“그 부분은 염려 마십시오. 여긴

당신들 이름도 전해지지 않을 정도 로 오지인데다,다른 곳에 서신을 보내려면 무조건 저를 통해야 하니 까요.”

조직을 치려면 기밀 유지가 철저해 야 한다.

조직을 치기 위해 강현에게 협력하 는 슈앙이 강현의 정체를 외부에 누 설할 리가 없잖은가.

더군다나 나탈리아는 슈앙의 통제 안에 있기 때문에 입단속이 어렵진 않았다.

대화를 마친 슈앙은 소개장을 쓰기 위해 잠시 자리를 떴다.

소개장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소개

를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 다.

슈앙에겐 크레인 공왕에게 하사 받 은 비밀감찰관 도장이 있었다.

슈앙은 도장을 쓰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서랍을 열었다. 그러 곤 서랍 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얇은 봉을 끼워 넣어 서랍 바닥을 들췄 다.

서랍 바닥 밑은 이중 공간으로 이 루어져 있어서 도장을 숨겨 놓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슈앙은 도장과 종이를 꺼내어 소개 장을 작성했다.

쥬리안에 있는 해군에 ‘공왕 전하 의 뜻을 품은 자들이 도착할 터이니 작전수행을 위해 배 한 척을 위장하 라’는 내용을 적었다.

작성한 소개장에 도장을 찍고 강현 에게 전해 주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문득 과도한 충성심이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공왕 전하의 이름으로 작전을 수 행해야 하는데 공왕 전하께 안 알려 도 되나?”

강현이야 기밀 유지를 위해 정체를 알리지 말라 했지만 공왕 전하한테 까지 비밀로 하는 것은 충심에 위배 된다.

그러니 슬쩍 전달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무려 공왕 전하의 이름으로 수행하

는 작전인데 공왕 전하께 알리지 않 는 건 신하된 도리가 아니다.

이런 세세한 일을 전하라고 비밀감 찰관이란 감투를 주신 게 아니겠는 가.

쥬리안은 괜찮겠지란 생각으로 또 다른 서신을 작성했다.

최강현과 김혜림이 크레인 공국에 있다는 내용의 서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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