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빌로스 제국의 수도 샹데르의 황궁 안.
황궁 안의 제3별궁 복도에선 하얀 드레스를 입은 미녀가 꼿꼿한 자세 로 또각또각 걷는 중이었다.
미녀는 흑발과 대비되는 새하얀 피 부와 자연스럽게 올라간 눈꼬리,빠 져들 듯 선명한 벽안을 지니고 있었 다.
전체적으로 여우상의 인상이라 눈 웃음이 그녀의 최대 챠밍포인트였 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 라진 지는 꽤 오래되었다.
두 공작은 반역을 일으켜서 계속 남진하려고 하지,황궁에선 오크 평 원의 지지를 얻어 낸 드래코프가 세 력을 키우고 있지.
머리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 다.
침실로 들어간 에르델은 궁녀의 시 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하얀 천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래로 홀러내렸고,꽉 조인 코르셋 을 풀었다.
하늘거리는 흰색 네글리제로 갈아 입고 난 후에야 궁녀를 물렸다.
“목욕은 됐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 나렴.”
“네,편히 쉬십시오,황녀님.”
궁녀는 양초에 불을 붙여 주고 고 개를 조아리며 뒷걸음질로 조신하게 물러났다.
라벤더가 가미된 양초가 타오르면 서 침실 가득 그윽한 향이 퍼져 나 갔다.
밋밋하던 침실 공기에 라벤더 향이 입혀지며 꿉꿉하던 습기가 일부나마 가시는 듯했다.
에르델은 은은한 불빛을 등지며 쓰 러지듯 침대에 몸을 던졌다.
“아? 다리가 노골노골 녹네. 이게 며칠만의 휴식인지.”
현재 내전은 동부 전선과 서부 전 선으로 나뉘어 박빙을 이루고 있었 다.
서부 전선에선 그란데 백작과 벨런 이 있는데다,오크 평원에서 다수의 오크들이 가세하면서 조금씩 북진 중이었다.
한편 동부 전선의 상황은 그리 좋 은 편이 아니었다.
몽발리 후작과 네베르 백작이 맡고 있는데 압둘과 카슈아딘에게 밀려 남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연일 동부 전선 승리를 위한 대책 회의와 피난민 구호 정책,다가올 겨울을 대비한 한파 대비 정책 등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 다.
지금에 와서도 황제는 모든 전권을
에르델에게 맡긴 채 방관하고 있고 말이다.
적어도 빌로스 제국 최후의 검이라 불리는 황제의 기사만 나서 줘도 한 결 편하련만.
그 외에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다.
오늘따라 유달리 그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그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이리 힘 들진 않을 텐데……
그 사람이라 하면 최강현밖에 더 있겠나.
얄미울 정도로 무심하지만 가끔씩 인간미를 보이며 사람 마음을 간지 럽히던 그 사람.
능력은 또 얼마나 좋은지 말만 꺼 냈다 하면 속 시원하게 해결책을 제 시했었다.
아쉬워해선 안 된다는 건 알고 있 다.
알고 있는데도 자꾸만 마음속에서 그의 모습이 선명해지는 걸 막을 수 가 없다.
차라리 알게 되지나 않았으면 좋았 으련만.
에르델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부 비부비 얼굴을 부비다가 침대에 걸 터 앉았다.
“아자아자 힘내자,에르델. 할 수 있어. 암암,할 수 있고말고. 여태까 지 잘해 왔잖아.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야.”
전신거울에 비치는 자기 자신에 대 고 활력을 불어넣는 에르델이었다.
피곤하니까 여러 잡생각이 드는 걸 거야. 내일도 바쁠 테니까 얼른 자 자.
사흘 동안 거의 잠도 못 잤는데 잠잘 시간 있을 때 자 둬야지.
에르델이 해파리 모양의 나이트캡 모자를 쓰며 이불에 들어가려는데 문밖에서 방문객이 왔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르델 황녀님. 임모벨 백작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
정치판에 복귀하길 한사코 거부하 던 임모벨 백작이었으나 에르델이 너무 혼자 고군분투하는 걸 보곤 스 스로 복귀를 선언했다.
빌로스 제국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 절을 보낸 탓에 눈에 띄는 공적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선대 황제의 장인인데다 오랜 기간 황궁에서 근무해 왔고,한때 제국의 미친개라 불렸던 자라는 걸 알 만한 자는 다 알고 있었기에 현재에 이르 러선 에르델을 든든하게 지탱해 주 고 있었다.
황녀 입장에선 가장 든든한 버팀목 이고,손녀 입장에선 자상한 할아버 지인 사람이 찾아왔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늦춰지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에르델은 임모벨 백작의 방문을 기 쁘게 받아들였다.
“들어오시라고 하렴.”
“네,황녀님.”
잠시 후,침실 문이 열리면서 임모 벨 백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임모벨 백작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 이며 예를 표했다.
“야심한 시각에 방문하는 실례를 범하게 되어 죄송합니다,황녀님.”
“문 닫으세요,임모벨 백작.”
“네.”
임모벨 백작이 문을 닫자 낡은 경 첩이 요란하게 울었다.
끼이이익! 투응!
“이제 됐어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할아버지.”
문이 닫히는 것을 경계 삼아 공적 인 자리에서 사적인 자리로 바뀌었 다.
임모벨 백작의 얼굴이 인자한 할아 버지의 인상으로 바뀌었다.
“몸은 어떻니? 최근 얼마 자지도 않았는데 너무 무리하진 말거라. 밥 도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고. 그러다 몸 상할라.”
“제 걱정만 마시고 할아버지도 몸 챙기세요. 더 이상 젊은 나이가 아 니잖아요.”
“허허,웬만한 젊은 놈들보다 팔팔 하니까 걱정 마려무나.”
“한잔하실래요? 남은 게 민트 줄렙 밖에 없긴 해도 나쁘진 않을 거예 요.”
“사양하마. 내 이리 오밤중에 찾아 온 건 다른 게 아니라 크레인 공국 에서 낭보를 전해 받아서 네게 알려 주러 온 거란다.”
“크레인 공국에서요?”
크레인 공국의 상황이 안 좋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빌로스 제국의 동부 전선보다 상황 이 더 안 좋으면 안 좋지,낫진 않 은 편이었다.
엘딘을 앞세운 공작군에게 밀리던 곳에서의 낭보라.
정말 낭보라 부를 만한 내용이었으
면 좋겠는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만큼 크게 기대를 하진 않았다.
헌데 기대 이상의 소식이 전해져 왔다.
“엘딘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더구 나.”
“하아,엘딘 그 작자가 문제이긴 하죠…….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 요? 엘딘을 제거했다고요?”
“데이낙스 백작이 직접 보내온 소 식이니 신빙성은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게다. 엘딘을 제거했고,조만간 반란을 일으킨 크레인 공국 남부 귀 족들을 정리하는데 성공하면 천공섬 탈환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라고 보내왔단다.”
“어떻게 엘딘을 제거했대요? 크레 인 공국에 그만한 전력이 있었던가 요?”
“크레인 공국에 무명의 마나마스터 가 가세해서 엘딘을 제거했다는군. 그거 때문에 공작파에서도 부랴부랴 사이런스를 동부 전선에서 빼내서 크레인 공국으로 보냈다고 하니 사 실이긴 사실인 것 같구나.”
“무명의 마나마스터라뇨. 엘딘을 제거할 정도의 실력자가 여태껏 무 명으로 지냈다니. 데이낙스 백작이 보내온 서신에 그 마나마스터에 대 한 내력도 적혀 있었어요?”
“그게 말이다. 워낙 바람 같은 성
격이라 잠깐만 도와주고 사라졌다는 데 이게 사실인지는 모르겠구나.”
에르델은 잠기운이 싹 달아나는 걸 느꼈다.
데이낙스 백작이 일부러 마나마스 터의 정체를 숨겨 주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가 일부러 그리할 이유가 없다.
마나마스터의 정체를 숨긴다고 해 서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데이낙스 백작이 내게 해를 입힐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하고 있기에 더더욱 그의 서신을 신뢰했 다.
진정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며 몸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는 자이다.
그렇다면 마나마나스터의 정체를 진심으로 알지 못한다는 뜻.
바람과 같은 성격을 지닌 무명의 마나마스터.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무명의 마나마스터에 대해 고찰하 던 와중에 에르델이 입을 열었다.
“엘딘을 제거할 정도의 실력자라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해요. 중립적인 성격이라면 더더욱요.”
“나도 같은 생각이란다. 공작파에 넘어갈 가능성이 아주 없다곤 할 수 없지.”
“크레인 공국에 사람을 보내야 하 긴 하는데 적임자가 없다는 게 걸림 돌이 되네요.”
“그러게 말이다. 이럴 때 벤젠 기 사단이 남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벤젠기사단을 떠올리니 미안한 감 정이 앞섰다.
동부 전선을 지키려고 몸 바쳐 싸 우던 자들이자,그 사람이 남긴 유 일한 흔적이나 다름없는 기사단이었 다.
드래코프 암살미수죄로 사형 선고 를 받는 내내 그들을 지켜 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라면 지켜 내지 않았을까 싶다.
그 사람이 있었다면…….
에르델은 각오를 다지며 임모벨 백 작을 똑바로 응시했다.
“할아버지. 어려운 부탁인 건 알지 만 이번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네가 하는 부탁에 어려운 부탁이 란 건 없단다. 얼마든지 이 할애비 의 손을 빌리려무나.”
임모벨 백작도 에르델이 무엇을 부 탁하려는지 아는 눈치였다.
에르델은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잡으며 황녀로서 명령을 내렸다.
“크레인 공국으로 가서 마나마스터 를 섭외해 주세요. 그리고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 주세요.”
임모벨 백작은 손녀의 부르튼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명을 받들 었다.
“어떤 자인지 몰라도 반드시 설득
해 보이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살 아서 돌아오겠습니다.”
*
크레인 공국 서부 지역의 베니스 남작령.
원래 가지고 있던 백작령은 몰수당 했고,작위가 강등되면서 서부의 벽 지로 내몰렸다.
영지 내에서 그나마 볼만한 거라곤 언덕 위의 풍차와 점심 잔반이란 이 름의 저녁 찬거리를 노리는 길고양 이가 고작인 시골이었다.
한때 공국 최고의 권세를 누렸던 가문이라는 배경을 감안하면 완전히 몰락했다고 볼 수 있었다.
베니스 백작이 국정농단의 죄를 짊 어지고 유배당하면서 실질적으로 나 탈리아가 가문을 관리하는 중이었 다.
이 외모 지상주의에 찌든데다 야심 에 가득 찬 여자가 시골 생활에 만 족할 리가 없었다.
“망할 소똥 냄새! 내 저택에 냄새 풍기게 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는 데 시정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허허,아가씨.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곳 영지민들의 9할이 농가입니다. 소가 없으면 일을 하지 못하지요.”
“명령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어딜 웃고 나자빠졌어? 해고야 해고! 슈앙,너 해고라고!”
“허허허,아가씨. 제가 나가면 누가 아가씨를 돌보겠습니까? 갈 곳 없는 늙은이 살리는 셈치고 계속 고용해 주시지요.”
“병사들을 파견해! 소를 죽여! 먹 을 게 없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소를 먹으란 말야!”
“허허허허,아가씨. 소가 없으면 밭 일은 누가 합니까? 여자가 너무 괄 괄대면 못씁니다. 어디 한번 소라도 키워 보실는지요? 그 크고 무지한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아가씨도 한 결 성격이 차분해지실 겁니다.”
“아 정말! 내가 무슨 소를 키우냐 고! 제발 사람 말 좀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화병이 돋아 앓 아누울 지경이었다.
이놈의 집사는 뭔 말을 해도 허허 웃으며 넘겨 버리는데다,하녀는 조 금만 다그치면 스트레스 받아서 화 장실로 도망가 버리지,병사들은 영 주민과 친분이 두터워 영주민을 해 치는 명령은 들어먹질 않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영지 였다.
나탈리아는 펄펄 끓는 냄비마냥 집 사 슈앙에게 역정을 냈다.
“아,됐어! 가서 차나 끓여 와. 종 이랑 잉크도.”
“네,아가씨. 나쁜 성질머리가 가라 앉도록 라벤더 티를 내오겠습니다.”
“역시 너 해고야! 당장 나가! 제발 좀 나가!”
“허허허,절 해고하면 누가 라벤더 티를 타 오겠습니까?”
웃으면서 주방으로 가는 슈앙을 두 고 나탈리아는 가슴을 퍽퍽 두드렸 다.
어후,내가 이러다 제 명에 못 죽 지.
뭐 됐어. 언제까지고 이러고 살 줄 알아? 나한테도 다 방법이 있다고.
디벨롭 대신 손잡은 그 남자와의 거래만 잘 풀리면 실권을 잡는 것도 꿈은 아냐.
나탈리아는 세상 불만 다 짊어진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한데 집무실엔 먼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사내가 나탈 리아에게 무뚝뚝한 어투로 말을 건 넸다.
“시골 생활이 제법 어울리는군.”
침입자를 의식한 나탈리아가 입을 크게 벌리고 사람을 부르려고 했다. 부를 사람이라고 해 봤자 못 미덥 기 짝이 없는 슈앙뿐이지만 일단 있 는 게 그 노인네뿐이라 달리 선택지 가 없었다.
아래에서 호랑이가 올라오는데 썩 은 동아줄밖에 없다면 그 썩은 동아 줄이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순간,사내가 깊숙하게 눌러쓰 고 있던 로브 후드를 뒤로 젖혔다. 사내의 얼굴을 목격한 순간,나탈 리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네,네,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저,저리 가 악마 자식아!”
베니스 백작가 몰락의 발단이나 다 름없으며,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놀 았던 최악의 원수.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최강현이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애당초 이 작자 행방불명 된 거 아니었어?
아 진짜! 미치겠네!
때마침 슈앙이 티 세트를 올린 쟁
반을 들고 나탈리아의 집무실에 들 어섰다.
나탈리아는 썩은 동아줄이나마 도 착해 준 걸 감사히 여겼다.
“슈앙! 빨리 가서 병사를 불러!”
슈앙은 나탈리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면장갑을 낀 손으로 이 마를 쳤다.
“아차차! 손님을 들인 걸 깜빡했군 요. 가서 차를 더 타 오겠습니다.”
야!
손님 아니라고!
손님 아니란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