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아니, 사람이 말이야 아무리 대단 해도 정도라는 게 있잖아.
안 그래?
무리일지 아닐지 두고 보라길래 뭔 가 있긴 있겠다 싶었지.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게 혹시 모 르는 법이잖아.
나야 위험하지나 않을까,우리가 지원해서 양동작전을 펼치면 조금은 쉽지 않을까 그 생각으로 여기 왔 지.
근데 막상 도착하니까 다 끝나 있 네?
무려 엘딘을
상대로 말이야!
용의주도하기가 쥐새끼 쥐덫 지나 듯 하고,온갖 악랄한 짓은 다 하는 데다,언데드 군단과 공작군 병력까 지 부리는 작자야.
우리가 그놈 하나한테 얼마나 휘둘 렸는지 알아?
근데 혼자서 적진으로 들어가선 전 부 몰살시켜 버리네.
이게 사람이냐고. 괴물이지.
데이낙스 백작은 무슨 반응을 보여 야 할지 몰라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 거렸다.
“아…… 아……
그에 대고 강현이 시체 더미 위에 서 검지를 들었다. 그러곤 로브 후 드 아래로 슬며시 드러난 코와 입가 중앙에 검지를 대었다.
신분이 밝혀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는 신호였다.
데이낙스 백작은 정신을 번쩍 차리 며 주위 반응을 살폈다.
크레인군 기사들이 아는 거라곤 데 이낙스 백작의 은인이자 마나마스터 가 홀로 적진에 쳐들어갔다는 사실 뿐이었다.
크레인군 기사들이 엘딘의 진지를 쑥대밭으로 만든 자의 정체를 궁금 해했다.
“배,백작님 저 사람…… 아,저분 은 누구십니까? 정말로 저분 혼자 엘딘의 진지를 초토화시킨 겁니까?”
“크레인 왕국 사람입니까? 아니면
에르델 황녀님이 보내 주신 분?”
“백작님? 백작님! 가서 인사라도 드려야 하는 게 아닌지요?”
마나마스터는 적이 되었을 땐 두려 운 존재이지만 아군일 땐 한없이 존 경스러운 존재다.
크레인군 기사들이 인사를 하고 싶 어 하나둘 시체 더미 위로 발을 옮 겼다.
데이낙스 백작은 강현의 존재를 숨 겨야 하는 입장이기에 기사들의 행 동을 제지했다.
“기다리게! 그에게 다가가지 말 게!”
“네? 혹시 말씀하셨던 분이 저분이 아닌 겁니까?”
“마,맞긴 하네만 그래도 기다리게. 나와 친분이 있어 이번만 날 도와준 것이니 깊이 관여하지 말게. 갈 길 가도록 놔두게.”
“그럴 수가! 저리 뛰어난 실력자를 그냥 보내야 한다니……. 하다못해 인사라도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감사의 인사는 충분히 전해졌을 걸세. 자자,그보다 뒷수습이 먼저일 세. 놈들은 진지를 버리고 도망갔네. 병력의 절반은 진지 안에 남은 물자 를 확보하고,나머지 절반은 패잔병 들을 추격하게나.”
진지 안에는 상당량의 물자가 보관 되어 있었다.
겨울이 되면 아예 철수를 하거나
중간 거점을 만들어 보급소로 활용 하는데,엘딘은 후자를 택한 모양이 었다.
고산등반이나 남극탐사 등에서 중 간 캠프를 만들듯,황무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점점 견고하게 다져서 보 급소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었다.
인근 마을을 습격하여 과하다 싶을 정도로 건축자재들을 공수해 온 것 도 장작 확보 겸 진지 공사를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데이낙스 백작의 지휘 하에 크레인 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사이 데이낙스 백작은 시체 더미 위의 강현과 사인을 나눴다.
강현이 입에 대었던 검지로 서쪽을
가리키며 새로운 신호를 보냈다.
진지 서쪽에서 따로 보자는 의미였 다.
데이낙스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진지 서쪽으로 빠져나갔 다.
진지 서쪽에 위치한 황무지.
공작군 진지가 있던 곳과 마찬가지 로 사방이 탁 트여 있지만 다른 점 이 있다면 버섯 바위가 곳곳에 존재 한다는 점이었다.
밤이 깊어 어두운 가운데 어느 버 섯바위 아래에서 강현과 데이낙스 백작이 따로 자리를 가졌다.
데이낙스 백작은 미리 도착하여 대
기 중인 강현에게 다가서며 여분의 파이프를 건넸다.
“한 대 피겠나?”
“괜찮습니다.”
“아,자네 담배 안 피웠었지. 잊고 있었군.”
“약속대로 엘딘을 정리했습니다.”
“힘들진 않았나?”
“힘들어 보입니까?”
“그리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잖 나. 걱정하는 척이라도 하게 해 주 면 안 되나?”
“엘딘을 처리했지만 할 일이 많으 실 겁니다. 크레인 남부 귀족들의 대다수가 반역을 일으켰다면 숫자가 그리 적진 않을 테지요.”
“틀린 말은 아니네만 자네 덕에 숨 통이 트인 것 또한 사실이지. 자네 에겐 몇 번을 감사해도 모자라네.”
“감사의 표현은 로산을 찾는 걸로 대신해 주시면 됩니다.”
“여유가 생겼으니 병력 일부를 돌 려서 조사단을 편성하겠네. 그렇다 곤 해도 로드의 협곡에서부터 조사 를 시작해야 해서 얼마간 시간이 걸 릴 걸세. 그동안 자네는 어떻게 움 직일 생각인가?”
데이낙스 백작의 말투 속에 은근한 기대심이 섞여 있었다.
마음 같아선 로산의 행방을 찾을 때까지만이라도 강현이 부대에 남아 협력을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강현만 있다면 크레인 공국 남부 귀족들을 정리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테니까.
그러나 강현으로선 크레인 공국의 조사단만 믿고 마냥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노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 편이라 서 말입니다. 따로 움직이며 로산의 행방을 찾아볼까 합니다.”
“남부 귀족들을 상대하는 게 노는 거라 말할 수 있는 그 여유가 부럽 군. 여유라고 하면 실례가 되려나. 자네도 편하게 지내진 않았을 테지. 그래서 어디로 갈 생각인가?”
“베니스 백작가가 몰락하셨다고 하
셨는데 얼마나 몰락했습니까? 아예 가문 자체를 멸문시켰습니까?”
“현 공왕께서 조카의 편의를 봐주 느라 작위 몰수까진 가지 않았네. 베니스 백작을 유배 보내고 재산과 영지 대부분을 몰수,그리고 작위를 남작까지 강등시켰다네. 지금은 나 탈리아가 서부 지방의 고향으로 내 려가 직접 가문을 돌보고 있다고 들 었네.”
“베니스 백작만 유배를 가고 나탈 리아는 그대로 놔뒀습니까?”
“나라고 나탈리아가 암중 실세였음 을 왜 모르겠나. 하지만 그녀를 처 벌할 증거가 없었다네. 만약을 대비 해서 모든 일처리를 베니스 백작의 이름으로 해 놨더군. 그래도 모든 세력과 실권을 잃었으니 그녀가 고 향 바깥으로 나올 일은 없을 걸세.”
“베니스 백작……. 이젠 베니스 남 작이군요. 전 베니스 남작가로 가서 커뮤니티의 흔적이 있는지 알아보겠 습니다.”
디벨롭 이후에 선정된 차원관리자 도 나탈리아와 손을 잡았을 가능성 이 높다.
나탈리아는 몰락해 가는 가문을 지 탱하기 위해 조직의 힘이 필요했고, 조직은 로드의 협곡 출입을 통제하 기 위한 가이아 대륙 현지 세력이 필요했으니까.
나탈리아를 찾아가면 커뮤니티의
차원관리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커뮤니티의 장로회 회의록에 의하 면 프로젝트 시행자는 차원관리자와 함께 작전을 펼치기로 되어 있었다. 지금쯤 커뮤니티의 차원관리자와 로산은 함께 행동하고 있을 거다.
즉 결과적으로는 차원관리자의 행 방이 곧 로산의 행방이라고 볼 수 있다.
데이낙스 백작은 강현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춰 주기로 했다.
“뭔가 알아내면 사람을 보내겠네. 혹시 연락이 닿지 않으면 가까운 라 벤더 상단에 봉인의 썰을 붙인 서신 을 넣어 두겠네.”
그러면서 데이낙스 백작이 개방의 썰을 건네주었다.
“나와 공왕 전하 사이에서만 쓰는 개방의 썰일세. 고유번호가 같은 봉 인의 썰을 쓸 테니 정보유출의 걱정 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걸세.”
강현은 개방의 썰을 받아 모양을 똑똑히 기억한 후에 아공간 주머니 로 넣었다. 그러곤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며 아무것도 없는 허 공에 대고 말을 건넸다.
“들었지? 서쪽으로 간다.”
그러자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날아서 갈 거예요?”
“물론.”
“카모플라쥬 걸게요.”
허공에서 녹색빛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곧 강현의 모습마저 사 라졌다.
동시에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며 데 이낙스 백작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데이낙스 백작은 정말로 사라진 건 가 싶어 강현이 있던 자리에 손을 내밀어 보았다.
혼자서 허우적거리며 헛손질을 하 다가 정말 없어진 걸 확인하곤 멋쩍 게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정말 여러 번 놀라는군.”
*
빌토르 백작가 소속 제2기사단 단
장 프라임.
그는 부하 기사를 죽인 자를 찾아 제5해저동굴 근처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오래토록 탐색을 펼쳤건만 흔적은커녕 실마리조차 잡지 못해 애만 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단서 를 얻게 되었다.
제5해저동굴에는 전쟁통에 피난 온 자들이 그대로 눌러앉으면서 노숙자 생활을 하는 자가 많았다.
단서는 그들에게서부터 나왔다.
피난민들이 말하길 제5해저동굴 입 구 근처에 몇 명의 사람들이 서성거 리더니 비행 몬스터를 타고 날아가 버렸다고 했다.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북쪽으로 날 아간 것만은 확실하다 했다.
범인을 쫓아 북쪽으로 추격길에 나 선 프라임은 구름다리 근처에서 달 갑지 않은 인물과 마주쳤다.
투 블록에 금발을 옆으로 넘긴 헤 어스타일,기미가 하도 심하여 남자 면서 분을 칠하여 목과 얼굴의 피부 색 대비가 선명한 30대 중반의 남 성.
드리안 공작가 소속의 사이런스란 자였다.
“빌토르 백작가 제2기사단 단장 프 라임. 사이런스 단장님께 인사 올립 니다.”
백작가의 기사단장이든 공작가의
기사단장이든 소속과 위상만 다르지 직위상으론 똑같은 위치였다.
공작가의 기사단장이라 해서 깍듯 이 예의를 차릴 것까진 없긴 하다. 하나 사이런스는 권위적인 성격이 라 불같이 화를 냈다.
정작 본인은 알콜중독자에 뒷담화 로 사람 관계를 비트는 성격파탄자 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에게 일침을 가하지 못한다.
그가 바로 공작군 최고의 실력자이 기 때문이다.
사이런스는 손톱 끝을 끌로 다듬다 가 입김을 후 불며 게슴츠레 눈을 떴다.
“에그머니나,프라임이네. 어쩌다 여기까지 왔니?”
저 여성스러운 목소리를 들을 때마 다 소름이 짝악 끼친다.
정상적으로 이성을 좋아하며,딱히 남자에게 호감을 품는 타입도 아니 다.
그런데도 저리 호르몬이 재가공된 듯한 행동을 취한다.
본인 말로는 메트로섹슈얼이라는데 솔직히 특이한 취향을 가진 자 같 다.
프라임은 두드러기가 날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제5해저터널 쪽에서 제 부하가 죽
었기에 그 범인을 쫓고 있습니다.”
“후방부대는 죽은 부하 원수 갚을 여유도 있고 좋겠어? 나야 하도 이 래저래 할 일이 많다 보니까 잠잘 시간도 없더라고. 여기 피부 일어난 것 좀 봐.”
“아,네. 제가 바빠서 그런데 나중 에 따로 시간 되면 인사드리겠습니 다.”
“얘가 왜 이리 급하게 구니? 그거 들었어? 크레인 공국에서 새로운 마 나마스터 가 나타났다더 라고.”
“새로운 마나마스터? 크레인 공국 에 마나마스터를 확보할 여유가 있 었던가요?”
“엘딘이 죽었다더라. 우후후,시체
냄새 나는 못난이라 싫었는데 쌤통 이다. 그치?”
“아…… 뭐……
“크레인 공국 놈들이 남쪽으로 내 려오게 놔둘 순 없으니까 나 보고 가서 상대하라더라고. 조금 있으면 겨울인데 추운데서 몸 상할까 몰라. 아무튼 재밌는 얘기를 들었는데 천 공섬 초소에서 누가 날아서 천공섬 을 지나쳤다는 거야.”
비행을 통해 천공섬을 지나쳤다는 말에 프라임은 안색을 달리했다.
제5해저터널에서 천공섬, 그리고 크레인 공국 남부까지.
모든 경로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자신의 부하를 죽인 범인과 크레인 공국에 나타났다는 정체불명의 마나 마스터가 동일 인물인 것 같았다. 상대가 마나마스터라면 프라임으로 선 할 일이 없다.
역으로 썰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이번 건은 사 이런스에게 맡기는 게 나아 보였다. 그런데 사이런스가 추가 정보를 내 놓았다.
“날아가던 무리가 4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2명은 크레인 공국으로 안 넘어가고 서쪽 해안 군도 방향으로 갔다더라고.”
“그걸 왜 저에게 말씀하시는지?”
“에잉,이리 눈치가 없어서 되겠
어? 갑자기 나타난 미스터 정체불명 씨가 나쁜 생각을 하고 보낸 걸 수 도 있잖아. 잡아 두면 인질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안 그래?”
사이런스의 말에 프라임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길,나한테 깜 처리 시키려고 불러 세운 거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