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화
공작군 기사들로선 미치고 팔짝 될 노릇이었다.
겁대가리도 없이 혼자 적진 한복판 에 들어오는 미친놈이 몇이나 되겠 는가.
마나유저 상급이 십수 명에,수천 명의 병력,그리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진 않지만 엘딘까지 있는 곳이다. 그래서 엘딘을 제거하려고 보낸 버 리는 말이겠거니 여겼다.
그런데 까고 보니 마나마스터네?
크레인군에 마나마스터가 없는 건 자명한 일인데 이놈은 어디서 솟아 난 거지?
아니,설사 크레인군이 새로운 마 나마스터를 얻었다 한들 덜렁 마나 마스터 한 명만 투입할 이유가 있 나?
기사들이 겁을 먹을 지경인데 병사 들이라고 멀쩡하겠는가.
병사들은 찔끔찔끔 뒤꿈치를 질질 끌며 뒤로 물러났다.
“저,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나마스터가 상대라면 저흰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테니 뒤로 물러나는 게……
마나마스터를 상대로 병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화살받이 역할이 고작이다.
화살받이 역할로 소모되는 게 싫어
서 허울 좋은 소리로 물러나려는 것 이었다.
그걸 모를 기사들이 아니었다.
마나마스터를 앞두고 누군들 전방 을 맡고 싶겠나!
먼저 튀어나간 놈이 먼저 뒤진다는 건 너희들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된단 말이다!
기사들은 불호령을 떨어뜨리며 병 사들을 다그쳤다.
상관의 명령인데 아랫것들이 거부 할 수나 있겠는가.
민간인을 해치고,흑마법사를 지휘 관으로 두는 군대에서 병사들이라고 편의를 봐줄 쏘냐.
병사들은 떠밀리듯 억지로 돌진했
다.
“도,돌격!”
“와아아아!”
밀물처럼 몰려드는 병사들을 상대 로 강현은 마실이라도 나온 양 여유 롭기만 했다.
개미 떼가 부산을 떤다고 겁에 질 리는 사람이 있던가?
개미 떼는 제 집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우기라도 한다.
하지만 저 병사들은 다르다.
싸우기 싫은 걸 억지로 싸우게 하 는 건데 전의가 생길 리 없다. 달려드는 병사들의 몰골은 흡사 편 식이 심한 아이의 모습 같았다. 강자는 싫고 약자만 좋아하는 소인배 특유의 편식 말이다.
강현은 몽환검을 당기며 투영 스킬 을 발동하려 했다.
그러나 금세 스킬 시전을 중단하며 공격방식을 바꾸었다.
‘실수할 뻔했군. 항상 효율 중시 전투만 하다 보니 쓸어버릴 수 있을 땐 쓸어버리게 된단 말이지.’
엘딘을 끌어내려면 재차 흑마법을 쓰게 만들어야 한다.
너무 압도적인 힘을 발휘해 버리면 놈이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 버릴 게 아닌가.
강현은 적당히 호각으로 보이도록 위장하기 위해서 투영 스킬 대신 몽 환검의 효과를 발동했다.
‘환영검 소환.’
강현의 몸 주변으로 환영검이 20 개가량 소환되었다.
물론 위력을 마나마스터 수준으로 하향 조정했다.
소환된 환영검은 강현의 지휘에 따 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휘이엉! 휘잉! 휘잉!
일개 병사에게 마나 블레이드와 동 일한 위력을 지닌 환영검을 막을 재 주는 없었다.
환영검의 날은 창과 갑옷을 종잇장 처럼 찢어발기며 병사들을 베어 넘 겼다.
강현이 몽환검을 지휘봉 삼아 휘두 를 때마다 환영검이 죽음의 선율을 그렸다.
병사들은 스스로를 위한 진혼곡을 본인 목청껏 내질렀다.
“크아아아!”
“으으옥!”
피는 위로 솟구치는데 육체는 아래 로 쓰러진다.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병사들 사이 에서 스켈레톤들이 빠져나오며 단숨 에 강현과 거리를 좁혔다.
스켈레톤 뒤에는 아직도 기사들이 망부석마냥 대기 중이었다.
절호의 기회가 올 때까지 몸을 사 리겠다는 심보였다.
스켈레톤이라 해 봤자 다를 게 뭐 가 있겠는가.
마기의 힘을 빌어 일반 병사들보다 힘이 더 강한 점?
언데드라 주인의 명에 복종하며 감 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점?
머리를 부수지 않으면 금방 재생한 다는 점?
그 어느 것도 강현에겐 문제되지 않는다.
한 방에 골로 보내 버릴 것이기에.
휘잉! 휘잉! 휘이잉!
스켈레톤들은 전투에 가세하는 족 족 일반 병사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피와 살이 흩날 리느냐,뻣조각이 흩날리느냐의 차 이뿐이었다.
이대로 스켈레톤과 일반 병사들을 계속 쓸어버려선 호각의 느낌이 살 지 않지.
좀 더 수위를 낮춰 줘야겠군.
수준 차이 나는 자들에게 맞춰 주 는 것도 일이란 말이지.
강현은 차츰차츰 환영검의 개수를 줄였다.
전투가 이어질수록 힘이 소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말 이다.
*
크레인 공국으로 진격한 공작군의 핵심 부대.
그를 이끄는 엘딘은 공작군 진지 바로 밑인 지하에서 모든 상황을 지 켜보고 있었다.
마법으로 땅을 파서 지하에 자신만 의 방공호를 만들고,흑마법을 걸어 종으로 만든 까마귀의 눈을 통해 지 상의 상황을 낱낱이 파악하는 중이 었다.
현재 상황은 일반 병사가 3할가량 줄었고,스켈레톤은 절반 이상 줄었 다.
침입자를 앞둔 엘딘의 판단은 매우 간결했다.
‘마나마스터치곤 평범한데? 능력은 처음에 내 분신을 공격한 투영검과 검의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게 고작인 것 같고,그마저도 점점 힘이 딸려 서 약해지고 있군. 쯧쯧, 투영검이 일격필살의 기술이었던 것 같은데 내 분신이나 없애는데 그쳤으니 밑 천이 떨어질 만도 하지.’
투영검에 의해 분쇄된 분신으로 말 할 것 같으면 흑마법의 일종인 ‘케 미 마리오네트’로 만든 분신이었다. 자신의 모습과 같은 나무토막으로 분신을 만드는 흑마법으로,분신은 원격조종이 가능하며 시전자의 능력 일부를 사용할 수 있었다.
분신을 만들려면 나무토막을 정교 하게 깎아서 시전자의 모습과 최대 한 비슷하게 만들어야 한다.
거기다 염소의 피와 질 좋은 황토
를 써야 해서 여간 만들기 힘든 게 아니었다.
말이 마법이지 거의 주술에 가까운 과정을 거친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재료가 준비되지 않은 지금 으로선 새로운 분신을 대타로 내세 울 수 없었다.
‘처음에 놈이 소환했던 환영검이
20개. 지금은 10개가 남았으니 절반 이 줄어든 셈이군. 놈도 슬슬 도망 갈 기미를 보이고 있고 하니 데스나 이트를 내보내 볼까?’
엘딘이 만든 언데드 병사 중에선 데스나이트가 가장 강력한 병사였 다.
데스나이트를 만들려면 최소 마나
유저 중급 이상이었던 자의 시체, 그중에서도 죽은 지 며칠 안 된 시 체가 필요했다.
시체의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엘 딘도 기껏해야 10구밖에 없었다.
크레인 공국의 수도까지 진격해야 하는 걸 감안하여 최대한 아꼈지만 지금이라면 써도 될 것 같았다.
엘딘은 창고에 숨겨 두었던 데스나 이트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다.
‘출격해라,나의 충실한 기사들아. 날 암살하러 온 쓰레기에게 격의 차 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거라.’ 명령을 받은 데스나이트들이 간이 창고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데스나이트들이 올라타 있는 목이
없는 말 ‘듀라홀’의 울음소리가 전 장 가득 울려 퍼졌다.
“히이이엉!”
“히이이! 푸르르!”
듀라홀은 투레질을 하며 침입자에 게 쇄도했다.
환영검에 휩쓸리며 죽어 가던 병사 들의 머리 위로 목 없는 말이 번쩍 뛰어올랐다.
데스나이트들은 침입자가 날린 환 영검을 머리 숙여 피하면서 검을 높 이 들었다.
듀라홀이 침입자의 코앞에 착지함 과 동시에 데스나이트가 검을 무자 비하게 내리쳤다.
후우응!
가장 먼저 침입자에게 접근한 데스 나이트의 검에 마나 블레이드가 깃 들었다.
최근에 죽었다던 크레인 공국의 마 지막 마나마스터.
그의 시체로 만든 데스나이트였던 것이다.
침입자로선 바스타드 소드를 가로 로 뉘여 겨우겨우 데스나이트의 검 을 막아 냈다.
뒤이어 다른 데스나이트들까지 합 류하여 한꺼번에 침입자를 몰아붙였 다.
제아무리 마나마스터라 한들 데스 나이트들의 파상공세를 어찌 막으 라.
침입자의 자세가 점점 수비 일변도 로 변하더니 환영검을 조종하는 것 에도 애를 먹기 시작했다.
‘승기가 이쪽으로 기울었군. 여기 서 스켈레톤만 조금 더 투입하면 확 실하게 끝장낼 수 있을 테지.’
데스나이트들만으로도 상대할 수 있겠지만 혹시라도 부서지면 곤란하 다.
데스나이트 같은 고급 전력의 안전 을 확보하기 위해 스켈레톤들을 추 가 투입하기로 했다.
침입자가 공작군 병사들을 베어 준 덕분에 시체가 많이 생겼다.
한때 아군이었던 자들이라지만 시 체에 아군 적군이 어디 있는가.
어차피 다 똑같은 언데드 재료인 것을.
성가신 게 있다면 언데드를 만들 때만큼은 직접 마기를 부여해야 한 다는 점이었다.
분신이 있었다면 대신 시켰겠지만, 침입자 놈이 분신을 부숴 버려서 직 접 지상으로 나가야 한다.
‘조만간 끝나겠군. 지금이라면 나 가도 상관없겠지. 방어하기도 바쁜 놈이 나를 본다고 별수 있겠어? 후 딱 스켈레톤 만들어서 끝장내 버리 고 협곡으로 진격해야겠군.’
새로이 합류한 마나마스터가 허무 하게 죽었다는 걸 알면 크레인군의 사기는 더욱더 떨어질 터.
크레인군이 덜떨어진 판단을 해 준 덕에 일이 더욱 쉬워졌다.
엘딘은 마법으로 출구를 뚫고 지상 으로 기어 나왔다.
침입자가 얼마나 병사들을 베어 냈 으면 엘딘이 있는 지점까지 시체가 엎어져 있었다.
멍청해도 마나마스터는 마나마스터 라는 거군.
나야 멀리까지 안 가도 되니 더 편해진 셈인가.
엘딘은 가까이에 있는 시체부터 차 례차례 스켈레톤을 일으키려고 했 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이루어지지 않 았다.
상공에서 날아든 화살 한 발이 엘 딘의 미간을 꿰뚫었기에.
투퍽!
조만간 끝나겠다는 엘딘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다만 끝나는 쪽이 엘딘 본인이었다 는 것만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더불어 김혜림은 선언대로 엘딘의 머리에 새로운 뿔을 달아 주었다. 화살이란 이름의 뿔을 말이다.
엘딘이 사망하면서 그가 부리던 데 스나이트며 스켈레톤 들이 실 끊어 진 마리오네트마냥 힘을 잃고 무너 져 내렸다.
와르르르!
스켈레톤을 이루고 있던 뼈와 데스
나이트를 이루고 있던 갑옷덩어리가 모래성처럼 무너지면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엘딘의 죽음으로 그의 마기가 주인 을 잃고 증발하는 것이었다.
공작군 기사들은 언데드 병사들의 죽음에서 엘딘이 죽었음을 알아차렸 다.
엘딘의 죽음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선사했다.
“언데드 병사들이 죽어? 설마 엘딘 님께 무슨 변고가 생긴 건가?”
“에,엘딘 님이 쓰러지셨어! 엘딘 님! 엘딘 님!”
“이미 늦었어! 엘딘 님이 돌아가셨 다! 다시 한 번 알린다! 엘딘 님이 돌아가셨다!”
엘딘이 죽었다는 게 확실시 되면서 공작군 진지가 크게 술렁거렸다. 기사들은 최고 지휘관이 죽은 자리 를 대신하기 위해 재빨리 수습에 나 서고자 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수습 방법은 침입자를 제거하는 것이었 다.
침입자만 제거하면 병사들의 사기 가 다시 크게 치솟을 것이며,드리 안 공작가에서 새롭게 마나마스터를 파견할 때까지 버틸 기력을 얻게 될 것이다.
침입자의 실력은 대단하지만 지쳐 있는 지금이라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며 기사들이 공격에 나 서려던 찰나.
지친 것으로 추정되던 침입자가 별 안간 환영검 20개를 추가로 소환하 며 입을 열었다.
“이젠 봐줄 필요 없겠군.”
방금 뭐라고 그랬지?
여태까지 봐준 거라고?
그게?
미친! 봐준 게 이 정도라니!
야,이 자식아! 봐준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마나마스터보다 더 강하겠 다!
추가로 소환되어 날아드는 환영검 을 앞에 두고 기사들은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다.
*
“속도를 높여라! 지금이라면 아직 전투 전에 합류할 수 있을 거다! 뒤 처진 자는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도 착하는 것만 신경 써라!”
강현이 떠난 직후,데이낙스 백작 은 심사숙고 끝에 결단을 내렸다. 협곡에서 병력을 빼는 것만큼은 해 선 안 되나 그것보다 강현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강현 홀로 엘딘이 있는 곳에 보내 선 안 된다.
혼자서 적진으로 쳐들어간 것에는
그만한 자신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다.
자신에게 크레인 공국을 바꿀 계기 를 만들어 준 자이자,에르델 황녀 의 은인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 다.
그래서 강현이 떠난 직후에 바로 병력을 꾸려 나온 데이낙스 백작이 었다.
헌데 한참을 달려도 강현을 발견할 수가 없다.
데이낙스 백작은 적진에 거의 다다 탔음에도 불구하고 강현이 보이지 않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 다.
‘빠른 말만 골라서 타고 왔는데 따
라잡지 못하다니.’
강현도 말을 타고 이동했다면 중간 에 마주칠 수 있을 줄 알았다.
데이낙스 백작이 소유한 하니온 산 종마보다 더 빠른 말은 없을 텐데 말이다.
벌써 저 멀리 황무지 한복판에 세 워진 공작군의 진지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이고 있었다.
벌써 전투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데이낙스 백작은 말 허리를 걷어차 며 박차를 가했다.
“이랴! 어서 가자! 어서 가서 그를 지원해야 한다! 절대로 그를 잃어선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라!”
땀을 뻘뻘 홀리며 달린 끝에 공작
군 진지에 도착했다.
데이낙스 백작은 무기를 높이 빼 들며 목청이 터져라 돌격 명령을 외 쳤다.
“돌격! 엘딘의 목을 딸 때까지 후 퇴는 없음을 명심해라! 우리에겐 돌 격뿐이다!”
“와아아아아!”
필사의 각오를 다지며 공작군 진지 로 들어갔다.
그렇게 요란법석을 떨며 입성을 했 는데……. 막상 들어가고 나니 분위 기가 이상했다.
공작군 진지는 온통 쑥대밭이 되어 있고, 보이는 거라면 공작군의 시체 뿐이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위엔 로브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내가 서 있었 고 말이다.
로브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내가 강현이라는 건 두말할 것도 없는 사 실이 었다.
그를 목격한 데이낙스 백작의 표정 이 바뀌었다.
각오에 찬 표정에서 벙찐 표정으로 말이다.
“엥? 벌써 끝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