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데이낙스 백작과의 대화 결과.
강현이 엘딘을 정리하면 그 즉시 로산 수색에 협조하는 걸로 합의를 봤다.
대화를 마무리한 강현은 아무도 없 는 등 뒤를 향해 검지를 튕겼다.
따악!
그러자 갑자기 강현의 몸에 녹색빛 이 둘러지며 주변 환경에 녹아들 듯 자취를 감추었다.
모습만이 아니라 인기척마저 사라 졌다.
처음부터 눈앞에 아무도 없었던 것 처럼 말이다.
데이낙스 백작은 귀신에 홀린듯 벙 찐 얼굴을 했다.
“안 그래도 괴물이었는데 못 보던 사이에 더 괴물이 되었군.”
*
전설급으로 업그레이드 된 카모를 라쥬는 이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용해졌다.
전설급이 되면서 존재감 희석 효과 와 시전자 한정 공,피격시 은신 유 지 효과가 추가되었다.
예전에는 기척을 죽이기 위해 무척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지만,지금 은 다소 큰 동작을 펼쳐도 상대가 기척을 느끼지 못한다.
즉 공격을 당할 때까지 그 누구 하나 존재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거다.
데이낙스 백작의 방에서 나온 강현 과 김혜림은 크레인 군 진영을 벗어 났다.
김혜림은 안개 낀 슈러프론 협곡을 나오는 동안에도 계속 카모플라쥬를 유지했다.
때문에 은신 상태에서 두 사람 간 에 대화가 오갔다.
“안 그래도 괴물인 사람이 더 괴물 같아졌다는데요?”
“괴물에서 더 괴물이 되어 봤자 괴 물인 건 마찬가지 아닌가?”
“다르죠. 그냥 동거랑,결혼해서 동 거하는 건 같은 동거인데도 다르잖 아요?”
“관에 들어가 있는 건 똑같은데 흙 을 덮느냐 마느냐 차이군.”
“같은 표현이라도 더 좋은 뜻이라 는 걸 말하고 싶었는데 그리 해석해 버리네요. 그나저나 바로 엘딘을 치 러 갈 거예요?”
“빨리 처리해야 로산을 추적할 수 있을 테지. 놈의 위치는 데이낙스 백작이 알려 줬으니 바로 처리하러 가자고.”
“그러고 보니 세이아나 언니랑 루 나는 어디로 간데요?”
“예전에 현자가 살던 집. 비밀의
서와 마도의 서를 만들 때 쓰인 스 킬북 용지의 출처가 신경 쓰이나 보 더군.”
“그래요? 뭐 혈영구슬이 있으니까 필요할 때 연락하면 되겠죠.”
일교차가 심하기에 밤이 된 지 얼 마 되지 않았는데도 기온이 급격하 게 떨어졌다.
낮 동안 열기를 한껏 머금은 바위 와 나무들이 차츰 식어 갔고,협곡 을 통해 빠져나온 북풍이 외로움을 타듯 사람의 소매 속으로 파고들었 다.
“어후,추워라. 여긴 완전히 겨울 날씨네요. 여기서 엘딘이 있는 공작 군 진지까진 얼마나 걸린대요?”
“말을 타고 가면 반나절 거리.”
“날아가면 1시간 내외로 도착할 수 있겠네요. 드림윙 쓸 거예요?”
“둘밖에 없는데 그럴 것까진 없지. 니아의 등에 같이 타고 가자고.”
강현과 김혜림은 로브 단추를 단단 히 걸어 잠그며 니아를 타고 날아올 탔다.
강현이 먼저 올라타고 뒤에 김혜림 이 탔는데 이때다 싶어 뒤에서 와락 끌어안는 김혜림이었다.
강현은 복부를 죄여 오는 강한 양 팔의 압박감을 느끼며 핀잔을 주었 다.
“그리 세게 안 잡아도 안 떨어져.”
“후후,뭐 어때요. 딱 붙어 있으면
서로 따뜻하고 좋죠.”
“말은 잘하는군.”
“출발? 어서 가요”
두 사람은 니아를 타고 날아올라 엘딘이 있는 남서쪽으로 기로를 잡 았다.
1시간 정도 전속력으로 상공을 질 주하다 보니 환한 불빛이 아른거리 는 공작군의 진지가 나타났다.
때 아닌 한파에 공작군 진지에선 많은 삼발대를 동원하여 모닥불을 지펴 놓고 있었다.
강현과 김혜림,니아는 카모플라쥬 가 걸려 있기에 대놓고 공작군 진지 상공을 날고 있어도 누구 하나 눈치 채지 못했다.
강현은 니아를 몰아 공작군 진지 내부에서도 불침번이 없는 장소에 착지했다.
니아를 소환석으로 되돌리고 엘딘 의 천막을 찾으려던 때.
진지 입구 쪽에서 애원 섞인 목소 리가 들려왔다.
“안 됩니다! 멀쩡한 집을 왜 부수 신단 말입니까?”
“차라리 저희에게 장작을 가져오라 고 하십시오! 장작이 필요해서 집을 부순다니! 일을 시켜도 좋으니 집만 은 부수지 말아 주십시오!”
“추운 겨울을 어찌 보내라고 집을 부수십니까? 아이들을……. 아이들을 봐서라도 제발 명을 거둬 주십시 오!”
진지 입구에서 마수레가 줄줄이 들 어오는 중이었다.
수레에는 오두막집의 편린으로 보 이는 갖은 나무기둥과 나무파편 따 위들이 실려 있었다.
대화의 내용으로 유추컨대 인근 마 을의 집을 부숴다가 장작을 조달하 고 있는 듯했다.
군대는 추위에 굉장히 민감하다.
한 명이 감기에 걸리면 해당 병사 가 포함된 십인대는 전부 감염된다 고 보면 된다.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추 위 속에서 자고 일어나면 컨디션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전투능력 이 급감한다.
그래서 날이 추워지면 최대한 열효 율을 높이기 위해 한 천막 안에 최 대한 많은 병사를 욱여넣고,뜨거운 숯을 넣은 화로만 덜렁 놓아둔다. 모닥불을 피우면 좋겠지만 화재 위 험이 있는데다 질식사의 위험도 감 안해야 한다.
그래서 천막 안에는 화로만 놔두고 천막 바깥에 최대한 많은 모닥불을 피워서 추위를 버텨 낸다.
강현은 진지가 세워진 곳이 황무지 한복판임을 확인했다.
‘장작을 구하지 못하니까 인근 마 을의 오두막집을 부숴서 장작을 조달하기 시작한 거군.’
오두막집 한 채면 거의 1천 명이 하룻밤을 날 수 있는 장작이 나온 다.
편하기야 할 테지만 명백히 군법에 위배되는 행위다.
가이아 대륙이든,원래 세계든 전 시 중엔 민간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건 금지되어 있다.
금지되어 있다 해서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핑곗거리를 대고 약탈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공작군은 대놓고 민간인의 집을 부숴 물자를 조달하고 있었다. 아니,상황은 단지 약탈에서 그치지 않았다.
별안간 강철 견갑이 달린 망토를 입은 자가 걸어 나오더니 차갑게 병 사들을 문책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을 위한 문책이 아니었다.
“거봐라,죽이지 않으니까 이리 와 서 시끄럽게 굴지 않느냐. 이래서 장작을 조달하면서 죽이라고 한 것 이거늘.”
“에,엘딘 님! 죄송합니다. 장작 조 달을 우선시하느라 그만……. 조만 간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당장 처리해라.”
엘딘이라 불린 자의 명령 한마디가 진지 입구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 다.
공작군 병사들은 애원하러 온 마을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고, 마을 사 람들의 정당한 요구는 쇳내 나는 창 날에 의해 묵살되었다.
엘딘은 마을 사람들이 죽는 족족 시체에 손을 뻗었다.
“신이 배려하고 인간이 살찌운 빈 껍데기여. 마계 7기둥 스랄스의 마 기에 힘입어 나의 충실한 해골병사 가 되어라.”
엘딘의 손에서 검은색 기운이 홀러 나와 시체마다 깃들었다.
흑마법사가 마족과의 계약을 통해 마족에게서 제공 받는다는 기운.
마기 였다.
엘딘의 마기가 시체에 깃들자 시체
의 살점이 녹아내렸다.
살점을 잃고 뼈만 남은 시체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시체의 뼈마디마다 머물러 있던 마 기들은 해골 병사들의 손에 모여들 어 강철처럼 단단한 본스피어나 본 소드가 되었다.
학살이 시작된 것을 본 강현은 몽 환검을 빼내 들어 마나를 부여했다.
‘장작 조달과 병력 조달을 동시에 하기 위한 약탈이었나. 못 봐주겠 군.’
역으로 생각하면 엘딘을 제거하기 엔 적기였다.
스켈레톤 군단 제조에 열중하고 있 다 보니 온통 빈틈투성이였다.
강현은 제자리에서 기본자세를 잡 으며 허공에 대고 몽환검을 내리쳤 다.
그와 함께 투영 스킬이 발동하면서 엘딘의 머리 위에 몽환검을 본뜬 투 영체가 생성되었다.
투영검은 몽환검과 동일한 움직임 을 취하며 아래로 떨어졌다.
강현의 공격력은 이미 가이아 대륙 의 수준으론 논할 수 없는 까마득한 경지에 이르러 있다.
현지인이라 테라 시스템이 없는 엘 딘이 어찌 해볼 단계가 아니었다. 투영검이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엘 딘의 몸을 일도양단했다.
서격!
쇠망치로 달걀을 힘껏 내리친 격이 다.
엘딘의 몸뚱이가 남아날 리 없었 다.
투영검이 엘딘의 몸을 산산조각 내 며 땅에 박혔다.
쿠우응!
강한 폭약이 터지면 충격으로 튀어 오른 파편에 의해 주변도 피해를 입 기 마련이다.
같은 맥락에서 엘딘뿐만 아니라 주 변에 있던 공작군 병사들도 공격에 휘말렸다.
“크아아악!”
“적의 야습이다! 종을 울려! 놈들 이 비겁하게 야습을 감행해 왔다!”
“젠장! 굼벵이 같은 놈들! 야습이 라는 말이 안 들리느냐! 불침번들은 소속 십인대를 깨워 야습 대응에 나 서라!”
개미집을 건드리면 개미들이 쏟아 져 나오듯 천막마다 병사들이 우르 르 뛰쳐나왔다.
한편 카모를라쥬 시전자가 아닌, 버프를 받은 자는 공격 시행 시에 카모플라쥬가 풀린다.
고로 강현은 엘딘을 베어 냄과 동 시에 카모를라쥬가 걷혀 나갔다. 김혜림이 강현에게 재차 카모를라 쥬를 걸어 주려 했다.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빠져나가죠. 카모를라쥬 다시 걸게요.”
그러나 강현은 대차게 고개를 젓고 말했다.
“끝난 게 아냐. 놈은 죽지 않았어.”
김혜림은 엘딘의 시체를 관찰하다 가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투영검에 베여 사방으로 퍼져 나간 엘딘의 시체가 눈에 띄는 변화를 보 였다.
엘딘의 것으로 추정되던 살점들에 서 검은 기운이 빠져나가더니 나무 파편으로 변했다.
“엘딘의 정체가 나무토막이었다는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닐 테고,흑마 법으로 분신을 만든 거겠죠?”
“마기가 빠져나오면서 나무로 되돌 아갔으니 흑마법의 일종이라 봐야겠지.”
“공격당할까 봐 미리 분신을 대타 로 세워 놓은 거네요. 보기보다 용 의주도한 걸요?”
“카모플라쥬를 유지하면서 놈의 위 치를 찾아봐.”
“강현 씨는요?”
“적당히 힘 조절하면서 적을 베어 넘기도록 하지. 수세에 몰리면 추가 로 스켈레톤 군단을 만들려고 할 거 야.”
“좋아요. 그 틈을 노려서 놈의 머 리에 커다란 뿔을 심어 줄게요.”
김혜림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하 늘계단을 소환했다.
그녀가 하늘계단에 을라 위로 올라
가면서 지상에는 강현 혼자 남았다.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눈에 핏대 를 세우며 엘딘의 분신을 공격한 자 를 찾아 헤맸다.
그들이 강현을 목격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혈혈단신으로 적진 한복판에 우두 커니 서 있는 침입자의 존재는 헛웃 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공작군 기사들은 병사들로 하여금 포위망을 형성하게 하며 현황을 거 듭 확인했다.
“엘딘 님을 암살하려 한 게 이놈이 맞느냐?”
“확실합니다. 저놈이 들고 있는 검 과 똑같은 형태를 띤 검의 환영이 엘딘 님의 분신에 떨어졌습니다.”
“농담이 심하구나. 아무리 봐도 혼 자인 걸로 보인다만.”
“또 다른 적의 존재는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제 몸 던져 암살을 시도하려 한 거겠지요.”
“크레인군도 참 조잡한 수를 쓰는 군.”
적은 혼자.
목숨을 버릴 각오로 엘딘 암살에 나온 자로 추정되는 자다.
그 증거로 삶을 포기한 양 포위망 이 형성되는 내내 도망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엘딘 암살에 실패했다는 걸 알곤 망연자실하여 움직이지도 못하는 거겠지.
아니면 곧 다가올 죽음의 순간이 두려워 굳어 버린 것이거나.
공작군 기사들은 마나유저 중,상 급 수준의 마나 오오라를 발현하며 우쭐거렸다.
“이름 모를 암살자여. 목을 날려 버리기 전에 이름 정도는 들어 주 마.”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군.”
“하도 불쌍해서 최소한의 자비라도 베풀까 싶어서 말이다. 희대의 머저 리로서 역사에 이름을 올리려면 이 름 정돈 밝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 순간,그들이 희대의 머저리라 칭했던 자가 바스타드 소드에 마나 블레이드를 부여했다.
강현은 검의 테두리를 따라 선명한 빛을 띠고 있는 검을 앞세웠다. 그 러곤 마나 블레이드를 목격하자마자 안색이 시퍼래진 이들을 향해 묵직 한 한 마디를 날렸다.
“알려 줘도 오래 기억하진 못할 텐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