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오레노를 비롯한 빌토르 백작가 소 속 부대 하나가 전멸당했다.
파다한 시체더미 중간에선 강현과 이름 모를 병사만이 남아 있었다. 강현은 병사의 목줄기에 검 끝을 가까이 대며 질문을 날렸다.
“빌로스 제국의 내전은 어떻게 되 어 가고 있지?”
병사는 새하얗게 안색이 질려선 가 까스로 대답을 뱉어 냈다.
“패,팽팽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팽팽하게?”
“마나마스터의 숫자는 공작파가 많 으나 오크 평원에서 오크들이 계속 지원군을 보충하고 있어서 인해전술 로 질적인 차이를 메우고 있습니다. 비,빌로스 제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다들 아는 사실인 데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지……
“사족이 붙는군.”
“히,히익! 죄송합니다! 다시는 쓸 데없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 니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천공섬의 현황은?”
“네? 천공섬 말씀이십니까?”
“천공섬은 브리튼 교의 자치령이 지. 황제파에 붙은 브리튼 교를 공 작파가 가만 놔둘 리 없을 텐데?”
“아,아! 드,드리안 공작가의 병력 이 천공섬을 점령하고 주둔 중입니다.”
“천공섬은 공작파의 병력으로 가득 하다는 거군.”
“그,그렇습니다! 크레인 공국이 황제에게 충성하기로 표명해서 병력 을 보내려 하고 있기 때문에……
크레인 공국이라면 어린 공왕을 앉 혀 놓고 공왕의 외척이 실권을 쥐고 있던 나라였다.
공왕의 외척에 해당되는 베니스 백 작가를 이용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베니스 백작가에서도 나탈리아란 여자가 암중 실세로서 나라를 좌지 우지하고 있었다.
디벨롭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공작 파에 힘을 실어 주려던 나라가 지금에 이르러선 황제파를 지지하고 있 다 한다.
강현은 언젠가 나라를 바꿔 보이겠 다며 의지를 불사르던 어떤 사내를 떠올렸다.
‘데이낙스 남작이 잘해 나가고 있 나 보군. 크레인 공국으로만 넘어가 면 데이낙스 남작을 통해서 로산을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몰라. 시도해서 나쁠 건 없겠지.’ 천공섬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로산 이 알아서 넘어오겠지만 천공섬에 공작파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로산을 기다리는 동안 반드시 공작 파 병력과 부딪치게 될 거고,대규모 병력을 상대하게 되는 만큼 소란 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공작파의 오합지졸들을 상대하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소란이 커지면 로산이 강현의 존재를 인지하곤 이동 루트를 바꿀 지도 모른다.
만약 대륙을 횡단하여 동쪽의 해저 섬을 통해 브리니아 공국을 경유, 그 뒤에 빌로스 제국으로 들어가면 그를 찾을 수가 없다.
천공섬에 들르지 않고 비행을 통해 곧장 크레인 공국으로 넘어가 로산 을 찾는 게 나을 듯하다.
이만하면 알고 싶은 건 다 알아낸 셈이다.
강현은 검을 거두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추가 질문을 날렸다.
“벤젠 기사단이 전멸했다고 들었는 데 말이지.”
“벤젠 기사단……. 네! 맞습니다! 한참 전에 전멸했습니다!”
“어쩌다 전멸하게 됐지?”
“황자 암살미수죄로 전원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만……
황자 암살미수죄?
빌로스 제국의 황자는 한 명밖에 없다.
엘리오스 킨 드래코프.
디벨롭과 함께 수단과 방법을 가리
지 않고 강현을 죽이려 했던 얼간이 황자다.
내전에서 최전방에 배치되어 공작 파 저지의 일축을 담당했던 벤젠 기 사단에게 드래코프를 죽일 이유가 있었을까?
절대 아니다.
역으로 드래코프가 암살미수죄인 것처럼 꾸며 벤젠 기사단을 처형했 다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럽다.
‘그럼 드래코프에게 그만한 계략을 꾸밀 힘이 있다는 게 되는데 말이 지.’ 무엇보다 드래코프는 강현을 죽이 려고 시도하다가 계속 실패했고,실 패할 때마다 세력이 약화되어 강현 이 카니발로 떠날 즈음에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 있었다.
세력을 잃고 빈껍데기가 된 드래코 프에게 벤젠 기사단을 계략에 빠뜨 릴 힘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드래코프가 몰래 힘을 키워서 황궁 에서의 영향력을 되찾았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정보 수집을 마친 강현은 병사의 목에서 검을 떨어뜨렸다.
병사가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털썩!
살아남았다.
숨통이 트인다는 말을 절실히 실감 한 참이었다.
죽은 기사와 병사들의 시체 사이에 서 오로지 자신만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길 만한 상황이긴 하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존재는 풀어 주 면 엉뚱한 마음을 품기 마련이다.
병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돌아가서 얼른 이 사태에 대해 보 고해야 해. 근데 뭐라고 보고해야 하지? 웬 이상한 마나마스터가 나타 나서 내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 다고 보고하면 그 꼰대 같은 상부 놈들이 믿기나 하겠어? 나만 정신병 자 취급당할 테지. 황제파의 마나마 스터라고 보고하면 어떻게든 잘 넘 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병사의 생각은 생각에서만 그쳤다.
곧바로 몽환검이 아래로 떨어졌기 에.
굵직한 검날은 병사의 머리를 우악 스럽게 뭉개며 짓이기듯 몸을 세로 로 쪼겠다.
강현은 한 손으로 능수능란하게 몽 환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 냈다.
병사의 시체에서 시선을 떼며 정면 을 바라보자 봇짐을 머리에 이고 맞 은편 산등성이를 오르고 있는 어떤 일가가 눈에 들어왔다.
추격대가 정상적으로 추격을 했다 면 1시간 이내에 따라잡혔을 거리였 다.
고향을 버리고 도주에 오른 일가의 모습에서 빌로스 제국의 현실이 보인다.
예전과 크게 다를 건 없나.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보다 더 빈 곤해지고,더 삭막해졌으며,더 피비 린내가 풍긴다는 점뿐이다.
빌로스 제국의 현실을 바꾸겠노라 며 힘겨운 싸움을 이어 나갔던 에르 델 황녀가 떠오른다.
“녀석도 그리 좋은 팔자는 아니 군.”
강현은 몽환검을 등 뒤에 도로 걸 치며 전투 현장을 유유히 통과했다.
*
강현이 제5해저동굴 입구에 도착하
자 김혜림,루나,세이아나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세이아나는 바닥의 모래 한 줌을 손에 쥐곤 아래를 향해 흘리며 바닷 바람을 만끽했다.
“이게 몇 년 만의 가이아 대륙인지 모르겠네. 공기부터 다른 것 같지 않아?”
“바닷가니까 공기가 다른 건 당연 하지.”
“멋진 대답인걸? 낭만이란 조미료 가 없어서 많이 싱겁다는 것만 빼 고.”
“마지막으로 여기 온 게 초월의 서 를 추가할 때였었지?”
“응. 사이먼 남작은 잘 지내나 모
르겠네.”
“세이아나,히든 스킬북엔 스킬봉 인효과가 적용되지 않는 거 알고 있 어?”
“그래? 그런 기능도 있었어?”
역시 몰랐었나 보다.
개발자라고 개발한 물건에 대해 전 부 알고 있는 건 아니다.
그 유명한 눈폭풍도 수송선이 이동 하면서 해병을 낙하시킬 수 있다는 건 몰랐다지 않은가.
혹시 모른다.
세이아나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효과가 있을지.
그 외에도 강현은 비밀의 서와 마 도의 서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그랜드 우드의 영역에서 비밀방이 열렸었지.”
“엥? 진짜? 난 초월의 서만 등록 했는데?”
“마도의 서랑 비밀의 서가 있더군. 마탑의 대마도사가 등록했다고 적혀 있었지.”
“그 영감 아직도 살아 있어? 와, 내가 처음 이세계로 왔을 때도 100 살이 넘었었는데 아직도 정정한가 보네.”
“중요한 건 어떻게 하위차원의 마 법사가 새로운 히든 스킬을 등록할 수 있었냐는 점이야. 초월의 서가 마지막 스킬북 용지라 하지 않았었 나? 대마법사는 무슨 수로 스킬북용지를 손에 넣었지?”
“나도 몰라.”
“시원하게도 말하는군.”
“거짓말은 나쁘잖아? 네 말을 듣고 나니까 나도 신경 쓰이네. 영감탱이 가 살던 집에 들러 볼까. 죽기 전에 혼자 가이아 대륙에 들락날락거렸던 것 같기도 한데.”
“그 부분은 나중에 결정하도록 하 자고. 그보다 하산하는 동안 몇 가 지 정보를 얻어 놨어. 천공섬에는 공작파 군대가 한가득 있다더군.”
“천공섬에서 대기하면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되겠네. 될수록 소란은 피 하는 게 좋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러니까 논
스톱 비행으로 가이아 대륙 서해 위 를 크게 우회해서 바로 크레인 공국 에 들어가는 걸로 하지.”
비행 수단이라면 차고도 넘친다.
강현은 드림윙을 사용해서 날면 되 고,김혜림과 루나는 니아를,세이아 나는 그리폰을 타고 날아가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비행기 여행을 연상 하면 곤란하다.
하늘의 바람은 차디차고,공기는 희박하며,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게 계속 긴장해야 한다.
겨울철에 고산지대에서 오픈카를 몰고 전력질주를 하는 거라 보면 된 다.
비행을 하기로 결정되자마자 김혜
림이 아공간 반지에서 뭔가 주섬주 섬 꺼냈다.
“후후후,혹시 몰라서 사 두길 잘 했네요. 이것만 있으면 비행 때도 안심이에요.”
김혜림이 꺼낸 건 군밤장수들이 자 주 쓰는 방한용 모자와 솜을 넣은 방한 마스크였다.
로브 후드를 뒤로 젖히고 방한용 모자와 방한 마스크를 쓰니 괴한이 따로 없었다.
강현과 루나,세이아나의 몫도 사 왔는지 모자와 마스크를 한 뭉텅이 더 꺼내는 김혜림이었다.
“여러 개 사 뒀으니까 다들 하나씩 쓰세요. 강현 씨는 특별히 라이칸슬로프 털이 달린 모자로 줄게요.”
모자를 건네받자 뻣뻣하기 그지없 는 회색빛 털의 감촉이 손안 가득 전해져 왔다.
“이런 건 또 언제 샀어?”
“언더그라운드 지하 1층에서요. 비
행할 때마다 로브 후드가 뒤로 넘어 가는 게 자꾸 신경 쓰이더라고요.”
“나쁘지 않군.”
“그렇죠? 다 착용하면 니아 소환해 주세요. 니아 등에 이거 설치할 거 예요.”
김혜림은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방 석을 자랑스럽게 꺼내 들었다.
치질이 있는 자들을 위한 방석이었 다.
방석 가운데 구멍에 검지를 넣고 훌라후프 돌리듯 장난치며 배시시 웃고 있는 김혜림이었다.
강현은 잠시 후에 니아의 등에 매 달게 될 물건을 보며 떨떠름한 눈빛 을 띠었다.
“너 치 자로 시작하는 그거 걸렸 냐?”
“그게 아니라 여기 구멍에 끈 연결 해서 니아 뿔에 매달면 단단하게 고 정할 수 있지 않겠어요? 니아 등에 오랫동안 앉아 있으니까 꼬리뼈가 어찌나 아프던지.”
“겉보기엔 그리 좋지 않아 보일 것 같다만.”
“강현 씨. 멋을 포기하는 대신 편
안한 시승감을 얻을 수 있다면 전 기꺼이 멋을 포기하겠어요.”
세이아나도 대화에 끼어들며 김혜 림의 의견에 한 표를 던졌다.
“나도 혜림이 말에 동감이야. 사람 들이 왜 돈을 더 지불하고 시트워머 를 추가하겠어? 인류의 기술은 엉덩 이를 따뜻하게 하기 위한 쪽으로 발 전해 왔다고.”
“옳소,옳소! 언니 말 잘하신다.”
“그거 여러 개 샀으면 나도 하나 줄래?”
“혹시 몰라서 이거도 3개 샀죠. 2+1이라 3개 산 거지만요.”
“나랑 너랑 루나가 쓴다 치면 개수 도 딱 맞아떨어지네.”
쿵짝을 맞추며 주거니 받거니 서로 맞장구를 쳐주는 두 여자였다. 졸지에 니아는 두 개의 방석을 얹 은 날개 달린 쌍봉낙타가 될 위기에 처했다.
강현은 니아의 소환석을 만지작거 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줌마가 둘로 늘어났군.”
?
번트 산 중턱에 빌토르 백작가의 병력이 몰려들었다.
야반도주 일가를 잡으러 나섰던 오 레노가 하도 돌아오지 않자 수색에 나선 것이었다.
빌토르 백작가 제2기사단 단장 프 라임은 매서운 눈빛으로 싸늘한 주 검이 된 오레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주변에서 오레노를 죽일 만한 실력자가 있었던가?”
프라임을 보좌하는 기사들이 현장 을 조사하다가 보고를 올리러 다가 왔다.
“살펴봤는데 전원 일격에 즉사한 것 같습니다. 시체에 남은 검흔으로 보건데 사용된 무기는 바스타드 소 드로 추정됩니다.”
“당장 백작가에 연락을 넣어서 이 일을 알려라. 그리고 주변의 목격 정보란 목격 정보는 죄다 긁어 오도 ?록 ?”
“마나유저 상급인 오레노를 일격에 죽일 정도의 실력자라면 보통 놈이 아닐 겁니다. 황제파에서 몰래 사람 을 투입한 걸까요?”
“황제파가 아니고서야 누가 함부로 빌토르 백작가의 기사를 건드리겠느 냐. 황제파의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반드시 척살해야 한다. 알겠나?”
“네!”
프라임은 죽은 오레노의 눈 위에 손을 얹어 눈을 감겨 주며 진득한 살의를 품었다.
“빌토르 백작가를 건드린 놈이 어 떻게 되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