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일반적인 마나기류는 휘말리면 시 야가 뒤틀리는데 일방통행 경계는 달랐다.
시야가 껌껌해지는가 싶더니 가이 아 대륙의 지도가 눈앞에 아른거렸 다.
더불어 머릿속으로 일련의 문구가 홀러들어 왔다.
[하위차원 일방통행 차원의 경계 (가이아 대륙행)]
[이 차원의 경계를 통과하려면 2억
CP를 지불해야 합니다. 2억 CP는 교환기 혹은 직접 소유한 금액 중에서 자동 차감됩니다. 만약 금액이 모자라면 입장했던 장소로 되돌아가 게 됩니다.]
강현이 소유하고 있던 수십 억 CP 중에서 2억 CP7} 자동으로 차감되 었다.
CP지불이 완료되자 머릿속으로 직 접 가이아 대륙의 지형 정보와 안내 문구가 홀러들어 왔다.
[도착하길 원하는 지점을 선택하십 시오. 선택한 지형 내에서 다른 지 형지물과 겹치지 않는 장소에 도착 하게 됩니다.]
지역을 선택하면,선택한 곳을 중 심으로 반경 20km 내에 있는 지점 에 떨어진다.
지금쯤 로산은 크레인 공국을 지나 고 있을 거다.
크레인 공국에서 빌로스 제국으로 오려면 무조건 천공섬을 거쳐야 한 다.
이왕이면 천공섬에 바로 착지하는 게 가장 편하긴 하다.
그러나 천공섬을 지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천공섬 위에 떨어지리란 보 장은 없다.
어쩌면 천공섬 밑에 펼쳐진 검은 기운의 격류 한복판에 떨어질 수도 있다.
검은 기운의 격류는 먼 옛날 마왕 이 억지로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차 원의 문을 열었다가 부작용이 발생 하여 생긴,가이아 대륙의 남북 경 계선이다.
접촉하는 모든 것을 터뜨려 폭사시 키기에,여태껏 단 한 차례의 연구 시도조차 해 본 적 없는 미지의 기 운이기도 하다.
무적이 있다 해도 정체 모를 기운 속에 갇히는 건 지양하는 게 좋다. 천공섬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반경 20km 내에 위험 지대가 없는 곳. 강현은 어젯밤에 세이아나,김혜림 과 상의해 둔 장소를 지정했다.
‘가이아 대륙 북서부 번트 산.’
번트 산은 가이아 대륙 북서부에 있는 산으로,제5해저동굴로 들어가 는 입구에 있는 산이었다.
거기라면 검은 기운의 격류와도 떨 어져 있고,위험한 지형지물이 없으 며,근방의 제5해저동굴을 통과하면 바로 천공섬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구 름다리가 나온다.
강현은 가이아 대륙 지도에 표기된 지형지물 중에서 번트 산에 해당하 는 지점을 선택했다.
그러자 깜깜했던 시야가 걷히면서 새하얀 빛이 번쩍였다.
화이트아웃에 걸린 듯 하얀빛으로 만 가득하던 시야가 원상복구되었다.
시야가 하도 흐린 탓에 눈을 몇 번이나 깜빡여야 했다.
이윽고 흐렸던 시야가 맑아지면서 주변의 사물이 눈에 들어왔다. 보이는 건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든 산등성이와 발밑 가득 깔린 낙엽, 도토리를 들고 있는 다람쥐 등 가을 산의 풍경이었다.
산등성이 너머 저 멀리 해안가가 자리 잡고 있었고,해저동굴의 입구 가 시야 끝자락에 아른거렸다.
처음 카니발에 가기 전에 요단을 끌고 들어갔던 제5해저동굴의 풍경 과 완전히 똑같았다.
“제대로 도착했군.”
하위차원에 도착했다는 증거로 개 인상점을 이용할 수 없었다.
더하여 하위차원에선 보구 해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잡다한 보구를 얻는다 하더라도 CP로 바꿀 수 없 다.
바꾸려면 아공간 보구에 넣어 뒀다 가 카니발에 가서 바꿔야 한다. 강현은 집게손가락으로 두 눈 사이 의 콧등을 꾸욱 누르며 눈을 깜빡였 다.
“눈이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있어 야겠어.”
줄기차게 카니발의 적색 대지만 봐 오다가 정상? 적인 땅을 보니까 적응 이 안 된다.
확실히 눈이 편한 건 하위차원 쪽 이다.
카니발 사람들이 항상 신경이 날카 로운 원인에는 붉은 대지도 한몫 하 고 있지 않을까 싶다.
현기증이 옅어질 때 즈음,강현은 소리잔을 꺼내서 입에 가까이 대었 다.
“여기는 최강현. 위치는 제5해저동 굴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 정상. 무사히 착지했으면 각자 위치 보고 해.”
착지하면 자신이 무사히 착지했음 을 알리고 자신의 위치를 밝히기로 정했었다.
한동안 대답이 없는가 싶더니 몇
초가 더 흐른 후에야 대답이 돌아왔 다.
- 강현 씨. 저도 무사히 도착했어 요. 근데 여기가 어디지? 잠시만요. 어디 계곡 같은데 식별할 만한 지형 지물 같은 게 눈에 안 띄네요.
“소리잔이 터지는 걸 보니까 나랑 가까이 있군. 다른 사람은?”
- 아까 루나랑 세이아나 언니가 어디 떨어지는지 봐 뒀어요. 아마 제가 있는 위치에선 둘 다 연락이 닿을 거예요. 둘 다 데리고 강현 씨 가 있는 곳으로 갈까요?
“제5해저동굴 입구에서 집합하는 게 더 빨라. 어차피 가야 할 곳이니 까 거기서 보도록 하지.”
강현은 제5해저동굴 입구에서 만날 약속을 하곤 소리잔을 로브 안주머 니에 넣었다.
산 아래로 방향을 잡고 이동하려는 데,산중턱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이 동하는 게 보였다.
눈을 좀 더 가늘게 뜨고 살피자 갑옷을 입은 기사와 병사들임을 확 인할 수 있었다.
머릿수는 어림잡아 20명쯤 될까.
무리의 후미에서 중형 깃발을 든 병사가 있었는데,깃발에는 붉은 실 로 수를 놓은 사슴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붉은 실의 사슴뿔 문양이라면 똑똑 히 기억한다.
잊을 리가 있겠는가.
강현이 용병 시절 때 마나마스터임 이 알려지자마자 달려와선 강현을 섭외하려 했던 가문 아니던가.
‘빌토르 백작가로군. 작전 수행 중 인 건가? 알아봐야겠군.’
강현은 자세를 낮추며 아공간 주머 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꺼낸 물건은 당나귀 귀였다. 우스꽝스런 당나귀 귀 머리띠를 착 용해야 하는 대신 멀리 떨어진 곳에 서 발생한 소리를 잡아 낼 수 있는 효과를 얻을 수 있는 A급 보구다. 당나귀 귀를 착용하고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자 빌토르 백작가 사병 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참나 야반도주하면 안전할 줄 아 나. 그놈의 영감탱이 세상 사는 방 법을 잘못 배웠구만.”
“다 제 아들놈 차출되는 거 싫어서 꾸민 짓 아니겠냐. 후딱 잡고 끝내 자고. 계집들 데리고 도망가면 얼마 나 도망갔겠어?”
“그 집 딸이 다섯 명에 영감탱이 후처랑 아들놈도 계집 하나 들였다 지? 씨팔,사내놈들 정리하면 남는 여자가 대체 몇 명인 거냐?”
“아서라,영감탱이 딸들이 소문난 못난이들이라더만. 괜히 그 나이 되 도록 숫처녀인 게 아냐.”
“이게 뭘 모르네. 대충 빚은 빵도 첫입은 맛있는 법이라고.”
“낄낄낄,그건 또 어디서 배운 명 언이냐? 배고프면 내상도 불사한다 와 맞먹는 명언이구만.”
차출을 거론하는 것에서 아직 내전 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빌로트 백작가는 후방지원부대를 맡고 있으며,지금 산등성이를 오르 는 부대는 외동아들의 강제차출을 피해 야반도주에 나선 일가를 잡으 러 나온 듯했다.
전시라 할지라도 아들이 한 명만 있는 집에는 소집장을 전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아들이 여러 명 있다면 최소한 한 명은 남겨 둔다.
대를 잇고,가족을 부양할 젊은 남
자가 최소한 한 명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작파에선 불문율을 깨고 모든 젊 은 남자를 강제 징집하고 있는 모양 이었다.
‘불문율을 깨야 할 정도로 공작파 상황이 안 좋은 건가? 추측할 거 없이 저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가 장 빠를 테지.’
후방에 있다는 걸 특권 삼아 평민 들을 등쳐 먹는데 재미 들린 자들이 다.
더구나 장소는 인적 드문 산속이니 눈에 될 염려도 없다.
현 가이아 대륙 상황에 대해 알아 내기엔 최적의 상황이다.
차려진 밥상을 마다할 수야 있겠는 가.
강현은 빙백검을 뽑으려다 말고 검 집을 통째로 허리띠에서 빼냈다.
‘당분간 빙백검보단 몽환검을 쓰는 게 좋겠군.’
빙백검의 푸른 검신은 너무 눈에 띈다.
몽환검이라면 겉보기엔 평범한 바 스타드 소드에 불과하니 등에 걸치 고 다닌다 해도 크게 눈에 띄진 않 을 거다.
강현은 빙백검이 담겨 있는 검집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넣는 김에 당나귀 귀도 넣자.
비주얼적으로 녹색 도깨비의 친구
같아 보여서 영 별로야.
준비를 마친 강현은 몽환검의 검집 에 매달려 있는 가죽끈을 크로스백 매듯 걸치곤 행동에 나섰다.
*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난 무척 기분이 좋았어.
야반도주 가족이 생겼단 보고를 듣 고 추적에 나섰거든.
그것도 아랫마을 벵 영감네 가족이 라더라고.
벵 영감네 딸들은 물기 빠진 호박 같지만 영감이 느지막이 들인 후처 는 제법 쫄깃하게 생긴 걸로 유명했어.
야리야리한 몸으로 빨래터에서 빨 랫방망이 휘두르는 거 볼 때마다 아 주 그냥 죽겠더라고.
우리 부대 소속 병사들 중에서 그 년 보고 군침 삼키던 놈이 한둘이 아닐걸?
나로선 기회만 엿보던 차에 잘된 셈이지.
솔직히 매일같이 땀내 나는 갑옷 입고,상관 눈치나 보고 있는데 이 럴 때 스트레스 안 풀면 언제 풀겠 어?
그래서 미리 허리띠 느슨하게 해 두고 뱅 영감네 가족을 찾고 있었 지.
산기슭에서 벵 영감네 계집들이 흘 리고 간 비녀를 찾아냈을 때까지만 해도 허리띠 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어.
근데 웬 로브 걸친 놈 하나가 산 길을 타고 내려오는 거야.
별로 추운 날도 아닌데 후드 꽉 잡아 내려선 얼굴 가리고,등에는 큼지막한 바스타드 소드를 매고 있 었지.
나도 그렇고,동료들이나 오레노 경도 그렇고 크게 신경 쓰진 않았 어.
후방 부대에 지원하러 온 용병이거 니 하고 생각했지.
후방 부대에서 꿀 빨려고 일부러
후방까지 와서 군부대에 지원하는 용병들이 많았거든.
다들 후방 부대에만 지원하려고 하 니까 금방 정원이 차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후방 부대 정원이 다 찼다는 건 바보라도 알 일인데,아직도 먼 길 와서 헛고생 하는 멍청이가 있구나 싶더라고.
근데 이놈이 웬 걸?
갑자기 우리 앞에서 떡하니 멈춰 서는 거야.
미친놈인가 싶어서 당장 비키라고 했지.
그런데도 안 비킨다?
한 술 더 떠서 우리 보고 이리 말
하더 라고.
“예의상 물어보도록 하지. 빌로스 제국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듣고 싶은데 들려줄 의향이 있 나?”
하아,내가 미쳤지.
그때 놈이 어떤 놈인지 파악했어야 했어.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오레노 경의 따귀를 때려서라도 말렸을 거야.
놈이 우리한테 질문을 날렸을 때 오레노 경이 인생 최악의 미친 짓을 해 버렸지.
“갑자기 와선 무슨 미친 소리냐? 썩 비키지 못할까!”
“바쁘다면 길을 터 줘야겠지. 건달
짓을 하느라 바쁜데 방해해서 미안 하군.”
“뭐? 건달 짓? 감히 내게 그따위 상스런 말을 해? 이 빌토르 백작가 의 문양이 보이지 않는 게냐!”
“발정 난 사슴밖에 안 보인다만.”
“이,이,이런 무례한 놈을 봤나! 당장 저 무례한 놈을 내 앞에 무릎 꿇려 데려와라! 빌토르 백작가를 모 욕한 대가는 네놈의 목숨으로 치러 야 될 거다!”
인정해.
내가 오레노 경이라도 같은 소리를 했을 거야.
우리 부대는 오레노 경이 마나유저 상급이고 병사들도 베테랑이라 후방 부대치곤 강한 편에 속했거든.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 용병인 줄 알았지.
우리 눈알이 유리구슬이라는 게 증 명될 때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어. 우리가 창을 들고 다가가니까 놈이 바스타드 소드를 빼 들더라고.
하도 굵어서 검이 아니라 둔기인 줄 알았다니까.
그걸 가뿐하게 한 손으로 다루더니 마나를 부여하더라?
근데 마나 오오라가 아니라 마나 블레 이드더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마나마스터 였다고!
완전히 새 된 거지.
놈이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르는데 우리같이 마나 쓸 줄도 모르는 병사 들이 뭐 어쩌겠어.
‘이놈아 죽어 볼 테냐’ 하고 휘두 르면 ‘예,제가 한 번 죽어 보겠습 니다’ 하고 뒈지는 거지.
오레노 경……. 아니지,오레노 그 자식 행동이 가관이었어.
평소에 오레노가 ‘전투는 마나로 하는 게 아냐,기술로 하는 거지’ 라고 말하면서 허세 부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
막상 마나마스터랑 싸우니까 가장 먼저 내빼더라.
내참 더럽고 치사해서.
웃긴 건 오레노 그 자식이 등 보
이자마자,후드 놈이 요상한 검 비 스무레 한 걸 소환해서 바로 베어 버리더군.
진짜 사람 가는 거 한순간이야.
난 어떻게 했냐고?
창 들고 가만히 있으면서 신한테 다음 생엔 거시기 큰 귀족으로 태어 나게 해 달라고 빌고 있었지.
한 몇 초 동안 눈 감고 기도했나? 기도 마치고 눈 뜨니까 부대 전멸 하고 나만 서 있더라고.
후드 놈은 나한테 시퍼런 마나 블 레이드 들이밀면서 이리 말했지.
“다시 한 번 묻지. 빌로스 제국 사 정에 대해 묻고 싶은데 대답할 의향 이 있나?”
왜 살려 줬나 했는데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살려 둔 거더라고.
아마 인생 살면서 가장 고개를 빠 르게 흔들어 본 게 언제냐고 묻는다 면 즉시 대답할 수 있을 거야.
바로 지금이라고.
“뭐,뭐든……. 무,물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