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지하 3층에선 막 복귀한 세미 레 이스 1등,2등,3등 공략대의 시상 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세미 레이스는 쉽게 말하자면 메인 레이스 아래에 있는 2부 리그였다. 주로 C급? A급 던전을 트랙 삼아 레이스를 펼치며,레벨대는 30-70 쯤 된다.
4달을 한 시즌으로 두고 1등부터 꼴찌까지 승점을 부여하는데 승점이 높으면 메인 레이스로 올라갈 수 있 다.
반대로 메인 레이스에선 시즌별로 하위권에 있는 자들은 세미 레이스로 강등된다.
리그 제도를 수행하는 스포츠 및
E스포츠의 인기를 감안하면 카니발 대륙의 유일한 리그 종목인 던전 레 이스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몇몇 커뮤니티의 조직원이나 지부 장들은 특정 선수의 스폰서가 되어 CP나 보구를 제공해 주고 있기까지 하다.
언더그라운드가 커뮤니티로부터 안 전한 건 뒷돈 외에도 던전 레이스의 스폰서가 된 지부장들이 많기 때문 이기도 하다.
지부장들은 언더그라운드가 세이아 나의 영역권 안에 있는 세력인 줄도 모른 채 CP나 보구를 제공해 주며 힘을 키워 주고 있는 셈이다.
선수 입장에서 스폰서가 있고 없고 는 많은 차이가 난다.
그러다 보니 스폰서가 없는 선수들 은 스폰서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을 어필한다.
선수가 가장 어필하기 쉬운 순간이 언제일까?
그건 바로 레이스가 끝나고 시상식 을 진행하는 순간이다.
1등을 차지한 공략대는 ▽내들의 뇌리에 남기 위해 여러 가지 캐치프 레이즈나 포즈를 준비하여 시상대 위에서 펼친다.
그런데 오늘의 세미 레이스 1등 수상자는 달랐다.
“다음에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상 소감이라 하기에는 담백하다 못해 무색무취에 가까운 한 마디였 다.
심지어 이번 1등 수상자는 매번 꼴찌만 하던 만년꼴찌였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3, 4인조로 팀 을 짜지 않고 혼자 다니는 별종인지 라 다른 자들보다 항상 공략 속도가 느렸다.
운이 하늘에 닿아 1등이 되었으면 필사적으로 자신을 어필해도 모자랄 판에 붙임성 없는 말 한 마디만 덜 렁하고 물러났다.
던전 레이스의 또 다른 묘미인 수 상자들의 광대짓을 보러 왔던 자들은 빅터의 행동을 두고 상반된 반응 을 띠었다.
“우?! 우?! 그게 1등 수상자의 소 감이냐! 수상자답게 화끈하게 뭐라 도 해라!”
“빅터야! 난 응원하니까 다음에도 1등 해라! 네 덕분에 오늘 단단히 한몫 잡았다!”
“얌마! 너 때문에 내 돈 날렸다고! 거기서 네가 왜 1등을 하고 그러 냐!”
“방금 돈 잃었다는 놈! 오늘 강물 따뜻하다더라r
“강물 따뜻하다고 한 새끼 누구냐! 뒤지고 싶냐!”
시상대 앞에서 돈 딴 자와 돈 잃
은 자끼리 시비가 붙으면서 분위기 가 험악해졌다.
종종 있는 일인지 즉시 언더그라운 드 직원들이 중재에 나서며 미연에 사고를 방지했다.
그사이 빅터는 시상대 아래로 내려 와 스태프 전용 복도로 들어갔다. 아직 시상식이 끝나지 않았지만 시 상식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희미한 발광이끼의 빛으로 밝은 복 도 안.
빅터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며 홀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앞으로 조금만 더……
상태창 확인을 마치며 복도 안으로
걸음을 이어 가던 중.
복도 벽에 기대어 있는 한 사내와 마주쳤다.
빅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먹물로 흠뻑 물을 들인 듯한 흑발,꿰뚫어 보듯 날카로운 눈매,은연중 에 풍겨 나오는 위압감.
한때 존경의 마음을 담아 단장이라 고 불렀던 자.
강현이 눈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 재회의 인사를 나눌 법도 하건만 빅터는 말없이 강현을 지나치려 했다.
그에 강현이 무뚝뚝한 말투로 빅터 를 불러 세웠다.
“나다,빅터. 벌써 잊었나?”
빅터가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우 뚝 섰다.
로브 소매 아래로 빅터의 손이 불 끈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지경이 될 때까지 주먹을 과악 쥐었다.
마치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참으려 는 것처럼.
무엇이 그리도 분한 거냐. 무엇이 그리도 고통스러운 거냐.
빅터는 여전히 강현을 등진 채로 간신히 입을 떼었다.
“더 이상 당신과 할 얘기는 없습니 다.”
간신히 감정을 절제한 듯 목소리에 서 먹먹함이 배어 나왔다.
강현이 아는 빅터는 성격이 둥글둥 글하고 공과 사를 잘 구분하는 인물 이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면모는 아직까 지 남아 있는 것 같으나,둥글둥글 하고 사람 좋던 성격은 온데간데없 었다.
더구나 목소리 속에는 강현에 대한 원망도 약간이나마 섞여 있는 듯했 다.
강현이 떠난 직후의 벤젠 기사단 사정이라면 김혜림을 통해 들었기에 일부나마 알고 있다.
그러나 김혜림이 떠난 후의 벤젠 기사단 사정에 대해선 아는 게 전혀 없다.
강현과 김혜림이 모두 떠난 시기부 터 지금까지 약 7, 8개월.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빅터는 조심스럽게 호흡을 골라 스 스로를 가다듬으며 강현을 냉대했 다.
“카니발에서 잘나가시는 것 같더군 요.”
“내 질문과는 관련 없는 대답 같다 만.”
“단장님을 찾으러 간다며 나선 혜 림 양도 본인의 말을 완전히 잊고 당신과의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모 양입니다.”
“빅터.”
“디벨롭을 처리한 이후에 왜 돌아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네,그러시겠죠. 당신에게 저희들
은 한낱 남에 불과했을 뿐이지요. 남과 할 얘기는 없습니다.”
강현의 판단이라면 믿을 수 있다. 강현과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다. 그리 말하며 무한한 존경심을 비치 던 빅터가 아니었다.
현재 강현의 눈앞에 있는 건 어떤 계기를 통해 고독의 길로 들어서길 택한 한 명의 사내뿐이었다.
강현은 무정히 걸음을 옮기려는 빅 터를 향해 마지막 질문을 날렸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됐지?”
빅터는 잠깐 멈칫했다가 재차 걸음 을 옮기며 무거운 한 마디를 남겼 다.
“전부 죽었습니다.”
왜 죽었는지,어떻게 그리됐는지.
벤젠 기사단이 전멸한 경위에 대해 선 묻지 않았다.
알고 싶다는 이유로 질문을 날리기 엔 빅터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애잔 했기에.
필시 말로 못할 지옥도를 경험한 것이리라.
어떤 일을 겪었는지 묻는 건 너무 나도 잔혹한 행동이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 다.
빅터에게 있어서 강현 일행은 이미 남이 되어 버렸다는 것.
강현은 저 멀리 복도 너머로 사라 지는 빅터를 보며 로브 후드 앞자락 을 끌어내렸다.
*
숙소로 돌아가니 김혜림과 김윤중 이 강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식사 같이 하자고 졸라 대기 에 같이 식당에 갔더니 웬 중년 여 성이 합류했다.
중년 여성의 이름은 장진혜로 김윤 중과 같은 혁명군 창단멤버였다고 한다.
커뮤니티 본부에서 청소부로 일하 며 밀정 노릇을 하다가 세이아나 탈 옥 건 이후로 본부에서 나와서 김윤 중과 함께 행동해 왔다.
세이아나와 신 혁명군이 그랜드 마 운틴 쉘터의 주민들을 이끌고 언더 그라운드로 오는 동안 함께 지내다 보니 관계가 진전되어 재혼을 결심 했다고 한다.
조만간 신 혁명군의 활동이 안정권 에 들어가면 정식으로 식을 치를 예 정이라 한다.
“그래서 이 사람이 말이야,갑자기 자기는 한 번 실패했다는 거야. 뜬 금없이 무슨 소리냐고 했지. 알고 보니까 그게 프로포즈였더라고.”
“에이,그건 너무했다.”
“그 성격부터 어떻게 안 하면 곤란 하다고 하니까 그때부터 조금씩 변 하더라니까.”
“후후후,아주 그냥 아버지를 쥐어 잡고 사시네요.”
“그러게 말이야. 그나저나 말이 잘 통해서 다행이네. 솔직히 걱정 많이 했거든. 가정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다 큰 딸이 생긴다고 생각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더라고.”
“편하게 생각하세요. 다 큰 딸은 자식이라기보다 친구에 가깝다잖아 요.”
“고마워.”
“저야말로 고맙죠. 저도 여기 챙겨 야 할 사람이 한 명 있어서 계속 아버지가 마음에 걸렸거든요. 잘 좀 부탁드릴게요.”
저녁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에서 이루어졌다.
웃음이 많아진 김윤중과 괄괄한 성 격의 장진혜,붙임성 좋은 김혜림. 이세계 소환 때문에 분열된 가족이 있다면,이세계 소환 때문에 맺어진 가족도 있기 마련이다.
사람은 적응하며,살아남으며,다음 세대를 이어 간다.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담겨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식사가 끝나고 김윤중과 장진혜는
따로 마련된 던전 레이드 공략대 전 용 숙소로 되돌아갔다.
강현과 김혜림은 숙소 최상층에 있 는 VIP룸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묵묵히 계단을 오르던 차에 김혜림 이 허리를 비스듬히 숙이며 강현의 얼굴을 빼꼼 올려다보았다.
“빅터 경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저녁 식사 내내 심각해 보이길래 요.”
나름 평소처럼 행동했다고 생각했 는데 김혜림의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았나 보다.
강현은 뜸을 들이다가 한참 후에야 무뚝뚝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벤젠 기사단이 전멸했다더군.”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어.”
“……우릴 원망하던가요?”
“그것도 묻지 않았어.”
“최소한 오해만이라도 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떠났기 때문에 기사단이 전멸한 게 아냐. 그 점을 혼동하지 마.”
“알고 있는데도 찜찜한 건 어쩔 수 없네요. 그리고 벤젠 기사단이 전멸 할 정도라면 황제파가 밀리고 있단 건데 에르델 황녀님은 괜찮을까요?”
“김혜림.”
“네.”
“영웅놀이 하러 가이아 대륙에 내 려가는 게 아냐. 우리의 목적은 어 디까지나 하위차원 정복계획을 저지 하는 것에 있단 걸 잊지 마.”
빌로스 제국 황가가 위기에 처해 있든 말든 그건 아무래도 좋다.
로산이 빌로스 제국에서 웨이브 봉 인석을 풀어 버리면 그때야말로 진 정한 의미에서 지옥도가 펼쳐지리 라.
목적을 잊어선 안 된다.
아마 빌로스 제국의 현황에 따라 로산을 저지할 방법이 달라지지 않 을까 싶다.
이왕이면 빅터에게서 빌로스 제국 의 근황을 들었으면 좋겠지만 빅터역시 반년 전에 카니발에 들어온 모 양이니 최신 정보까진 없을 거다. 직접 내려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 다.
강현은 김혜림과 갈라져 방에 들어 가며 불조차 켜지 않고 그대로 침대 에 드러누웠다.
김혜림이야 에르델과의 친분이 있 기에 황가를 신경 쓴 거지만 강현은 다른 방면에서 황가를 신경 쓰고 있 었다.
‘각성의 서가 황제의 유산이란 걸 알아 버린 이상 마냥 모른 척할 수 만은 없겠군.’
비밀의 서와 마도의 서는 마탑의 대마법사에 의해 등록되었다고 했었다.
황제가 각성의 서에 담긴 숨겨진 기능을 깨닫고 그를 이용한 히든 스 킬북을 등록하라고 지시한 게 아닐 까.
어쩌면 황제가 후에 나타날 계승자 를 위해 또 다른 전언을 남겨 놨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황궁에 갈 필요가 있다.
강현은 몇 시간 앞으로 다가온 가 이아 대륙 복귀를 위해 잠깐이나마 눈을 붙였다.
*
몇 시간 후,언더그라운드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지하 동굴 의 최하증.
하위차원 일방통행 차원의 경계 앞 에 다수의 사람들이 도착했다. 스펙트럼을 늘어놓은 듯 다양한 색 을 띤 마나기류 앞에서 황재욱이 경 계 이용방법을 알려 주었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면 가이아 대륙 지도가 머릿속에 홀러들어 갈 겁니다. 대략적인 위치를 지정해서 떨어지는 거라,원하는 위치에 똑 떨어지진 않으니까 도착하면 서로 소리잔으로 위치 확인부터 하세요.
그리고 아마 상공 3미터 위에서 떨 어지니까 낙법을 쓰시든,스킬을 쓰시든 착지 조심하시고요. 지금까지 제가 말한 것 중에서 이해가 안 된 다거나 더 묻고 싶은 게 있으신 분?”
“어쩌다 그리 촐싹거리는 성격이 됐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대답해 줄 래?”
“누님,마지막까지 그러셔야겠습니 까?”
“마지막 좋아하네. 누가 들으면 영 영 안 돌아오는 줄 알겠다,야.”
“질문은 없는 걸로 알겠습니다. 누 님 빼고 다들 몸조심 하세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세 이아나와 황재욱 덕에 긴장되었던 분위기가 다소 완화되었다.
강현은 루나와 김혜림에게 각각 2 억 CP씩 주었다.
세이아나는 쉘터를 팔아 남은 돈이 있으니 본인이 가진 CP를 쓰기로 했다.
CP배분이 끝나면서 마나기류에 들 어갈 준비가 끝났다.
첫 타자는 강현이었다.
“다녀오도록 하지.”
배웅하러 나온 황재욱이며 신 혁명 군,발레나에게 짤막한 인사를 남기 며 기류에 발을 들였다.
그러자 마나기류가 강현을 냉큼 기 류 안쪽으로 빨아들였다.
마치 가이아 대륙이 강현을 기다리 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