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다.
카니발 대륙 전역에 길이 남을 멍 청한 짓을 하고 말았다.
적을 쉘터에 가뒀다가 감당을 못해 서 쉘터를 팔았더니 적이 그냥 가 버렸다.
시한부 판정 받고 흥청망청 가산 다 탕진했더니 오진이었던 격이다. 제례미는 멀어지는 강현을 허탈하 게 바라보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 다.
무너진 쉘터 너머에선 쉘터 바깥으 로 피난 가 있던 엔티티엔 주민들이 쉘터가 사라진 것에 놀라 술렁이고 있었다.
새 몬스터에 올라타 있던 조직원들 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누군가는 이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 지 물어봐야 했다.
‘야,네가 가서 물어봐. 이대로 가 만히 있기만 할 수도 없는 거잖아.’
‘미쳤어? 말 걸었다가 괜히 불똥 맞으라고? 이런 건 깜 있는 사람이 총대 매야 하는 거 아냐?’
‘벳로가 있었다면 이럴 때 뭐라도 해 줬을 텐데 하필……
벳로라면 뒷수습을 위해 역정이 쏟 아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 을 했을 거다.
조직원들이 안절부절못하는 가운데
제례미의 몸이 휘청거렸다. 당장이라도 새 몬스터 위에서 떨어 질 것 같은 위태로움에 조직원들이 화들짝 놀라 바삐 움직였다.
“지 역장님!”
“지역장님! 괜찮으십니까!”
“빨리 부축해 드려!”
굴욕감으로 점철되었던 험난한 신 고식과 감당할 수 없는 큰 사고를 쳤다는 스트레스는 제례미에게 강한 현기증을 선사했다.
움직이기는 것마저 힘든 나머지 조 직원들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지상 에 착지했다.
“지 역장님 몸에서 땀이…… 누가
가서 물 좀 가져와! 지역장님,탈수 때문에 어지러운 걸지도 모르니 물 부터 마시고 한숨 돌리십시오.”
누군가가 가져온 냉수를 한 모금 들이켜니 조금은 현기증이 가셨다. 제례미는 식은땀과 산발이 된 모습 으로 혼이 나간 듯 눈을 끔뻑이다가 입을 열었다.
“놈은 완전히 사라졌느냐?”
“네,아쉽게도 도망갔습니다.”
“아쉬워? 훗,미친…… 녀석의 힘
을 보고도 아쉽다는 말을 하다니 네 놈들도 어지간하군.”
“죄,죄송합니다. 아첨하려 한 게 아니라……
“지령을 무시하고 쉘터까지 날려먹
었으니 처벌을 피하긴 글렀군. 사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라더니.”
“비관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쉘 터를 재건하고 최강현이 먼저 공격 해 왔다는 식으로 보고서를 써서 올 리면 누가 제례미 지역장님을 트집 잡겠습니까? 최강현이 지역장의 위 에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건 속 이 쓰리지만,그 부분은 본부도 인 정하고 있는 바이니 괜찮을 겁니 다.”
치욕을 겪은 건 사실인지라 대륙 전체의 비웃음을 사는 건 면하기 어 렵 다.
대신 쉘터를 재건하고 보고서만 교 묘하게 써서 올리면 본부의 처벌만큼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살아남을 수 있는 선택지가 하나뿐 인데 그마저도 쉽지 않다는 게 문제 다.
제례미는 쉘터 재건이 어렵다는 점 을 지적했다.
“수십만 명의 시민을 다시 수용하 려면 66억을 들여서 8성급 쉘터를 지어야 하지 않느냐. 수중에 33억밖 에 없는데 나머지 33억은 어디서 구하자고?”
“시민들과 여행객들에게서 뜯어내 는 게 베스트겠지만 본부에 책을 잡 히지 않으려면 저희끼리 해결해야 합니다. 하아…… 내키진 않으실 테 지만 스렛을 팔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텟 1포인트당 60만 CP로 팔 수 있으니까 33억 CP를 만들려면 5, 500 포인트를 팔아야 한다.
다른 조직원들이 십시일반으로 스 렛을 절반쯤 팔면 3, 000포인트 분량 이 모일 거고,나머지는 제례미가 부담하면 얼추 계산이 떨어지지 않 을까 싶다.
이번 사달의 발단이라지만 혼자서
2, 500포인트를 팔아야 하는 게 유쾌 할 리 없었다.
헌데 의외로 제례미는 흔쾌히 스텟 을 팔았다.
이 마당에 자존심은 무슨!
살아남는 것만 생각해도 살아남을
지 말지 모르는데 그깟 스뱃이 문제 인가.
“2, 500포인트를 팔 테니 나머지
CP를 최대한 빨리 모아 와라. 그리 고 은신 스킬을 가진 자들은 당장 데릭로우스를 타고 최강현을 미행 해. 최소한 놈이 어디로 가서,뭘 하려는지라도 알아내야 면목이 설 테니.”
“그리하겠습니다. 다들 들었나? 엔 티티엔 최대 위기상황이니 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 각자 가진 스렛을 팔 거나 안 쓰던 보구를 해체해서 CP교환기에 담아 지역장님께 제출 해라. CP교환기를 제출한 자부터 피난처에 가서 시민들을 통제하도 이번에 팔아치운 스렛이야 세금이 나 뒷돈을 좀 더 적극적으로 챙겨서 충당하면 금방 복구할 수 있다.
제례미는 가진 스렛에서 2, 500포인 트를 팔아 15억 CP를 마련했고,조 직원들도 하나둘씩 자신의 스텟을 팔아서 마련한 CP를 CP교환기에 담아 제례미에게 제출했다.
이걸로 어떻게든 급한 불은 끌 수 있게 되었다.
총 66억 CP를 제례미의 CP교환기 에 옮겨 담으면서 쉘터를 구입할 준 비가 끝났다.
제례미가 개인상점을 뒤져 쉘터를 구입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외치길.
“3시 방향! 3시 방향 언덕에서 다 수의 병력이 나타났습니다!”
제례미는 반사적으로 감고 있던 눈 을 뜨며 3시 방향 언덕을 올려다보 았다.
300미터가량 떨어진 언덕 위에선 제각기 다른 차림의 무리가 대기하 고 있었다.
복장이 조잡한 걸로 봐선 커뮤니티 소속의 병력은 아니었다.
숫자는 기껏해야 10? 20명 정도? 어디의 여행자 무리이지 않을까 싶 었다.
한데 갑자기 언덕 앞에 위치한 평 지가 부글부글 끓더니 일시적으로 늪이 생성되었다.
들은 적 있다.
외딴 섬들을 거점 삼아 움직이며, 섬에서 재배한 마약을 대륙으로 들 여 밀매하는데다,해안에서 약탈을 일삼는 도적 집단이 있다고.
소속된 숫자만 수천 명에 이르며 우두머리에겐 바닷속과 땅속을 항해 할 수 있는 배가 있다고 한다.
“설마……
이쯤 되면 불행의 여신이 자꾸만 제례미에게 미소를 방긋거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늪의 수면이 일렁일수록 제례미의 낯빛 역시 홁빛으로 물들었다.
잠시 후,선박이 늪을 헤치며 위로
솟구쳤다.
터어영! 쏴아아아!
나타난 것은 대형 범선이었다. 선체는 코팅된 듯 번들거렸고,돛 대는 있되 돛은 달려 있지 않아 적 을 단죄하는 거대한 십자가를 실은 느낌을 주었다.
돛대의 최상단에선 ‘C’란 알파벳을 검으로 찌른 듯한 문양의 깃발이 펄 력이고 있었다.
제례미는 깃발의 문양에서 상대방 의 정체를 확신했다.
“해상 카르텔! 남쪽에 숨어 살던 놈들이 여기까지 왔다고?”
상대는 해상 카르텔,혹은 카니발 도적이라 불리는 집단이었다.
C는 카니발을 의미하며 카니발에 있는 모든 것을 약탈하겠다는 의미 를 담고 있었다.
고래처럼 솟구쳤던 선박이 기울면 서 선박 밑바닥이 늪 위로 엎어졌 다.
철썩!
늪 위에 정박한 선박의 뱃머리에는 전신 갑주를 입은 거한이 서 있었 다.
모든 각 부분에 뿔이 돋아나 있는 독특한 모양의 갑주였다.
카니발에서 조금이라도 소문에 민 감한 자라면 10개의 뿔이 돋아나 있는 전신 갑주를 입은 자의 정체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해상 카르텔의 두목이자 커뮤니티 에서 거금의 현상금을 걸어 둔 범죄 왕.
리카르도였다.
리카르도는 갑판 난간 위에 한쪽 발을 올리며,엉망진창인 엔티티엔 의 풍경을 감상했다.
“휘유? ,역시 사람은 부지런하고 볼 일이야. 것 봐, 너희들은 웬 내 륙 원정이냐고 투덜거렸지만 내 말 대로 하니까 이리 횡재하는 거 아니 겠냐.”
“뉘에? 뉘에? ,두목 말씀이 곧 신 의 말씀이십니다요. 그래서 이제부 터 늘 하던 대로 합니까?”
“차려진 밥상이 눈앞에 있는데 안
먹으면 예의가 아니지. 죽이고 빼앗 아라. 고메즈가 없는 커뮤니티 따윈 이빨 빠진 종이 호랑이다! 이들을 해상 카르텔 내륙 진출의 첫 제물로 삼자꾸나!”
“와아아아!”
과거에 해상 카르텔은 내륙에서 활 동하다가 고메즈의 토벌대에 쫓긴 나머지 어쩔 수 없이 외딴 섬을 옮 겨 다니며 활동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선 가장 위 협적인 적이던 고메즈가 없어졌기에 내륙으로 다시 손을 뻗치고자 마음 먹었고,오늘도 내륙 거점을 찾아다 니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엔티티엔에 서 벌어진 전투를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노략꾼이 쉘터와 대다수의 병력을 잃은 시민들을 두고 그냥 지나칠 수 야 있겠는가.
고양이 앞에서 어물전 문을 열어 둔 셈이다.
선박에서 도적들이 쏟아져 나와선 총공세에 나섰다.
그 숫자가 어찌나 많은지,머릿수 만 하더라도 조직원들의 10배에 이 르렀다.
쉘터를 재건한다고 스렛을 팔고, 보구를 해체한 조직원들로 미쳐 날 뛰는 도적들을 어찌 막으리오. 사방에서 조직원들이 난도질당했으 며,엔티티엔 시민들은 공포에 떨며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그 와중에 무기를 지닌 여행객들은 도망치기 바빴고 말이다.
약탈과 학살의 현장 속에서 제례미 는 허탈한 표정으로 두 무릎을 털썩 꿇었다.
리카르도는 전의를 잃은 제례미 앞 에 서며 제례미의 손에 쥐여진 CP 교환기를 응시했다.
“쯧쯧,커뮤니티도 갈 때까지 갔구 만. 이리 허접한 놈을 지역장이람시 고 세우다니 말이야.”
“CP교환기를 바치며 충성을 맹세 하면 내 배에 태워 줄 수도 있다 만?”
비명과 혈향이 가득한 악몽의 현장 속에서 제례미는 줄곧 아무 말도 않 았다.
선택의 기로에 선 그가 택한 길은 생존이 었다.
제례미는 수십 억 CP가 든 CP교 환기를 위로 들며 갈라진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배에…… 태워…… 주십시오.”
지역장이란 자부심도,사내로서의 자존심도 모두 내다 버린 선택이었 다.
살기 위해.
살아남는다는 그 한 가지를 위해.
제례미란 사내는 스스로 콧대를 꺾
고 한낱 도적의 발 앞에 이마를 찧 었다.
리카르도는 제례미가 두 손 모아 내민 CP교환기를 집었다. 그러곤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둣 무심하게 발을 들어 제례미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과직!
전신 갑주의 무게가 한 점에 집중 하여 머리 위에 떨어졌다.
깔린 머리가 어떻게 될지는 쉬이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수박이 깨지듯 경쾌한 파열음과 함 께 제례미가 절명했다.
리카르도는 갑주 신발을 바닥에 비 벼 핏물을 닦아 내며 신랄한 투로 중얼거렸다.
“한 번 배신한 놈을 뭘 믿고 쓰라 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리카르도가 손 안에서 CP교환기를 경쾌하게 굴렸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난세를 고하는 일갈이 터져 나왔다.
“커뮤니티의 시대는 끝났다! 어디 한번 우리도 카니발의 패권을 쥐어 보자!”
*
엔티티엔을 떠난 강현 일행은 북쪽 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속력을 최대로 높여 한나절쯤 비행을 하다 보니 던전이 가득한 평원이 나타났다.
평원에 있는 던전은 입구가 죄다 지하로 내려가는 지하동굴 형태를 띠고 있었다.
평원 전체에 땅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보니 거대한 개미굴에 들어선 듯한 착각마저 주었다.
강현은 기록식 지도를 거듭 확인하 며 목적지에 다다랐음을 알렸다.
“여기가 앤트 평원이군. 분명 세이 아나가 이 부근에서 기다린다고 했 는데 말이지.”
고도를 낮춰서 한참을 둘러봐도 세 이아나는커녕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세이아나도 수시로 혈영구슬을 들 여다보고 있을 테니까 우리가 왔다 는 걸 알 텐데.
자고 있기라도 하나.
세이아나를 부르기 위해 필담용 종 이와 혈영구슬을 꺼냈다.
혈영구슬에 마나를 불어넣자 세이 아나의 모습이 비쳤다.
구슬 속 세이아나는 그리폰을 타고 강현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현은 오랜만에 겪는 그녀 특유의 장난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간만에 만났는데도 여전하군.”
깜짝 놀래 주려다 실패한 요염한 인상의 은발 숙녀는 무안함을 무마하기 위한 윙크를 날렸다.
“후후,오랜만에 보니까 좋네. 다들 잘 지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