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김혜림을 알아보고 내가 있단 걸 추측한 건가.
모르는 사이에 김혜림의 이름도 커 뮤니티의 리스트에 올라갔나 보군. 무력시위를 위해 디스트로이를 보 낸 건 아닌 듯했다.
강현에 대해 알고 있다면 디스트로 이 정도로는 위협조차 느끼지 않는 다는 걸 잘 알 테니까.
디스트로이를 마중 역할로 택할 정 도로 강현을 대우하고 있다는 뜻으 로 보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강현 입장에선 초대에 응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우린 이제 막 떠나려던 참이라서 말이지. 초대에 응하기 힘들 것 같 군.”
“이전의 관계를 감안하면 경계하시 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당신을 잡으러 온 게 아니니 경계를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알고 있다면 긴 말은 필요 없겠 군. 엔티티엔에는 식량 조달을 위해 서 들른 거니까 지역장에게 가서 그 리 전하도록.”
“하다못해 이야기만이라도 들어 주 실 순 없겠습니까? 커뮤니티에선 당 신과의 은원관계를 백지화하고 새로 이 관계를 정립하고 싶어 합니다. 이건 비단 엔티티엔 지부의 뜻만이 아니라 수령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커뮤니티 수령이 직접 명령을 내려 강현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고 한 다.
원인은 세븐즈 교와의 대립 때문일 거다.
명색이 지미도 지역장 중 한 명인 데,그를 가볍게 제압하곤 유유히 사라진 집단이다.
만만하게 볼 수 있을 리 없다.
커뮤니티에선 세븐즈 교와 본격적 으로 대립하기 전에 최소한 강현을 아군 혹은 중립 관계에 놓기 위해 방책을 준비해 뒀을 거다.
지금의 초대는 강현에게 커뮤니티 에서 준비한 것들을 제안하기 위한 초대일 거고 말이다.
강현의 위상을 감안하면 적잖은 혜 택을 준비해 둔 게 틀림없다.
그러나 강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수령에게 전해. 나는 커뮤니티와 우호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다고.”
“최강현 씨,너무 섣부르게 판단을 내리신 건 아닌지요. 커뮤니티란 거 대 조직이 당신 한 명에게 이리 저 자세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 나 어려운 결정인지 알고는 계십니 까?”
“뻔뻔하군.”
“네? 뻔뻔하다뇨?”
“얼마 전까지 줄곧 죽이려고 추격
하고,내 동료를 감금해서 날 유인
하려 하고,내가 공략 중이던 웨이 브롤 통째로 봉인해서 날 가두려고 했었지. 근데 이제 와서 우리가 저 자세를 취했으니 너도 눈치껏 응해 라? 커뮤니티가 오라고 하면 내가 알겠습니다 하고 따라야 하나 보 지?”
“아,아니…… 그런 뜻이 아니 라……
“그럼 초대를 거부해도 되겠군.”
벳로로선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솔직히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줄 줄 알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커뮤니티가 먼저 숙이고 들어가고 있는 마당이다. 아무리 강현이라도 계속 커뮤니티와 척을 지는 건 부담스러울 터. 근데 이 작자는 뭘 믿고 이리도 당돌하게 구는 건가.
설마 제안조차 들으려 하지 않을 줄이야.
벳로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필 사적으로 강현을 설득하고자 했다.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진 않 겠습니다. 듣기만이라도 하면 안 되 겠습니까? 쓸데없이 적을 늘려서 당 신께 대체 무슨 이득이 있단 겁니 까?”
“그쪽과 손을 잡아 봤자 내게 아무 이득이 없기 때문이지. 반면에 그쪽 은 얻는 게 많을 거고 말이야.”
“저희가 뭘 준비했는지는 알고 이
득을 논하는 겁니까?”
“그럼 읊어 봐.”
“여기서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 리를! 저희가 준비한 건 세력과 세 력 사이에나 오갈 법한 내용들입니 다. 길거리에서 할 수 있을 리가 없 잖습니까!”
“세력과 세력으로 조약을 맺는 거 라면 일개 지역장 수준과 종이에 사 인한다고 끝날 일은 아니군. 나더러 수령과 만나러 바빌론까지 가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벳로는 속으로 뜨끔했다.
강현은 지금까지의 대화만으로 벳 로의 의중을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있 었다.
강현의 말대로 일단 지부로 초대하 여 갖가지 혜택이 주어진다는 것을 납득시킨 후 카심에게 보내려 했었 다.
근데 갈 때 강현 일행만 덜렁 보 내냐?
그럴 리가 있겠나.
엔티티엔 지부에서 안내역이란 명 목으로 병력을 붙여 함께 이동하게 될 게 분명했다.
엔티티엔에서 바빌론까지는 육로로 두 달가량 걸린다.
불편한 동행들을 달고서 두 달 동 안 커뮤니티 본부로 가라?
심지어 강현에겐 아무런 이득도 없 는데?
강현이 커뮤니티와 손을 잡아 봤자 얻는 이득이라곤 기껏 해야 각 지부 를 지날 때마다 극진한 대접을 받는 다든지,거액의 CP를 준다든지,진 귀한 스킬북이나 보구를 받는다든지 그 정도일 거다.
놀랍게도 커뮤니티의 능력 내에서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강현에 겐 필요 없는 것들이다.
반면에 커뮤니티는 세븐즈 교와의 싸움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고,세 븐즈 교를 쓰러뜨리면 더더욱 카니 발 대륙에서의 입지가 확고해진다. 세븐즈 교 때문에 강현과 손을 잡 으려는 작자들이니 세븐즈 교가 사 라지면 다시 강현을 치려 들 터.
언젠간 뒤통수를 칠 자들인데 뭐 하러 그들의 뜻대로 해 줘야 하는 가.
강현은 냉철하게 등을 돌리며 벳로 에게 일침을 가했다.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하니까 같은 눈높이로 내려서는 게 저자세인 줄 아나 보지? 착각에 빠져 사는군.”
강현이 북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김혜림과 루나가 그 뒤를 따랐다. 강현 일행은 금방 북적이는 인파에 섞여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강현이 떠난 후에도 벳로는 한동안 얼빠진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 다.
다른 디스트로이들이 벳로의 상태 가 걱정되어 말을 걸려던 찰나.
별안간 벳로가 진지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놈의 말투로 미뤄 보건데 뭔가 목 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어,저리 단호하게 우릴 적으로 삼고 있는 건 이전의 은원 때문만이 아닐 거야. 뭐지? 놈은 무슨 목적을 가지고 북 쪽으로 가고 있는 거지? 우릴 적으 로 단정 짓는다는 건……
“저기…… 벳로?”
“아!”
“아이쿠,깜짝이야. 이 사람이 갑자 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지부로 돌아간다. 최강현 그놈은
모종의 계획을 품고 있어. 그게 뭔 지 몰라도 커뮤니티에 해가 될 것만 은 분명해.”
다른 디스트로이들은 벳로의 말에 어리둥절해했다.
방금의 대화만으로 최강현이 모종 의 계획을 품고 있는지 아닌지 어떻 게 안단 말인가.
유일하게 벳로만이 강현이 위험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손을 잡아 봤자 이득이 없다고 말 한 부분이 그 증거다.
커뮤니티가 보구나 스킬을 제공하 든,지부 내에서 극진한 대접을 하 든,대접 받기 전에 사이가 틀어질 만한 일을 벌일 것이기에 이득이 없다고 말한 걸 거다.
생각지도 못하게 천금 같은 정보를 얻었다.
‘우리 커뮤니티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은 최강현이 세븐즈 교에 가담 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 니겠지.’
벳로의 경우 디스트로이 중에서도 경력이 제법 긴 편이라 본부에 어느 정도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본부의 연줄을 통해 들은 이야기 중엔 세븐즈 교의 밀정이라고 밝혀 졌던 리군혁 지역장이 세이아나 지 역장을 가둬서 최강현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골 정신이 강한 강현이 이제 와서 세본즈 교에 들어갈 린 없다.
‘이 경우엔 최강현이 단독으로 커 뮤니티에 해를 입힐 준비를 하고 있 다고 보는 게 맞아. 그게 뭔진 몰라 도 상부에선 짐작 가는 게 있을지도 몰라.’
얼른 이 일을 본부에 전하지 않으 면 손 놓고 있다가 당할 게 틀림없 었다.
정보를 전달해서 대책을 세우게 해 야 했다.
벳로는 디스트로이들을 데리고 엔 티티엔 지부로 되돌아갔다.
지부에 들어서자마자 계단을 두어 개씩 성큼성큼 뛰어오르며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때마침 계단에서 내려오던 제례미와 마주쳤다.
제례미의 험악한 표정으로 보건데 여전히 기분이 언많은 모양이었다.
“꼴을 보니 초대엔 실패했나 보군. 녀석의 뭐라고 말하며 거절하더냐?”
“조금 있다가 보고 드리겠습니다. 급히 본부에 전달해야 할 사항이 있 으니 비켜 주십시오.”
“뭐라고? 어이,벳로. 가만히 있으 니까 내가 물로 보이나? 작작 무시 해라. 죽여 버리기 전에.”
“정말 급한 일입니다. 모든 설명은 조금 이따 드릴 테니 일단 지나가겠 습니다.”
벳로는 제례미의 옆을 지나치며 계
단을 올랐다.
헌데 갑자기 등에서 뜨끈한 느낌이 올라왔다.
푸욱!
뜨끈한 느낌은 등을 관통하여 가슴 까지 전해졌다.
벳로는 전신의 힘이 맥없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찬찬히 가슴팍을 내려 다보았다.
아래로 내려가던 벳로의 시야에 자 신의 가슴을 관통한 무기의 편린이 보였다.
벳로의 등 뒤에서 제례미의 살벌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한 번만 더 날 무시하면 죽인다고 말했을 텐데?”
날붙이가 좌우로 비틀리면서 벳로 의 몸속을 짓이겼다.
벳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살점 섞인 핏조각을 토해 내는 것밖에 없 었다.
“커헉! 커헉커헉! 끄르륵!”
“아아? ,이래서 전임자의 부하를 남겨 두면 골치 아프다는 말이 생기 는 거구만. 가서 네가 그토록 숭배 하던 고메즈와 재회하려무나.”
가슴이 관통당하고 나서야 알아차 린 게 있다.
제례미가 하도 자기가 고메즈보단 낫다고 말하기에 조금은 상식이 통 용되는 사람일 줄 알았다.
그러나 고메즈나,제례미나 거기서 거기인 미치광이들이었다.
벳로는 커뮤니티 본부가 알아야 할 중대한 사실을 가슴에 담아 둔 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벳로의 시체가 계단 아래로 구르면 서 계단에 기나긴 혈선이 생겨났다. 제례미는 숨이 빚은 벳로의 시체를 하찮다는 눈빛으로 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그러곤 벳로의 죽음에 당황 하여 기겁하고 있는 디스트로이들에 게 말을 걸었다.
“어이,최강현,그놈이 뭐라 하면서 거절하더냐?”
“그…… 그게…… 커뮤니티를 한껏 비웃으며 거절했습니다.”
디스트로이들은 당황한 나머지 어 휘력이 낮아졌다.
그로 인해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로 강현의 행동을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본인들이 느끼기엔 강현이 비웃는 것 이외에 다른 의도가 있었다라고 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디스트로이들의 단편적인 보고는 제례미를 홍분케 하기에 차고도 남 았다.
“조금 저자세로 나가 줬다고 바로 우릴 비웃어? 놈은 어디로 갔느냐? 당장 바른대로 고해라!”
“흐,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본부 의 지령에 따르자면……
하나같이 지령! 지령! 지령!
제례미는 제 분에 못 이겨 있는 힘껏 고함을 질러댔다.
“애당초 본부의 지령이라는 것도 최강현 그놈을 처리하지 못해서 내 린 지령 아니냐! 놈을 죽이면 될 일 이다! 이 엔티티엔 안에서 내가 놈 에게 질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엔티티엔에서 만큼은 그 누구도 지역장님께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알면 놈의 위치를 말하라고!”
“북,북쪽 관문으로 갔습니다!”
제례미는 과도하게 흥분한 나머지
숨을 몰아쉬며 씩씩거리다가 지시를 내렸다.
“사방 관문 중에서 북쪽만 닫고, 도시 전역에 코드 레드임을 알려라. 쉘터 안을 전장으로 삼는 한이 있더 라도 놈을 척살하고 말겠다.”
기나긴 시가지를 지나 북쪽 외곽 지역에 이르렸을 무렵.
강현은 거북 그림이 그려진 길을 걷다가 불온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아까부터 너무 조용하군.”
따로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는데 김 혜림과 루나의 손엔 벌써 활과 스태 프가 쥐여져 있었다.
아무리 도시 외곽 지역의 농업지대
라지만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새참을 먹던 농부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북쪽 관문에서 들어오던 여행객과 북쪽 관문으로 향하던 여 행객의 발길이 뚝 끊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쪽 관문 앞에 도착했다.
이상하게도 북쪽 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강현 일행보다 앞서 북쪽 관문에 도착한 여행자들이 관문 앞 에서 투덜거리며 발길을 돌리고 있 었다.
“뭔 일이길래 갑자기 북문을 폐쇄 한담. 남문까지 가려면 한참 걸리겠 네.”
“남문도 조만간 폐쇄한다잖아. 늦
으면 오늘 안에 못 나가니까 빨리 움직이기나 해.”
“주민까지 다 나가라고 한 것 같은 데? 대규모 방역 소독이라도 하는 거려나.”
주변의 대화로 유추컨대 모종의 이 유로 북문이 폐쇄되었고,도시의 모 든 사람들이 남문으로 빠져나간 듯 하다.
방역 소독이라 하기에는 규모가 너 무 크다.
강현이 커뮤니티의 초대를 거부한 직후에,강현이 나가려고 하는 문을 닫았다.
명백히 강현을 월터 안에 가두기 위해서 벌인 짓이리라.
강현은 빙백검을 빼어 들며 무적을 끌어올렸다.
“날 노리고 한 짓이야. 쉘터 안을 전장으로 만들 속셈인 건가.”
“주민들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걸로 봐선 훈련된 상황인 것 같은데 요? 근데 그거 알아요?”
“알아.”
“후후,뭔 줄 알고 그래요?”
“놈들은 거절하든,말든 언젠가 통 수 칠 놈들이었다는 거.”
“에이,너무 금방 맞춰 버리면 문 제 내는 보람이 없잖아요.”
커뮤니티가 공세를 취하는 거야 하 루 이틀 겪는 일도 아니다.
강현 일행은 익숙한 일인 양 강현
이 전방에 서고,김혜림과 루나가 후방에 서는 삼각 진형을 갖췄다.
1분도 채 되지 않아서 시가지와 이어진 거북길을 통해 데릭로우스를 탄 무리가 접근해 왔다.
무리의 선두에 선 올백머리 금발백 인은 안 그래도 게슴츠레한 눈을 더 욱 좁히며 강현을 주시했다.
“따로 최강현이냐고 묻지 않아도 바로 알아보겠군. 딱 봐도 죽이고 싶게 생겼어.”
강현도 올백머리 금발 백인이 누구 인지,누구와 닮은 성격인지 보자마 자 파악했다.
올백머리의 금발 백인이 제례미이 며,고메즈 못지않은 미치광이라는 걸 직감했다.
“지역장 응시 조건에 정신병자 항 목이라도 있나 보지? 고메즈가 없어 지더니 고메즈 2세를 데려왔군.”
“시건방지다고 들었는데 생각 이상 으로 맛이 간 놈이구나.”
“다시 제안이나 하자고 온 건 아닐 테고. 신입 신고식치곤 꽤 가혹할 텐데 지금이라도 물러나는 걸 권하 지.”
“크하하하! 이놈이나,저놈이나 전 부 신입 취급을 하는군. 잘 들어라 개자식아. 네놈은 지옥에 발을 들였 다. 엔티티엔 안에 발을 들인 것부 터가 네놈의 실수란 말이다.”
제례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
을 까딱였다.
마치 바닥에 있는 자를 향해 위로 올라오라는 듯 독특한 방향으로 손 을 까딱이고 있었다.
땅바닥에는 그 누구도 없었는데도 그의 손가락질은 계속되었다.
이윽고 제례미의 손가락에 마나가 부여되었을 때.
땅바닥에 그려져 있던 거북 그림이 일제히 들썩이며 3D 그림마냥 바닥 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에 있던 그림들이 구 현화하면서 강현 일행을 둘러쌌다. 땅바닥에 그린 거북 그림은 물론이 고,내벽에 그려져 있던 거대한 인 물화가 거인의 모습으로 구현화되며 몬스터화 되었다.
제례미는 구현화한 그림 몬스터들 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트 몬스터들아. 저들을 섬멸해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