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높은 상공에서 카니발 대륙을 유람 하고 있는 어느 부유섬.
섬 위는 폐허가 된 유적지와 버려 진 신전이 존재했다.
부유섬 끄트머리에선 깃털이 꽂힌 모자와 녹색 스톨을 두른 여인이 스 몰 하프를 켜고 있었다.
가녀린 손가락이 하프의 현을 뜯을 때마다 여인의 입에서 소프라노 톤 의 음색이 흘러나왔다.
가장 거대한 의지가 자신의 옷을 갈아입힐 재단사를 찾고 있나니. 오늘날에 와서 시계의 유리에 세명의 재단사가 비치니라.
한 명은 섬세한 밑그림으로 비단옷 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흑발의 사내 이구나.
한 명은 관록으로 편안함을 주는 검은색 잠옷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은발의 여성이구나.
마지막 한 명이 눈에 비치지 않는 것이 시계를 불안하게 하나니.
부탁이오,재단사들이여. 그대 곁에 있는 자들을 잃지 마오.
권위를 잃은 시계가 정시의 뻐꾸기 소리를 내 보지만 듣는 자가 없네.
여인이 노래를 마치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여인의 눈은 사람의 것이 아닌 것 처럼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공허함을 담은 눈으로 지상을 내려 다보던 여인에게,인간의 상반신과 말의 하반신을 지닌 사내가 다가와 선 예를 갖췄다.
“바람이 찹니다,신전 안으로 드시 지요.”
여인은 머나먼 지상을 애틋하게 내 려다보며 말을 꺼냈다.
“파르마,오늘 미래의 단편이 얼핏 보였답니다.”
“그런…… 능력을 잃으신 게 아니 었군요.”
“잃긴 했죠. 다만 가끔씩은 보여 요.”
“무엇을 보았습니까?”
“세 사람이 가진 인연, 도착,절 망.”
“후…… 우려하던 흐름대로 가고 있군요. 흐름을 바꿀 수 있을 것 같 습니까?”
“파르마,물길을 바꾸려면 상류에 서부터 새로운 물길을 만들어야 하 죠.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에요. 그는 아직도 성장 중이에요. 이제 겨우 고치 속에 들어가서 외골격이 생기려는 참에 섣불리 간섭하는 건 좋지 않아요. 기회는 한 번뿐이니까 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불쾌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로선 좀 더 오래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후후후,고마워요,따르마.”
따르마라 불린 켄타로우스는 다시 한 번 예를 갖추며 여인에게 귀가할 것을 권했다.
“바깥에 오래 계시면 몸에 해롭습 니다. 신전으로 들어가시지요,타임 로드님.”
*
나의 인생은 ‘버림’으로 점철되어 있다.
처음으로 버려진 건 15살 때였다. 동네에서 철물점을 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투자로 먹고 살겠다며, 은행 대출이며 주변 사람들에게서 돈을 빌리기 시 작했다. 그러고선 어느 그물망 제작 회사에 수억을 투자했다.
당시에 아버지는 내게 이리 말했 다.
진철아,내가 말이야 저기 저 어디 회사 가면 이사 소리 듣고 막 그러 면서 대접 받으면서 산다. 니 아버 지가 이런 사람이다. 니 뭔 뜻인지 알제? 우리 한 번 멋지게 살아 보 자. 내가 길 닦아 놓을 테니까 니는 그냥 멋지게만 살면 된다.
멋지게 살자를 입에 살고 달던 아
버지.
하지만 15살이 되던 해의 봄,개학 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를 기다 리고 있던 건 식탁에 앉아 울고 있 던 엄마와 너만은 멋지게 살라고 적 어 놓은 아버지의 쪽지였다.
멋지게 살자.
나와 엄마를 버리고 간 당신에게 그 따위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 각해?
네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어.
처음부터 필요 없는 존재였다고!
그래,두고 보자.
내가 잘돼서! 나중에 당신이 다시 찾아와서! 내 앞에서 미안했다고 말 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해 주겠어.
당신은 아버지라 자처할 자격도 없 다고.
그래서 미친 듯이 노력했다.
아직도 의예과 합격통지가 날아왔 을 때 지어 주었던 어머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해 준 것도 없는데 잘 자라 줘서 고맙다고 말했던 나의 어머니.
왜 해 준 게 없습니까.
당신이 있기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데.
‘멋지게 살자.’
이 말은 싫어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만큼은 멋지게 살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그리 다짐하며 입학했던 대학에서 두 번째로 버려졌다.
상대는 실습을 나갔던 병원의 여자 선배.
이유는 출세였다.
상투적인 이야기다.
실습 나간 병원에서 학창시절 친하 게 지냈던 레지던트 선배와 친하게 지냈는데 아무래도 선배 쪽에서 내 게 은밀한 감정을 품었던 듯하다. 나는 그걸 전혀 몰랐고 말이다. 그런데 참 기가 찬 것이 선배 병 원 원장과 불륜 관계였다는 거다.
일은 어느 날 갑자기 터졌다.
술이 취한 게 화근이었다.
그녀와 둘이서 술을 마시고 모텔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걸 병원 사람 이 본 모양이었다.
당연히 소문이 퍼졌고 원장이 여의 사에게 추궁을 했는데 성추행이었다 고 말해 버렸다.
그 뒤의 내 인생?
병원에서 본격적으로 성추행을 추 궁하기 시작했는데 멀쩡할 리가 없 잖아.
실습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퇴출당 한 건 말할 것도 없고,학과에까지 말이 전해져서 각종 조치가 취해졌 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에게만은 알리 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 준 사람이 나 때문에 울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결국 나는 학교를 자퇴했고 다른 길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런데 나중에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자퇴하기 전날.
어떻게 전해 들은 건지 어머니가 내 이야기를 듣고 지방에서 올라와 그 여자 집에 찾아갔다고 한다. 찾아가서 양쪽 무릎을 모두 꿇고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고 한다.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우리 엄마가…… 그년에게…… 빌 었다고…… 그것도 무릎 꿇고…….
너무 화가 나서,너무 원통해서.
친구들을 불러 술 한잔 하자고 했 다.
그리고 그날이 내가 이세계로 소환 된 날이기도 했다.
이세계로 넘어가서 다른 차원이라 는 걸 들었고,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고 느꼈을 때 모든 걸 포기했다.
포기하니 적응은 어렵지 않았다.
힘들지만 친구들이 항상 곁에 있었 던 데다,용병일 말고도 일을 가리 지 않고 했기에 의식주 걱정은 없었다.
마음 맞는 친구들이 있고,몸은 고 되되 정신적으론 편한 생활.
차라리 이리 사는 것도 나쁘지 않 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갑자기 세간에 떠돌기 시작 한 어떤 소문이 나를 움직였다.
‘최상위 웨이브를 공략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군. 그것도 여기서 얻은 능력을 고스란히 소유 한 채로!’
돌아갈 수 있다.
어머니 곁으로.
그것도 테라 시스템을 통해 얻은 능력을 고스란히 가진 채!
진실일지,헛소문일지 모르지만 현
지 생활에 순응하던 나를 바꿔 놓기 엔 충분했다.
웨이브의 끝에 도달하면 능력을 고 스란히 가지고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가기만 하면 어쩔 수 없이 미 뤄 두었던 모든 것이 해결된다. 복수와 성공.
테라 시스템으로 얻은 모든 능력을 이용하면 뭔들 못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만날 수 있 다.
그리 생각하며 친구를 버렸다.
아니,친구만 버렸을까.
만나는 사람들을 족족 배신하고, 이용하고,죽여 왔다.
모든 걸 버리고 올라가는 것만 생
각했건만 지금은 세본즈 교의 말단 사제로서 굽실거리며 지내고 있다.
*
슥삭! 숙삭!
“그게 정말이야? 최강현이 신화급 웨이브를 공략했다고?”
숙삭! 숙삭!
“쉿! 조용히 해. 지금 그거 때문에 교단 내에서 난리도 아냐.”
숙삭! 슥삭!
“에구구,입조심해야겠네. 나중에 제대로 들려줘. 지금은 빨리 성녀님 한테 가자. 늦으면 또 라파엘 님이 화내실지도 몰라.”
세븐즈 교의 대신전 내부에 위치한 말단 사제들의 숙소.
숙소 앞에선 최진철이 비질을 하고 있었다.
불칸의 전설급 웨이브에서 마지막 남은 불사조의 깃털을 써서 살아남 긴 했다.
헌데 커뮤니티 본부로 돌아가는 길 에 함정에 걸려 세븐즈 교라는 곳의 포로로 잡혀 버렸다.
이후에 그들이 대신전이라 칭한 곳 에 끌려오긴 했는데,끌려온 이유가 황당했다.
뭐라더라.
자기들이 신화급 웨이브에서 얻은 마법석 생성 용지로 ‘어떤 마법석’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법석이란 게 뭔가.
특정 보구에 소켓을 뚫어 거기다 박아 넣는 보구 아니던가.
근데 페널티로 사람 몸에 박아 넣 어야 한다는 규칙이 생겼단다. 게다가 몸에 마법석을 박는다고 무 조건 마법석을 쓸 수 있는 것도 아 니고 부작용이란 게 존재해서 여태 껏 살아남은 자가 없다고 한다.
처음 잡혀 와서 실험체 전용 감옥 에 갇혔을 때엔 먼저 잡혀 온 자들 이 한 명도 돌아오지 않는 걸 수도 없이 봐 왔었다.
앞서 실험실로 끌려 들어간 자들이 절명에 이르며 비명을 지를 때마다 얼마나 소름이 끼쳤는지 모른다. 조만간 내가 저리될 거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그 일념으로 자존심을 다 버리고 살아남는 것에 전념했다.
세븐즈 교 사제에게 입교하고 싶다 고 빌었다.
마음에도 없는 온갖 비굴한 말을 모두 쏟아 냈다.
심지어 목숨처럼 여기던 스렛을 전 부 팔아 CP로 만들어 교단에 바치 겠노라고 맹세했다.
갖은 노력 끝에 모든 스렛을 팔아
CP로 만들어 교단에 바치곤 겨우 말단 사제로서 받아들여졌다.
지금의 나는 총 스텟 50인 레벨1
수준의 쓰레기다.
꿈꾸던 목적과 능력을 팔아 목숨만 을 겨우 부지한 쓰레기.
매일매일 주어지는 거라곤 숙소 청 소와 빨래 정도뿐.
원래 세계로 돌아가 어머니를 만나 고 날 버렸던 이들에게 굴욕감을 주 겠노라 다짐했던 복수심은 모두 물 거품이 되었다.
최진철은 지나가던 여사제들이 수 다스럽게 떠들던 말을 들으며 헛웃 음을 피식 흘렸다.
“훗,신화급 웨이브 공략? 잘나가 는구만. 그 자식은 항상 그랬었지.”
친구…… 였었던 자.
최강현.
나와 같이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만큼은 항상 좋은 결 과만을 얻었다.
내가 의예과에서 자퇴했을 때도 녀 석은 대기업 취업이 확정되었었고, 내가 던전에 녀석을 버렸을 때도 기 어코 살아나와 금세 대륙 최고의 검 사로 등극했다.
지금에 이르러선 카니발에서도 최 강자로 여겨지고 있다.
녀석과 나의 차이점이 뭐지?
내가 그 녀석보다 못한 게 뭐냐고!
분명 최강현보다 앞서 움직였건만 항상 정신을 차리고 보면 녀석이 앞 서나가고 있다.
지금도 녀석은 카니발 대륙 최강자
로 등극한 반면,나는 사이비 소굴 에서 비질이나 하고 있다.
최진철은 폐부에 찌들어 있던 열등 감을 끌어올려 깊은 한숨을 내쉬었 다.
“하아.”
그의 근심과 무관하게 대신전과 이 어진 정원길 쪽에서 고압적인 목소 리가 들려왔다.
“성녀께서 지나가신다! 예를 갖춰 라!”
정원 쪽에서 시스루 풍의 흰 드레 스를 입은 갈색 머리의 여자가 3급 사제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얼마 전에 잡혀 온 혁명군 포로들 중에서 유일하게 마법석을 이식 받고도 멀쩡한 여자라 했다.
세본즈 교에선 마법석 이식이 성공 한 것만으로 즉시 성녀 취급하기 시 작했다.
고작 마법석 이식이 성공했다는 것 만으로 성녀 취급이라니.
사이비 종교답게 다들 제정신이 아 니다.
얼마나 대단한 마법석이었는지 몰 라도 얼마 전까지 포로에 불과했던 자를 성녀로 받들다니 말이나 되는 일인가.
내 상식선에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이해가 안 되지만 어쩌겠는가.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야 하
는 것을.
최진철은 성녀의 행차에 맞춰 빗자 루를 바닥에 놓고 한쪽 무릎을 꿇었 다.
이윽고 성녀 일행이 최진철 앞을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성녀가 갑자기 최진철의 얼 굴을 스윽 보더니 걸음을 멈추며 벙 어리가 말이 트인 듯 떠듬떠듬 말을 꺼냈다.
“오.. 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