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웰던으로선 품평을 당하는 것 같아 껍껍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제 막 피그숲에 들른 외 부인들에게 자신의 사정을 강요할 순 없었다.
억지로 반란세력으로 들일 만한 힘 도 없거니와 페널티를 거론하는 것 외엔 내세울 메리트가 없는 것도 더 이상 강요할 수 없는 것에 한몫했 다.
강현 일행은 웰던의 움집에서 나와 서 피그숲 동쪽으로 이동했다.
저 멀리 잎이 풍성한 나무가 아른 거릴 즈음,김혜림이 안타까워하는 투로 말했다.
“좀 안됐네요.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하고,먹을 게 무지막지하게 맛없는 푸드스톤밖에 없다니.”
“동정할 거 없어.”
“저 모습도 뒤통수를 치려고 일부 러 가장한 모습인 거예요?”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도 않 고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작자들에게 동정 같은 거 줄 필요 없어.”
“조금 다르지 않아요? 상황을 개선 하고 싶어도 종족 특성 때문에 못하 는 것 같던데.”
“종족 특성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 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녀석 들은 종족 특성을 방패 삼아서 자신들의 불편한 생활을 합리화하고 있 어. 동정은 시도할 기회조차 부여 받지 못하는 자에게 주는 거야.”
동정이란 피어나기 전의 꽃이 꺾일 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무심코 던진 꽁초에 눈을 맞아 실명한 갓난아기.
누군가 장난으로 넣어 둔 컨닝 페 이퍼 때문에 퇴실당한 수능생. 누군가의 욕심으로 폭행 누명 쓰고 실직한 신입 사원.
노력할 기회조차 빼앗긴……. 혹은 노력 끝에 이룬 것을 박탈당한 자에 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 정당한 동정 이다.
그에 비하면 웨어피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무서워요. 살려 주세요. 죽이지 마 세요. 종족 특성이에요.
종족 특성 때문에 못 싸우는 거라 면 전투가 아니더라도 협상이나 개 발 등 상황을 개선시킬 방법은 많았 다.
돼지의 특성 중에서 안 좋은 부분 만 잔뜩 가져다 놓은 듯한 종족이었 다.
그들을 동정하는 건 게으른 자들의 변명을 긍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 다.
김혜림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경솔하게 말
했어요.”
“알면 됐어. 그래도 동정까진 아니 지만 노력을 인정해 줄 만한 인물은 있더군.”
“웰던은 인정할 만하더라고요. 오 로지 근육만으로 100kg를 유지하고 있는 거죠?”
“안 보이는 곳에서 피 나는 노력을 했을 거야.”
푸드스톤에 단백질이 그리 많지 않 음에도 불구하고 근육만으로 100kg 이상의 몸을 유지하고 있다.
그 맛대가리 없는 음식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어떻게든 칼로리를 축적하 고,하루도 빠짐없이 스스로를 채찍 질하며 진주같이 값진 땀방울을 홀렸을 게 분명하다.
전형적인 노력은 하는데 요령이 없 어서 고생하는 타입이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 덧 지배세력의 영역에 들어와 있었 다.
지배세력의 영역은 숲의 냄새부터 가 달랐다.
촉촉한 녹음에선 싱그러운 향이 흘 러나왔으며,푸석푸석하던 땅엔 폭 신한 잔디가 깔려 있었다.
녹색과 푸른 하늘,붉은 발광이끼 가 적절히 섞여서 눈을 편하게 해 주었다.
강현은 붉은색 발광이끼를 채집하 여 플라스크에 담았다.
'붉은색,노란색,황금색 발광이끼 를 모았으니까 남은 건 녹색 발광이 끼로군.’
플라스크를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 넣고 있는데,풍성한 나무마다 비대 한 살집이 삐져나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지배세력에 속한 웨어피그들이었 다.
그들은 반란세력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강현 일행이 다가가자 지레 겁을 먹고 벌벌 떨었으며, 다른 웨어피그 들은 떨고 있는 웨어피그를 쳐다보 기만 했다.
반란세력과 다른 점이라면 피부에
윤기가 흐른다는 점과 50kg가량 몸 무게가 더 나가 보인다는 점을 꼽을 수 있었다.
반란세력 때와 마찬가지로 한참 동 안 소란을 벌이고 있자 세력 내 우 두머리가 찾아왔다.
지배세력의 우두머리는 돼지 그 이 상의 돼지였다.
신장은 무려 3미터가 되는 거구였 다.
그리고 근육질의 웰던과 달리 어마 어마한 비만이었다.
피부는 내부에 쌓인 지방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커튼처럼 겹겹이 늘 어져 있었고,눈은 살에 파묻혀 눈 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으며,스스로 걸을 수 없는 나머지 바퀴 달린 침대 위에 누워 타인의 도움을 받아 움직이고 있었다.
지배세력의 우두머리는 말하는 것 조차 귀찮은지 입만 뻐끔거렸다. 웨어피그 중 한 명이 그의 입모양 을 해석하여 강현 일행에게 전달해 주었다.
“나는 웨어피그의 왕 레어라고 한 다. 그대들은 공략자임이 틀림없으 렷다.”
“저기요. 확실히 해 두고 싶어서 묻는 건데 말을 못하는 거예요,안 하는 거예요?”
통역사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 으며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흠흠,왕께선 오래전에 그랜드 우 드님의 은총을 받으셨다. 당시 그랜 드 우드님의 은총에 감격하여 목이 메인 탓에 지금까지 말을 못하고 계 신 것이니 실례되는 말은 하지 말 거라.”
지잉- 지잉-
통역사가 말하는 모든 문구에서 노 이즈가 섞여 나왔다.
지배자가 자신을 신격화시키기 위 해 신화를 지어내는 건 흔한 일이 다.
보통은 자신에게 지배자의 자격이 있음을 설파하기 위해 신의 후손이 나,신의 계시를 받은 자로 표현한 다.
살이 쪄서 말하는 것조차 귀찮은 것을 포장하고자 이야기를 꾸며 내 는 왕은 처음 봤다.
대화를 이어 가던 중 레어가 누워 있는 이동식 침대가 크게 흔들렸다. 덜덜덜덜!
레어가 겁에 질린 양 부르르 떨면 서 침대가 요동쳤다.
레어가 뒤뚱거리면서 엎드리려고 애썼다.
여태껏 강현 일행을 보고 겁에 질 렸던 웨어피그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왕이라 할지라도 종족 특성에선 못 벗어난다는 걸까.
반란세력에 공략자를 두려워하지
않은 자가 한 명 있었으니,지배세 력에도 공략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한 명쯤은 있을 거라 여겼었 다.
그게 적어도 레어는 아니었다. 강현은 유일하게 통역사만이 강현 일행을 보고도 태연한 것을 포착했 다.
“통역사. 이름은?”
“별 볼 일 없는 통역사의 이름은 왜 묻나?”
“네가 지배세력의 리더니까.”
통역사라고 자처했던 웨어피그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공략자들은 농담에 능한가 보구 나. 일개 통역사를 높이 쳐주니 과분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
“암중 리더는 고달프겠군. 아랫것 들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남자답게 인정하는 것조차 못하고 있으니.”
“이 일개 통역사의 이름이 궁금하 다면야 알려 주지 못할 것도 없지. 미디엄이라 부르거라.”
“그러지,미디엄. 그쪽도 공략자의 목적이 뭔지는 이해하고 있겠지?”
“두 진영 중 한 진영의 말살. 그걸 모를 것 같으냐?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지배세력은 언제든지 반란세력을 칠 수 있을 텐데?”
지배세력의 평균레벨은 120이고, 반란세력의 평균레벨은 60이다.
지배세력이 반란세력을 칠 땐 종족 특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반란세력을 치는 게 어렵지 도 않다.
지배세력이 쳐들어가면 반란세력은 종족 특성 때문에 벌벌 떨 테니 엎 드려 떠는 작자들을 처리하기만 하 면 된다.
강현의 말은 정론 중 정론이었다.
지배세력으로서도 공략자와 왈가왈 부할 것 없이 자체적으로 반란세력 을 처리하는 게 훨씬 편하다.
헌데 미디엄은 코웃음을 치며 비웃 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청소 좋아하나?”
‘‘청소?”
“집안 청소 말일세.”
“치울 필요를 느끼면 치우는 정 도.”
“나도 마찬가지일세. 청소란 건 정 말 귀찮지. 내 집 청소도 귀찮아서 방치해 두는 판에 외지인이 와선 옆 집 청소를 하라는군. 자네 같으면 할 마음이 들겠나?”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지만 결국 귀찮다는 거군.”
“정답일세.”
놔둬도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반란세력을 뭐 하러 쳐야 하냐는 말 이었다.
반란세력의 영역에서 얻을 수 있는 거라면 맛없는 열매만 맺는 푸드우드 정도일까.
가만히 있어도 잘 먹고 잘 사는데 손에 끈적한 피 묻혀 가며 싸울 이 유가 없었다.
이로써 양측 세력의 입장을 모두 들어 보았다.
강현은 피그숲이 유지되고 있는 원 리를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반란세력은 종족 특성 때문에 지 배세력을 공격하지 못하고,지배세 력은 편한 생활에 익숙해져서 능동 적으로 움직일 생각을 않는군.’ 겁쟁이와 게으름뱅이.
구제불능 집합소로 보이는 두 집단 을 아주 절묘하게 맞물려 놓은 숲이 었다.
두 집단 사이에 맞물려 있는 톱니 바퀴를 어긋나게 해야만 피그숲을 공략할 수 있었다.
일단 가장 단순한 방법부터 시도해 보자.
강현은 엄지로 검자루를 밀어 올려 시퍼런 검날을 드러냈다.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귀찮아도 해야 할 수밖에 없겠지.”
“협박 같은 삼류 수작에 걸릴 줄 아나? 벨 수 있으면 베어 보거라. 대신 지배세력에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를 잃어버리게 되 겠지.”
미디엄 외에 다른 지배세력 웨어피 그들은 강현 일행과 마주치면 엎드려 벌벌 떨기만 한다.
대화가 통하긴커녕 얘기를 들을 생 각도 하지 않는다.
미디엄이 괜히 고자세를 취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공략자들에게 있어 중요한 요소라는 걸 인지하고 있기에 거만 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거였다. 강현은 검 자루 끝을 손바닥으로 두드려서 검날을 검집에 되돌려 놓 았다.
“철저하게 규칙에 보호 받고 있군. 배짱을 부릴 만해.”
“알았으면 꺼지거라. 저주 받은 땅 에서 쓴맛 나는 열매나 씹으며 지내 도록.”
“원한다면 돌아가 주지. 그 전에 자이언트 푸드우드란 걸 직접 보고 싶은데 견학 정도는 허가해 줬으면 하군.”
“당장 꺼지라는 말 못 들었나?”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라는 걸 해 봤으면 좋겠군. 허가를 요청한 게 그쪽을 위한 최소한의 매너란 것 정 도는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강현 일행이 허락 없이 그냥 밀고 나가도 지배세력은 길을 막을 수 없 다.
공략자만 보면 벌벌 떠는 병력으로 공략자를 막는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백날 열을 내며 명령을 내려 봤자
웨어피그들은 길을 막는 건 고사하 고 엎드려 빌기 바쁠 거다.
강현의 요청에 딴지를 건 것부터가 자신의 무지함을 인증한 것과 같았 다.
미디엄으로선 강현과의 보이지 않 는 공방을 펼치다가 마지막에 불의 의 일격을 먹은 셈이었다.
미디엄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배세 력의 영역 동쪽을 가리켰다.
“동쪽으로 걷다 보면 은혜의 나무 가 보일 거다. 열매에는 손대지 않 겠다고 맹세할 수 있나?”
강현은 더 이상 미디엄에겐 볼일 없다는 양 걸음을 떼며 무심한 어조 로 말했다.
“내가 예의를 갖춰 줬다고 해서 그 쪽에서 예의를 강요할 수 있는 건 아니지.”
“크옥,공략자 놈이 감히……
“돼지보단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말 이 있지.”
“뭐라고?”
“너 자신을 모르는 걸 보니 그 말 이 왜 있는지 알겠군.”
미디엄은 끝까지 무슨 말인지 이해 하지 못하며 강현의 말을 욕지거리 정도로 치부했다.
강현 일행은 미디엄이 격노하건 말 건 신경 쓰지 않고 숲 동쪽으로 나 아갔다.
잠시 후,강현 일행 앞에 3미터 높
이의 풍성한 나무가 나타났다.
나무의 가지마다 금단의 과실마냥 붉은 광택을 지닌 열매가 맺혀 있었 다.
나무 아래에선 지배세력에 속한 웨 어피그들이 게걸스럽게 열매를 먹는 중이었다.
푸드스톤이 열리는 걸로 보아 자이 언트 푸드우드임이 틀림없었다. 하루에 수천 개의 열매가 열리는 나무치고는 너무 작았다.
고작 3미터 높이밖에 안 되는 나 무에서 정말 수천 개의 열매가 열릴 수 있는 걸까.
의문이 해결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열린 열매가 무게를 못 이기고 아래로 떨어졌다.
투둑! 투둑! 투두두둑!
열매가 떨어지는 모양새가 우박을 연상케 했다.
땅에 떨어진 열매는 멍든 자국 하 나 없이 매끄럽게 바닥을 굴렀다.
더욱 놀라운 건 열매를 떨군 나뭇 가지에서 고작 몇 초도 되지 않아 새로운 열매가 열리고 있다는 것이 었다.
쉴 새 없이 열매를 떨구고,새롭게 열매가 맺히는 나무.
그게 바로 자이언트 푸드우드였다. 에덴의 일부를 엿보는 듯한 광경을 목격한 순간 악마적인 계략이 샘솟았다.
다시 한 번 말하겠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악마적이라 할 수 있 는 계략이었다.
“이건 한국식 운영법을 적용할 수 있겠군.”